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역사적 예수를 말해야 하는가? 2005-02-08
김준우 (감신대 초빙교수,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1. 적개심과 폭력의 제국주의적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수고하며 핍박받는 많은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외면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깝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최근에 교회가 사회적 비판의 초점이 되고 있는 이유는 정치나 경제는 민주화와 투명화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권력은 아직도 비민주적 상명하복의 구조와 독재의 온상으로 남아 있으며(최상천), 또한 탈권위주의 시대에 반발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이다. (참조: 한겨레 21, 342호, 2001/1/18, 536호, 2004/12/2).
'안티 기독교,' '안티 예수,' '안티 바이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 등 여러 반기독교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 사람들이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 이유들은 주로 기독교인들의 위선, 극우적인 목사들의 숭미적 태도, 불상훼손과 같은 오만불손한 행위들, 대형교회들의 세습,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공격적이며 배타주의적인 전도 행태 등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눅 6:31)는 말씀처럼,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로부터 그런 적대적 대접을 받는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이제까지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하였기 때문다. 예를 들어,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 노예제도와 유색인종들에 대한 정복과 학살은 말할 것도 없으며, 지난 연말에 수십 만 명이 희생된 쓰나미 재앙에 대해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그 재앙이 타종교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여 신문과 인터넷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 희생자들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그들은 천벌을 받아 죽었다는 말인데, 큰 슬픔에 잠긴 그 유가족들을 비롯해서 전세계의 비기독교인들이 이런 보도를 전해들었을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목사들조차 이처럼 하나님을 피에 굶주린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타종교인들에 대한 저주와 적개심을 드러내는 마당에, 비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기독교인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대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 희생을 복음의 핵심으로 가르치는 기독교가 이렇게 비기독교인 이웃들에 대해 저주와 적개심에 사로잡힌 종교로 둔갑하여, 역사상 종족학살을 가장 많이 저질러왔던 폭력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종교(김진호)가 된 신학적 이유는 무엇일까?
2.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적 의미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하며 선포해왔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며 삼위일체의 제2격으로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며, 언젠가 재림하여 세상을 심판할 분으로서, 그를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천당으로 인도하는 분이다. 이렇게 고백되는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역사뿐 아니라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
첫째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의식과 삶의 한계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하는 용기를 주어, 우리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구원하시는 분이다.
둘째로, 우리의 삶의 현실이 비록 냉혹하고 부조리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무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도적으로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세계라는 믿음을 통해, 절망 속에서도 우리의 삶의 의미를 긍정할 수 있게 해주는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셋째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도록 가르침으로써, 우리의 삶이 거룩함과 사랑의 측면에서 개인적인 완전주의적 윤리를 향해 나아가도록 도전하며 격려하는 분이다.
3.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적 문제점들
그러나 이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는 지난 18세기 계몽주의 이래로 과학적 세계관과 고등교육을 통해 비판정신을 배운 이들에게는 신앙적으로 여러 문제점들을 드러내게 되었다.
첫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동정녀 탄생과 부활승천과 같은 고대의 신화적인 언어들과 개념들, 세계관을 통해 고백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교리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서 지적인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즉 과학적 세계관과 특히 역사의식의 확산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화적 교리를 지적으로 정직하게 고백하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이런 과학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전근대적인 신화적 세계관을 문자주의적으로 고수함으로써, 지적인 정직성을 불신앙의 태도라고 간주한다.
전세계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서도 젊은 층과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교회를 가장 많이 이탈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세계관의 차이, 즉 성경이 기록된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과 현대의 과학적-역사적 세계관의 차이로 인한 "정신분열증"(로이드 기링) 때문이다. 개인의 신앙발달 과정에서 이런 분열증은 특히 비판적 사고방식을 통해 관습적 신앙단계에서 주체적-성찰적 단계로 넘어갈 때 흔히 겪게 된다(제임스 파울러).
둘째로, 사도신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잉태와 출생 다음에 곧바로 수난과 부활승천으로 이어져,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내용(알맹이)이 완전히 빠져 있으며, 그 모두가 수동태로 고백되어 있다는 사실(로버트 펑크)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일생을 선택하고 결단했다기보다는 마치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종당한 꼭두각시와 같은 모습이며, 예수의 이런 수동성은 기독교인들 역시 수동적이며 비자주적인 노예적 인간으로 만든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오늘날에는 그리스도 신화가 고대 지중해 연안에 널리 퍼져 있었던 오시리스-디오니소스라는 구원자 신화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티모시 프리크, 피너 갠디)이 알려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은 물론이며, 독특성과 진정성마저 도전 받게 되었다.
