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후 7시 부터 30분간 창제회 실시를 통한 일념의 대변혁과 소원성취를 위하여
경지명합과 발적현본 그리고 보탑을 여는 일념에 대하여(함께 진지하게 읽고 확고한 일념으로 실천해가십시다~!!!)
"좋아지는 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요 나쁘게 되는 것은 필정(必定)이라고 생각하라." (성인어난사 1190~1쪽)
모든게 일념(一念, 마음)의 소작입니다.
일념 즉 일념삼천이고 생명의 근원이고 일체 생명의 작용입니다.
우리들이 일념에 억겁의 신로를 다하여 보탑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제대로 봉창하는 순간 의정(依正)에 걸친 대우주근원의 일체의 보탑(불성)들이 함께 일제히 솟아나와 장엄하게 각자 자기자신을 장식할 뿐만 아니라 함께 더불어 주변의 일체 생명들도 같은 찰라의 순간에 거대하고 찬란한 대환희의 보탑들로 솟아나와 장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境)과 지(智)가 명합(冥合)하는 순간 즉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와 하나가 되어 발적현본(發迹顯本)하는 일념의 순간에 우리들 자신이 찰라에 각자가 본불이 되고 석가불이 되고 다보불이 되고 지용보살의 상수 상행보살이 되고 사대보살이 되고..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이 됨과 동시에 그 불성들을 불러내고 그 모든 공덕을 무상보취 불구자득(無上寶聚 不求自得)으로 일시에 물려받고 그 불력과 법력 그리고 위광세력 까지 자기자신의 일신에 고스란히 받게 되며 또 제불 제천의 지킴도 동시에 받게 되어 자유자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생명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부르는 순간의 일념이 중요한 것입니다.
"일념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어의구전 790페이지)"라는 대성인님의 어지남대로 입니다.
또 이런 일념으로 창제를 하는 그 찰라의 순간에 아래 말씀대로 되는것입니다.
"日蓮등의 동류의 본회는 무상(無上) 無上이란 南無妙法蓮華經 무상 중에 극무상이니라. 이 묘법을 가르켜서 무상보취라고 설하셨느니라. 보취란 삼세제불의 만행만선의 제파라밀의 보(寶)를 모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 무상보취를 신로(辛勞)도 없고 行功도 없이 一言으로 수취하는 신심이며 불구자득이란 이것 이니라.(어서 727페이지)"
이 얼마나 위대한 창제행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알고 환희하면서 그 한없는 감동과 감사함으로 보탑의 주체인 본불의 입장에 대해 다음글을 이어 갑니다.
"그러므로 아부쓰보(阿佛房)가 바로 보탑(寶塔)이고 보탑(寶塔)이 바로 아부쓰보(阿佛房)이며 이것 이외(以外)의 재각(才覺)은 무익(無益)하니라. 문(聞)·신(信)·계(戒)·정(定)·진(進)·사(捨)·참(慙)의 칠보(七寶)로써 장식한 보탑(寶塔)이니라. 다보여래(多寶如來)의 보탑(寶塔)을 공양(供養)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신(自身)을 공양(供養)하시는 것이며 자신(自身)이 또한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이니라. 이렇게 믿으시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하시라. 이곳이 바로 보탑(寶塔)의 주처(住處)이니라."
(아부쓰보어서 1304페이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당체라 함은 법화경을 믿는 日蓮의 제자 단나 등의 부모소생의 육신 바로 이것 이니라. 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오직 법화경을 믿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번뇌 업 고의 삼도가 법신 반야 해탈의 삼덕으로 전하여 삼관 삼제 즉 일심(一心)에 나타나서 그 사람이 소주(所住)하는 곳은 상적광토니라."
(어서 512페이지)
원래 우리들은 미혹한 범부의 상태 그대로라도 본불의 생명의 상태인 것입니다.
