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스로 언제쯤 이런 멋진 산행기를 한번 써 볼수 있으려나
복잡하고 지루할지 모르는 일상에서 마음의 여유와 감탄을 자아내는
산행기네요..
번잡을 잊고 한번쯤 지리산에 푹빠져 보는건 어떨런지..
카페에서 다들 감탄을 하기에 옮겨 봅니다..^^즐거운 주말들 보내셨는지 모르겠군요..앞으로 한주도 즐거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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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좋은 느낌으로 감동을 받기만 하는 처지라 빚만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개인적인 글이긴 하지만 산은 우리모두가 사랑하는 대상임을 빌어 옮겨봅니다.
<지리산유람기>
프롤로그
기차에 오르기 전,
다녀오면 짧은 산행기라도 보여달라는 그대의 서운한 목소리에 너무 쉽게 대답해버렸다.
조금은 어이없는대답을 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리 싫지만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감동은 언제나 추억보다 쉽게 잊혀지는 법이라면 이러한 시간들이 그리 소모적인 일만은 아닐거라는 믿음에서 여행중의 단상과 메모를 정리 해 본다.
산행기란 나보다 더욱 산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산행역시 여행의 대상지로 지리산을 택했을 뿐이지, 능선을 걷는 것과 조용한 휴양림의 오솔길을 걷는 것과 나에게는 차이가 없다.
동행하였더라면, 그대와 나누었을 대화였을지도 모르기에 -유람기 정도로 읽어보길 바란다.
# 십이월 이십팔일
예정했던 영등포 발 남원행 마지막 열차는 매진되었다던 전화 안내원의 친절한 목소리가 서둘러 집을 나서게 한다.
입석까지야 매진되진 않았을거라는 근거없는 믿음에 아니면 다른 형태로의 이동까지 생각하며 매표소에 도착하니 2분전 개찰을 시작한 22시 59분행 열차의 좌석이 하나 비어있다는 낭보에 웃던 모습이 기억난다.
두달 전 동창모임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던 산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망년회는 그 곳까지 가는 기차안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물론 반추와 망각의 축배를 들며...
-오페라를 읽어 주는 남자-
옆의 앉은 동승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오페라에 대한 관심인지 ,특이한 남자에 대한 호기심인지 물어보고 싶지만, 눈을 감는다.
아직은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고 싶지 않다.
또 시집 한권 챙겨넣지 못한 부산한 산행준비를 떠올리며,
늘 대수롭게 생각치 않아 피우던 게으름이 당혹감을 주던 일들도 떠오른다.
주머니에 손에 익은 수첩과 볼펜을 만져보는 것으로 자위해본다.
다시 돌아가게 되면 읽어볼 생각이다.
03:30분 경 남원역 도착
플랫폼을 걸으며 열차에서 내린 인파를 훑어본다.
비슷한 행색의 차림이 있다면 터미널의 버스가 다니기 전까지는 말동무가 될 수 있을거란 생각에서다.
산행차림의 외지인은 저 혼자 뿐임을 확인하고 대합실로 들어간다.
'누워있기 좋은 의자구조다.'
먼저 잠 이든 노숙자들 사이에서 허리를 펴 본다.
창문까지 꼭 닫은 대합실에 술냄새가 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홀로 서울을 떠날때면 마지막 열차를 탈 일이 많았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선 나의 여행은 거의 즉흥적인 결정이였던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
터미널의 대합실보단, 작은 역사의 그 곳이 추위와 피로감을 추스리기엔 더욱 낫다는 것은 경험의 축적이다.
금일산행이 줄 피로감을 생각하면서 잠시라도 눈을 붙이길 원했지만 마음 뿐이다.
자판기의 커피를 마시며 역의 광장을 둘러본다.
광장 한 복판의 버드나무.
둘레의 크기만으로 짐작해도 내 나이 보다 더 되었을 수령을 짐작한다.
잎새는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지만,
낮이면 이 곳 텃새들의 쉼터가 되고있음을, 늦은 밤이면 이 곳을 거쳐가는 나그네들이
역을 떠나기전 잠시 놓아둘 상념의 보관소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새 역사의 조감도엔 그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에 오랫동안 눈길을 두어본다.
06시 30분경 터미널 옆 호남식당.
이 지역의 택시기사들도 권하는 곳이지만, 줄지여 영업하는 대여섯군데의 식당들 모두 4000원의 백반값을 치루기엔 송구스러울 정도의 다양한 찬이 나온다는 것은 늘 감동의 이유가 된다.
굳이 동편제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남원을 찾는 것은 아니지만,
이른 새벽부터 비녀를 꽂은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차려주는 아침상은 송구함 이상의 감격이다.
07시 30분경 일요일 아침이라지만 터미널이 한산하다.
산 내음이 물씬 풍기는 사람을 살피니 베낭의 크기가 당일 산행은 아니지 싶다.
"종주하시려나 보죠?" 여쭈니 웃기만 하는 모습이 낯설지 아니하여 다시 물어본다.
"혹시 뱀사골 산장 주인이 아니신가요?" 다시 웃으며 그렇노라 말씀하시는 대답이 반갑기 그지없다.
아마 산에서의 처음 일박이 그 곳에선지라 , 그 곳의 주인을 터미널에서 만나게 되니 없는 말이라도 지어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였다,
반선행 첫 버스는 그렇게 그 분과 나 단 둘이서 올랐다.
