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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찰 스크랩 양주회암사
현림 추천 2 조회 603 18.08.18 21:05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양주 회암사



양주 회암사(檜巖寺)는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사찰의 창건 역사를 보면

고려 충숙왕 15(1328) 인도의 고승 지공 화상이 1328(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와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지은 사찰로,

 창건할 때는 266칸의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한다.

1378(우왕 4) 지공의 법을 이은 나옹(懶翁)화상이 중건하였고,

조선 성종 3(1472)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삼창 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하였던 국찰로 알려져 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게 했으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회암사에서 수도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태조 이후 200여 년 동안 번성하던 회암사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점차 퇴폐해지기 시작하여 재건과 중창을 반복하게 된다.

 

1472(성종3)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된 회암사는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 정책으로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로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가 되었다.

 

1821(순조 21) 지공·나옹·무학의 부도와 탑비까지 고의로 훼손되었으나

 조정에서 1828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나옹·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1976년에는 호선(昊禪)스님이 큰 법당과 삼성각·영성각(影聖閣) 등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공화상이 창건하기 전에도 1174(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보우(普愚)1313(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회암사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기도 했다.

1424(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번성기 때 회암사의 규모는 전각이 총 262간이었고, 암자도 17개나 되었으며

또한, 모셔진 불상도 15척짜리가 7구나 있었다고 하며, 관음상도 10척이나 되어

당시 회암사는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기가 동국 제일로서

 이런 절은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1821)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곳 법당 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 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운허요하가 쓴 "천보산 회암사 대웅전 창건기"에 의하면

1828년에 탑비를 다시 세우면서 조그만 암자를 지어 가람을 수호하고, 옛 회암사를 잇게 했으며,

1922년 봉선사 주지 홍월초 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대사가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어 오늘의 회암사에 이르게 되었다.

 

후설에 의하면 회암사의 폐사는 빈대가 많아 불을 태워 없앤 절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소실됐다는 설도 있고

또한 절의 크기에 대해서 가마솥 안에 들어가 팥죽을 쑬 만큼 절의 규모가 컸다고 하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쌀을 씻는 함지박이 너무 커 사람이 빠져 죽어도 모를 정도였으며,

전국을 다니다가 만나는 승려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회암사에서 왔다고 할 만큼 승려 수가 많았다"라고 한다.

옛 회암사는 문헌상 동방의 첫째였고 우리나라의 국찰이었으나

 폐허가 된 후 사지에 석벽과 기단, 계체 등 일부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박물관에서 조사. 발굴하고 있으며, 앞으로 사적지내 사유지를 매입하고

원형 그대로 발굴한 후 문화와 역사적 가치창출로 지역의 전통문화를 활성화하고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 잡혀있다.

 

* 문화재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 회암사지 부도 (보물 제388),

회암사지 쌍사자석등 (보물 제389), 회암사지 맷돌 (경기도 민속자료 제1),

지공선사 부도와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

무학대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 회암사지 부도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

회암사지 당간지주 (향토유적 제13) 등이 있으며

옛 절터는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0년 부터 현재까지 대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조사전>

대웅전 아래에 있는 정면 3, 측면 1칸의 팔작건물로,

회암사에 주석했던 세 명의 화상, 곧 지공, 나옹, 무학의 진영과 함허득통의 진영을 모신 전각이다.

기단은 대웅전과 같은 가구식 기단으로 2단을 쌓아 조성하였다.

건물 외부는 중앙에 편액을 두고 전면에 34분합의 격자살 창호를 두른 모습으로,

외벽을 단청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다.

 

건물 내부는 벽과 맞닿은 불단 위에 조선 후기 목조 석가 여래좌상을 봉안하고

후불탱으로 가사탱과 삼화상의 진영을 모셔 놓았다.

후불탱은 근래 조성한 것으로, 스님들의 가사 중 25조 가사를 도안하여 그 내부에 여러 불보살과 경책,

그리고 나한을 장식한 독특한 불화이다.

진영은 4구로 삼화상 진영은 조선 후기에 함허득통 진영은 근래에 조성한 것이다.