셋째로,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으로 고백되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는 부재(不在)하시는 분이 되어 그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임재와 성품을 정서적으로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종종 종교적인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려는 경향은 바로 이런 신학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4.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적 및 사회적 문제점들
이 교리적이며 신화적인 예수 그리스도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적인 위기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위기를 초래한다.
첫째로 신화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오늘날 현대인들이 지적으로 정직하게 고백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의 자기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신앙고백에서 정직하지 못하다는 말이며, 이런 비정직성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단지 입술로만 고백하도록 만들어 믿음과 생활의 불일치를 초래하며, 비주체적이며 비자주적인 인간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분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었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우리들 인간으로서는 질적으로 다른 그분을 본받을 수도 없으며,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본받을 필요도 없다는 문제가 생겨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처럼 신화적이며 전근대적인 세계관을 고집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비합리성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영혼을 천당으로 인도하는 분이라고 강조됨으로써, 결국 개인주의적이며 영혼구원중심적이며, 저 세상적인 구원 이해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결국 기독교인들의 이기주의와 기복신앙을 부채질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믿을만한 사람 찾기 어렵다"는 말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단순한 비아냥이 아니다.
또한 이처럼 개인의 영혼중심적 구원 이해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일반적으로 사회적 모순이나 생태계의 파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도록 만들뿐만 아니라, 교회중심주의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어, 교회 자체의 비민주적 구조와 종교 패거리주의에 대해서도 침묵하도록 만들어, 결국 교회가 "종교의 탈을 쓴 독재의 소굴"(최상천)이라는 비난을 받게까지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이기주의와 기복신앙이 초래한 비윤리성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사회적 신뢰성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사람들만을 배타적으로 구원하는 분이라고 강조됨으로써, 기독교 신자들과 비기독교인들 사이에 천당(예수)과 지옥(불신) 사이의 간격만큼이나 뛰어넘을 수 없는 종교적 장벽과 사회적 차별을 분명히 설정한다. 이런 배타적 구원론의 장벽과 차별은 결국 교회중심주의를 통해 배타적 충성을 요구하며,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기독교 제국주의를 낳는다.
이런 배타주의와 기독교 제국주의는 외부인들(멸망받을 악한 자들)에 대해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멸망시켜야 할 사탄의 세력으로 간주한다.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적인 이웃들에 대해 저주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조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괴물"로 둔갑시키는 짓이며 "사탄적인 기독교"의 특징이다(월터 윙크). 예수의 사랑과 희생의 복음을 적개심과 폭력의 종교로 둔갑시키는 것은 이처럼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5. 실종되었던 역사적 예수를 다시 말해야 하는 신학적 이유들
기독교 역사에서 역사적 예수는 실종되어버렸다. 당시의 "우상파괴자"(iconoclast)를 "성상"(icon)으로 만드는 신격화 과정에서, 예수의 인간성과 그가 몸바쳐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는 실종되고 말았다.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들, 즉 원죄(어거스틴), 성육신(아타나시우스), 삼위일체(가파도키아 교부들), 속죄론(안셀름) 등의 교리들을 예수가 가르친 적이 있는가? 예수가 스스로를 "주님"이나 "구세주"라고 부른 적이 있는가? 예수는 자신이 흘릴 "피"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적이 있는가?
역사적 예수를 다시 말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지적인 정직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역사적 예수, 즉 당시 랍비와 예언자로 불렸던 분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만의 품성과 구원의 능력과 임재를 경험한 것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놀라운 경험이 당시 어떻게 신화적인 언어와 개념과 세계관을 통해 그리스도로 고백되었는지를 추적함으로써, 그리스도 신화의 핵심적 요소들, 즉 하나님의 아들, 동정녀 탄생, 십자가와 부활승천 등의 교리들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정직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정직한 신앙고백을 통해 신앙적인 열정을 되찾고 교회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이다. "예수에 관한 종교"를 그 역사적 뿌리였던 "예수의 종교" 위에 다시 세우지 않고서는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들을 배반하였는지를 확인함으로써 교회의 도덕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역사적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나라가 아니라 현재적인 나라이며, 저 세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적인 나라이며, 개인주의적인 나라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나라이며, 영혼구원만의 나라가 아니라 정치적이며 구체적인 삶의 통전적인 해방의 나라이다.
