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국민치고 『아기공룡 둘리』 TV판을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날아라 슈퍼보드』를 TV에서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작품들을 TV에서 보았을 것이다. TV를 틀면 심심찮게 방영을 하고, 또 당연하다는 듯이 작품을 감상하고… 그런 경우가 반복되면서 많은 시청자들은 이 작품들을 ‘장기 방영 작품’으로 오해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실제로 ‘장기 방영 작품’일까?
정답을 이야기 하자면 ‘아니다’ 이다. 『아기공룡 둘리』는 전 13화, 『날아라 슈퍼보드』는 우리가 흔히 하는 첫 번째 시리즈가 전 15화로 주 1회 방영으로 계산하면 1/4분기면 끝이 나는 짧은 TV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머털도사』, 『떠돌이 까치』, 『독고탁』 등, 추억의 TV 애니메이션은 모두 단편 작품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추억의 TV 애니메이션은 단편이거나 단기 방영작인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의 애니메이션 역사는 짧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며, TV 애니메이션이 태동한지는 이제 겨우 20년 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40년 가까이 계속해서 방영되는 작품이 있는 일본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의 TV 애니메이션은 대개 짧다는 것이 일반 적인 평가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국 TV 애니메이션은 긴 작품이 없는 걸까. 우선 위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TV 애니메이션의 태생에서부터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1987년, 88올림픽을 앞두고 문화적인 저변 확대를 위해 시작된 TV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일단은 국산 애니메이션을 많이 방영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방영 시기에 개의치 않는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였다. 이현세의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떠돌이 까치』, 이두호의 『머털도사』, 이상무의 『독고탁』 등, 당시 인기리에 연재 중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초창기의 작품들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준하는 방영 시간으로 TV 애니메이션이라기 에는 짧디 짧은 작품들이었다. 그 시절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일본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26화가 넘는 장기 방영 작품들로 매주 2회씩 방영하면서 안방을 장악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 ‘단편 애니메이션’으로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장편 애니메이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87년 방영된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전 13화), 88년 방영된 이진주의 『달려라 하니』(전 13화), 허영만의 『날아라 슈퍼보드』 등, 1쿨(1/4분기, 보통 3개월 12, 13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들이 다수 등장하여 매주 잊지 않고 시청자들을 찾아가긴 했지만, 작품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아 몇 년이 안되어 재탕, 삼탕을 반복하게 되는 악순환을 연출하였다.
이런 상황은 90년대 중반이 넘어서까지 계속 이어져왔다. 명절이나 기념일이 되면 가끔 1회성 단편 특선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고, 편수가 13화가 넘는 TV 애니메이션은 정말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1회에 20분 분량의 일반 적인 애니메이션 포맷의 작품에 한해서, 이후 동일) 공중파는 매주 2~4회씩 방영하는 일본 작품들이 대거 방영되었고, 거기에 케이블TV의 개국으로 인해, 한국 TV 애니메이션의 설자리는 점점 줄어만 갔다. 적은 편수의 작품을 고집해 왔던 것과, 많은 작품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 TV 애니메이션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의 TV 애니메이션은 장편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이 많다. 국민 애니메이션이라 불리는 『사자에씨』는 1969년 방영을 시작하여 38년 째 방영 중이며,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도라에몽』과 『짱구는 못말려』는 각각 79년, 92년부터 지금까지 방영 중이다. 그 외에도 『드래곤볼Z』나 『포켓몬스터』 등의 작품이 방영 중이거나 장기 방영되었다. 이런 애니메이션은 모두 모든 연령층에게 지지를 얻고 있는 이른바 ‘가족 애니메이션’이며, 『사자에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끈 작품인 것이다.