 

지공화상(指空和尙) 진영은 풍채가 당당하고 수염이 많다는 기록과는 달리

왜소한 모습으로 회청색과 붉은색이 혼합된 가사를 입고 있으며,

머리에 삼산형의 보관을 쓰고 있다

         제발은 서천국백팔대조사지공화상(西天國百八代祖師指空和尙) 진영이라 쓰여 있다.

 

나옹화상(懶翁和尙) 진영은 지공화상과 같은 가사를 입은 모습으로 손에는 주장자와 염주를 들고 있다.

머리는 민머리로 약간 비스듬히 자세를 틀고 있으며,

우측에 고려국공민왕사나옹대화상진영(高麗國恭愍王師懶翁大和尙眞影)이라는 묵서명을 가지고 있다.

지공화상 진영과 함께 조선 후기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함허득통(涵虛得通) 화상

스님의 휘()는 기화(己和)요 호는 득통(得通)이며 구명(舊名)은 수이(守伊)

구호(舊號)는 무준(無準)이다. 함허는 자모산(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成佛山) 연봉사에 머물면서

거실의 당호를 함허라 했기 때문에 생긴 별호이다. 스님은 고려 우왕(禑王) 2(1376)

 중원(지금의 충주)에서 유민(劉民)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휘()는 총()이고 벼슬은 전객사사(典客寺事)이며 어머니는 방씨(方氏)이다.

스님의 모친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서 대성자모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했다고 한다.

관악산 의상암에 가서 머리를 깎고 병자년(1396)에 승려가 되었다.

 이듬해 정축년(丁丑年) 이른 봄에 처음으로 회암사에 가서

왕사 무학 묘엄존자(妙嚴尊者)를 만나 친히 법요를 들었다.

 

이 인연으로 스님은 임제종 계통으로 제21세손이며 나옹 밑으로 제2세가 된다.

스님은 무학스님 밑에 조금 있다가 하직하고 여러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수행에 전념하였다.

 갑신년(1404) 봄에 스님은 회암사로 돌아와 한 방을 치우고 지냈는데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여일하였다.

 

스님은 신해년(1431) 가을에 영남 의양산 봉암사에 들어가 퇴락한 절을 수리했다.

그러나 스님은 법을 펴지 못하고 선덕 8(1433) 계축 315일 발병하여 심신이 편치 못했다.

41일 신시에 스님은 조용히 앉아

湛然空寂 本無一物 靈光赫 洞徹十方

更無身心 受彼生死 去來往復 也無罣碍라 하고, 조금 있다가 또

臨行學目 十方碧落 無中有路 西方極樂이라 했다.

이것이 곧 스님의 영결이다. 문도들은 5일 동안 그대로 모셔두었는데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다비 후 치골을 향수에 씻으니 뼈에 붙은 사리가 확연히 빛났다.

효령대군이 이 사실을 상달하니 왕이 명령하여 제자들이

네 곳(현등사, 봉암사, 정수자, 연봉사)에 부도를 세우게 했다.

스님의 세수는 58세이며 법랍은 38년이다.



@지공화상

지공스님은 인도의 스님으로 인도의 불교를 직접 이 땅에 전하는 역할을 한 스님 가운데 한 분으로

나옹스님, 무학스님과 더불어 여말선초의 삼대 화상으로 일컬어지는 분이다.

스님은 인도 마갈타국 만(滿)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나란타사 율현(律賢)에게 출가하였다.

열아홉 살이 되어 남인도 릉가국의 길상산에서 보명(普明)에게 참배하는데, 보명스님께서

"중천축에 이에 이르렀으니 몇 걸음이었는가?" 하니 지공화상은 대답을 못 하였다.

물러가 석동(石洞)에 앉기 6개월 만에 깨달은 바 있어 보명에게 고하기를

"두 다리가 일보다" 하자,

보명스님이 의발을 주면서

"하산일보(下山一步)하면 문득 이 사자의 아이로다.

나의 문하에서 법을 얻어 출신한 자가 여럿이나 중생에게 모두 인연이 적었도다.

너는 나의 교화를 널리 하라" 하였다.

