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포커스 2019-12>
투명한 시혼에 투사된 동일화의 양상(樣相)
-박미산 시인의 개아와 합일정신의 특이성
엄창섭(김동명학회 회장, 본지 주간)
1. 합리성의 추이(推移)와 시적 교감(交感)
모름지기 비센떼 우이도부로가 시학의 근본원리를 ‘현실의 해체와 변형’으로 인식하고 “시인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고 미학이며 예술론임”을 주장한 점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따라서 해체로서의 창조원리와 주체의 분열에 있어 정신작업의 종사자인 시인은 선험적으로 ‘작은 신의 대언자임’을 극명하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투명한 시혼에 투사된 동일화의 양상(樣相)-박미산 시인의 개아와 합일정신의 특이성」에 관한 심층적 논의는 때로는 현상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힘의 연계선상에서 수행하는 작업이기에, 특정한 시인의 작위(作爲)가 진통과 산고의 과정을 통한 생명의 당위성에 기인(起因)한 점은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힘겨운 육화(肉化)로, 어디까지나 ‘성스런 노동이며, 눈물겨운 시적 교감’으로 일상의 서정성에 합일된 미의식과 그 맥을 일관성 있게 검색하는 작업이기에 그 같은 합리적 해법은 지극히 유의미하다.
일단 우리 현대시단에서 ‘느림의 삶을 새로운 가치로 해석하고 자존감을 올곧게 지켜내는’ 월간『모던포엠』통권 195호의 모던포커스에서 <사춘기>, <알파별 스피카*> 외 8편의 시편을 모처럼 심도 있게 분석하려는 남다른 배경의 대상은, 국제 항구도시인 인천태생으로 2006년 『유심』지의 신인상과 2008년 『세계일보』신춘문예 당선 이후에도 꾸준히 시작에 몰두하며, 현재 『세계일보』에 「박미산의 마음을 여는 시」를 절찬리에 연재 중인 박미산(본명 明玉) 시인이다. 그간에 평자들에 의해 비중 있게 다루어진 <달 속의 아버지>, <집시>, <태양의 혀>, <불꽃놀이> 등의 시편들은 시격의 격조와 미적 타당성이 결과적으로 언어의 재해석으로 확증된 생산물이다. 무엇보다 그 자신의 한층 명백한 삶의 행보는 2016년 이후 서울 종로구 쇄의 공간인 문화 살롱「백석, 흰 당나귀」를 운영하면서 "명동시대가 사라진 것이 안타까워 ‘혼돈의 시대를 살며 치열했던 삶과 낭만을 노래했던 옛 예술가처럼 ‘서촌’에 가난한 예술인들의 쉼터이자 사색의 공간”을 확장하고 몸소 실천궁행하는 이 시대의 기인(奇人)이랄까? 그의 다채로운 인생지도가 펼쳐져 있음은, 운명처럼 버틴 가난의 벽 앞에서도 긍정적 사고(思考)를 지닌 강한 자존감의 소유자라는 현재성이다.