브로커체제의 위계질서와 연고주의가 판치는 불평등과 착취의 나라가 아니라, 브로커 없는 평등주의적 나라(존 도미닉 크로산), 지배가 없는 하나님의 탈지배적 질서이다(월터 윙크). "예수는 (세례요한의 메시아 기대에 관한) 희망을 사랑으로 바꾸고, 미래의 종말론을 현재의 해방으로 바꿈으로써, 스스로를 종교와 묵시사상으로부터 해방시켰다"(토마스 쉬한).
셋째로, 기독교의 배타주의와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역사적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 즉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내부인들(탕자의 비유의 큰 아들,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제사장과 레위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바리새인, 큰 잔치의 비유에서 초대받은 사람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새벽부터 일한 품꾼들)을 위한 특권이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외부인들(탕자의 비유의 탕자,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사마리아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세리, 큰 잔치의 비유에서 초대받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이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저녁이 다 되어 일을 시작한 품꾼 등)을 위한 특혜의 나라이기 때문이다(로버트 펑크).
예수는 외부인들에게 저주와 적개심이 아니라, 무조건적 용서와 특혜를 베풀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배타주의는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제국에 맞서서 정반대되는 질서로 이루어진 반제국주의 운동이다(리처드 호슬리).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운동이다(월터 윙크). 보복을 가르치는 종교는 예수의 종교(용서)가 아니라 사탄의 종교이다(윌리엄 블레이크). 그 하나님 나라는 약자들에게 노예들의 도덕, 즉 굴종과 체념을 가르치는 강자들의 나라가 아니라, 주체적이며 자주적인 약자들의 저항을 통해 이룩하는 나라이다.
결론적으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선교사역을 충실하게 계승하지 않는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를 무시하고 배반해왔던 교회사의 전철을 밟기 쉬우며, 그 기독교는 지금 세계적으로 몰락해가고 있다. 최근에 새롭게 회복되고 있는 역사적 예수의 목회를 계승하는 작업은 교회를 다시 살리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하다.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 소장 www.historicalijesus.co.kr
첫댓글 이것이 자유주의인지 아닌지..이런 신학적 연구가 훌륭하고 정직한 것으로 각광받고 임용탈락되었다고 분규가 일어나는 신학교..감신이 언제 진보였고 언제부터 어떤의미로 점점 보수화되어간다는것인지 모르겠지만,
교회연합을 말할때,개신교회에 진보교단,보수교단이라고 정의할수 있는 근거가 있었는가(특별히 기장을 제외한다면)..진보신학은 어떤 어떤교단이던 앓게된 병마일것입니다. 교회연합은 진보와 보수의 대화가 아니라 개신교단간의 연합으로 말해져야하고,진보신학은 그야말로 교회가 연합해서라도 풀어가야할 숙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이성구교수님의 발제원고중 [개혁주의,복음주의,오순절,알미니언]과 [해방신학,다원주의.여성신학,빈손신학..]이 같은 대화의 선상에 놓여있음은 옳지 못합니다. 실제로 에큐메니컬운동과 교회개혁운동에 가장 심각하고 예민한부분인것을 오히려 더 정확하게 진단하고 분별해서 말씀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싶습니다.
개신교회의 연합,또는 연합활동이 그렇게 크게 문제거리였겠으며 그것이 교회일치로 나아갈수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어떻게 말하자면 어차피 교계지도자들이나 관계있는 일,평신도들이 연합운동에 눈을 뜨고 문제의식을 갖게되는 이유는, 연합활동과 개혁운동,기독교의 사회참여등에서 소위 자유주의 신학이 피부에 와닿기 때문입니다. 현상은 이러한데,그렇지 않다는 원리로 무너지는 강둑을 막을수가 있을까요..
지난 2월부터 복음과 상황를 받아봅니다. 사실 저는 발행인 박은조목사가 고신목사시라는것에 놀랐습니다. '복음과 상황'이 어떤 뜻인지,모토가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겠지만,어쨌던 저는 박은조목사가 아주 진보(?)적인 분이실것이라고 생각했을만큼 상황을 읽고 주장하는 눈은 전통적인 복음은 아닙니다. 복상이 교단기관지가 아니기에 발행목적에 따라 그럴수는 있겠지요..그러나, 복상을 통해보게되는 진보신학,뉴조나 다른 교계언론지들을 통해 물밀듯이 쏟아지는 자유스런 신학들은 어디서나 에큐메니컬과 개혁을 말합니다. 진단하고 파악하고 대처하고 교회를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자들과 연합하면 볼만하겠네....