 

뒤에 원나라를 거쳐 고려 충숙왕 15(서기 1328)에 이 땅으로 와

금강산 법 기도량(法起道場)에 참예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다시 원나라의 부름을 받고 연경(燕京)에 돌아가 법원사를 짓고 머물다가

공민왕 12(서기 1372)에 귀화방장(貴化方丈)에서 시적(示寂)하였다.

 공민왕은 그의 다비 일부분을 가져와 회암사에 부도를 세워 그의 자취를 흠모하였다.

지공스님이 고려에 머문 시기는 그리 길지 않으나,

원나라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꽤 많은 고려 사람이 그의 문하를 찾았고

나옹대사에게 법을 전한 전법사이기도 하여 실제로 고려의 불교에 이바지한 공이 참으로 컸다.

그는 두 권의 문수사리무생계경그리고 원각경, 선요록(禪要錄)같은 책을 남기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선요록은 그의 사상을 모두 담고 있다 하겠다. 그의 법어 한 구절을 여기에 적어 본다.

 

啞者高聲說妙法(아자고성설묘법)

聾者遠處聽微言(농자원처청미언)

無情萬物皆讚歎(무정만물개찬탄)

虛空趺坐夜來參(허공부좌야래참)

 

벙어리가 높은 소리로 묘법을 설하고

귀머거리가 먼 곳에 가는 말을 듣는다

무정한 만물도 다 찬탄하고

허공에 가부좌하고 밤새워 참선하다



@나옹화상

속명은 아원혜(牙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법명은 혜근(惠勤), 또는 혜근(彗勤).

아버지는 선관서영(善官署令)서구(瑞具)이다. 중국의 지공(指空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 인가를 받고

무학(無學)에게 법을 전하여, 조선 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웠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서 출가하였다.

그 뒤 전국의 이름 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충혜왕 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하고,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1347(충목왕 3) 원나라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 지공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내다가 1350(충정왕 2)에 평강부(平江府) 휴휴암(休休庵)에서

한철을 보내고, 다시 자선사(慈禪寺)의 평산처림을 참견(參見)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이듬해 명주(溟州)의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 상을 예배하였다.

 

그곳에서 무상(無相)과 고목영(枯木榮) 등의 승려를 만나 법론(法論)을 벌였고,

1352년에는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원나라 순제(順帝)는 그를 연경의 광제선사(廣濟禪寺) 주지로 임명하였고, 1

3561015일에는 개당법회(開堂法會)를 가졌다.

순제의 만류를 무릅쓰고 주지직을 내놓은 뒤 다시 지공을 찾아갔다가 1358(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하였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청으로

잠시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던 중,

홍건적으로부터 신광사를 수호하였다. 그 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

(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그 뒤 송광사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였으며,

1376년에는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왕명으로 밀성(密城: 밀양) 영원사(塋源寺)로 옮겨가던 중,

 1376(우왕 2) 515일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56, 법랍 37세였다.



@무학대사

무학(無學: 1327~1405)은 고려(918~1392) , 조선(1392~1897) 초의 승려이다.

 속성은 박이고 이름은 자초(自超)이며, 법명은 무학(無學) · 계월헌(溪月軒)이다.

 조선 태조에 의해 왕사가 되었으며, 한양 천도를 도왔다.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는 조선 최초이자 최후 왕사로 18세에 출가하여

1353년에 원()에 가서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 ?~1363)과 고려의 승려 나옹(懶翁, 1320~1376)의 가르침을 받고,

1356년에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왕사에 임명되었다.

자초의 법을 이어받은 승려가 득통 기화(得通己和, 1376~1433)이다.

그는 21세에 관악산 의상암에 출가하고,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자초의 가르침을 받았다.

 




@조사전 목조여래상 복장유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6호로 지정된 이 목조여래상은 높이 50.2, 무릎 폭 36.5.

두 손은 따로 제작하여 끼워 넣은 상태이다.

복장발원문인 발보리원(發菩提願)을 통하여 목조여래좌상이 1755(영조 31)

창평(昌平) 용흥사(龍興寺) 상선암(上禪庵)에 봉안하기 위하여

조각승 상정(尙淨) 등이 조성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불상이 언제부터 지금의 회암사에 봉안되었는지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불상에서 나온 복장물로는 조성발원문, 여러 권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여러 종류의 다라니(陀羅尼), 황초폭자(黃綃幅子)로 감싼 후령통(喉鈴筒) 등이 있다.

