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전통무기
연발식 권총의 원조 ‘삼안총’(三眼銃)
동서고금의 전쟁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의 본질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데 있어 왔으며, 또 그것은 앞으로의 전쟁에 있어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변화한 것은 그 시대의 과학 기술 진보에 따라 새로이 등장한 무기가 주요 변화요인이었고, 그 무기를 어떻게 구사할 것인가에 따라 전술과 전략도 변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전쟁의 승패와 한 나라의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한 무기체계의 수준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전쟁의 승패는 무기체계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역사의 주인공이 된 국가들은 우수한 과학기술로 군사와 경제를 지탱하여 번영을 구가하여 왔던 것이다.
콜드 45구경 리볼버권총(전쟁기념관 소장)
화약병기의 흐름을 살펴보면 권총이 소총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다. 14세기의 핸드캐넌을 소형화한 이래 때로는 소총 이상의 스피드로 발전을 가속화해 온 것이 권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화승총은 발화방식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기병용으로는 적당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기병의 경우에도 사격시에는 말에서 내려서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후 발화장치가 개량되면서 기병용으로 활용이 점차 늘게 되었는데, 특히 19세기초에 뇌관식 격발장치가 발명되어 권총에 사용됨에 따라 그 활용 폭이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특히 이 때에 연발총의 개념을 적용한 획기적인 발명품이 등장했다. 1832년 개발된 새뮤얼 콜트의 리볼버 연발총이 그것으로 이 권총은 1862년 리처드 개틀링의 기관총과 함께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로서 명성을 떨쳤다.
초기의 권총은 구조상 회전식 권총으로 연뿌리 모양의 회전 탄창에 탄환과 약협(藥莢)을 일체로 한 탄약포(5~8발)를 장전하여, 발사할 때마다 수동∙자동으로 탄창을 회전시키면서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다. 물론 18세기 중엽까지는 격발장치를 손으로 일으켜 세우고 탄창도 발사 때마다 손으로 회전시켰지만, 1835년 미국 S. 콜트가 격철(擊鐵)을 세우면 회전탄창이 회전되는 싱글액션 장치를 개발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후 1855년에는 영국에서 방아쇠를 당기면 격철이 서고 회전탄창이 돌면 다시 격철이 떨어져서 뇌관을 발화시켜 탄환을 발사하는 작동이 한 동작으로 되는 더블액션 장치가 발명되어 오늘날 회전식 권총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권총은 미국 남북전쟁을 거쳐 서부 개척시기를 맞으면서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또 성능 개량도 매우 짧은 시간내에 이루어졌다. 당시 콜트의 SAA는 서부를 정복한 권총이라 불리며 당시 최고의 인기 권총이었다. 이 총이 발표된 것은 1873년으로, 그 뒤에도 개량을 거듭하며 100년 이상 발매되어 오고 있는데, 당시 미군의 제식권총이기도 했다.
연발식 권총이 인기를 얻은 것은 휴대가 간편하고, 손쉽게 연속 사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19세기 이전에도 이러한 연발총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었다. 다만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쉽게 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연발총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화약병기가 있는데, 바로 삼안총 내지는 삼혈총으로 불리는 화기다.
초기 삼안총을 개량한 명나라 삼안총
16세기말 명에서 ‘삼안총’ 도입, 독자적 제조
삼안총은 기본적으로 불씨를 손으로 점화해서 탄환을 발사하는 지화식 화기의 일종이지만, 하나의 총신에
세 개의 총구멍 또는 세 개의 총신이 하나의 손잡이에 묶여 있는 독특한 형식의 화기다.