서울 미아리에 사시는 산장주인은 두 달만에 하산하였다 다시 올라가신다고 하신다.
이태 전에 들렸을때 시베리안 허스키종을 닮은 늑대개와 찍은 사진을 아직 보관하노라고
말해보니 이젠 다롱이라는 잡종을 기르고 있노라고 사진을 보여주신다.
내리기 좋게 운전석 옆 앞자리에 앉으니 기사님이 혼자 오셨느냐고 물어보신다.
"추우실 텐데..."하며 말문을 여시던 기사님은 반선에 도착할 때까지 지리산과 자신의 추억에 관한 얘기로 눈 좀 붙이고 싶은 생각마저 사라지게 하신다.
<어머님 문상까지 와 주던 일본인 친구를 알고 지내는데,
젊었을 적 산행에서 뱀사골 부근에서 여권과 지갑을 잃어버려 당황하는 그 이를 보고 내국인인지 싶어 도와주려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당혹스러웠다던 이야기...어찌하여 집까지 데려와 일본에서 잠시 사신적이 있는 아버님의 통역으로 대화를 나누며 한 달가까이 학업도 포기하고 영.호남 지역의 여행을 하며 나눈 우정담, 후일 동경대출신의 수재였던 그 이가 귀국후 안정을 찾고 덕분에 후지산이며 일본 전역의 여행을 하며 느낀 경험담>등 당시에는 그리 흔치않을 인연에 대한 귀한 이야기들을 해 주셨다.
오전 9시경
반선에 도착하여 산장주인아저씨께는 먼저 오르시라는 인사를 드린다.
같이 오르자고 말씀하시지만 페이스를 쫒다간 체력점검밖엔 안 될 듯 싶어
산장에서 다시 뵙기로 하고 20분 후에 출발한다. 3시까지 쉬엄쉬엄 오를 생각으로
이 번산행에의 의미를 떠올려 본다.
전일 불면이라 벌써부터 피곤하기도 하였거니와 목적지는 뱀사골 대피소 까지만이라 호흡에 신경을 써 보기로 한다.
아니 눈길 가는 곳이 있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출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느지막히 점심 겸 저녁을 해 먹고 그 곳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과 대화라도 나눌 수 있게되면 만족할 터였다.
땀은 나지않지만 호흡을 조절하여도 피로감이 계속 따른다.
뱀사골에 도착하니 두 시가 채 되지 않았다. 선선히 오른듯한데,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노고단에서 먼저 넘어와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기다리던 여자가 있어 대화를 나누니 같은 열차를 타고 구례와 남원에서 내린 것 뿐이다. 차를 끓여 같이 마시며 일행이 올때까지
기다렸다.
'연하천까지 가기엔 충분한 시간이지만, 쉬고 싶다..어차피 그리 팍팍하지만은 않은 일정이다.'
오후 4시가 넘어서니 노고단에서 또 화엄사에서 산행을 시작한 사람들이 속속 산장에 들어오고 있다.
이곳은 취사장이 따로없어 일몰 이전에 식사를 해결하기로 하고 준비를 하니,
대구에서 오신 중년의 아저씨 두 분이 자신들의 것이 먼저 요리되었다며 같이 식사하자고 하신다. 아직 물이 끓기도 전인 코펠을 보며 호의를 받아들인다.
보온주로 준비했다던 보드카의 맛이 각별하다.
"삼일간 마셔야하는데.." 농담하시며 건네던 술잔이 취하기도전에 동이 나버렸다.
송구한 마음에 어쩌면 술 창고나 다름없을 베낭을 뒤지며,
여하튼 누군가와는 같이 마셨을 술과 미리 얼려온 보쌈을 녹이니 식사준비는 다 되었다.
안주거리도 충분하지만 3,4인용 싸이즈의 코펠하나로 재탕 삼탕의 과정을 거쳐 후식까지도 요리하시는 두 분의 모습이 놀랍다.
시베리아에서 사업을 하셨다는 두 친구분들은 동토의 혹한속에 적응하기위한 원주민들의 생활모습을 이야기 해 주시며 도수 높은 독주와 열량이 높은 요리는 필수라며 보고 배우라며 지켜만 보라고 하신다.
막사안으로 돌아와 랜턴 불빛아래서까지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해 주시던 고마운 이 분들은 31일날 천왕봉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 다소 불만스럽던 첫날 밤이다.
# ' 방장산(方丈山)이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 -두보의 詩중-
'고대 중국에서는 동해바다 건너 신선이 살고있는 신비경으로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을 꼽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지리를 따온 방장산이란 이름은 선계유람을 목적으로 하는 선인들이 자주 부르던 지리산의 또 다른 명칭이며, 조선 중기의 지리지인 산경표의 개념으로 백두대간의 실체를 거론했던 성리학자들은 백두에서 시작되어 지리에서 머문다라는 개념의 두류산(頭流山)이라는 명칭을 즐겨썼음을 유람기를 읽다보면 알 수가 있다.