연화대좌가 불상과 함께 조성되었는지는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회암사 목조여래좌상은 통견(通肩) 식으로 법의를 착용하였고 연화좌 위에 가부좌를 취하였다.

불상은 머리와 신체의 비례가 적절하고 하체가 튼실하여 안정감을 준다.

불상은 머리와 상체를 앞으로 약간 숙인 모습이다.  

불상의 머리는 둥근 형태이며, 적당한 크기의 나발(螺髮)과 원통형의 정상 계주(髻珠),

반원형의 중앙 계주를 갖추고 있다. 상호는 동그랗게 튀어 올라온 백호(白毫)

 양옆으로 올라간 눈썹 선, 역시 양쪽으로 치켜 올라간 가늘고 긴 눈,

콧방울과 콧구멍이 새겨진 짧은 코, 짧은 인중, 입술에 힘이 들어가 있는 입, 큰 귀를 갖추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조각되어 있다.

 

불상의 법의는 대의(大衣)와 승각기(僧却崎:가사 아래에 걸쳐 가슴 겨드랑이를 덮는 작은 옷)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법의 주름은 신체의 굴곡을 따라 유기적으로 표현되었다.

법의는 하체를 덮고 연꽃 사이로 흘러내리는 부분을 제외하곤

양쪽 팔에서와같이 대부분 큼직큼직하게 면을 사용하여 질감을 나타냈다.

승각기 띠 위에는 접힌 주름을 연꽃이 펼쳐진 모습으로,

띠 아래에는 자식으로 음각하여 표현하였다.

 

불상의 수인은 오른손을 살짝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손바닥을 앞을 향하게 하였고,

왼손도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왼쪽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았다.

회암사 목조여래좌상은 전체적인 분위기와 얼굴 표정, 법의 주름의 표현 방식이

18세기 중반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어서 복장발원문에 기록된 조성 연대와 일치한다.








<대웅전>

전면 3칸 측면 3칸의 주포식 팔작지붕으로 대웅전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문수와 보현보살을 협시로 모시고 뒤편은 영상회상탱이 목조 양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신중탱




@관음전

전면 3, 측면 2칸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법당 안에는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고 신중탱과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지금의 관음전은 옛 대웅전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관음전주련

虛空境界豈思量(허공경계기사량)

허공의 경계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大道淸幽理更長(대도청유이경장)

대도는 맑고 깊으며 이치(理致)는 영원하도다.

但得五湖風月在(단득오호풍월재)

다만 다섯 호수에 풍월(風月)이 있음

春來依舊百花香(춘래의구백화향)

봄이 오면 옛날처럼 백화(百花)향기 풍기리.


관음전의 신중탱,



지장탱







삼성각




칠성탱


산신


독성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指空禪師浮屠石燈)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9. 높이 3.5m. 건립 시기는 고려 시대.

이 부도는 충렬왕 말년에 고려에 들어와 머물렀던 인도 마갈제국(摩竭提國) 고승 지공(指空)의 사리탑으로,

팔각당형(八角堂形)을 기본구조로 하여 기단부(基壇部탑신부(塔身部상륜부(相輪部)가 모두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약간 두꺼운 지대석(地臺石) 위에 팔각형 상·하대석과 고복형(鼓腹形)의 중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부는,

 상대석만이 앙련석(仰蓮石) 모양을 하여 약간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을 뿐,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아 매우 단순 소박한 형태를 하고 있다.  

팔각모양의 옥개석(屋蓋石)에 둥근 꼴의 몸체를 하고 있는 이 부도의 탑신부 역시

기단부에서 보는 바와 같이 표면에는 일체의 장식이 없어 단조로움은 한층 더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팔각 옥개석은 낙수면(落水面)의 경사가 급하고 추녀 끝 선이 두꺼워 다소 둔중해 보이긴 하지만,

용마루에 마련된 여덟 개의 융기선과 낙수면이 만들어 내는 현저한 곡선으로 말미암아 경쾌함 또한 엿보인다.  