그 같은 관점에서 흘려버린 기억의 흔적을 독자로 하여금 시적 질료에 시선을 끌게 하는 충동의 전이(轉移)로 새삼 버스안내양의 관계를 돌이켜 보이려는 의중은 아니더라도 1989년 4월 김포교통 소속 130번 버스에서 근무하던 38명이 마지막이었지만 “안내양이 버스를 빵빵하게 부풀린다/그래도 나로부터 떨어지지 않는 모래알들/휘어지는 길목, 중심이 덜컹거린다/짐작할 수 없는 손이 스윽/치마 속을 훑고 간다/푸른 강이 순간 사라지고/개자식/첫 욕을 질겅질겅 씹어 삼키던 봄날(사춘기)”의 보기나 ‘낯모르는 얼굴들이 드러누웠다’를 모티브로 하여 “처음 가져본 나의 방엔/중학영어, 국어문제집들이 상에서 뒹굴고/온몸에 들러붙는 그들의/고함소리를 털어내려고/나는 모래바람을 삼켰다/지평선 위로 하얗게 빛나는 별이 떴다/모래알이 처녀자리에 돌풍을 일으키고/스르르 무너지는 여고시절(알파별 스피카*)”에서 각주로 처리한 알파별 스피카는 ‘황도 12궁 중 6궁에 해당하는 별자리인 처녀자리의 으뜸별’이라는 시적 형상화는 개아(個我)의 육성과 체취로 아득히 흘려버린 세월에 관한 낭만의 회감(懷感)을 서정적 미감으로 되살려 ‘생명외경의 엄숙성’을 절감케 하는 고통을 수반한 정신작업은 한순간의 초조와 불안감을 평정시키는 역동성과 생명감의 동일화 양상에 해당하기에 못내 그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또 하나 언젠가 깊은 산중에서 길을 묻는 수행자에게 어느 선사가 “눈앞이 길이다.”라는 일깨움을 주었듯 그의 시편은 ‘보편적으로 시어의 현학성과 눈부심, 수사의 화려함이나 기법의 뛰어남이 응축되었기’에 타자에게 경계심이나 거부감은 허락되지 아니한다. 까닭에 ‘가난이 그대로 얼어버린 빙판길 연탄재를 밟고 비탈진 길’ 오르듯 “넘어지고 자빠지며/눈물만 훌쩍 건너뛰었다/그녀의 스카이캐슬엔/뜨개바늘이 회초리가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스카이 캐슬)”에서 보다 입증되는 그만의 시편은 지극히 인간적인 친근함과 일상의 순수서정성이 내재되어 이채롭다. 비록 절망의 끝이 불투명한 현재성에서 삶의 매순간을 섬세한 촉각과 감각의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아니하고, 불안하게 생존하는 대상의 탐색을 위해 지상에 갈앉은 낮은 음계로 열정을 이처럼 읊어낸 담백한 시격의 동일화의 양상에서 시 읽기와 감상은 심상의 간극을 좁히는 작업이기에 새삼 흥미롭다.
2. 경계의 층위와 심상의 투사(透寫)
어디까지나 「경계의 층위와 심상의 투사」라는 관점의 해명을 위한 방편으로, 「향연(饗宴)」에서 디오티메가 소크라테스에게 육체의 아름다움에서 내적 아름다움의 반사상을 찾을 것을 권하는 행위는 동일성을 지닌다. 플로티니우스 또한 지각 가능한 세계를 영원한 형식의 세계에서 나오는 거울의 반사상으로 간주한 것처럼 대다수 현대인들이 반짝이는 표면을 접할 때, 비교적 반사상에 관해서는 그 나름으로 외형에 치중하며 내적 아름다움의 도외시 경향은 경계할 정황이다. 일반적으로 중세의 영성문학이 아우구티누스의 작품에서 거울에 비친 상에 의한 풍부한 의미를 빌려온 점에 비춰 인간정신은 거울에 비친 상의 환상, 즉 물질세계의 허상을 수락하지 않을 때, 상대적으로 신의 성스러운 빛의 속성인 은총을 끝내 허락받을 수 있다.
특히 삶의 매순간 물상의 미세한 움직임도 예리하게 포착하여 놓치지 않고, ‘영혼을 관통하는 삶의 의지로’ 불확실한 공간에서 생존하는 인간존재의 탐색을 위해 끊임없는 묵언의 응시로 우직하리만치 그 자신의 시편에서 극명하게 밝혀내는 직관적인 시적 행위는 향방이 일정하지 않는 바람의 통로를 찾으려는 생산적이고도 건강한 정신작업에 잇닿은 결과는 가볍게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이 같은 점에 견주어 다행스럽게도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인 박미산 시인의 시편에서 이채롭게도 ‘피비린내가 울컥울컥 넘어오고 블루문이 열리는’ 정황에서 다소 감정의 절제 없이 충동적으로 읊어진 “손톱과 손톱 밑살,/오이지가 도마에 빨갛게 누워있다/프리다 칼로의 고통보다/내 피가 더 무섭다(칼로)”와 같은 시편을 접하고 수시로 시적 다양성을 접한다.
