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大田>은 “태전”<太田>이 아닙니다.
大田의 원래 지명은“太田”이었으나, 日帝가“大田”으로 格下시켰다면서 원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고들 합니다. 일제가 우리를 지배한 것은 20세기 초부터 35년동안 입니다. 그러나 대전은 15세기에 만들어진 東國輿地勝覽에 이미 등장하고 있으며, 17세기를 살았던 이 고장의 先賢 尤庵 宋時烈의 文集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부 단체의 주장대로 태전이란 이름이 近世에 잠시 사용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수 백년 전부터 傳來된 고유의 이름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뀔 수는 없을 것입니다. 大田은 우리의 역사적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유로도 大田이 다른 이름으로 바뀔 수는 없습니다.
아래 글은 <태전이름되찾기운동본부> 등 일부 단체의 주장들입니다. 또 2003년에는“부끄러운 문화답사기”라는 책이 출간되어 여기에도 태전이라는 고증되지 않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주장 1>.“선조들이 전해 준 대전의 원지명 태전”
대전의 본래명칭은 <한밭>, <콩밭>을 의미하는 <太田>이었다. 대전천을 중심으로 한 천변의 넓은 땅을 한밭이라고 불렀고 이 하천이 범람하여 이루어진 경작지에 이곳의 주민들이 콩을 많이 경작하여 콩밭(太田)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한국 땅이름 큰사전에 의하면 한밭은 대전 또는 태전이라 하고 콩밭은 두전이 아니라 태전이라 부른다. 결국 한밭이자 콩밭이었으니 한밭과 콩밭을 다 함께 나타내고자 태전으로 썼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장 2>.“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이 지어 준 오욕의 지명 대전”
태전이라는 명칭이 대전으로 바뀌게 된 까닭은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등박문이 <太>字에서 점을 빼어내라고 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세가 뛰어난 이곳에 太字를 쓰면 일본을 해치는 큰 인물이 나올 것을 염려하여 太字에서 점을 떼어내서 평범한 大字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 당시 이 고장의 유일한 일간지였던 호남일보가 1932년에 발행한 충청남도 발전사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대전직할시가 편찬한 [한밭정신의 뿌리와 창조](1922)와 [한밭의 얼]을 비롯하여 충청남도 향토문화연구소장 최문휘 씨가 편찬한 대전직할시(1992)와 여기는 대전이다(1982) 및 대전직할시 지명위원이며 중도일보 상무인 변평섭 씨가 편찬한 실록 충남반세기(1983) 등도 역시 대전이 한밭, 콩밭을 의미하는 태전이었던 것이 <일본인에 의해 대전으로 불리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주장 3>.“대전(大田)과 태전(太田)의 거리”[출처: 부끄러운 문화답사기]
우리에게 한밭(太田)을 대전(大田)이라 부르고 표기하도록 강요한 이는 바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다. 역사학과 풍수 등 동양학에 능했던 그가 한밭(太田) 주위의 산천경계에 흐르는 상서롭고 강렬한 地氣를 꺾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중략>.
대체로 위에 열거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 어느 특정 종교단체도 태전으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자신들의 종교관과 연관시켜서 펴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가 생성된 시기가 오래지 않은 20세기 초이니 17세기의 역사를 간과한 주장인지도 모릅니다.
*** 아래는 문헌상에 나타난“대전”에 관한 자료들입니다.
<문헌 1>. [東國與地勝覽/成宗 17/1486年刊/제17권/ 公州牧]
* 柳浦川: 유성현 동쪽 20리에 있다. 그 근원은 전라도 珍山縣 지경에서 발하였다.
* 省 川: 유성현 동쪽 7리에 있다. 그 근원이 連山, 珍山 두 지경에서 합류하여 鎭岑縣을 지나 유성현 동쪽에 이르러 성천이 된다.
* 大田川: 유성현 동쪽 25리에 있으니 전라도 錦山郡 경계에서 나왔다. 이상의 세 냇물이 합류하여 회덕현의 甲川이 된다.
<문헌1>에 나타난 大田川이란 大田의 복판이나 주변을 흐르는 하천이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이 대전천은“大田”의 존재<지명>를 입증해 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문헌 2>. [宋子大全 續拾遺 附錄 卷之二 日記]
동국여지승람보다 약 200여 년 뒤에 기록된 문헌에도 大田의 지명이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宋子大全續拾遺 附錄 卷之二>의 日記<楚山日記 門人 閔鎭綱 錄>입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우암선생이 賜死<1689. 3/숙종15>된 후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당시 대전과 인근의 지명들이 등장하는데 현대에도 남아있는 낯익은 이름도 있습니다.
[宋子大全續拾遺 附錄 卷之二] 楚山日記 門人 閔鎭綱 錄...
