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의 땅 전주
전주교구의 천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1784년 가을, 전주의 토호(土豪)이며 양반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경기도 양근의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동생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대부로 삼아 교리를 배웠다.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향하여 호남 지방의 첫 사도가 되었다. 그리고 1784년 겨울에는 진산의 양반인 윤지충이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입교하고,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이 지방의 천주교는 전주와 진산(현 충남)을 중심으로 뿌리내려 갔다. 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박해(신해, 신유, 정해, 기해, 병인 등) 때마다 희생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전주 지방은 순교의 땅이 되었다.
전주교구는 1791년 박해 이후 일찍이 교우촌(敎友村)이 형성되었으며, 신유박해(1801년) 이후 정국이 평온해지자 전국의 신자들은 전라도를 피난처로 삼아 모여들었다. 특히 병인박해(1866~1868년)를 전후하여 전국에서 피난해 온 신자들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이 고장 곳곳에 형성되었다. 이들은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부모’로 인식하며 살았고, 그 삶은 가히 ‘수도자적 믿음 살이’라 하겠다. 또 ‘나눔’의 삶, 사람 대접받는 ‘신명나는 공동체’형성, ‘말씀’에 맛 들이는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
전주교구 순교자들 중 병인박해 때(1866년)순교한 정문호, 조화서, 손선지, 이명서, 한재권, 정원지, 조윤호 등 일곱 분이 1984년에 성인품에 올랐으며, 신해박해(1791년) 때 순교한 윤지충과 권상연, 신유박해 (1801년)때 순교한 유항검과 유중철, 이순이 등 다섯 분을 포함한 박해시대 순교자 24위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자로 선포했다.
이 글은 전주교구 홈페이지와 paxkorea. kr 의 기록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2. 전동성당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성지 전동성당
주소 55044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1
전화 063) 284-3222
홈페이지 http://www.jeondong.or.kr
전동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남문 밖, 현 전동성당 자리는 신해박해(1791)때,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던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곳이고, 또 ‘호남의 사도’로 불렸던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
전동본당의 초대 주임신부는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였다. 1889년 전주 본당이 설립되고 보두네 신부가 부임했지만, 당시 전주에는 신자가 한 명도 없어 처음에는 완주 소양 대승리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9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고,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했으며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했다. 보두네 신부를 통해 이곳에 성당이 건립된 일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보두네 신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서려 있을 법한 전주성 성벽의 돌과 흙으로 주춧돌을 세웠는데, 바로 그곳이 순교터였기 때문이다.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써 사적 제 288호 이고 사제관은 도지정 문화재 자료 178호이다.
전동성당 자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적으로 출중한 순교자를 낳은 순교지 가운데 한 곳이다. 특히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현 전동 본당 자리)에서 관장의 배교 권유와 회유를 단호히 거부하고 당당히 천주교가 진리의 종교임을 밝히면서 처형되었다.
신유박해 때인 1801년 9월 17일에는 전라도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하느님의 종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아우 유관검(柳觀儉, 1768~1801, 세례명 미상), 윤지헌(尹持憲, 1764~1801, 프란치스코)이 능지처참 형을 당하였고, 김유산(金有山, 1760~1801, 토마스)과 이우집(李宇集, 1762~1801, 세례명 미상)은 참수형을 당하였다. 특히 유항검의 목을 풍남문 누각에 매달아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하였으니, 현 전동 성당터는 이들의 피가 서린 곳이다.
1889년 봄, 경상도 지역에서 사목하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 - 1915,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전주로 부임하였으나 당시 전주에는 감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주 부중에 신자가 한 명도 없어 배경집 베드로 회장의 안내로 우선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일명 대승리)에 정착하여 전주 이외의 북쪽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것이 전주 본당, 즉 전동성당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보두네 신부는 본당의 장래를 위해 인구가 많은 전주 부중으로 본당을 이전하기 위해 노력하여 1891년 6월 23일에 전주 남문 밖에 있는 구례 영저리(營低吏) 집을 매입하였다. 대성동에서 전주 부중으로 본당을 이전한 보두네 신부는 연령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에야 현재의 자리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하고, 전교를 시작하여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되었다. 전동 성당은 1908년 보두네 신부가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914년에야 우여곡절 끝에 외형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주춧돌은 1909년 7월 전주부의 허가를 얻어 남문 밖 성벽의 돌을 가져다 썼다.
이로써 1791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현장을, 또 1801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의 능지처참과 참수를 지켜보았던 그 성곽의 돌들이 하느님 성전 건립의 주춧돌로 사용된 것이다. 1937년 한국 교회 최초의 자치 교구로 전주교구가 설정되고 전동성당은 주교좌성당(1937~1957)이 되었다.
1957년 주교좌성당이 중앙 성당으로 바뀌기 전까지 전동성당은 전주교구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던 본당답게 교구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성장했다.
■ 순교자
◆ 복자 윤지충 바오로 (1759∼1791년)
윤지충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그의 아우이다. 본래 총명한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고종 사촌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1787년 인척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이종 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자주 왕래하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바오로는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즉 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듣고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조정에 보고하여 처형의 윤허를 받았다.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바오로와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복자 권상연 야고보 (1751∼1791년)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 사촌 윤지충 바오로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이후 그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 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고모(즉 윤지충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는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체포령이 내려져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각각 피신하였으나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진산 군수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 감영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야고보와 윤지충을 옥에서 끌어내 형장으로 정해진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그는 이때 초죽음이 된 상태였지만 이따금 씩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형장에 이르자, 윤지충이 먼저 칼날을 받았다. 이어 야고보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
1754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다음 해에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 마태오는 그의 조카이다.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의 인척 권일신이었다. 이내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1786년 봄에 가성직 제도하에서 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에서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1764∼1801년)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1764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군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이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는 그의 형이다. 1791년에 형이 순교하자 그는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동료들과 함께 전주 감영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후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 그 외 전동성당에서 순교한 님들
○ 윤관검(34세) 유항검의 아우/전주 초남리 출신. 능지처참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 김유산 토마스 (41세) 북경 왕래 밀사/전라도 진잠 거주. 참수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 이우집(40세) 유관검과 친척/전라도 영광 사람. 참수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 찾아가는 길
주소 55044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