이에 견주어 푸른 식물성 언어로 “시를 모르는/사랑을 모르는/장미가 가시마다 붉은 욕을 주렁주렁 매달고/시와 사랑 사이 미묘한 경계에서/발을 헛딛으며 자신을 찌른다(붉은 욕이 피는 오월)”에서나 “꽃잎 터지는 소리가 거짓말인지/폭탄 터지는 소리가 참인지//점자를 더듬어 봐도/수화를 나누어 봐도//한 번 어긋난 말은/폭탄처럼 계속 터져 나온다(꽃 누르미)”라는 현재성에 ‘꽃 누르미가 품고 있던 붉은 말들이 폭발할 날들이 올 것이다,’라는 그만의 간절한 기대감은 ‘느린 삶의 예증으로 가깝거나 먼 내일’과도 연계된 일상으로 지극히 합목적적이기에 못내 수긍할 심상의 투사다.
아타카마 사막/아무도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었지/어느 날 풍만한 비가 내렸어/
내 생애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생명의 흔적이 없는 몸에서/꽃 두 송이가 자박자박 걷기 시작했어//
-<꽃들의 발소리>에서
그렇다. 위에 인용한 시편 <꽃들의 발소리>에서의 보기처럼 의태법에 의한 시적 기법을 통해 쉽게 확인되듯 ‘꽃 두 송이가 자박자박 걷기 시작했어’와 같이, 비록 사각의 빌딩 숲에 자리해 있을지라도, ‘아이 등 뒤로 사막이 바다처럼 넘실거리고 모래 위로 물결자국 남을지라도’ 특정한 그 공간에 시적 상상력은 머물지 아니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칠레의 일명 ‘꽃피는 사막(Flowering desert)’인 아타카마로 마침내 확장되기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사유의 존재인 그 자신이 홀로 고독하게 바람과 들꽃과 이마를 마주하며 끊임없이 전통의 실타래를 꼬는 일에 전념하는 그 자신은 놀랍게도 단절과 회색의 시간대에 처연하게 몸담으면서도 오로지 현재와 잇닿은 시간대에서 밝은 미래사회를 지향해 시혼을 불태우는 열정은 너무 투명해 눈물겨울뿐더러, 인간소외, 상실된 자아를 모성적인 각별한 돌봄으로 일관하는 그만의 엄숙한 작업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 전율 같은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와 같이 생생한 일탈의 정신을 그만의 예술적인 질감과 터치로 시적 형상화를 통한 엄숙하고도 생명적인 시작(詩作) 행위는 따뜻한 감성에서 배어나온 감미로운 눈물과 “황금빛으로 물드는 시간이 오고 있다/백 년을 반쯤 뜯어먹은 나는/무릎을 감싸 안고 창문을 바라본다/당신의 깨진 믿음이 내 발밑에 가득하다//환상을 그려 넣을 줄 아이는/창문을 깨지 않고 통과한다/아이의 탯줄을 꽉 움켜쥔 내가 끌려간다(비트코”에서처럼 ‘동화(assimilation)와 투사(projection)의 혼합적 양상에 의한 ‘아이의 탯줄을 움켜진 자아가 끌려가듯’ 끝내 묵언(黙言)의 수행은 화엄(華嚴)이랄까? 주어진 운명에 거역함이 없다. 까닭에 힘겹고도 고독한 수행자의 창조적 정신능력의 결과물, 즉 수동적인 사물(the passive things)과 능동적인 사물(the active thoughts)을 결합하는 매개적 정신능력(the intermediate faculty)의 범주에 위치한 그의 시적 상상력은 창조적 영혼의 교감에 견주어지기에 눈부신 존재의 꽃이다.