문헌에는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3천동자를 배를 태워 보낸 곳이 이 곳 방장산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조의 성리학자들의 글만 보더라도 견문을 넓히기위한 유람의 대상지로 길면 3주이상씩 지리산에 머물렀던 성소(聖所)이고 보면 2박3일 혹은 3박4일의 완주를 목표로 두고 오르는 것은 우리네의 산행관이지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레이스를 펼치며 시,분,초를 다투고 정상에 오르는 정복의 희열을 바라는 것은,
자연을 친화와 자기정화의 매개로 삼던 전통적인 사고관과는 사뭇 다르다고 밖에 말할 수없다, 방장산이라는 또다른 명칭도 권토중래와 개혁을 꿈꾸다 신선들이 노닌다는 이상세계로의 귀의를 하려던 자들에게 자주 불리던 이름으로 보아 지리산은 히말라야 너머 있다는 우리 민족의 샹그리라가 되어왔던 곳이라 말하면 무리일까?
나는 지리적 개념의 두류라는 이름보다 방장산이라는 이름을 애호한다.'
잠을 미덕일 수도 있다고 믿는 나이지만, 산 중에서의 수면은 깊이가지 못한다.
어두운 막사안에서 켠 랜턴 불빛이 고이 잠든 누군가의 수면을 방해할세라
조용히 나와본다.
허술히 차려입고 나온 옷매무새로 슬슬 추위를 느낄 때쯤 뒤 따라나온 거구의 사내가
며칠 전의 올라갔다온 덕유산의 설경을 말해준다.
하산하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삭발까지한 이 사내는 자신이 본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하며 25일 대설주의보 이후 눈이 내리지 않은 이 곳의 기상이 조금은 마땅치 않은 모양이다..나 역시 밝은 별빛을 바라보며, '기설제'라도 드리면 어떨까 하고 물어본다.
29일 오전 7시 아직 어두운데 산장안은 일찍 떠나려는 사람들로 부산하다.
같이 일어날까도 싶지만 바쁠 것 없는 나는 서두르면 손해라는 생각이 든다.
침낭안에서 뒤척이다 식사를 마치고 산장아저씨와 단 둘이 남아 원두커피를 끓여 마신후에야 출발하니 오전 10시경이다.
마지막 출발자와는 30분 간격이니 호젓한 산행이 될 수 있을거란 기분이 든다.
잠을 못 잔 전날에 비해 몸상태가 매우 좋다. 이게 다 늦잠 덕이다.
화개재에 오르는 계단에서 숨도 차지 않은건 이번 산행이 처음이지 싶다.
무엇보다 기분좋은 건 거슬러 오는 산행자만 없다면 산과 나뿐이라는 사실이다.
눈 밟는 소리와 바람..그리고 숨소리만 들릴 것이다.
# 仁者樂山 智者樂水(지혜를 구하는 자는 물가를 좋아하고..)
며칠간 눈이 내리지않아 공원 관리인들의 눈만 피한다면 야간산행도 무리없을 듯 싶다.햇살마저 포근하여 나목림(裸木林)의 설화(雪花)를 구경하기엔 좀 더 고지대로 옮겨가야 할 것같다.
조금은 입고 입던 자켓이 답답해 진다.
'쌓인 눈을 밟는 소리와 숨소리만이 귓가에 청명히 들릴때쯤 작은 사심하나 존재할 수 없는 지극한 평온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적당한 육신의 자극은 정신을 맑게 한다고 했던가.
능선을 걷고 있다는 인식만으로 바랄 것 없는 충만을 맛보는 지금이 비로소 내가 산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을때다.
조금은 거칠게 토해내는 날숨을 통해 의식의 찌꺼기들이 몸 밖으로 배출되고 있다는 상상에
빠져본다.
능선 위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이미 과거가 된 죽어버린 시간들로 그 것들을 실어간다'.
언제부터인가 산을 오를 때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산 역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도 그 쯤이였던 것 같다.
산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울 수 있는 것이다.
잡다한 일상에서 파생됐을 의식과 감정의 불순물을 이미 비워버린 순결한 정신으로 산을 타고 있을 때 아무것도 밀어내지 아니하고 어떠한 형태의 생명이든 그 넉넉한 품으로 감싸안고 있는 산의 존재가 말없이 느껴진다.
어찌 오다보니 새 해 일출 산행이 되었지만 신년구상이니 다짐이니 하는 사욕들은 이 곳에서는 떠올리기도 민망하다.
돌아가는 기차안에서나 더 어울릴듯한 생각이다.
그저 걷다가 내 심장의 고동을 느껴보고, 또 몸을 식히는 바람에 사념만 실려 보낼수만 있어도 며칠간의 짧은 산행으로서는 대단히 성공적인 시도라 생각해 본다.
명상을 하던 참선을 하던 모든 수신(修身)의 목적이 탐.진.치의 수성(獸性)을 버리는데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몸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쉬어가기로 한다..
토끼봉이 눈 앞에 서있을 즈음, 바위에 걸터 앉아 사과를 먹고 있는 한 사내를 만난다.
# 중봉과 하봉(그의 필명이다.)
노고단에서 넘어온 사내는 힘들다며 사과 한 쪽을 건넨다.
조금 지쳐 보이긴 하지만 깡마른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가 나이를 쉽게 짐작하지 못하게 한다. 줄이면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처럼 까지도 보이는데, 하산하면 나이많은 아주머님들 많은 산악회에 들어가 약초 이름이나 배워야겠다고 다짐하는 말이 그 사내의 풍모와 썩 어울리는 듯 하여 잠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연하천에서 그 분과 같이 식사를 했다.
