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평행
네이버블로그/ 인간에게는 의식 수준이 있다
④ 사회적 의식 또는 휴머니즘
인간은 살아가는 존재이다. 작은 단위인 나로 출발해서 가정 그리고 마음 또는 사회로의 확대 현상이 일정한 집단을 형성한다.
하여 사회적인 존재로 군집, 일종의 사회학적 출발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사는 일을 고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평안하고 아늑한 세상이기보다는 고통과 신음이 넘치는 아비규환의 공간이 인간사라는 뜻인 것이다.
여기서 어떤 추구의 길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마음, 결국 마음의 길이 결정되면서 자기의 삶에 무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슬픔의 피륙을 짤 것인가 아니면 화려한 색상의 비단을 만들 것인가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가 만든다는 자기 책임설이 곧 삶이다.
∇ 부정과 칼날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는 것이 답일 것이다. 전자를 낙관의 태도라고 한다면, 후자는 긍정보다는 저항의 칼끝으로 심장을 찌르려는 복수가 때로 시적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른바 권력에 항거하는 형태를 저항이라 말하고 순응하는 모양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모순의 시대에 목소리에 칼날을 감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도가 지나칠 때는 자기를 찌르는 비수로 둔갑하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70년대부터 모순의 극치에 항거의 목소리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시인은 김수영 시인이라 말들을 한다. 죽기 전에 쓴 「풀」은 마포구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그해, 48세 때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수영은 평가 이상의 평가를 누리고 있지 않나 한다. 이는 한국 시문단의 판단에 병폐가 아닌가 하지만 엄밀한 분석과 평가에 의해 명성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로 명망의 성가를 높이는 것이 대부분이라 생각되지만 사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는 구절은 췌사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시간이 허락됐었다면 틀림없이 그 구절은 삭제했을 것이다. 뿌리는 누워서는 논리상 안 되기 때문이다. 전문을 인용해 본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지난 60년대 말은 흐린 날씨의 사회라고 하겠다. 모순과 불합리가 권력자에 의해 또는 가진 자에 의해 침탈당하는 슬픔의 시대라고 해야겠다.
이때 바람은 훼방의 이미지라면 풀은 저항의 탁월한 이미지 구축의 시어였다. 그러나 맨 마지막 구절은 삭제한다 해도 아무런 의미상의 병해가 안 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영문학 전공에 미국의 국민시인 월터 휘트먼의 시집 『풀잎 속에서』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두 사람의 일치된 이미지는 오히려 김철수에서 잡초는 불에도 또는 마차의 바퀴가 지나가도 끄떡없는 저항의 이미지가 단단하다. 물론 시적인 완성도에서는 김철수의 「잡초」가 뒤처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미의 전개에서는 건강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긍정과 휴머니즘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을 했다. 모든 전재는 실존의 형태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존재 자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이면서 벗어날 수 없는 ‘고기 잡는 항아리’의 처지가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 또한 결국에는 휴머니즘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설득하고 말하는 길을 제시할 때, 감동은 더 커다란 사랑의 뜻을 가져오기에.
문학의 영원한 숙명은 결국 휴머니즘의 실천에 방법론의 전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시인은 순수와 깨끗함, 영혼이 맑아 추구하는 사랑과 용서하는 사도일 뿐, 고함치고 거드름 피우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감싸는 보자기를 펼칠 때 추위를 가려주고, 목마름에 물이 되는 것이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하는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젠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려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자
―김동명, 「파초」
조국을 벗어나 이국의 외로운 고독이 밀물지는 처지가 파초로 의인화 되었다. 갈증이 있고 또 남방을 떠난 몸은 추위에 가릴 수 없는 노출에서 휴머니즘의 뜻이 시인의 마음으로 감싼다. 샘물로 갈증을 시켜주고 추위를 가리기 위해 방안에 기거함을 허락한 시심은 곧 사랑의 마음이다. 더구나 종처럼 시중을 들기 위해 ‘우리’로 펼치는 마음에는 사랑이 넘치는 시심에 꿈이 더불어 피는 듯하다. 고함치고 욕지거리 하면서 살벌한 아우성이 아니라 뜻깊은 호의로 감쌀 때, 세상은 의지할 만하고 더불어 살기 위한 서로의 체온 나누기에 바른 사회가 될 수 있음을 「파초」는 역설한다.
나는 얼마나 깨끗한가
나는 얼마나 순결한가
대답이 머뭇거린다
죄 없음도 죄가 되는
사는 일 그렇기 때문
욕망이 문을 닫을 수는 없지만
나오지 말라 나오지 말라는
부탁 더불어
고개만을 숙이고
살아 예 이르렀어도
희색 빛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지는 내
그림자의 길이에
안도감이 다시
부끄럽다
―이승섭, 「순결과 깨끗」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잘해도 때로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는 경우도 있고, 너무 정직해도 아픔을 폭포로 맞을 때도 있다. 너무 하얗기 때문에 비난의 과녁은 피할 수 없는 경우도 너무 많다. 그러나 순결함이 미덕이고 깨끗함이 옳은 일이라면 감수의 파도를 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어렵다는 뜻은 이런 경우에도 적용될 것이지만 신념을 개성으로 내세울 때 구름은 항상 비켜간다. 순결하고 깨끗함 또한 인간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곧 휴머니즘의 정도에 이르는 말이 아닐까 한다.
시와 모든 문학의 본질은 휴머니즘의 밝은 표정을 찾아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 문학의 숙명인 이유가 아닐까? <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시평집(이승섭, 마음시회, 2022.)’에서 옮겨 적음. (2024. 4. 3. 화룡이) >
첫댓글 나는 얼마나 깨끗한가
나는 얼마나 순결한가
대답이 머뭇거린다
절대자 앞에 서면 누구나
부끄러움 뿐이지요....
'시와 모든 문학의 본질은
휴머니즘의 밝은 표정을 찾아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
문학의 숙명인 이유'라는 말씀을 죽비소리로 간직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