지붕 위 기둥 모양의 상륜부는 앙련(仰蓮)으로 대신하고 있는

 복발(覆鉢)과 서로 연결되어 조각한 꼭대기의 보륜(寶輪)과 보주(寶珠)로 이루어져 있다.

(귀부) 

부도 앞쪽에 떨어져 자리하고 있는 석등은 사각형을 기본구조로 하여 하대석으로부터

 굵직한 간석(竿石상대석·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과 옥개석에 이르기까지

모두 네모꼴을 이루어 둔중해 보뿐만 아니라 딱딱한 느낌을 준다.  

이 석등의 특징은 기단부 갑석(甲石) 위아래 부분의 모서리를 모죽임하여 처리한 점과

2매의 판석을 세워 화사석을 만듦으로써 화창(火窓)이 앞·뒤쪽으로만 두 개 뚫려 있는 점이라 하겠다.

 

낙수면이 거의 직선을 이루어 지공선사 부도와 대조를 보이는 옥개석은

부도의 옥개석과 마찬가지로 네 곳의 내림 마루에만 융기선을 마련했을 뿐이며,

꼭대기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장식하였다.

 

목은집(牧隱集)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西天提納薄陀尊者浮屠銘)

 고려사(高麗史)의 관련 기사에 의하면,

지공(指空)의 유골을 왕이 친히 왕륜사(王輪寺)로 가서

불치(佛齒)와 지공의 두골(頭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옮겼다고 한다.

고려로 옮겨진 지공의 유골은 양주 회암사를 비롯하여 묘향산(妙香山) 안심사(安心寺),

장단(長湍: 현재의 개성의 화장사(華藏寺), 3곳의 부도에 봉안되었다라고 한다.

따라서 회암사에 있는 지공선사의 부도는 1372(공민왕 2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순조실록(純祖實錄)과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의 내용 중에는

 이응준이라는 자가 회암사의 부도와 비석을 파괴하고 사리를 훔친 후에 그곳에 자신의 아버지를 묻었다라고 하며,

그러한 사정으로 인해 순조가 경기감영에 명하여 지공선사의 부도와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楊州檜巖寺址無學大師塔)1828(순조 28)에 다시 세운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과 더불어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고 형식화된 부도의 양식적 특징을 근거로,

 1372년에 제작된 부도가 파괴되자 1828년에 다시 제작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부도비 옆에는 귀부(龜趺)가 있고 비신(碑身)은 알 수 없고 그 위에 옥개석만 놓여 있다.

 

지공선사 부도(指空禪師浮屠)는 탑신부가 구형(求型)을 띠고 있다는 점이

이전 시기의 부도와 가장 다른 점이다. 이러한 양식적인 변화는 고려 후기 금속제 사리구 등에서

일부 유사한 양상이 나타나지만, 석조(石造)로 제작된 부도 형식으로는

지공선사 부도가 이른 시기의 예이므로

구형 부도(求型浮屠)’라고 하는 새로운 형식의 시원작(始原作)이라 할 수 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楊州 檜巖寺址 無學大師塔)

이탑은 홍융탑으로도 불리며 19639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88호로 지정되었다.

탑의 둘레는 탑을 보호하기 위한 석제 난간이 둘려 있다.

탑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 돌 위에 받침 부분인 기단(基壇)이 놓이고

탑신(塔身)과 머리 장식 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 모양의 돌이고 가운데 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 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 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 있게 보이고

구름무늬가 한층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돌은 8각으로 처마 부분에는 목조건축을 흉내 낸 모양들이 새겨져 있다.

경사는 급하며 추녀 끝은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돌 하나만 올려놓아 간소화된 형태를 보인다.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탑은 규모가 웅대하고 모양도 가지런하다.

