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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49,3.5-6
주님께서
3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시작 1,1-3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2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해줍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통해 당신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민족들의 빛으로 세울 것’이라는 예언자 이사야의 예고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소스테네스 형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증언하며, 성도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를 빌어 줍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두 가지로 증언합니다.
먼저, ‘첫 번째 증언’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
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말은 대체 무슨 말일까요?
사실 우리는 오늘도 미사 중에는 ‘하느님의 어린양’란 이름을 다섯 번이나 부릅니다.
대영광송에 한 번(“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영성체 예식에서 네 번(“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두 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어린양”의 네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야훼이레”, 곧 하느님께서 준비한 제물로서의 “어린양”(야훼이레; 야훼께서 준비하신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갔을 때,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에서 보듯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제사에 쓰기 위해 준비한 ‘제물’입니다.
둘째는 ‘파스카의 어린양’(탈출 12,1-27; 레위 23,5-6; 신명 16,1-7)입니다.
곧 하느님께서서 모세를 통해 이집트의 맏자식을 치는 죽음의 재앙을 내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맏아들을 살리기 위해 문설주에 발라진 ‘희생양’입니다.
셋째는 “아자젤”, 곧 대신 죽는 ‘속죄양’으로서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여 년 동안 사막을 헤매면서 사나운 맹수들이 위협할 때마다 염소나 양을 한두 마리 맹수들에게 보내주었고, 가나안에 정착 후에는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 제의로 바쳐지면서(매년 7월 10일),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양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하느님께 번제로 불살라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자기와 온 민족의 죄를 자복한 후에 광야로 내보냈던 “아자젤”, 곧 ‘속죄양’입니다.
넷째는 승리하신 ‘천상의 어린양’(묵시 5장)으로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함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신 분”(묵시 5,13)임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특별히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라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물질적 공간적 그릇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도, 옛날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사는 사람들도 그리고 장차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곧 ‘전 인류’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들, 동서고금의 전 세계 모든 인류의 죄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어린양’이심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의 죄인들을 없애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 또한 세상의 죄를 없애고, 평화를 주는 ‘어린양’으로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곧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을 따르는 우리 역시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소명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자신보다 뒤에 오신 분이지만 당신보다 앞서신 분이요, 이미 전에 증언한 분이요, 자신이 세례를 준 것이 바로 이 분을 세상에 알려지시게 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인 다음, ‘두 번째 증언’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증언입니다.
그는 먼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2-33)라고 환시를 통해 보고 들은 바를 말하고,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예수님 위에 머무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원이 존귀하신 분, 곧 아버지의 권능이신 성령으로 도유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생명의 푸른 잎사귀를 물어온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물어오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안에서는 하느님 아드님의 신적 생명이 자라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옷 입듯이 입었고(갈라 3,27), 그분은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일인지요!
그러니 이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활짝 드러내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
주님!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자신을 내어 주고 피 흘려 죄를 없애는 어린양이 되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서 위하여 바쳐지는 사랑의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보고 닮는>
지난주 주님의 세례 축일 때 예수에 대해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첫째 독서와 복음에서는 예수에 대해 각각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는 나의 종”
“하느님의 어린 양”, “하느님의 아드님”
“자기보다 앞서신 분”, “자기가 알려야 할 분”
저의 초등학교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공부하다 내려가 오래간만에 만나 술을 마시며 얘기하는데 성서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반가워서 세례받았냐고 물으니 그저 예수님이 훌륭한 분이기에 존경하고 삶에 도움이 되기에 성서를 가끔 읽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였습니다.
옛날 도덕 교과서에서 가르치듯 세계 4대 성인 중의 하나이고, 우리 인생에 있어서 스승이 될 만한 분 중의 하나이신 분 말입니다.
실제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부를 때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요.
그것도 나의 스승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좀 뛰어난 분을 일컫는 것으로.
저도 북한에 가면 선생님, 김찬선 신부 선생이라고 불립니다.