"妙法蓮華經의 당체라 함은 법화경을 믿는 日蓮의 제자 단나 등의 부모소생의 육신 바로 이것 이니라."라고 하신대로 그 전제가 법화경을 믿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이라고 하여 말법의 법화경인 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을 믿는 전제가 있어야 본불로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본불의 생명을 갖추고 있지만 실질적인 본불의 생명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법화경(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을 지극 지순으로 믿는 즉 경지명합 발적현본의 상태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념여하에 따라서 보탑 안에 들어가 본불의 입장에서 모든 생명들을 책임지는 행위(본불의 입장에서의 창제행 실시)를 할 수도 있고, 또는 본불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미혹되어 자기자신 즉 본불을 비참한 존재로 증선(憎善) 질선(嫉善) 한선(恨善) 경선(輕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원리 상으로 볼 때 자기자신이 본불임을 망각하고 다른 법화경행자인 다른 본불 까지도 비방하는 14비방 중에 마지막 이 네가지의 더 큰 죄를 범하게 되고 근본적으로 생명을 열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고 자기자신 뿐 아니라 남들(원래 본불인) 까지도 증오하고 질투하고 한탄하고 경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념 상의 미묘한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기에 자신의 일념을 항상 잘 살피고 점검해서 용맹정진(勇猛精進)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일념이 흐려져서 불성이 열리는 것을 스스로 막는 행위를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매일 행하고 있는 창제행이 중요하고 특히 다른 기원없이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30분 동안 실천하는 이 순간이 경지명합 발적현본하는 순간이 될 수 있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나아가 가족이나 지인 등 타인을 위해 기원해드리는 행위의 실천은 근본적인 본불의 자세로서의 이타행의 창제행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부터 행주좌와 틈틈이 행하는 창제행은 지금까지 실천해 온 무수한 제목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일념하에 일념에 억겁의 신로를 다해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바로 그 순간 부터 일시에 수 많은 변화들이 나타나는 것이고, 이 진지한 창제행에서 부터 실질적인 말법광선유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념에 억겁의 신로를 다한 창제행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본불로서의 각오와 책임감과 강한 결의와 확신에 차서 말법광선유포를 기원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또 자연스레 경지명합.발적현본하게 되어 75억명의 무명의 지용보살들을 불러내어 이 창제행에 동참시키는 실질적인 절복행을 전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2009년 부터 창가학회에는 혈맥이 완전히 끊겼지만, 2000년대 초 전 그나마 혈맥이 조금이나마 흐르고 있을 때의 절복전을 상기해 보면 이런 일념으로 우리들의 일념이 본불로 불타고 있었기에 자석에 생명들이 끌리 듯이 우리들의 본불의 생명 즉 불계의 생명 상태에 감응되어 순간적으로 대상자들의 생명에 근본적으로 내재돼 있든 불성이 불리어서 처음 시작은 단 3명이 시작했지만 2년도 채안되서 5300여명이라는 무명의 생명의 불성을 열어주는 대절복이 저절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방법의 단체였든 창가학회 속에서의 절복전이었기에 절복전을 주도한 저를 포함한 3명 모두 상상을 초월하는 불벌을 받아 파란만장한 역경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제 부터의 우리들은 올바른 혈맥("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존(釋尊)과 개성불도(皆成佛道)의 법화경(法華經)과 우리들 중생(衆生)의 셋은 전(全)혀 차별(差別)이 없다고 깨달아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바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이라고 하느니라. 이 일은 다만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 단나(檀那) 등(等)의 간요(肝要)이며, 법화경(法華經)을 가진다고 함은 이것이로다."(어서 1337페이지))이 흐르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부르고 있기에 시시로 성도하고 시시로 현본하면서 24시간 내내 본불의 생명이 용현된 상태인데 자신의 사소한 소원들이 이뤄지지 않을 이유가 없고 말법만년 진미래제의 광선유포의 기반도 구축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얼마나 깊이 확신하고 창제행에 임하느냐 그 일념의 미묘한 차이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경지명합. 발적현본. 허공회의식에서의 보탑 南無妙法蓮華經와 인본존으로서 보탑과 일체이신 日蓮의 입장...
나와 더불어..동류..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입장의 위대함과 감사함...
삼세상응과 무시무종 무량무변의 입장에서의 실감...
먼저 본존님을 향해서 제목을 봉창하지만 일단 대어본존님과 하나된 상태인 경지명합. 발적현본이 된 상태부터는 바로 그 순간 자기 자신이 南無妙法蓮華經의 보탑을 열고 보탑 속으로 들어가 좌정하고 황송하게도 대성인님과 경지명합으로 하나되어 석존과 다보불과 시방의 일체의 제불과 보살 그리고 제천선신과 일체의 생명들을 향해 어루만지듯 제목을 보내주어 불성을 열어주는 행위의 주체자가 되는 것입니다.