무학대사 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140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쌍사자석등(보물제389)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석등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살았던 무학대사의 승탑 앞에 세워진 석등이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에 있다. 1821년 이응준이 선조의 유골을 투장(投葬) 하며 훼손하여

 1828(순조 28) 다시 세웠다. 쌍사자석등은 196392일 보물 제3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등은 어둠을 밝혀 준다는 조명의 역할 이외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불가(佛家)의 중요한 상징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석등은 불교가 전래하는 삼국 시대부터 제작되었는데,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와 부여 가탑리 절터에서 석등의 부재가 발견되어

그 역사가 6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통일 신라 때에는 불국사(佛國寺) 대웅전 앞 석등과 같이

하대석(下臺石)과 화사석(火舍石),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팔각으로 된 간주석을 중심으로 상대와 하대 받침을 연꽃무늬로 장식한 장엄한 전형적인 한국식 석등이 완성되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제388]과 함께 건립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1407(태종 7)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2.6m이며, 평면의 전체적인 기본 형태는 네모꼴을 띤다.

지대석(址臺石)과 하대석(下臺石)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하대석에는 모두 8판의 연꽃이 겹을 이루면서 넓적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위의 간주석은 2마리의 사자로 조각되었는데, 이러한 형식은 통일 신라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자의 형상을 보면, 뒷다리를 뻗지 않고 무릎을 오므리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고,

가슴과 배가 서로 붙고 엉덩이가 밑으로 닿아 있으며 앞다리는 매우 짧다.

즉 간주석을 대신하고 있는 사자는 통일 신라 시대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제103]에서 보이는

 사실적인 표현이 강조된 사자와 비교할 때 앙증맞고 귀여운 인상을 준다.



 

상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하대석과 같은 형태의 연꽃무늬로 장식되었으며,

1단의 각형 굄이 각출(各出)되어 있다. 화사석(火舍石)2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두 방향으로만 화창(火窓:석등의 불을 켜 놓는 부분에 뚫은 창)을 내었다.

 화사석의 네 귀퉁이는 둥근 형태의 기둥을 모각(模刻)하였고,

통창(중간에 가름대나 살을 넣지 않고 통짜로 짠 창문)의 좌우에는

주연부(周緣部: 테두리 부분)에 얕은 홈이 음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보주까지 모두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지붕은 두껍고 처마 밑이 곡면으로 처리되어

네 귀가 자연스레 들렸으며, 지붕 위의 우동 마루는 두툼하게 표현되었다.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목조 건축물과 같은 형태로 제작하여 옥개 받침을 대신해

목조 가구에서 보이는 부재들이 표현되었다. 옥개석의 뒷부분에는 높이를 달리하는

 2단의 원좌(圓座)를 각축하고 두툼한 보륜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 보주를 얹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석등은 우리나라 고유의 석등 형식인 8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간주석이 2마리의 사자로 대처 된 이형(異形)에 속한다.

또한, 목조건축의 지붕에서 유래된 옥개석의 형태, 화사구를 두 방향으로만 내고 있는 점,

그리고 사자를 비롯하여 연꽃무늬 등의 표현 방식에서 조선 전기의 양식적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

이 비는 무학대사(13271405)의 탑비로서 1410(태종 10) 왕명에 따라

변계량(卞季良)의 글과 공부(孔俯)의 글씨로 세워졌으나

 1821(순조 21) 인위적인 파괴로 말미암아 뒤에 다시 세워졌다.

 

비문에는 대사의 일생이 적혀 있는데,

특히 그가 고려 공민왕 때 연경(燕京)에 가서 지공대사(指空大師)를 찾아 법을 구하고,

 이어서 법천사(法天寺)에 가 있는 나옹선사(懶翁禪師)를 만나보고 제자가 된 일,

 태조의 부름을 받아 왕사가 되어 한양 천도에 큰 역할을 한 일,

회암사에 두 스승의 묘탑을 세운 일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무학대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명승으로 속성은 박(), 이름은 자초(自超)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 선사(小止禪師)에게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고

용문산(龍門山)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운 후

묘향산(妙香山)에 수도하였다. 연경에 다녀온 후 회암사에서 머물다가

금강산(金剛山) 금장암(金藏庵)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4각 하대석(下臺石) 위에 비신을 놓고 장방형의 비개석(碑蓋石)을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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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8.08.19 06:01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18.08.19 06:48

    나무 아미타불
    감사 합니다_()_

  • 18.08.19 16:21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 18.08.23 03:10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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