따로 준비 할 생각이였지만 꺼내는 쌀봉지마다 3인까지도 가능한 분량이다.
찌게는 내가 끓이지만 그 사람의 여유가 미소짓게 한다.
단독 산행이긴 하지만 애초에 홀로 식사 할 뜻이 없었나 보다.
베낭의 부피를 줄이고 싶은 생각에 끓는 물에 넣어도 될 만한 부식들과 먹을 것들을 꺼내어 놓는다.
좀 이른 점심이지만 먼저 와서 쉬고 있던 사람들을 불러 같이 식사를 했다.
29일 13시경
한참 떠들며 쉬어도 벽소령까지만 가기로 한 그 사람과의 일정은 급할 것이 없어,
해지기 전까지 거북이 산행을 하기로 한다.
차를 두 잔이나 마신 후에야 출발한다.
일행을 원한것도 가이드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기운을 차린 그는 지리산에 산재한 봉우리며 계곡, 사찰에 이르기 까지 아직 잘 모르고 있던 비경들을 설명해 준다.
독도법도 지형도 읽을 줄 아는 그는 체력이 회복되면 비정규 코스로의 산행을 시작 할 것이라 한다.
연신 "그래요?"하며 감탄만 하던 충남.북일대의 산행에 대한 경험담은 내가 오른 코스들과는 전혀 반대의 설정들이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예를 들면 계룡산에 대한 산행만 관한 그의 말이 걸작이다.
"해발 800도 안되는 그 산이 영산(靈山)인 이유가 분명히 있겠죠."하며 시작되는 비정규 코스에 대한 이야기는 손이 시립지만 않다면 수첩에 적어놓고 싶을 정도의 것이였다.
벽소령 산장이 눈에 들어오기 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다.
산장에 짐을 풀기엔 이른 시간이라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조금씩 어둠이 밀려오지만 대화를 끊기에는 그리 추운 날씨가 아니다.
새해 일출을 보러 온 산행자들로 장터목 산장의 31일 예약은 물론이고 아직 반 밖에 오지 않은 벽소령에서도 예약자의 정황을 살펴야 할 정도였다.
비박을 하던, 산장에서 선잠을 자던 개의치 않을 산행이였지만, 공원 직원의 눈을 피해 비정규 코스로 산행을 하던 이 사람도 예약문화와 삶의 질과는 관계를 두고 싶지 아니하는 사람이였던가 보다.
날은 이미 저물고 아직 배낭엔 마지막 날 저녁에 마실 와인 한병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운 저녁이다.
종일 이야기를 하느라 입이 메마른 탓인가...와인 한 모금이 밑에서의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옆자리의 홀로 오신 다른 산행자들에게도 권하니 드신 후의 표정이 너무 좋아보이신다.
한 병 더 없느냐는 얘기에 나 역시 한 모금 밖에 마시지 못한 사실이 무척 아쉬웠다.
하지만 준비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다. 그 맛도 각별했거니와 일행들과 합류하지 못해 남은 여분의 산장표와 장터목 산장의 것도 주신다길래 천왕봉까지는 오를 생각이지만 일출은 거슬러와 촛대봉에서 맞이 할거라 하니 또다른 이가 세석산장의 예약표까지 주신다고 하신다.
벽소령의 야경이 만월은 아니였지만 이미 나의 마음에는 달빛이 환하게 비추이고 있었다.
엽서라도 쓰고 싶은 밤이다.
23시경 옷을 추스리고 산장 밖으로 나와본다.
#벽소야월
"아득한 숲 뒤의 봉우리 위에 만월이 떠오르면
극한의 달빛이 천지에 부스러지는 찬란한 고요는
벽소령이 아니면 볼 수 없다" -시인 고은-
'벽소령 산장은 지리산에 산재한 국립 산장중에 가장 애정을 가지는 산장이다.
산장의 공원직원을 부러워 했던 적도, 국립공원 직원이 될 까 생각이 머문적도
이곳의 만월을 보고 난 이후이 일이다.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이문열의 소설중에, 눈내린 창수령의 고갯길을 넘어가며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고 묘사한 과정이 기억이 난다.
서술형의 문체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사실에 괴리감을 느낄 정도의 미문이라 그 부분만 몇 번을 반복해서 읽을 정도였고 이 곳의 만월을 본 적이 있기까지는 느껴보고 싶던 경험의 대상이였다.
우선은 지리산 일백십리 종주길의 중간에 위치한 점이 맘에 든다.
<천왕봉 일출>을 목적으로 코스를 짜면 축지법이 아닌 이상 어느 지역에서 오르던 1박2일 정도의 짧은 산행계획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하루의 시간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만월을 보기 위해서라면 달력도 살피는 수고가 필요하고 어느면에선 천왕봉 일출을 보는 것이 더 쉬울 수가 있다.
야행성인 사람이라도 놓쳐가기 쉬운 위치라는 것, 그리고 앞뒤로 탁 트인 능선위에 자리잡아 사람들만 많지 않다면 선계라도 온 듯한 느낌에 들 것이다.
아름답지만 포근하지 아니하고, 포근하지만 아름답지 못한 공허감을 메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야경이다.
이 곳의 만월을 처음 보게 되었을땐 밤하늘을 올려다 보는 사람의 뒷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질 지경이였던 것 같다.