이런 장기 방영 애니메이션은 공통적인 특징이 존재한다. 바로 ‘캐릭터성’이 뚜렷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작품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가 최고로 부각되면서, 그 매력이 극에 달한 것이 바로 작품의 장수로 이어지기 때문에 『짱구는 못말려』, 『도라에몽』, 『포켓몬스터』, 이 세 작품만 보더라도 왜 장편 애니메이션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을 보면, 한국의 TV 애니메이션도 충분히 장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아기공룡 둘리』만 하더라도, 원작 만화가 10년 가까이 연재된 작품으로 원작 에피소드 만으로도 몇 년은 끌고 갈 수 있는 작품이었다. 비록 87년 당시가 아니더라도, 90년대부터 이미 둘리의 네임밸류는 굉장했기 때문에 『날아라 슈퍼보드』처럼 2기를 늦게라도 냈다면 좀 더 많은 시청자들에게 각인이 되었을 텐데, 둘리나라에서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선택했던 것이다. 원작 만화의 분량을 생각하면 굉장히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 비해, 『날아라 슈퍼보드』는 1990년 1기 시리즈가 방영된 뒤, 약간의 공백을 두면서 5기 시리즈까지 방영되었다. 특히 2기는 「아이큐 점프(현, 격주간 점프)」에 연재 중이던 『슈퍼보드 2부』와 비슷한 시기에 방영되어 만화와 애니메이션 양쪽으로 색다른 슈퍼보드를 즐길 수 있기도 하였다. (캐릭터의 해석과 결말 등이 상당히 달랐음)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TV 애니메이션 시장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13화 분량으로 끝이 나버리고, 그나마 남아 있던 좋은 원작 만화들은 90년대 중반 극장 애니메이션의 붐이 일어나면서 그쪽으로 소진되고 만다. (물론 작품의 시나리오 적인 면에서는 방대한 분량의 작품을 극장용으로 만든 탓에 높은 퀄리티를 내지는 못하였다)
그 후 지지부진하던 국산 TV 애니메이션은 90년대 후반 화려한 부활을 선언하게 되는데, MBC와 투니버스가 공동으로 제작한 『영혼기병 라젠카』가 그 주인공이었다. 다만, 이 작품도, 후속 방영작인 『바이오캅 윙고』도 13화로서 편수로는 지지부진 했지만, TV 애니메이션 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으면서 KBS, SBS도 다시금 TV 애니메이션에 전념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편수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KBS의 야심작 『
녹색전차 해모수
』의 뒤를 이은 『
레스톨 특수구조대
』, SBS의 『
트랙시티
』를 필두로 『
태권왕 강태풍
』, 『
스페이스 힙합덕
』, 『
사이버영혼 바스토프 레몬
』 등, 21세기에 들어서까지 제작된 대부분의 국산 TV 애니메이션이 전 26화 분량을 넘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공중파 애니메이션의 쇠락과 맞물리면서 짧은 편수로는 케이블 TV 시장에서도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인 것과, 시청자들의 높아진 눈을 충족시키기 위해 양질의 작품을 제작해야 한다는 제작사의 의식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지금까지 국산 TV 애니메이션은 점점 장기 시리즈로 변모하였고, 좀 더 오래 작품을 보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해진 것이다.
작품별 편수가 길어짐과 동시에 21세기에 들어서 국내에도 드디어 100편이 넘는 작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스튜디오 카브에서 제작한 『
나롱이 시리즈
』가 바로 그것. 원래 초능력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애니메이션 『
스피어즈
』와 일부 캐릭터를 공유하는 작품으로 제작된 『
뚜루뚜루뚜 나롱이
』는 캐릭터성과 가벼운 이야기로 1년간 방영된 작품이다. 국내 애니메이션에서 같은 캐릭터를 공유하는 다른 시리즈 작품이 제작된 것부터 매우 드문 일인데, 그 첫 작품이 52화 동안이나 방영된 것은 정말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롱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뚜루뚜루뚜 나롱이』에 이은 2번째 시리즈 『쾌걸롱맨 나롱이』로 또 다시 1년간 방영을 한 것. 그 덕분에 본편이라고 할 수 있는 『스피어즈』를 포함해 총 130화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 성장의 이면에는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국산 TV 애니메이션의 노하우와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나롱이』 시리즈 외에도, MBC의 『장금이의 꿈』이 2기 52화, 『검정 고무신』이 3기 52화가 방영되어 국산 TV 애니메이션의 수명이 점점 늘어나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일본의 장기 방영 중인 TV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캐릭터’를 강조한 작품으로 시청자들에게 쉽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롱이』, 『검정 고무신』도 바로 그런 ‘캐릭터’를 강조한 작품으로, 여러 캐릭터를 중심으로 자잘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방식인 것이다. 과거 한국 애니메이션에는 부족했던 그런 끈질긴 생명력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서야 채워진 것이다.
최근 『르브바하프왕국 재건설기』를 마친 스튜디오 카브는 『나롱이』 새 시리즈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나롱이』 시리즈의 공식 홈페이지는 2기 시리즈인 『쾌걸롱맨 나롱이』가 끝난 지 반 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업데이트가 이루어 지고 있어서 팬들과 제작자들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질 정도라서 3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또, 『장금이의 꿈』도 3기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국산 애니메이션의 장기 방영 기록은 계속 갱신 될 것으로 보인다.
특선 만화와 짧은 시리즈로 시작된 한국의 TV 애니메이션은 이제 성숙해진 시청자들과 물이 한껏 오른 제작사들로 인해 길고 질 좋은 작품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새 시리즈가 실제로 제작되어 완성되면 거의 180편을 넘게 될 『나롱이』 시리즈의 기록을 깨기 위해, 어떤 작품이 또 다른 캐릭터와 시나리오를 갖고 나설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제 한국도 10, 20년 동안 계속될 애니메이션이 나올 때가 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