그저 ‘김찬선 씨’하고 부르거나 김 동무나 김 선생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김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는 싫으니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호칭을 들으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저를 마음으로부터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저를 종교인으로 진정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도 종교, 그것도 천주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그리고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선교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도, 스승도 아니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큰 스승으로 추앙받는 세례자 요한이 증언합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러기에 나보다도 훨씬 앞서시고 크신 분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이분은 그리스도를 빙자해 우리를 등쳐먹는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진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희생제물이 되실 분이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세상의 죄, 우리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의 물의 세례는 세상에 죄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회초리의 세례이지만, 예수님의 물과 성령의 세례는 세상의 죄를 자기의 것으로 끌어안고 자신의 희생으로 세상 모든 이의 죄를 씻는 사랑의 세례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자꾸 잘못을 저지르는데 아무리 타일러도 고치지 않자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놓고 당신의 종아리를 치라고 합니다.
네가 이렇게 잘못을 계속 저지르는 것은 내가 네게 나쁜 유전자를 주고 너를 잘 못 가르친 나의 잘못이니 나를 마구 치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희생양이 되게 하신 것도 이처럼 세상의 죄를 당신 죄로 짊어지고 없애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신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런 주님을 보라고 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주님을 봐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기만 하면 우리 과제가 끝납니까?
본 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죄를 씻을 뿐 아니라, 남의 죄를 나의 죄로 끌어안는 어린양을 보고 닮는 것, 이것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어린양>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해 주십니다.
그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진실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압니다.
이 시간 사랑이신 예수님의 희생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양에 관해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구약성경에서 보면, 어린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사 때 제물로 사용된 동물입니다.
제물로서의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제단에 올려졌고, 그때 제물의 피는 속죄의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죄의 용서를 청한 것입니다.
둘째는 파스카의 어린양(탈출12,3-13)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할 때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때 이집트 왕 파라오가 완고하게 말을 듣지 않자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는데 마지막 재앙이 이집트에 있는 모든 맏이의 죽음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맏아들부터 맺돌 앞에 앉은 여종의 맏아들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들이 모조리 죽을 것이다.”(탈출 11,5)
이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여 살리기 위하여 한 집에 한 마리씩 새끼 양을 잡아 제사 지내고, 그 피를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도록 하여 이스라엘이 죽음의 재앙이라는 심판을 면하고 노예 생활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에게 어린양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건너뛰다.”라는 의미의 파스카 축제가 지속되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희생양을 파스카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주님의 종을 얘기합니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깍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 53,7)
여기서는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음으로써 그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실 주님의 종이 도살자의 칼 아래 죽임을 당하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비유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언되신 주님의 종이 바로 그분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사 49,3.6)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의 죽음이 지닌 속죄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의 양이자 파스카의 양, 곧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없애시는 참된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의 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1요한 4,10).
예수님은 우리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 향기로운 예물이십니다.
미사 안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찾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사제가 축성된 빵을 나누는 동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절한 청원과 평화를 갈망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영하기 직전 사제는 성체를 높이 들어 외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그리고 우리는 응답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이 말씀 안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죄의 용서와 평화의 선물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영성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희생의 삶을 오늘 여기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속죄와 희생양이 되신 어린양을 모시는 우리의 행위에는 우리도 어린양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그러므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신심을 가지고 모시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를 위해 밥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웃의 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는 내 밥이야! ’하면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며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합니다.
내가 “네 밥이 되어 줄게!”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천치가 되는 세상입니다.
자기 이익과 권리만 주장하고 남의 권리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이 팽배해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똑똑한 사람은 넘쳐나고 갈수록 각박하고 메마른 사회가 되어갑니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 주는 마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삶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희생은 핀 한 개를 줍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다가오는 이웃을 향한 희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길만이 세상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음을 믿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요한 3,16)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에페 5,2)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필리 3,8-9)
어린양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 자주 주님 앞에 무릎 굻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구원자이시며 희생제물이 되신 주님은 살아있는 성교회의 심장인 감실 안의 성체로 현존”(교황 바오로 6세)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루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다른 건 몰라도 ‘사랑’은 가르치며 배운다>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행복일까요?