이러한 구조적인 특징 때문에 ‘삼안총(三眼銃)’,‘ 삼혈총(三穴銃)’이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 보통 인마 살상을 주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전투∙훈련시에는 소리를 이용한 신호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삼안총은 원래 중국에서 사용해 온 화기로 임진왜란중에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어 사용되었다. 중국의 삼안총에 대해서는 ‘대명회전’(1587),‘ 신기보’(1597) 등의 문헌에 나타나는데, 대체로 16세기 전후에 개발된 화기로 북방지역에서 기병용 무기로 기마전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조선 최대의 전란이었던 임진왜란 때 전해졌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을 이용한 보병전술에 맥없이 무너졌다. 초기 전투의 경험을 토대로 피아 화기의 성능상의 우열과 전술상의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한 조선은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명나라의 선진화기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명나라 군은 대장군(大將軍)∙
불랑기(佛狼機)∙멸로포(滅虜砲)∙호준포(虎蹲砲)∙백자총(百子銃)∙삼안총(三眼銃)∙쾌창(快槍)∙조총(鳥銃) 등 다양한 화기를 장비하고 있었고, 명나라 군은 이들 화기를 활용하여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평양성 탈환전투에서 승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명나라 군으로 부터 삼안총∙호준포∙백자총통∙불랑기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전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삼안총 도입의 계기가 된 평양성 탈환전투 기록화(국립진주박물관 소장)
평양성 탈환전투 기록화 부분도
보물 884호 삼안총(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삼안총(육군박물관 소장)
삼안총(전쟁기념관 소장)
쌍자총통(전쟁기념관 소장)
조선에서 삼안총이 언제부터 제조됐느냐 하는 점은 기록은 명확치 않으나 1593년경부터 인 것 같다. 이는 선조실록의 1593년 12월 2일조 비변사의 장계에서 삼안총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비변사는 전투에 가장 필요한 화기가 조총이고, 그 다음이 삼혈총이라고 하면서 조총 제조는 제작공정상 지극히 어려
워 숙련된 장인이 아니면 완성품을 얻기가 어렵지만 삼혈총의 경우에는 어렵지 않기 때문에 지방의 병사들에게 철물을 이용하여 삼혈총을 제조하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또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동제 삼안총 한 점의 제작 시기가 앞서 실록의 기록과 동일한 시기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삼안총의 총신에는‘만력 계사년 12월 제조, 무게 5근 7량, 매 총구멍에 화약 6전 철환 2개, 장인 전신금’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다시 말해 이 삼안총은 계사년인 1593년 12월에 장인 전신금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실록 기사와 유물로 미루어 짐작컨대 1593년 12월경에 이미 삼안총의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설치된 훈련도감 군사들이 부족한 조총 대신에 삼안총∙승자총통을 가지고 훈련하고 있다는 기사나 조정에서 중앙에서의 화기 제조가 수요에 미치지 못하자 지방에서 조
총∙삼안총 제조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는 기사가 실록에 보인다.
당시 전쟁이 한창이던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군을 상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화기였다. 특히 일본군의 조총 전술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총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많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조총보다 위력은 떨어지지만 제조가 용이한 삼안총을 많이 활용했던 것이다.
1594년 4월, 유성룡이 군사들의 훈련 필요성을 상소하면서‘포수 5백여 명이 장비한 화기가 태반이 삼혈총과 승자총통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당시 조선군이 장비한 무기중에서 삼혈총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음을 보여준다(서애문집).
특히 1595년 5월 28일에는 선조가 승정원에 전교하여 “삼안총은 적을 방어하는데 좋은 무기로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입직하는 포수들은 다음 달부터 삼안총 쏘기를 연습하여 몇 차례 돌아가서 끝맺도록 하라”고 삼안총의 훈련을 적극 지시하고 있다.
삼안총은 이후 구한말까지 널리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1808년에 발간된‘만기요람’에 기록된 각 군영의 무기 재고상태를 보면 훈련도감에 153점, 어영청에 60점의 삼안총이 장비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총신 세 개를 병렬로 연결, 연속사격효율 높여
기본적으로 삼안총은 당시의 일반 총들과는 다른 연발총 개념이 적용된 화기로서 구조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삼안총은 기존의 총들과는 다른 다관식 화기다. 기존의 총(총통)들은 모두 하나의 총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화약과 발사물(화살 내지는 탄환)을 총구쪽에서 장전한 다음 심지에 불을 직접 점화하여 발사하게 되는데, 재장전 후의 발사과정도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야 하였다. 총(화기)을 한 번 발사한 후 두번째로 발사할 때까
지는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되어 사격 속도가 극히 느릴 뿐만 아니라 일단 발사한 후 재장전하는 동안 병사가 적의 공격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는 취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한번에 다량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 세종 때‘일발다전법’기술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후 발사물이 화살에서 탄환으로 대체되면서 이러한 기술적
노력은 기존의 총신 세 개를 병렬로 연결함으로써 더욱 효과를 높이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삼안총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삼안총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시에 주조된 하나의 총신에 총구 세 개가 뚫어져 있는 형식이고, 또 하나는 세 개의 총신을 각각 주조하여 횡으로 붙인 형식이고, 나머지 하나는 세 개의 총신을 붙이되 그 외부에 죽절을 부착하여 파열되지 않도록 한 형식이다. 이런 삼안총 형태는 기본적으로 중국제와 다른 것이었다.