김준우교수가 임용탈락되서 불쌍타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의 '역사적 예수'는 김준우자신이 보는 '역사'속에 갇혀 있는 예수일 뿐이라고 여겨지는군요. 결코 성경의 예수가 아니고 김준우자신의 생각속에 있는 예수라고 여겨지는군요. 기독교가 제국주의화되어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김준우교수처럼 저항일변도의 예수도 문제이지 않을까요? 제국주의자 예수와 저항세력으로서의 예수....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곳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또한 부흥과 개혁의 카페의 주인으로 계신 줄 믿습니다. 다른 예수를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받을지어다.
많은 학문이 너를 망하게 하였구나............ 지식만 가졌고 신앙은 버렸구나............
바람소리님, '너'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김준우교수, 장경선님, 광주행님, holojoy놈. 중에서 누군지 명확치가 않아서 조심스럽게 질문해 봅니다. 바람소리가 분명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원래 바람소리는 좀 그렇지요? 님들도 다 학문을 한 것같이 보입니다만 저런 신학을 가졌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학교수가 저 정도이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바람소리도 그런 정도면 분명해집니다. 감사합니다.
위의 논문을 쓰신 분은 아마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거나, 아님 처음부터 자유주의 철학적 신학서적들을 읽어서 책상머리 신학자의 눈으로 "가상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한것 같군요.
이분의 글은 일부 타당한 지적도 있지만, 여러 곳에서 잘못된 전제와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군요. 하도 틀린 곳이 많아 일일이 말을 하기조차 힘들군요.
카타콤의 순교자들은, 주기철목사,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결코 배타적 제국주의자들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주님 위하여 조용히 피흘려 순교하였을 뿐 결코, 결코 김준우 님이 말하는 그런 보복주의자들이 아니었어요!1
17년전 감신대의 한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 어느 신입생이 질문, "교수님, 감신 교수중에서 동정녀 탄생을 불신하는 분이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교수 왈, "자넨 장로교 신학생인가? 동정녀 탄생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학생, "교수님, 그렇다면 교수님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교수, "...."
자넨 장로교신학생인가?ㅎㅎㅎ 그런데, 장로교도 야단난거 같습니다. KNCC 백도웅 총무 예장통합, 연동교회 이성희목사도 통합..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주체적이지않다니, 그리고 그런 신자들이 삶에서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니... 이분은 어디 굴뚝에 있다 나왔나? 우리 주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임재에 감격해 하고 있는데...
ㅎㅎ 김준우라는 소위 신학자라는 사람이.... 해벗님이 아주 잘 말씀했군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땡중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의 사명이니 소위 대화라는 체널을 통해 진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겠지요...
대화 한다고 내가 그리로 가는것도 아니고 타협하자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자신 속에 있는 진리는 양보할 수 없지요. 어쩌면 저들이 진짜를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준우교수같은 분들을 교회의 평신도들은 '전도대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신학교에서는 이단이라고 하거나 신학의 다양성을 인정해야한다면서 대화의 대상이라고 하지요. 이런류에 대해 장성한 분량으로 취급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하게되는 이유는 순전히 신학전공이기때문이지요. 이런 자유주의신학이 대화의 상대이고 신학(결국 교회의)한축으로 자리잡아가는것을 보면 이시대의 우리(?)가 믿는것은 결국 학위가 아닌가 싶습니다.
신학도 아니고 대학과 전공이라는 증명,학위자체를 과학만큼이나 공고하게 믿어버리는것이 이시대이기에,학문,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탈선과 심하게는 적그리스도적인 주장이 나와도 진보신학이 되고 다원적성경해석을 인정해야한다는 합리적인 태도를 취할수밖에 없게 되는 거겠지요.
그러나 우리시대에는 신학전공,신학자라는 말이 이미 가장 위험할수도 있는 말이 되어버린것 같습니다. 학위도로 증명이 안되고 교세로도 참교회는 분별할수 없는일이고, 그렇다고 신비와 기적을 의지할수도 없고...어쩌면 갈수록 교조적인 분리가 더 필요할수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의 연합도 연합이지만요..
이 글 아래에도 진지한 고민의 장이 펼쳐졌군요. 요즘 우리 카페 분위기가 가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