일전에 이 곳의 야경을 시 로 써 본 적이 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잠시 그 때의 기분을 회상하고 싶어 책장을 뒤져 보지만 찾기가 힘들다.
# 통천문
12월31일 04:00
천왕봉까지 오르고 다시 세석으로 돌아와야 하는 나에겐 다소 벅찬 일정이라 조금 서둘러 산행을 하기로 한다.
식사를 마치고 옷 매무새를 추스리니 오전 다섯시다.
전일 같이 산행을 하던 그 사람도 장터목까지만 가는 일정이지만 함께 한다.
영신봉에서 일출을 찍으려는 사진작가분도 동행하신다.
'처음 지리산을 마음속에 품게 된 계기는 열 일곱때였던 것 같다.
학원강사가 읽어보라며 건네신 책이 검은 바탕에 판화로 산이 새겨진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다.
빨치산의 근거지로 묘사된 지리산에서의 그들의 생활들은 그저 김범우나 염상진 등 가상의 인물에 대한 막연한 매력보단 이현상 부대라는 실제인물들에 대한 동정과 호기심이 더욱 강하였고, 그들이 얼어죽고 굶어 죽고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진 것도 지리산에서 였기 때문이다. 좀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뒤 만나게 된 자전소설 이태의 <남부군>을 읽게 되었을 땐 때론 패자의 명예가 승자의 환희보다 더욱 비중있게 기록되어야 함을 다짐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들을 품에 안고 그들이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던 곳이 지리산이였기 때문이다.'
헤드랜턴의 불을 끄고 동행한 이의 경험으론 한 번도 언 적이 없었다는 선비샘에서 목을 축일 때쯤 베낭 끈에 걸어두었던 고글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두른 산행탓에, 잠시 쉬었던 곳에 되돌았다 오기엔 충분한 시간이였지만 망설여진다.
한 해에 몇번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지만 애착이 가는지라 또 눈밭이라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세석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발길을 되돌려 본다.
괜한 짓이라는 생각이 자꾸들지만 쉬이 썩을 물건도 아니였다.
서두르는 걸음에 숨이 차오를 때마다 잠시 시험에 들었다는 느낌이 자꾸든다.
다시 발길을 되돌리는 것과 되돌릴 길을 걸었다는 것과 그냥 가던길을 계속갔을 상황의 의미가 잠시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한다.
30여분 가까이 다시 되돌아 갔다가 올라오는 부부산행자의 모습을 보고 오시는 길에 보지 못하였느냐고 묻고 나서야 시험이 끝났다.
먼저간 일행과는 그들이 선선히 갔더라도 한 시간이상이 거리다.
그들이 가만히 앉아 기다리지 않는다면 쫒기 힘든 거리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산행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되려 마음이 한결 가볍다.
잠시 바위에 앉는다. 어느새 부부산행자들과 함께 있다.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벽소령에서 일박하고 오신다는 40대 중년부부의 모습이 놀랍다는 생각이다. 페이스를 못맞출 빠른 속도다.
그분들이 몇 번의 마라톤 완주경험이 있다는 사실은 세석에서 때이른 점심을 해 먹을 즈음이다.
잠시 하던 생각을 좀 더 붙잡기로 하고 혼자 앉아 있었다.
벌써 허기가 진다.
'언젠가 게릴라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체 게바라의 평전이 서점가의 사회과학 부분 베스트 셀러에 오른적이 있었다.
여름이였던 것 같은 기억은 또래의 청년들이 하얀 면 티셔츠 위에 그의 초상화를 새기고 다녔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몇 번이나 손에들다 망설이며 놓은 것은 이현상 이라는 남한 빨치산 총수에 대해 좀 더 알고 시작해도 좋을 듯 싶어서였다.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언제 나의 마음 속에 조국이 떠난적이 있었던가
가슴엔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이현상의 시 중-
이태의 <남부군>을 보면 이현상 부대의 족적들이 논픽션으로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국회의원까지 지낸 저자는 기자의 신분으로 이현상 부대에 합류했다고 한다.
산중에서의 그들의 삶은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면 얼어죽어 있고 굶어죽고 총에 맞아 죽어서이다.
한밤 중이라도 능선을 걸으면 발각되기 쉬어 늘 8부능선 쯤을 택하여 다니느라 발들이 산짐승처럼 비틀어져 있고 남과 북 모두의 체제에 버림받아 근거지도 주민들의 협력도, 보급도 없었을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초와 슬픔은 한번 쯤은 지리산을 오를 사람이라면 그들이
품던 이상(理想)에 관계없이 원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49년부터 5년동안의 정규군과의 교전횟수만도 수천 회요, 그 곳에서 죽어간 부대원들만 1만여명 이라고 한다. 그들이 부딪쳤을 두려움과 번민들은 사르트르에 의해 "21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칭하던 체 게바라의 것과는 비교자체가 무리이다.
역사가 승자만의 기록이 아닌 패배자의 비통함도 같은 비중으로 다룰수 있을 때 소모적인 무고한 희생의 전쟁을 피 할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이름이 체 게바라의 명성에 묻혀 갈때쯤 이현상의 생가가 있는 금산에 사는 그를 기억하는 연로하신 분들은 그 분을 아직도 "선생님"이나 "어르신"의 호칭으로 부른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앞서가시던 부부산행자의 걸음들이 매우 경쾌하다.
세석에 도착하니 먼저간 일행들도 반겨준다.