7월 11일(乙巳) 새벽 2시(축시)에 빈소를 파한 다음 朝奠과 上食을 올리고 나서 시신(柩)을 상여에 실은 다음 발인제를 지내고 바로 길을 떠나는 새벽에 비바람이 치다가 오래지 않아 조금 개었다.
상여를 메는 인부들의 담당은 注山, 馬山, 沙峴, 瓦旨 등 4개 부락과 白達村, 大田, 沙塢, 草洞에서 社倉契가 차출(調出)하여 3패로 나누어 번갈아 메고 동화동까지 갔는데 李德遠 등이 냇가에 병풍과 차일을 치고 기다리고 있어서 상여를 멈추고 잠시 쉬었다.
[宋子大全續拾遺附錄卷之二 <日記> 楚山日記門人閔鎭綱錄]
十一日乙巳。丑時。破殯。因行朝奠及上食。昧爽。奉柩載轝。行遣奠。仍就道。日未明。風雨交作。差晩小霽。○擔夫則自注山,馬山,沙峴,瓦旨四村及白達村,大田,沙塢,草洞社倉契調出。分三運替擔。至東華洞。李德遠等。設依帳於川邊以待之。停柩少憩。○金宙一,李德遠,趙相一等。各致奠。卽發引行。白達諸軍仍擔。至太峴。東華,紫雲,新灘替擔。至達田。成楚柏。設依帳於川邊以待之。停柩晝點。○成楚柏,林遇箕各致奠。林則操文。○秣馬後東華諸軍仍擔。至東倉,達田軍替擔。至獨樂津頭柳星彩設依帳以待之。停柩少憩。○柳星彩兄弟致奠。渡江後達田軍仍擔。日落時。至燕岐。日昏後。行夕上食。仍止宿。○本倅李元齡言于鄕任使之設依帳以待云。○門人黃世楨及宋元錫。文義儒生吳再昌等。各操文致奠。李萬稷,朴世周。亦致奠。
위의 초산일기는 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의 장례에 관하여 제자가 그날 그날 기록한 것으로써 당시에도 이미 여러 마을 이름과 더불어 大田의 지명도 함께 쓰였음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이러한 지명들은 宋浚吉 선생의 <同春日記>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또 輿地圖書<1760년/영조36 간행>에도 아래의 기록이 있습니다.
公州牧 山內面 瓦旨里 自官門東距九十里.
懷德縣 縣內面 注山里 自官門東距十五里.
懷德縣 外南面 草洞里 自官門南距二十五里.
公州牧 鳴灘面 草塢浦里 自官門東北間距四五里.
<문헌 3>. [각종 기록]
아래에는 대전과 관련된 여러 기록들을 열거함으로써 <대전>이 본래의 지명이었음을 밝혀 두고자 합니다.
<1>. 山內面 大田九浦坪 字十七卜四沓四斗落賭租三石十五斗 其東邊沓七卜七二斗落 [1751년<영조27> 忠州朴氏 別給文書; 朴鎭昌소장]
[朴民熙<1687∼1756>가 아들의 武科급제를 기뻐하여 토지를 別給한다는 기록]
<2>. 徐有榘 <純祖 27/1827)의 林園經濟志五의 倪圭志 卷第四 八域場市에 대전장(大田場)이 공주목에서 동쪽 70리에 있는 山內面의
大田에서 2일, 7일에 선다는 기록.[設大田場 在州東七十里 山內面 二七日設]
<3>. 性潭先生集 卷二[宋煥箕; 1728 ~ 1807/尤庵 宋時烈 五代孫] 詩, [雨後會大田 拈韻共賦 時判官再從叔自京搬還 同居於誠夫家]
[邇來花樹盛筵稀 步出田村拂布衣 山雨須知塵累洗 溪風正好朗吟歸 高堂杖屨歡何極 一榻琴棊興不微 度外時憂自澒洞
偏憐斯會藹天機]
<4>.
南塘 韓元震/1682-1751/遂庵 權尙夏의 門人 [權尙夏는 尤庵 宋時烈의 門人]의 行狀
[기사전거: 行狀(尹鳳九撰, 南塘年譜附錄), 韓如益遺事(韓元震 撰), 韓有箕墓碣銘(權尙夏 撰, 寒水齋集 卷28), 韓有箕夫妻墓誌
(韓元震 撰), 韓聖箕墓碣(李縡 撰, 陶菴集 卷33), 韓國系行譜 등 기록]
<5>. 巍巖遺稿 卷之十一(李 柬; 1677 ~ 1727) 遂庵 權尙夏 門人, 白湖集(尹 鑴; 1617 ~ 1680) 등에도 대전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대전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이 자료는 大田地名誌의 일부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첫댓글 항상 소중한 정보주시니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