창제 중간에 잠시라도 일념이 흐트러져서 경지명합.발적현본이 안된 상태가 되면 곧 바로 본존님을 향해 창제하는 입장으로 바뀌고 또 일념을 다시 정비하여 경지명합.발적현본 하게되면 다시 南無妙法蓮華經의 보탑 안에서 일체를 향해 제목을 보내주는 위대한 주관자로서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념 여하에 따라 수시로 보탑 안에서 본불의 입장으로 전생명을 감싸안아 갈 수도 있고 또 일념의 흐트러짐이 심하면 전혀 자신도 빛날 수 없고 다른 생명의 불성도 용출시킬 수 없는 하찮은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법광선유포를 책임져야 할 우리들의 입장으로 볼 때 지금까지는 구계의 입장에서 본존님을 향해 제목을 봉창하는 입장 만으로 알고 실천해 왔는데 경지명합. 발적현본한 상태의 확고한 광선유포 책임자 입장에서는 그 일념의 대전환과 동시에 南無妙法蓮華經의 보탑 안에서 일체의 생명을 열어주는 주관자(본불)로서의 창제행을 하는 것으로 실감하며 일념을 다한 창제를 해야합니다.
일체의 생명을 책임져 가야하는 창제행의 진지함과 일념의 깊이와 확신의 정도는 자연스레 전우주의 생명을 흔들어 깨우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경지명합.발적현본이 전제된 상태에서 창제 할 때의 좌정하는 위치는 즉 본존님을 향하는 입장이 아니라 자신이 허공회의식을 주관하는 본불의 입장이 되어 보탑 안에서 석가 다보불 외(과) 제불 보살 제천 모두를 바라보고 제목을 보내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즉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생명을 향해서 불성을 불러내는 장엄한 의식인 제목을 보내주는 대자대비의 행위를 본불의 입장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자신이 모든 생명을 책임지고 불성을 열어주고야 말겠다는 깊은 확신과 일념과 서원과 결의로 보탑을 열어가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어본불의 대자대비의 마음과 그 실현 방안의 실천인 창제행에서 본불로서의 자신의 입장과 위치와 경애를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대성인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동류라고 확신합니다.
자기자신이 본불이란 자각과 책임감이 없이 부르는 창제 속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경지명합도 발적현본도 7.5억명의 지용보살의 용출도 현출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불로서의 자각과 책임감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부르는 제목은 단 한마디의 창제로도 일체를 일변시킬 수 있습니다.
전부를 일시에 원하는대로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확신이 바로 니치렌대성인님의 확신이시기에 구원의 불제자인 우리들도 목숨을 걸고 용맹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불이라는 자각과 말법광선유포를 책임져야 하는 책임자라는 입장에 섰을 때 일념에 억겁의 신로를 다해서 창제를 할 수 있고 그 결과 본래 무작삼신이 념념에 일어날 뿐 아니라 전우주 근원의 일체의 생명을 대환희로 약동시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념 속에 진정한 의미의 광선유포는 완결될 수 있고 지구촌도 지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우주근원의 생명의 일체는 바로 자각한 한사람 한사람의 발적현본에 의한 본불로서의 자각과 입장으로 임할 때 만이 모든 생명의 근원적인 정화와 환희중의 대환희의 생명의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념 속에서 미래의 75억명의 지용보살의 현출도 전부 유유자적 즐기면서 원하는대로 전부 다 바꿀 수 있고 절복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본불로서 보탑 안에 들어가서 보탑을 여는 행위=창제행임(자행화타에 걸친 창제행)을 알게되고 그 감사함과 전율과 감동과 송구스러움에 대환희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창제를 하는 그 순간 바로 즉시 스스로 자체현조로 열고 즉신성불로 열려가는 것을 실감해야 하며,
그리고 대우주근원을 향해 묘음을 봉창하는 순간은 최고의 대자대비의 행위의 극치이고 가장 숭고한 행위이며 일시에 모든 것을 정화시켜서 환희하게 하는 위대한 불성들을 열어가는 장엄한 순간임을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창제는 우주삼라만상의 모든 생명들의 불성을 불러내기 위한 장엄한 의식=모든 생명들의 보탑들을 열어주는 행위=75억의 지용보살들의 보탑을 일시에 열어서 대환희로 용출하는행위입니다.