원래 중국의 삼안총은 하나의 총열에 3개의 약실과 심지구멍이 형성되어 있어 화약과 탄환을 3개층으로 장전하였다가 차례대로 불을 붙여 쏘는 형태였다. 중국의 십안총도 유사한 화기인데, 하나의 총열에 10개의 약실과 심지구멍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의 화기는 세 층으로 장전한 후 차례대로 불을 붙여 발사 하지만 자칫 한꺼번에 폭발하는 등 사용에 기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삼안총은 보다 안전하고 사격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3개의 총열을 가진 다관식 삼안총으로 개량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삼안총은 최초부터 다관식 삼안총이었다. 인조 때 이서가 지은‘ 화포식언해’ 에 의하면 총신마다 소약선 3치, 화약 3돈, 토격 2푼, 철환 1개라고 되어 있어, 총구 세 개에 각각 철환 1개씩을 동시에 장전하고, 연속 내지는 동시에 3발을 발사할 수 있다고 하여 중국의 삼안총과는 다른 발전된 형태였던 것이다.
특히 좀 더 간편한 제작과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서 세 가지 형태가 함께 개발되었음을 볼 때 우리 선조들의 무기 개발 기술의 개량을 위한 고민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중국식 삼안총과 유사한 화기가 우리 나라에도 존재하는데 바로 쌍자총통이다. 쌍자총통은 승자총통 두 개를 병렬로 붙여 놓은 것과 같은 형태로, ‘신기비결’ 에는 쌍안총으로 나와 있다. 신기비결에 의하면 좌우의 두 개의 총신에 각각 3개씩의 화약심지 구멍이 있으며, 탄환 2개씩을 각각 3개층으로 장전한 다음 앞에서부터
차례로 심지에 불을 붙여 사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쌍자총통은 중국제 삼안총보다는 개량된 화기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총통을 개량하여 장전시간 지연에 따른 사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한번 장전으로 6회 연속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한 연발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발총의 개발은 한번 장전으로 여러번의 연속 사격을 도모하는 형태로, 유럽에 있어서 발사장치 개량
을 통한 사격간의 재장전시간을 줄여 나가는 것과는 대조적인 발전형태라 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 일행 중 마상무예단이 일본에 연행 갔을 때 마상재를 시연한 모습을 그 린 그림.
조선통신사 일행이 에도 거리를 행진하고 있는 모습
조선통신사 행렬도에 나타난 삼혈총수 모습(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신 매우 짧고 가벼워 기병용으로 유리
삼안총이 지닌 두번째 특징은 총신이 매우 짧고 가벼워 기병용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다는 점이다. 1605년, 순변사 이시언이 선조에게 “삼안총이 말 위에서 쓰기에 아주 좋으며 적을 두렵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기병은 상대적으로 화기 사용에 있어서 많은 제약 요소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매번 장전한 후 발사하는 방식의 화기보다는 한꺼번에 세 개의 총신에 장전한 후 세 차례에 걸쳐 연속 사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안총은 기병 전술운용에 있어서 매우 유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무예교범인 ‘무예도보통지’ 의 마상재에도 바로 삼안총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마상재는 기병들이 말 위에서 무기 사용과 몸동작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고안된 무예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기록이 보이는데, 한때 훈련도감의 관무재에서 봄∙가을로 마상재인을 선발하여 마군에 속하게 한 마상재군이 편성된 적도 있다. 이처럼 마상재는 무예로 시작하여 실전에도 활용되었는데, 유성룡의 ‘징비록’ 에는 마상재의 재주로 적을 무찔렀다는 기록이 있고, 효종 때는 북벌계획 추진시에 마상재 기술을 연마하는 등 기병들의 무예로 자리 잡았다. 이런 마상재는 외국인들에게 우리 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요즘 아시아에서 불고 있는 한류 열풍, 한류의 원조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에 일본에 문화적 충격 준 한류는 조선통신사로, 200여 년간 12번에 걸쳐 파견된 통신사는 정치∙외교 뿐 아니라 문화예술 측면에서 일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의 통신사는 정사∙부사∙종사관을 포함하여 거의 500명에 달하는 사절단으로 한양에서부터 부산을 거쳐 쓰시마 섬, 에도에 이르기까지 왕복 5~8개월이 소요될 정도로 긴 여정이었다. 이들 통신사 일행은 에도를 방문하여 막부장군을 직접 만나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또 접대를 받았다.