제가 지금까지 얼마 안 되는 시간 살아오며 깨달은 것은 사랑할 때, 그래서 사랑 받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한 여대생이 워렌 버핏에게 성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워렌 버핏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면, 그게 성공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사랑해줄까요?
사랑은 주는 만큼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먼저 주시기 위해 인간이 되어 우리 양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증가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받고 구원받습니다.
세상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 25,29)
복음에는 이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가지려면 먼저 더 가져야 합니다.
더 가진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감사하면 가진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있는 것에 감사하면 더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자의 특징은 기쁘게 나누어준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나누어줄까요?
다른 이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증언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더욱 충만히 내려주십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내용의 복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증언하였지만, 처음엔 알지 못하고 증언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 1,31)
알지 못하는 분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증언하는 중에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알아볼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요한 1,33)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 복음 선포 소명을 받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믿음이 강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해야 합니다.
해야 어렴풋이 아는 분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저도 대학생 때 수녀님의 강요에 못 이겨 교리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리교사를 하다 보니 내가 가르치는 분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 알고 싶은 마음이 하.사.시.를 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주님의 부르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더 폭넓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함께 성장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깔때기 효과’, 혹은 ‘싱크대 효과’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한 곳에 무언가가 빨려 들어갈 때 주위에 있는 것들이 그곳으로 모입니다.
주님의 은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좋은 곳으로 당신 은총을 내보내려 할 때 은총은 그곳으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주려고 하는 자가 받는 법입니다.
우리가 아는 게 없다고 선교하지 않으면 아는 것마저 잊어버립니다.
가진 사랑마저 빼앗깁니다.
그러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선교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차게 됩니다.
제가 보좌 신부 때 사제인 제게 선교한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 할머니는 저의 미사를 6개월씩이나 나오셨지만, 저를 알아보지 못하고 되려 선교하셨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할머니는 모든 사람이 사제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하는 사람이 받는 은총입니다.
김하종 신부도 그랬고 이태석 신부도 그랬으며 마더 데레사도 그랬습니다.
모두가 선교하려고 하다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마련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느님 지식과 사랑은 가르쳐야 늡니다.
가르치면서 자신의 부족한 면을 발견하게 되고 보충하고 더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전하는 이들이 당신을 모른 채 선교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을 주시고 마치 모세의 지팡이처럼 힘을 실어주십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해서 전하지 못한다고 하지 말고 전하지 않기 때문에 만나지 못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모든 이들의 스승이 되도록 파견하십니다.
누구든 사랑의 교사가 되도록 합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8-20)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게 된 비결 - 광야에서의 대피정, 오랜 침묵 수행, 열렬한 기도 생활>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직전 유다 전역을 주름잡던 대세 인물이 세례자 요한이었는데, 하도 저명 인사가 되다보니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뒤를 쫓고 있었습니다.
스승의 마음은 대체로 비슷하겠지요.
자식 같은 제자들과 평생 같이 가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공과 정성을 들여 만들어놓은 인재들이기에 스승에게 있어 제자들은 삶의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미래와 노후를 책임져줄 든든한 보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떠나보내기가 무척 아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정말 특별합니다.
드디어 그토록 간절히 학수고대했던 예수님께서 눈앞에 지나가십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가 제자들을 향해 크게 외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요한복음 1장 29절)
참으로 많은 의미가 함축된 세례자 요한의 선언입니다.
‘제자들아! 드디어 때가 왔다.
내가 너희들을 내 제자로 양성시킨 최종 목표가 이루어질 순간이다.
바로 저분이다. 따라가거라.
나는 괜찮으니 내 걱정일랑 조금도 하지 말고 지금 바로 저분을 따라가라.
앞으로 저분을 스승으로 모시거라.’