이 창제행의 여는 행위의 순간에는 그 주체자가 본불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이 본불이란 자각과 입장에서 깊고도 강력한 창제를 보내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순간 석가불도 다보불도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모든 불성이 불리어서 환희하며 역용을 나타내고 우리들을 칭찬하고 지키고 지켜갈수 있는 위광세력이 더해지는 모습으로 모든 것이 현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탑 안에서 창제행을 시작하는 순간 자체현조로 스스로 열고 열리어서 우주대의 모든 생명들의 불성이 일시에 각자의 보탑들로 열리는 것이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 시방의 모든 불 보살과 제천선신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동시에 환희 중의 대환희의 불성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여는 주체자가 자신이 본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추법이 되고 문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이런 일념이라면 절대로 광선유포를 달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상보취를 불구자득 할 수도 없게 됩니다.
니치렌과 동류라고 확언해주신대로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과 같은 입장과 경애와 결의와 서원을 품고서 더욱 강력한 창제행의 실천으로 목숨을 걸고 부자석신명의 자세로 75억명의 민중들을 구제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만다라 대어본존님의 상모에서 볼 수 있듯이 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의 보탑 중에 인본존이신 日蓮이 모든 생명을 떠 받치듯 제일 아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범부승.불경보살의 마음가짐과 그 실천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자리의 배치이시기에 너무나 황송하고 한편으로 정신이 번쩍들게 합니다.
南無妙法蓮華經 보탑의 본불이시면서도 항상 겸손하신 자세를 유지하시려는 인본존이신 니치렌대성인님의 모습에 형언할 수 없는 존경심과 자랑스러움과 송구스러움으로 깊이 마음이 멈춰서서 어본불을 우러러 보게 되고 자신의 자세를 가다듬고 자연히 옷깃을 여미게 됩 니다.
또 본명이 아닌 법명 즉 日蓮을 인본존으로 하신 것은 대성인님과 제자인 우리들 즉 동류들 전체를 배려하신 마음씀씀이라 생각되어 몸둘바를 모를 정도이고, 이 무언의 준엄한 지도를 심간에 새기면서 창제행에 임하고 평소의 생활과 광선유포의 장에서의 행동지침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의하게 됩니다.
또 日蓮에서 엿볼수 있듯이 모든 생명을 소생시키는 위대한 생명력인 日(해, 빛, 소생,환희 중의 대환희,정과 사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밝디 밝은 지혜, 자광, 대자대비의 마음의 빛..)과 蓮(팔엽의 백연화라고 하신 어서 말씀대로 청정무구한 순백의 연꽃과 같은 생명으로 어떠한 탁함도 정화시켜서 아름다운 새하얀 연꽃 처럼 빛나게 하는 강력하고도 고요하고 자애로운 생명의 표현)에 생각이 미치면 아~~본존님~!!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결국 南無妙法蓮華經와 日蓮이 인법일개로 본불의 모습 즉 대보탑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계시는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주시고 계시기에 대어본존님과 동일하게 일념을 정하고 말법광선유포를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일체의 생명들을 끌어안고 떠 받쳐서 경지명합.발적현본된 상태의 제목을 자신의 구식심왕진여의 도읍지로 부르고 의정불이로 보내고 어루만져 주어 불성 즉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으로 하나같이 본불의 생명으로 열리도록 전혼을 다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법광선유포의 주체자로서의 강한 결의와 서원 그리고 창제행과 절복행의 실천에 의해 그 찰라의 순간에 본불로 현현되고 자연히 즉신성불의 상태가 되어 무상보취 불구자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대만다라 대어본존님을 도현하실 때 법본존인 南無妙法蓮華經 부터 일체의 생명을 전부 고스란히 도현하시고 나서 최후에 인본존인 日蓮을 도현하시고 수결로 마무리 하시고 계신 모습에서
깊이 배견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마음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 법본존인 南無妙法蓮華經인 보탑을 여는 것 부터 석가다보 이불 뿐만 아니라 시방의 모든 불 보살 제천 등을 총망라해서 어루만듯이 감싸안고 제목을 보내고 물들여서 불성을 불러내어 환희하고 위광세력을 더하고 지키고 지킴을 받고 하는 일체의 총책임자가 되어 창제행에 임하고 일상 생활에 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이 지구촌의 전인류 즉 75억명의 지용보살들을 용출시켜내야하는 사명을 가진 본불로서의 깊은 창제로 한분도 빠짐없이 불성을 용현시켜서 구원해 주는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책임자로서의 불력과 법력과 위광세력은 상상만해도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할지에 생각이 미치니 주체못할 정도로 가슴이 뛰고 더욱 크다란 결의와 희망과 서원에 불타서 일념이 더욱 불타오르게 됩니다.
