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서운면의 상징이자 자랑을 넘어 안성시의 상징이자 자랑인 서운산. |
| |
▲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300년 이상 앞선 고려 광종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룡사. 사당패 바우덕 등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
우리동네 우리마을 서운면을 지난 2015년 1월에 연재를 시작해 이제 약 15개월 만에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물론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해 2주간 연재를 쉬기도 했지만, 서운면이 14개 법정리 25개 행정리로 이루어진, 행정규모에 있어서 그렇게 큰 면(面)이 아님을 감안하면, 오랜기간 연재를 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당연히 서운면 주민들의 협조가 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서운면이 가지는 특성, 즉 서운산을 중심으로 한 자연환경과 청룡사로 상징되는 문화유산, 그리고 바우덕이로 상징되는 이야깃거리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풍부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운면(瑞雲面)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당시 안성군 기촌면(奇村面), 송죽면(松竹面), 덕곡면(德谷面), 입장면(立長面) 등 4개면을 합해 생긴 면(面)이다.
면이름은 다른 지역처럼 대한제국시절 면의 이름에서 가져와서 조합한 것이 아니라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안성을 대표하는 서운산(瑞雲山)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운면 사람들뿐만 아니라 안성사람들이 의지해 온 서운산
서운면이라는 이름이 이 산이름에서 유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운면 사람들의 삶은 이 서운산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이번 마을 탐방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멀고 가깝고의 차이는 있었지만 서운면은 모두 서운산에 의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는 안성시 전체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서운산(瑞雲山)은 해발 547m로 안성의 서운면, 금광면에 걸쳐 있을뿐만 아니라,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을 포괄하는 산이다. 맑은 계곡과 부드러운 산세로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이 높아 사시사철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청룡사, 석남사 등 역사깊은 사찰을 품고 있기도 하다.
서운산은 청룡산(靑龍山) 혹은 좌성산(座聖山, 혹은 左城山)으로 불리우며 특히 이번 마을 탐방 과정을 통해 대부분의 서운면 주민들은 ‘좌성산’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서운산에 얽힌 주민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서운산이 청룡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며 환경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진 산인데, 이번 마을탐방과정에서 이부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다.
그러나 언급이 없었다고 해서 그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닐터, 서운산의 환경적 가치에 대해서도 안성시민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안성고대사의 비밀을 품은 서운면
서운산과 서운산을 품고 있는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전에 입장면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이 지역은 이미 알려진 문헌만으로도 안성의 역사, 특히 고대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안성과 관련된 최초의 문헌기록인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부자(父子)지간인 심나(沈那)와 소나(素那)의 이야기를 통해 선덕여왕 때 이지역이 백제와 신라 간에 치열한 영토전쟁을 벌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번 마을탐방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의 증언 등을 통해 서운산에 얽힌 “좌성산에는 샘이 100개가 있어서 서울(수도)이 들어선다고 했는데, 99개의 샘은 찾았지만 100번째 샘 하나를 찾지 못해 서울(수도)이 못되었다.”는 전설이나, 지금의 현매리에는 왕궁이 있었다는 ‘신아궁’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리에서는 백제의 왕이 머물렀다는 ‘유왕골’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전설과 기록들은 최근 도기동 지역에서 출토되는 삼한시대의 유적과 관련하여 서운면, 나아가 안성의 삼국시대 초기, 더 나아가 삼한시대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여기에 오촌리에서는 나말여초 유적이 발굴되는 등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서운면의 역사와 문화들이 하나 둘 드러나고 있다.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이러한 서운면의 역사와 문화가 지역민들의 자부심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주민들의 삶의 질을 풍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쓰여야 할 청룡사의 연혁
서운면의 자랑이자, 안성의 자랑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청룡사임은 두말할 필요 없다.
특히 이번 '우리 동네 우리 마을'을 통해서 청룡사의 연혁이 다시 쓰여 져야 함을 확인했다.
즉 이제까지 알려진 고려 원종 6년인 1265년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것이라는 주장이 여러 문헌의 기록으로 보아 사실이 아님을 확인했다.
특히 마을 주민들 사이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300년 이상 앞 선 고려 4대 임금인 광종(光宗, 925~975, 재위 949~975)이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청룡사를 창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없는 것도 만들어서 자랑하는 일도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있는 사실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것은 지역의 문화적 역량과 관련된 일이다.
청룡사의 연혁과 관련해 시민들의 관심과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미륵의 고장 서운면
청룡사의 연혁을 고려 광종대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가 서운산에 있는 북산리 미륵이다.
학계에서는 이 북산리 미륵이 신라말이나 고려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북산리 미륵을 만든 주체가 청룡사를 창건한 주체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서운면은 미륵의 고장이기도 하다.
안성전역에 많은 미륵이 분포되어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서운면에서 확인한 미륵만 3곳에 달한다.
하나는 북산리 미륵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른바 ‘떠내려간 미륵’으로 알려진 도림리 미륵이다.
도림리 미륵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천안시에 속해 있지만, 그곳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전에는 안성에 속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하천을 경계로 해 있을 뿐 안성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안성주민들의 삶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서운면 문화권의 미륵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이 도림리 미륵은 그 재질이나 구성에 있어서 동촌리 미륵과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동촌리 미륵은 그 재질이나 형태면에 있어서 기존 안성의 다른 미륵들과는 다른 내용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제까지 안성사람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미륵이다.
수 백년 이상을 때로는 서운면 사람들의 수호신으로, 길안내자로, 혹은 친구로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온 동촌리 미륵이 지금은 갑갑한 비닐하우스 안에 있다.
그래서 서운면의 뜻 있는 여러 사람들로 부터 이 동촌리 모습이 제 모습을 드러냈으면 하는 바람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 |
▲ 신라 말과 고려초 유물이 많이 발굴된 오촌리 유적. |
| |
▲ 독특한 재질을 가진 동촌미륵의 얼굴 부위. |
| |
▲ 아주 잘 생긴 자태를 뽐내는 북산리 느티나무. |
| |
▲ 1872년 지방도에 나타난 서운면 지역. |
| |
▲ 삼한시대 왕의 궁이 있었다는 신아궁, 지금은 현매리 지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