모름지기 생명외경(生命外境)의 존엄성을 신앙처럼 떠받들고 격랑의 시간대를 만보(漫步)하면서 투명한 산 여울의 흐름도 놓치지 않고, 영혼의 울림으로 조율하여 마음의 상처를 다독이는 일련의 생명적인 변주는 못내 유의미하다. 이 같은 정황은 오웬의 지적처럼 “시인의 소임은 시대적 상황에 경고하는 것이다.”라는 인식의 깨어남과 정서법에 한층 충직하여 감동의 마침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관념의 일탈로 삶의 잠언을 교시(敎示)하려는 의중에 견주어, 케니언대학의 시학교수인 랜섬(John Crowe Ransom)이 “시는 자연미의 표현이며, 상상이라는 훌륭한 기능이 시의 작인(作因)이다.”라는 역설은 각별하게 스키마(schema)로 기억할 점이다. 혹여 생생한 일탈의 정신을 축으로 하여 예술적인 질감과 터치의 대비(對比)로서 자연에의 회귀를 시각화한 행위는, 탈진(Burn-out)된 생명외경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순수한 정신적 현재성은 종종 일상의 감동을 회복시켜주기에 그만의 당위성을 지닌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숙명적으로 죽음을 껴안고 사는 존재인 까닭에 그 자신의 선한 심성과 담백한 품격으로, 순수서정성을 엄격히 통제하고 즉물적 현상을 적확하게 풀어 보인 ‘합리성, 그 모순에 대한 사유’에 한층 감성적인 박미산 시인의 시적 의미성은 그 자신이 적절하게 빚어낸 그간의 생명적인 결과에서 당당한 자존감으로 빛나는 편이다. 그 점에서 우리가 접하는 일상의 세계와 즉물적 대상은 일정한 패턴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향한 끊임없는 변전과 연계성을 지속할 일이기에, 그 자신의 내적 성숙을 위한 눈물겨운 허물벗기는 주의 깊게 반복할 일이다.
또 하나 오랜 날 평자는 초허(超虛) 김동명이 ‘시인은 반드시 모국어를 지켜내야 한다.’는 그 삶의 교시(敎示)를 켜켜이 지켜왔기에, 모국어에 관해 지극한 관심사(關心事)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나 센키에 비치의 「등대지기」를 심장 깊은 곳에 소중한 스키마(schema)로 간직해 왔다. 한편 최소한 이 땅의 정신작업의 종사자임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우리말을 갈고닦고 가꾸어 가리라는 그 같은 절박감으로, 진정한 시인으로서 비록 무분별한 세계화 추세로 외국어가 범람하는 오늘의 현재성에서 우리말과 글에 애착을 지니고 시대적 소임을 엄격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은, 언어는 그 민족의 위대성을 상징하는 역사요, 문화이기에 격변하는 불확정한 시간대에서도 뼈아픈 자기성찰을 통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
3. 시인의 시대적 소임과 그 자존감
보편적인 시작과정(詩作過程)에서도 필립 라킨(Philip Larkin)은 “시란 맑은 정신의 문제,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것이다.”는 리얼리즘의 이론은 가시적인 일체(一切)의 대상은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소멸하는 상관물임을 역설한 것이다. 때문에 생경(生硬)하여 낯익고, 추상적이면서도 몰개성적인 시편에서 치밀함을 초월한 끝에 시어의 적확성과 본질적인 ‘성스러움’은 ‘활력이 넘쳐나는(golden brain)’ 역동성의 추이와 결속되어야 하고, 불안한 의식을 걷어내고 자아존재의 관계층위로 시 의식을 한층 빛나게 하는 인자(因子)로서의 기능과 작동은 일관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차지에 박미산 시인이 우직하리만치 시편의 골격을 지탱하는 역동성은 생명의 본질, 본원(本源)이라는 자연회귀성에 맞물려 있다. 특히 의식의 심층에 내재되어 있는 지난(至難)한 기대감은, 마침내 생의 불꽃이 점차 꺼져가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고향(본질적인 삶, 천상)에 관해 감정을 절제하여 지적인 세계를 뛰어넘는 식별력으로 영성을 지향한 추이와 새로운 도전은 결코 소홀하게 지나칠 수 없다. 이 같은 시적 모티프에 있어 비록 불어오는 바람은 ‘경전도 교리도 없을지라도’ 그 같은 측면은 황금찬 시인이 ‘잡초도 풀이라며 생명외경심을 부단히 일깨워주었듯’ 화자 자신의 역설(paradox)처럼 잘못 든 길도 길임에 틀림이 없다. 까닭에 “작은 딸이 옆에서 울고 있다/차들의 경적소리가 뒤통수를 갈긴다/핸들을 잡은 손등 위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더 이상 머뭇댈 틈이 없다/도로 위에서 새가 울고 있다(길을 놓치다)”는 삶의 현장에서 종종 체득하는 눈물겨운 정신풍경도 깊은 애정을 지녀야하기에 ‘아름다운 동행을 결코 끝낼 수 없다.’ 이처럼 일관성을 지니고 추구하는 기대만큼 열린 공간을 지향한 남다른 열정과 내면의식은 삶에 관한 자아성찰의 울림을 확인하는 고뇌로 지난(至難)한 ‘몸의 시학’이야말로 그만이 지닌 당위성으로 지적되어진다.