"잠시 시험에 들었던듯 해요."
"어떤거요?"
"오면서 내내 한 생각만 정리되더군요..이미 소멸했을 시간과 공간으로 다시 뛰어들겠다는
판단은 집착이라는 케케묵은 감정이 유혹하는 몽환이라는 거죠. 살아있는 자는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성취해 나가기에 몰두해야겠죠.."
"점심을 먹기엔 어중간 하지만 허기가 지니 먹고 가도록 하죠..아직 해가 많이 남았네요"
비슷한 시간 도착한 부부산행자들이 간식을 주신다.
오면서 보니 걸음들이 경쾌하여 비결을 여쭈니 매일 조깅을 하신단다.
젊으셔서 8000m급 히말라야 고봉에도 오르셨다는 아저씨는 내 나이때는 100kg씩 짊어지고 산만 다니셨다고 한다.
그 때는 산행만이 다음 산행을 위한 체력관리에 도움이 되시는 줄 알았지만 지금은 담배도 끊으시고 두 분이 매일 15km씩 조깅을 하신다며 두 분다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신다는 얘기는 런닝머신 위에서 아주 적당한 속도(?)로 대단한 각오(?)를 해야 1시간을 겨우 채우는 나에게는 경이로운 이야기다.
식사를 마치고, 천왕봉에 올랐다 다시 내려올 생각을 하니 좀 서두르고 싶어진다.
아주머님이 부산에 올 일 있으면 작업실에 들리시라며 연락처를 주신다.
바닷가에 있다는 얘기에 혹시 화가시냐고 넘겨 짚어보니 그러하시단다.
바다와 작업실에 쌓였을 그림들을 생각해 보니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어
"어! 저는 진짜로 찾아 갈지도 모르는데요. 하산하면 꼭 먼저 연락드릴께요." 넉살 좋게 인사를 드리고 나선다. 성함을 아니 전시회라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 통천문 그리고 천왕봉
31일 13시
세석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부근에 운해가 빠르게 밀려다닌다.
날도 습해지고 바람도 좀 불어오는 것이 기설제라도 드리고 싶었던 마음을 안것일까..
아직까지는 신설(新雪)로 새롭게 만들어질 설경을 보지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다.
'청학동 어느 밑자락에 자연학교인가 찻집을 운영한다던가 가물거리지만 <하얀능선위에 서면>이라는 산행기를 쓴 남난희씨라는 산악인이 살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30여일간의 동계단독종주를 한 최초의 여성산악인인데 그 경험을 여성적인 느낌으로 잘
묘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진부령에선가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하여
초췌한 모습으로 서서 울고있던 당시에는 처녀였을 사진이 무척이나 인상깊었다. 아마 안아주고 싶다는 느낌이였던 것 같다.'
아직 하산 코스를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런 생각도 자유롭게 한다.
14시40분
장터목에 도착하니 운해가 더 가까이에 느껴진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새해 일출을 보려는 산행자들로 밖에 까지 부산하다. 산장안으로 들어갈까 하다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바로 오르기 시작한다.
일몰까지의 시간도 얼마남지 않았지만 다시 세석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서두르고 싶다.
이곳부터는 설화를 구경할 수가 있었다.
'설화는 눈과 바람이라는 자연의 조화가 빚어내는 조소이다.
눈발을 머금은 차갑고 습도높은 안개가 혹한 속에서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을 본 적이 있다면 겨울산행을 선호하는 목적도 될 법하다.
잠시동안의 햇살로 녹다 만 얼음의 결정위에 또 다른 결정을 지닌 눈발이 결합하여 얼기를 반복하고 자세히 보면 모양이 다 틀린 것은 수많은 결정체의 모습때문이라 한다.'
천왕봉에 이를수록 운해가 머금고 있던 눈발의 양도 많아진다..
어느덧 구름 속을 걸어가고 있다.
조금 숨이 차다. 표적지에 적힌 음각이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비롯되다"였는지 "발원되다"였던지 헷갈린다.
통천문을 지나며 귀천 이라는 시를 소리없이 낭송해 본다.
하늘로 통하는 문과 그 곳으로 돌아가겠다던 천상병 시인의 의지와 "좁은 문"이라던 예수의 메세지, 사막으로 나가야 했던 서양의 교부들과 산으로 들어와야 했던 수도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엉키고 있다.
여기부터는 이미 구름위에 떠 다니는 시점이다.
천왕봉에 오르니 첫 날 뱀사골 산장에서 만났던 두분이 계셨다.
반나절 정도의 차이로 계속 만나지 못하여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천왕봉에서 가장 혼자 서있기 좋은 곳에 배낭 하나가 놓여져 있다.
누구의 것일까 생각하며 소일하니 10여 미터 아래의 텐트 주인의 것이다.
길고 하얀 수염을 기르신 연로하신 분의 의지가 무엇이든지 영 마땅치않다는 생각이 든다.텐트를 치고 밤을 보내시겠다는 의지조차 이유를 짐작할 수없게 한다.
같이 오르던 사진작가 분이 사진을 두 장 찍어주셨다.
꼭 보내주신다고 연락처를 적어 달라는 친절에 감사를 드린다.
표적지에 적힌 글씨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였다.