애써 양성시킨 자신의 제자들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제 달릴 곳을 다 달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모든 사명을 120% 완수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기에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습니다.
구세사의 주인공으로 점점 떠오르시는 예수님을 흡족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자신을 스스로 쇠락시키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뵙고 지체없이 그분임을 알아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의 대피정, 오랜 침묵 수행, 열렬한 기도 생활을 통해 깨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과는 정반대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등장하신 하느님을 몰라뵙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은 메시아 도래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했습니다.
영적 생활에 매진하지 않고 세상일에만 몰두했기에, 내면을 갈고 닦지 않고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였기에, 영적인 소경 상태로 살았기에 그토록 확연한 모습으로 다가오신 메시아를 알아 뵙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고, 메시아를 박해하고, 그분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서 살상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하느님이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하느님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하느님과 가장 멀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여러 순간, 여러 변장한 모습으로 우리 눈앞을 스쳐 지나가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둔감함과 미련함으로 인해 지척에 계시는 주님을 몰라뵙는 과오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봐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과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일은 하느님께서 직접 계시를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무슨 공부나 연구를 통해서 얻는 지식도 아니고, 무슨 수행이나 수련을 통해서 얻는 깨달음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시는 은총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마태 11,27)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알려 주셔야만 예수님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총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요한 7,28)
이 말씀은 “너희는 내가 나자렛 출신 목수 예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입니다.
인간 예수가 누구이고, 어디 출신이고, 무슨 일을 하면서 살다가 죽었는지를 아는 것은 누구든지 조금만 공부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는 은총을 받은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총은 누가, 어떻게 받는가?
하느님께서 누구에게는 그 은총을 주시고 누구에게는 안 주시는가?
특별히 선택되고 뽑힌 사람만 그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에 응답하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응답하기를 거부하고 안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알게 되지만, 안 믿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을 모르는 채로 끝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쪽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은 죄 자체를 없애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 즉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신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분입니다.
죄에서 구원되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면 회개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저절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라는 말은 “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곧 오시는데” 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라는 말은 요한복음 머리글에 있는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분이라는 믿음은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믿음과 하나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옛날의 예수님이 아니라 오늘의 예수님, 즉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머리글에 있는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는 일이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일이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을 가리켜서 ‘하느님의 자녀’ 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 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토마스 사도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요한 20,28).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며,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믿는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 하느님의 자녀다운 수행자, 성소자, 증언자의 삶>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
(시편 40,9)
참으로 오랜만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 많은 국민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 주인공의 영화, ‘영웅’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사형을 앞둔 아들 안중근 도마에게 보낸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입니다.
동영상을 대할 때 마다 코끝을 찡하게 하며 눈물짓게 하는 장면입니다.
너무 감동스러워 두 번째 강론에 인용합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 거리가 될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天父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제가 주목하는 것은 조마리아 어머니의 신앙입니다.
흡사 마리아 성모님과 예수님 모자사이처럼 느껴지는 조마리아와 안중근 도마 모자의 관계입니다.
주님께 대한 깊은 믿음없이는, 사랑없이는 이런 마지막 편지를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안중근 도마 역시 얼마나 신앙으로 무장된 인물인지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대로 안중근 도마 의사의 죽음은 말그대로 순국殉敎의 죽음, 순교殉國의 거룩한 죽음입니다.
또 한 분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작년 2022년 12월31일 향년 95세로 선종한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입니다.
아마 참 좋은 선종의 죽음보다 이웃에 줄 수 있는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선종의 죽음은 그대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삶의 요약입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교황님께서 마지막 남긴 임종어로 그의 평생 삶을 요약합니다.
소화 데레사의 임종어도 이와 똑같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주님의 증언자로 일관된 삶을 사신 성인같은 교황님입니다.
프란치스코 현임 교황님과의 형제적 우정의 사랑도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베네딕도 교황의 ‘나의 영적 유언서’ 내용도 감동적입니다.
겸손과 진실,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유언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님의 증언자로 한점 부끄럼없는 최선을 다한 삶이셨습니다.