우리들 각자는 앞으로 그 위력을 발하면서 대우주근원의 생명의 실상을 증명하고, 우리들 스스로가 대성인님의 배려와 설계도대로 말법의 본불로서의 위용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지용보살들이 본불로서 보탑을 열어가게 되면 지구촌 구석 구석의 일체의 생명들의 불성이 불려서 열리고 열려서 자연스레 광선유포는 그 속도를 더해 갈 것이고 지구촌의 평화낙토와 일체중생의 행복도 담보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법광선유포는 결국 지금 본불로서의 자각과 일념으로 도전하고 있는 우리들이 완수하게 되는 것이고 그 임무완수는 필정인 것입니다.
목숨을 아끼지 말지어다라는 어문대로 보무도 당당히 각자가 니치렌대성인님의 입장(범부승)과 어본불(구원의 어본불)의 입장이 되어 사색하고 결의해서 창제행에 임하게 되면 어떠한 난간도 타고 넘어서 말법만년 진미래제 까지 광선유포의 기반-금강불괴의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 관련어서 ***
한 번 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일체의 불·일체의 법·일체의 보살·일체의 성문(聲聞)·일체의 범왕(梵王) · 제석(帝釋) · 염마(閻魔) · 법왕(法王) · 일월(日月) ·중성(衆星)·천신(天神)·지신(地神)·내지(乃至)·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천(人天)·일체중생의 심중의 불성을 오직 한 마디로 불러 나타내시는 공덕은 무량무변하니라. 나의 기심의 묘호렌게쿄를 본존으로 숭앙하고, 나의 기심 중의 불성·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제석의 불성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의 불성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법화초심성불초 557쪽)
동서남북(東西南北) 팔방(八方) 및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외(外) 사백만억나유타(四百萬億那由佗)의 국토(國土)에 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잇따라와서 충만(充滿)하시었다. 하늘에는 별과 같이 땅에는 도마(稻麻)와 같이 열(列)지어 계시며,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하시는 것을 비유하면 대왕(大王)의 태자(太子)를 모든 신하(臣下)가 수호(守護)하는것과 같다. 단(但) 사천왕(四天王)의 동류(同類)가 수호(守護)하여 주시는 것도 황송한 일인데, 일체(一切)의 사천왕(四天王) 일체(一切)의 성수(星宿) 일체(一切)의 일월(日月) 제석(帝釋) 범천(梵天) 등(等)이 수호(守護)하시니 만족(滿足)해야 할 일이니라. 게다가 일체(一切)의 이승(二乘)·일체(一切)의 보살(菩薩)·도솔내원(兜卒內院)의 미륵보살(彌勒菩薩) 가라타산(伽羅陀山)의 지장(地藏) 보타락산(補陀落山)의 관세음(觀世音) 청량산(淸凉山)의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등(等) 각각(各各) 권속(眷屬)을 구족(具足)하여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해 주심으로써 만족(滿足)해야 할 것인데 또한 황송하게도 석가(釋迦) 다보(多寶) 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친(親)히 자진(自進)해서 내림(來臨)하시어 주야(晝夜) 십이시(十二時)동안 수호(守護)해 주심에 대한 황송함은 말로 다하지 못하노라.
(우에노전답서 1570쪽 )
보탑품(寶塔品)에 가로되 「여러 대중(大衆)을 접(接)하여 모두 허공(虛空)에 있음」 운운(云云). 이들의 불(佛) 보살(菩薩)․대성(大聖) 등(等)․통틀어 서품(序品) 열좌(列座)의 이계팔번(二界八番)의 잡중(雜衆) 등(等)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어본존(御本尊) 속에 주(住)하시어 묘법(妙法) 오자(五字)의 광명(光明)에 비추어져서 본유(本有)의 존형(尊形)으로 되니 이를 본존(本尊)이라고 하느니라. ...중략...
이 어본존(御本尊)을 결코 타처(他處)에서 구(求)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흉중(胸中)의 육단(肉團)에 계시느니라. 이것을 구식심왕진여(九識心王眞如)의 도(都)라고 하느니라.
십계구족(十界具足)이라 함은 십계(十界)가 일계(一界)도 빠짐없이 일계(一界)에 있음이라, 이에 의(依)해서 만다라(曼茶羅)라고 하며 만다라(曼茶羅)라고 함은 천축(天竺)의 이름으로서 여기서는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도 공덕취(功德聚)라고도 이름하느니라.