언젠가 이 글귀가 바뀔 것이라고 믿어본다. 산세의 형태로만 보아도 멀리는 중국의 곤륜산 더 멀리는 히말라야의 산들로 뻗어나오고 굳이 영토와 민족의 개념에 국한시키더라도 백두산에서나 어울릴 듯한 글귀이다. 차라리 "한국인의 기상이 발화(꽃 피는 곳)하는 곳"이나 "쉬어가는 곳"정도의 글귀로 바꾸면 좋을 듯 싶다.
서쪽 암벽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천주(天住)라는 음각글자가 더 맘에 와 닿는다.
'이태전의 산행에서 같이 오른 지일 형은 그 날 아침 향을 피우고 있었다.
기원인지 발원인지 모를 기도였지만 끝내 묻지 않고 하산하였다.
내려가면 따스한 정종 한 대포라도 나누며 물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15시50분경 장터목으로 다시 내려왔다. 추워서 잠시 쉬고 가야겠다.
두달전 동창모임에서 새해맞이 일출을 보러오겠다던 가시내의 이야기도 얼핏 떠 올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장안으로 들어간다.
2박3일간의 산행중에 앞서거니하며 만났던 사람들이 모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천왕봉 일출을 보려는 이들은 이 곳이 목적지다.
그간의 산행중에 말동무도 길동무도 되어준 그들에게 감사하고 싶어 인사를 드리니, 벽소령 산장의 표를 주신 어르신이 자네 것이라며 플라스틱 병에 담긴 양주를 꺼내신다.
아직 갈 길이 남았지만 안 마시는 것도 결례인 듯 싶어 두어 잔 술잔이 돌아가니 이 곳에서
자고가고 싶다는 생각이다. 몹시 피곤하다.
17시경..어두워 오지만 보온주(?) 덕에 차가운 바람마저 살갗게 느껴진다.
며칠동안 얼굴에 물을 묻힌적도 없어 되려 상쾌하다.
이쯤이야 하며 들여보낸 알콜이 시비를 걸고 있다.다리가 좀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 멀지 않은 길이지만 어둠이 이미 내려앉아 걸음이 좀 빨라진다.
거친 숨 좀 몰아쉬니 세석산장의 불빛이 보이는 촛대봉에 이르렀고,
쉬고 싶은 생각에 바위위에 잠시 누웠다.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가도 될 평이한 내리막 길이라는 우스운 생각이 들자 아예 눈까지 감아본다. 얼굴을 할퀴며 지나가는 바람이 다시 차갑게 느껴질 때쯤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별 하나의 영가(詠歌)
'늘 뿌옇게 흐린 밤 하늘만 바라봐야했던 서울 촌놈이 별자리를 헤고 고개를 들어보게 된 것은 순전히 억압(?)을 당하고 있을 때 부터였다.
가기 싫어 친구들 보다 먼저 갔던 논산 훈련소의 밤 하늘은 불편하고 불만 가득한 가짓수 만큼보다 더 많은 위로로 다가오던 유일한 말동무였다..
자대를 배치 받고 제대를 하는 그 날까지 보초를 나가면 잠을 재우는건 부사수고 나는 늘 고개를 들고 있었다. 철책 근무가 아니라서 귀만 열어두고 있어도 되는 상황도 그러한 일들을 가능하게 했지만 덕 분에 2년 남짓한 세월동안 본 유성의 수만도 지금 나이의 배는 될 것이요, 유성이 타들어 가는 소리까지 머리 위에서 들었을땐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질려나 하던 막연한 두려움이 들던 것도 그 무렵이였던 것 같다.'
21시경 오늘 밤도 어김없이 두 개의 유성을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유성의 밝기나 크기를 나름대로 상중하급으로 나누자면 중급은 될 만하다. 무엇보다 옆에서서 같이 하늘을 보던 사람들에게 두시간만 이렇게 떨고 있으면 볼 수 있을 거라고 건넨 어처구니없는 장담도 20여분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기뻤다.
23시 30분경 잠시 누워있다, 새해를 맞이하러 나온다.
바랄게 없다는 것도 조금은 심심한 일이다. 그냥 잠들기에도 무언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정이 지날때까지 서 있기만 하다 들어온다.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빌어 올 행복이면 그것도 심심하지 않은가..
#.2003년 1월1일
06시30분경 세석에서 촛대봉까지는 15분가량이면 오를수 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장터목 산장엔 어제 오후3시경 쯤에도 사람이 가득했는데, 세석은 그 곳만큼 많지는 않아
여유가 좀 있었다. 눈을 감고 기대앉아 다리를 주물렀다.
내 다리를 내가 주무르는 것은 하나도 시원치 않다..
베낭을 놓은 채 스틱에 의지하고 산장 밖으로 나왔다. 아직 어둡지만 이미 대부분 올라가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해 잠시 망설이다 다시 풀리겠지 생각하며 조금 힘들게 올라갔다.
더디게 올라서인지 타이밍은 절묘하게 잘 맞았다. 떨며 기다릴 것도 없이 바위 위에 올라서니 일출시작이다. 환호성도 여기 저기에서 터지기 시작한다.
일출 뒷편의 운해도 장관이였다. 구름의 양도 풍부했지만 풍속이 제법 빨라 움직임이 다이내믹하다. 몸을 비틀어 여기저기 쳐다봐도 감동적인 장관이다. 성능좋은 카메라가 있었다면 연속촬영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 슬슬 눈보라도 불어오고 비로소 겨울산에 왔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사진을 찍어 달라기에 장갑까지 벗고 기꺼이 찍어준다. 멋지게 나올거라는 확신도 건넸다.