그리고 각지의 일본인들과 주자학∙문학∙의학∙미술 등 각 분야에서 활발한 문화교류를 하였다. 지금도 통신사행에 참여한 관리들이 남긴 기행문을 비롯하여 당시 한∙일 지식인들이 주고받은 많은 글들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통신사 일행에는 마상재에 뛰어난 재인들이 동행했는데, 1635년(인조 13년) 일본 정부의 요청에 따라 마상재에 뛰어난 장효인과 김정이 사신을 따라가서 재주를 선보였다. 이후로 통신사행에는 반드시 마상재인이 동행하였다. 마상재 중에서 단연 으뜸 기술이라고 한다면‘마상립’을 들 수 있다. 마상립은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삼혈총을 들고 달리는 말 위에서 두 발로 서서 균형을 잡는 기예다. 즉 말 위에 서서 두 발로 중심을 잡은 상태에서 삼혈총을 이용해서 적을 공격하는 무예인 것이다.
이들이 행하는 마상재를 본 수많은 일본 사람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선의 마상재 기술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는데, 특히 18세기에 사신으로 간 박경행은 “전쟁터에서 총∙칼∙창이 들어오고 깃발이 휘날리며 북소리가 요란할 때 말에 몸을 숨긴 채 적진에 돌입하여 적의 깃발을 빼앗거나 적군의 목을 베어올 수 있는 날랜 재주를 지닌 사람이 우리 나라에 400~500명은 된다” 라고 말해 당시 조선의 국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후 일본에서는 마상재를 구경하고 경탄한 사이토가 이를 모방하여 ‘다이헤이혼류(大坪本流)’라는 승마 기예 유파를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현재 교토대학 문학부박물관에 소장된 ‘한인희마도’ 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요청에 따라 통신사 일행으로 파견된 마상재인 두 명이 에도성에서 장군과 막부의 고관 및 유명한 영주들 앞에
서 각종 말재주를 펼치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마상재 중 두 마리의 말을 한꺼번에 부리는 쌍기마 자세다. 공연 때는 부채를 들고 마상재를 하였고, 전쟁시에는 삼혈총과 같은 기병용 총을 사용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통신사 일행의 마상재 공연 모습을 일본인 화가가 그린 작품으로, 공연장 옆에 서 일본의 고관들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고려미술관 소장).
구경 10~19㎜, 전체 길이 36.6~52.7㎝
이처럼 삼안총은 비록 총열이 짧고 가늠쇠가 없기 때문에 사거리가 짧고 정확도도 떨어지는 단점도 있으나 제작이 비교적 쉽고 말 위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기병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다.
특히 백병전을 펼칠 때 화약이 떨어지게 되면 철퇴와 같은 타살무기로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구한말까지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관장이었던 채용신이 그린 ‘대한제국동가도’ 에 의하면 행렬 최선두에 전립에 호의차림인 기병이 삼안총을 높이 들고 행진하는 모습이나 통신사 일행의 기병이 삼안총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에서 당시 삼안총의 활용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삼안총은 상당히 많은 수량이 전해오고 있는데, 대체로 구경은 10~19㎜이며, 전체 길이는 36.6~52.7㎝ 정도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물은 앞서 언급했던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삼안총으로 보물 제8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총통은 총길이 38.2㎝ 이고, 통신 길이는 26㎝, 병부 길이는 12.2㎝, 구경은 1.3㎝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명문이 확실히 명기된 삼안총으로는 최고에 속하는 국방과학기술문화재로 평가된다.
화약병기의 발전에 있어 조총은 매우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조총이 등장하면서 전투 양상도 새로운 형태를 띠고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총의 경우에도 장전 및 발사과정이 간단하지 않아 일정한 시간 안에 사격할 수 있는 횟수가 활보다 오히려 더 적었다.
특히 기병들이 사용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여러 개의 총신을 하나로 묶어 놓아 연발 사격이 가능하게 한 다관식 연발총을 제작한 것이다. 따라서 연발총의 원조는 삼안총이라 할 수 있다.
글 | 박재광 _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