이 어본존도 다만 신심의 이자에 들어 있으니 이신득입(以信得入)이란 이것이니라. 니치렌의 제자단나등(弟子檀那等) · 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 · 불수여경일게(不受余經一偈)라고 무이(無二)로 믿음으로써 이 어본존의 보탑 안에 들어 갈 수 있느니라. 미덥고 미덥도다. 어떻게든 후생을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시라, 결단코 남묘호렌게쿄라고만 봉창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라, 신심의 후박(厚薄)에 달려 있으며, 불법의 근본은 신(信)으로써 근원으로 하느니라. (니치뇨부인답서 1244쪽)
그러므로 아부쓰보(阿佛房)가 바로 보탑(寶塔)이고 보탑(寶塔)이 바로 아부쓰보(阿佛房)이며 이것 이외(以外)의 재각(才覺)은 무익(無益)하니라. 문(聞)·신(信)·계(戒)·정(定)·진(進)·사(捨)·참(慙)의 칠보(七寶)로써 장식한 보탑(寶塔)이니라. 다보여래(多寶如來)의 보탑(寶塔)을 공양(供養)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신(自身)을 공양(供養)하시는 것이며 자신(自身)이 또한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이니라. 이렇게 믿으시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하시라. 이곳이 바로 보탑(寶塔)의 주처(住處)이니라
(아부쓰보어서 1304쪽)
"석가(釋迦) 다보(多寶)의 이불(二佛)이라 해도 용(用)의 부처이며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야말로 본불(本佛)이시니라. 경(經)에 가로되 「여래비밀신통지력(如來秘密神通之力)」이 이것이로다. 여래비밀(如來秘密)은 체(體)의 삼신(三身)으로서 본불(本佛)이고 신통지력(神通之力)은 용(用)의 삼신(三身)으로서 적불(迹佛)인 것이니라. 범부(凡夫)는 체(體)의 삼신(三身)으로서 본불(本佛)인 것이며 부처는 용(用)의 삼신(三身)으로서 적불(迹佛)이니라. 그러므로 석가불(釋迦佛)은 우리들 중생(衆生)을 위해서는 주사친(主師親)의 삼덕(三德)을 갖추셨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런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처에게 삼덕(三德)을 갖게 해 드린 것은 범부(凡夫)이니라, 그 까닭은 여래(如來)라 함은 천태(天台)의 석(釋)에 「여래(如來)라 함은 시방삼세(十方三世)의 제불(諸佛)·이불(二佛)·삼불(三佛)·본불(本佛)·적불(迹佛)의 통호(通號)이니라」고 판정(判定)하시었다. 이 석(釋)에 본불(本佛)이라 함은 범부(凡夫)이고 적불(迹佛)이라 함은 부처이니라. 그러나 미오(迷悟)의 부동(不同)으로서 생불(生佛)이 다름에 의(依)하여 구체(俱體)·구용(俱用)의 삼신(三身)이라고 함을 중생(衆生)은 알지 못하느니라." (제법실상초 1358~9페이지)
妙法蓮華經의 당체라 함은 법화경을 믿는 日蓮의 제자 단나 등의 부모소생의 육신 바로 이것 이니라. 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오직 법화경을 믿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번뇌 업 고의 삼도가 법신 반야 해탈의 삼덕으로 전하여 삼관 삼제 즉 一心에 나타나서 그 사람이 所住하는 곳은 상적광토니라.
(어서 512페이지)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을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은 없느니라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자는 자신이 보탑이고 자신이 또한 다보여래이니라
妙法蓮華經 이외에 보탑은 없으며 법화경의 제목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한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어서 1304쪽)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타사(他事)없이 불러 나아간다면 천연(天然)히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를 갖추게 되느니라. 여아등무이(如我等無二)라 해서 석존(釋尊)과 같은 부처로 손쉽게 되느니라. 비유(譬喩)컨대 새의 알은 처음엔 물인데 그 물속에서 누가 하는 것도 아닌데, 주둥이나 눈이 생겨나서 허공(虛空)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 우리들도 무명(無明)의 알이고 천박한 몸이지만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창제(唱題)라는 어머니가 품어주어서 삼십이상(三十二相)의 주둥이가 나오고 팔십종호(八十種好)의 개모(鎧毛)가 생겨 갖추어져서 실상진여(實相眞如)의 허공(虛空)을 날게 되느니라. 이로써 경(經)에 가로되「일체중생(一切衆生)은 무명(無明)의 알속에 있어 지혜(智慧)라는 주둥이가 없다. 불모(佛母)라는 새는 분단동거(分段同居)의 옛집에 돌아와 무명(無明)의 알을 두들겨 부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이란 새를 보금자리를 떠나게 하여 법성진여(法性眞如)의 허공(虛空)을 날게 한다」라고 설(說)했느니라 취의(取意). (어서 1443페이지)
묘음(妙音)이란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것은 말법당금(末法當今)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음성(音聲)이니라.