사람들이 하나둘 천왕봉으로 세석으로 발길을 옮긴다. 좀 더 여운을 느끼고 싶다.
# 촛대봉 일출을 보며
기다린 것은 저희만이 아닙니다
밤사이
멎지 않은 대지의 생명들
신 새벽부터 나와 기다리던 우리는
구름너머 보이는 님의 그리움입니다
서서히 운해 너머
밝아오는 님의 포옹에 눈을 감고
다짐해 봅니다.
사랑하는 것은 님만이 아닙니다
밤사이
님을 그리던 대지의 생명들
이른 새벽부터 나와 기다리던 우리는
구름너머 가고 싶은 반가운 미소입니다
운해너머 붉게 드리운 님의 사랑에
속삭여 봅니다
보여주고 싶던 것은 님의 사랑만은 아닙니다. - 졸작 시-
혹시 소망이라도 빌 것이 있나 마음을 살펴보니 없다.
그래도 좀 밋밋하기에 빌것이 없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전날 밤 천왕봉 일출을 보러 갈 거라고 함께 별을 보던 산행자들이 이 곳에 있어, 반가운 마음에 아는척하니, 불러도 대답이 없더란다. 참 예쁘게 사는 사람들이다.
새해인사를 건네고 산장으로 내려왔다.
눈발이 제법 굵어진다. 아침식사를 하고 진통제를 먹었다. 산장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구한건데 약효가 빠르다. 언제까지 내려 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기설제도 이루어지고,
하산길이 그리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석에서 백무동으로 가는 길도 초행길이니 다리아픈 것은 지나간 일이다.
# 세석에서 내려가는 백무동
11시경 하산을 시작한다. 세석에서 내려가는 백무동 계곡은 장터목에서 내려가던 코스와는 또다른 느낌이다. 겨울이라 수량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그 곳보다 깊다는 느낌이 든다.
우선 시야가 트여 산기슭을 걷는 답답함이 없다.
곳곳에 눈길을 두고 걸음을 멈출만한 곳도 많다. 어느 소(沼)에선가는 거북이를 닮아 보이던 큰 바위가 있어 하산 중에 만난 일행에게 '거북바위'라고 농담을 건네니 정말인줄 아시길래,
어쩌면 거북바위라 불릴지도 모르겠다고 정정을 해 드린다.
하산 길은 오르는 길보다는 시야가 좁아지지만 이 곳은 눈길 가는 곳이 많고 사람들도 적어 자주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백무동 계곡으로 하산 할 일이 있으면 늘 다니던 장터목 코스보다는 이 곳을 권해보고 싶다. 천왕봉에서는 좀 거슬러 내려와야 하지만 합류하기 전까지의 산세는 전혀다른 느낌이다.
눈발이 멈추었다는 사실을 잊고 내려오니 사람들이 많아진다.
오후3시경..계곡 주차장 테이블 위에서 베낭을 다시 정리한다. 옆에 계시던 나이 드신 분에게 인사를 드리니, 천왕봉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고 한다.
이미 구급헬기도 한 대 떠올랐고 주차장에서 대기하셨을 대원들도 들 것을 메고 계곡으로 서둘러 올라가고 있다. 공무원들이지만 성인(聖人)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지 싶다.
어느덧 다시 평지를 걷고 있는 편한 걸음이지만, 마음은 아직 산에 걸어두고 있다.
에필로그
맥주의 첫잔은 단 숨에 들이켜야 술이 아니라 맥주를 마시는 것 같다.
오이 속을 파내어 술잔을 만들고 사과 속을 파내어 사과주라 생각하며 마신다던 이야기도
이번 산행중에 처음 들어본 얘기이다. 평범한 일상속에 평범하게 보이던 사람들도 그 곳에서는 산 처럼 매력있는 대상으로 다가온다. 사람이 품고있는 생각과 취향과 사고의 방법들은 일상에서의 짐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다양함으로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자신의 체험과 포용이 삶의 충실여부를 판가름나게 한다면
무리일까..고대 인도의 철학에서는 삶을 고행으로 받아들이는 자와 여행으로 받아들이는 자로 나눈다고 한다. 늘 치열해 보이는 그대의 모습이 좋아 보이던 것은 이 모든 삶의 과정들이 어느 순간엔 후자의 모습으로 서있을 상상을 해 보기 때문이다.
미래도 너무 기대하지 않기를 바래본다..짐작컨데 모든 깨달음의 형태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것이다..어린 아이도 이마에 깊게 주름이 패인 노인도 참다운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삶의 목적에 충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글을 적으며 내내 히말라야의 어느 롯지에서 그대에게 엽서 한 통 날리고 있을 한량의
모습이 떠오른다. 거대한 산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는 저녁 노을을 보며 한 손엔 찌그러진 캔맥주를 들고 더없음이 아쉬워 노래하며 나이 서른을 맞이하는 나의 모습이..
어찌됐든 약속을 지켰으니 대포 한잔의 몫은 그대가 치루어주기를...
산행중에 만난 어떤 사람이 얘기해 주더구나..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혼자 오르는 것이 좋다. '라고..볶던지 삶던지 술안주로 준비해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