각론하고 소중한 정신적 생산물의 층위는 혹여 현대도시의 구조물인 네 개의 각(角)에 대비되어 아쉽게도 인상 비평적이라는 변명이 주어질 것이나 다행스럽게도 박미산 시인의 시적 작위(作爲)는 ‘생명의 교감(交感)과 길 찾기, 따뜻한 감성과 맑은 영혼의 꽃, 소소한 일상과 생각의 속도, 경계 허물기와 정조(情調)의 빛남’이라는 해법의 다양성으로 분할된다. 한편 이처럼 깊은 사유의 그늘에 담긴 이채로움으로 인해 그 자신이 ‘창의적 생산물에 의한 개방적인 중개자이며 동시에 존엄한 생명외경의 실체로서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로 일컬어짐에 결코 거슬림이 주어지지 아니한다. “흐르는 피로 목을 축인다/모래의 부드러운 물결이 회오리친다/점점 시끄러워지는 사막/웅크려 운다 해도 그 소리를 잠재울 수 없겠지/소리 소문을 어깨에 덮고 긴 잠을 자야겠다(낙타 가시나무)”에서 ‘낙타와 가시나무=동(動)과 정(靜), 동물과 식물’의 상이한 대비(對比)의 투명성은 가일층 갈등구조가 내재된 삶의 처소에서 열중과 불멸의 시혼을 이 땅의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되 영혼의 닻줄을 피멍든 손으로 끊임없이 움켜잡는 예언자적 시인의 시대적 소임의 수행에 견주어질 눈부신 시 정신의 빛나는 실체로서의 정체성 확장은 충격적이기에 앞서 자못 경이롭다.
어디까지나 「시인의 시대적 소임과 그 자존감」의 새로운 접근과 합리성 해법에 있어 ‘지상에 나직이 갈앉은 시적 정조와 함께’ 진리와 정의의 상징인 빛은 어둠을 밝히며 무지를 무너뜨리는 역동성에 기인(起因)한다. 그 같은 연유로 견고한 고독과 자유로운 영혼의 바람 앞에서 개아적인 삶의 고뇌와 생명적인 정신작업을 통한 심리현상은, 황혼기의 삶을 반추(反芻)하는 존엄한 생명외경의 교시(敎示)이다. 까닭에 아름답고도 위대한 창조적 영혼으로 따뜻하고 밝은 미래사회의 지평을 열어가야 할 일이기에,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가 “무관심은 죄악이다.”라는 역설을 삶의 잠언(箴言)으로 다시금 일깨우되, 불행한 현재성에서 대립과 극렬한 이분법에 의한 대립과 갈등의 매듭은 반드시 화해와 통섭으로 가까운 시간대에 풀어내야 한다.
결론적으로 ‘시퍼런 도끼 날(刃)에 찍히면서도 향을 뿜어내는 향나무처럼’ 오직 존귀한 품격을 지닌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그 유무(有無)의 대립관계를 일상의 순수서정성으로 극복하고 ‘과연 나의 시편은 절창(絶唱)인가?’라는 극명한 물음 앞에서 치열한 불멸의 시혼을 다독이되, 시대적 소임의 엄격한 수행은 못내 지속할 일이다. 차지에 화평을 통섭(通涉)의 인자로 작동시켜 모처럼 월간 『모던포엠』통권 195.「모던포커스」의 지면을 통해 ‘극소수의 창조자’로 지적해도 결코 지나치지 아니한 박미산 시인에게 거는 평자의 한결같은 기대감이라면, 비록 가슴이 저며 와서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간대일지라도 감동의 회복을 끊임없이 추구하되 밝은 미래사회의 지평을 열어가기 위해 ‘2%의 염분이 오염된 바다를 정화시키듯’ 한순간 ‘존재의 꽃’을 눈부시게 발화시킬 알맞은 정신기후의 조성을 요청하는 간절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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