(어의구전 774쪽)
성인이 부르시는 제목의 공덕과 우리들이 부르는 제목의 공덕과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나이까 라고 운운. 조금도 승렬(勝劣)은 있을 수 없소이다.
(마쓰노전답서 1381쪽)
그러하므로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존과 개성불도(皆成佛道)의 법화경과 우리들 중생의 셋은 전혀 차별이 없다고 깨달아서 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바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이라고 하느니라.
(생사일대사혈맥초 1337쪽)
법은 스스로 홍통되지 않는다. 사람이 법을 홍통하는 고로 인법이 함께 존귀하니라.
(백육개초 856쪽)
이러한 자의 제자단나가 된 사람들은 숙연이 깊다고 생각하여 니치렌과 동일하게 법화경을 넓혀야 하느니라, 법화경의 행자라고 불려져 버린 것은 이미 불상(不祥)이며 면(免)하기 어려운 몸이로다.
(자쿠니치보어서 903쪽)
법화경의 본문의 간심인 妙法蓮華經는 삼세제불의 만행만선의 공덕을 모아서 五字로 하였으니 이 五字 내외 어찌 만계의 공덕을 포함하지 않겠느뇨
그러나 이 구족의 묘계는 한번 가진후 행자가 파하려고 해도 파해지지 않으니 이를 금강보기계 라고 말한다
(중략)
삼세제불은 이 계를 갖고 법신 보신 응신 등 어느 것이나 무시무종으로 부처가 되셨느니라
(어서 1282쪽)
일념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
(어의구전 790쪽)
이 만다라(曼陀羅)는 문자는 오자 칠자이지만 삼세의 제불(諸佛)의 스승이며, 일체의 여인의 성불의 인문(印文)이니라. 명도(冥途)에는 등(燈)불이 되고 사출(死出)의 산(山)에서는 양마(良馬)가 되며, 하늘에서는 일월과 같고 땅에서는 수미산(須彌山)과 같으며, 생사해(生死海)의 배이고 성불득도(成佛得道)의 도사(導師)이니라.
(아부쓰보어서 1305쪽)
이 어본존을 결코 타처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흉중의 육단에 계시느니라. 이것을 구식심왕진여의 도라고 하느니라.
(어서 1244쪽)
니치렌의 혼을 먹물에 물들여 넣어서 썼으니 믿으실지어다, 부처의 어의(御意)는 법화경이며 니치렌의 혼은 바로 남묘호렌게쿄이니라.
(교오전답서 1124쪽)
日蓮등의 동류의 본회는 無上이란 南無妙法蓮華經 무상중에 극무상이니라
이 묘법을 가르켜서 무상보취라고 설하셨느니라
보취란 삼세제불의 만행만선의 제파라밀의 보(寶)를 모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 무상보취를 신로(辛勞)도 없고 行功도 없이 一言으로 수취하는 신심이며 불구자득이란 이것 이니라
(어서 727쪽)
日蓮의 자비가 광대하면 南無妙法蓮華經는 만년외 미래까지 도 유포하리라 (중략)
극락 백년의 수행은 예토의 1일의 공덕에 미치지 못하고 정상 2천년의 홍통은 말법의 1시만 못 하니라
이는 오로지 니치렌의 지혜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때가 그렇게 시킬 뿐이로다
(어서 329쪽)
대저 묘란 무슨 뜻이뇨 오직 나의 일념이 불가사의 함을 妙라고 하며 불가사의한 마음도 미치지 못하고 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즉 일어나는 바의 일념의 마음을 찾아보면 있다고 말하려 하면 색도 질도 없고 또한 없다고 말하려 하면 갖가지로 마음이 일어나니 유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무라고 생각할수도 없느니라
有無의 두 말도 미치지 못하고 유무의 두마음도 미치지 못하며 유무가 아니면서 유무에 두루미치어 중도일실의 묘체로써 불가사의함을 妙라고 이름하고 이 묘한 마음을 이름하여 법이라고 하느니라
(어서 384쪽)
법화경은 사람의 모습을 비출 뿐만 아니라·마음도 비추느니라. 마음을 비출 뿐만 아니라·선업도 미래까지도 비추어 보심이 흐림이 없노라.
(신국왕어서 1521쪽)
나의 신심(身心) 외에는 선악에 있어서 머리카락 만큼의 법도 없으므로 그래서 나의 몸이 그대로 三身즉 一의 본각의 여래인 것이니라
이를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중생이라고 도 미혹이라고 도 범부라고 도 말하느니라
이를 나의 신상(身上) 이라고 아는 것을 여래라고 도 성인이라고 도 지자라고 도 말 하느니라
(어서 410쪽)
무도 유도 생도 사도 약퇴(若退)도 약출(若出)도 재세(在世)도 멸후도 모두가 본유상주(本有常住)의 거동(擧動)이니라. 무(無)란 법계동시(法界同時)에 묘호렌게쿄의 거동 이외는 없느니라. 유(有)란 지옥은 지옥이 있는 그대로 십계본유(十界本有)의 묘법(妙法)의 전체이니라. 생(生)이란 묘법의 생이므로 수연(隨緣)이요, 사(死)란 수량(壽量)의 사이므로 법계동시(法界同時)에 진여(眞如)이고, 약퇴(若退)인 고로 멸후이며 약출(若出)인 고로 재세(在世)이니라.
(어의구전 754쪽)
말법의 부처란 범부이고 범부승이니라
法이란 제목이고 僧이란 우리들 행자이니라
부처 라고도 하며 범부승 이라고도 하느니라
(어서 766쪽)
우리 함께 몇 번이고 읽으면서 사색하시고 그 감사함과 감동과 전율의 깊이를 더하시고, 더욱 순수하고 겸손하고 겸허한 마음자세로 대어본존님과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께 오롯이 다가가십시다.
우리들은 대성인 처럼 본불의 입장으로서의 자각과 책임감으로 자신의 일념을 무장하고 또 가장 낮은 자세와 마음씀씀이로 모든 것을 포용하고 격려하면서 나아가십시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이 어본존을 결코 타처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흉중의 육단에 계시느니라. 이것을 구식심왕진여의 도라고 하느니라.
(어서 1244쪽)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항상 여러가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日蓮등의 동류의 본회는 無上이란 南無妙法蓮華經 무상중에 극무상이니라
이 묘법을 가르켜서 무상보취라고 설하셨느니라
보취란 삼세제불의 만행만선의 제파라밀의 보(寶)를 모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 무상보취를 신로(辛勞)도 없고 行功도 없이 一言으로 수취하는 신심이며 불구자득이란 이것 이니라
(어서 727쪽)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항상 여러가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南無妙法蓮華經
南無妙法蓮華經
南無妙法蓮華經
항상 여러가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아지는 것은 불가사의,
나쁘게 되는 것은 필정.
이 경과 지가 명합하는 순간
즉 남묘호렌게쿄와 하나가 되어
발적현본하는 일념의 순간에
우리들 자신이 찰라에 본불, 석가불, 다보불, 지용보살의 상수 상행보살, 사대보살이 된다
모든 공덕을 무상보취, 불구자득으로 일시에 물려받고
그 불력과 법력 그리고 위광세력 까지 자기자신의 일신에 받으며
일념에 억겁의 신로를 다하면
본래 무작의 삼신이 염념에 일어난다
소위 남묘호렌게쿄는 정진행.
日蓮등의 동류의 본회는 무상
無上이란
南無妙法蓮華經 무상 중에 극무상
이 묘법을 가르켜서 무상보취.
묘호렌게쿄의 당체는
법화경을 믿는 日蓮의 제자 단나 등의 부모소생의 육신 바로 이것.
방편을 버리고 오직 법화경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번뇌, 업, 고의 삼도가 법신, 반야, 해탈의 삼덕으로 전하여 삼관 삼제 즉 일심에 나타나
그 사람이 소주하는 곳은 상적광토
이제 부터 우리들은 올바른 혈맥
구원실성의 석존
개성불도의 법화경
우리들 중생 셋은
전혀 차별없이 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바를 생사일대사의 혈맥.
남묘호렌게쿄 !
남묘호렌게쿄 !
남묘호렌게쿄 !
항상 여러가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여러가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