“1.감사입니다.
우선 언급되는 것이 하느님께, 부모님께, 이웃에게 감사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2. 용서입니다.
알게 모르게 잘못한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3. 믿음입니다.
교회의 모든 이에게 믿음에 대한 당부입니다.
“믿음을 굳게 지키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교회는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그의 몸입니다.”
4.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겸손되이 요청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나의 모든 죄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영원한 거처로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내게 맡겨진 모든 이에게 날마다 나의 진심어린 기도가 향할 것입니다.”-
참 겸손하고 아름다운 평생 삶이 요약된 유언입니다.
우리에게 참 좋은 삶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발광체 주님을 잘 반사한 반사체 증언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긴 유언이 평생 삶을 요약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침 예전에 어떤 자매가 들려준 임종시 남편의 고백, 세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1. 고맙다, 2. 미안하다, 3. 사랑한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지, 모든 앙금은 눈녹듯이 사라지고 사후에 더욱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고백은 마지막 임종 시 하느님께 드려도 참 좋겠다 생각되어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으로 내적으로 아름답고 행복하게, 자유롭고 부요하게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세가지 답을 찾아 냈습니다.
첫째, 주님 사랑의 수행자修行者로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세례자 요한은 물론 모든 성인들의 예외없는 공통점입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당신 수도승들에게 세상에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있어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살려고 노력한 분이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현존을 ‘지금 여기에’ 현재화하려고 노력한 가톨릭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셨던 분입니다.
교황님은 진리의 협조자라는 주교 문장처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사랑하며 그분의 협조자로 사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은 물론 모든 성인들이 다음 제 기도문의 고백에 공감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둘째, 하느님께 불림 받은 주님의 성소자聖召者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존재 이유이자 존재 근거입니다.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불림받은 존재로 하느님 뿌리에 닿아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존엄한 품위의 근거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화답송 후렴이 불림 받은 우리의 성소를 새삼 확인하게 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수행자의 삶에 항구할 때 우리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닌 불림 받은 성소자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사도로 부르심은 받은 바오로가 그 성소의 그 좋은 모범이며 다음 사도의 말씀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께 불림받은 주님의 종은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 또한 불림받은 성소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성소를 깨닫는 주님의 종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어제 연중1주간 토요일 아침성무일도시 베드로 2서 독서 말씀도 은혜로웠습니다.
새삼 우리의 성소가 얼마나 큰 은총의 선물인지 깨달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시고, 뽑아 주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절대로 빗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고, 또한 여러분에게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2베드 1,10-11)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證言者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증언자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을 알게 되어 저절로 주님의 증언자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성소자에 이어 주님의 증언자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 세례자가 그 좋은 증언자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태양처럼 결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아니라 태양 빛을 반사하는 달처럼 발광체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일뿐입니다.
주님을 증언하는 삶은 바로 발광체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의 삶입니다.
사랑의 수행자의 삶에, 주님의 성소자의 삶에 충실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증언자의 삶, 반사체의 삶입니다.
바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주님을 증언하는 모든 성인들은 물로 우리 역시 이스라엘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과연 주님의 영광을 잘 반사하는 반사체로서의 증언자의 삶인지 반성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 세례자는 참으로 주님을 잘 반사하는 증언자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한 요한 세례자인지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알아보고 고백하며 이웃들을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감격에 벅찬, 주님의 빛을 찬연히 반사하는 요한 세례자의 증언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일러 주셨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증언자의 모범이 주님의 종인 복음의 요한 세례자, 그리고 바오로 사도입니다.
주님의 증언자되기에 앞서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사랑의 수행자였고, 자신의 성소를 깊이 깨달아 알았던 주님의 성소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길이 확연해졌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의 수행자, 주님의 성소자, 주님의 증언자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 중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엄중하고도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사 49,6ㄷ)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우리의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증언이 들립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사 49,3).
교회는 이 "종"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주님께로 모여들게 하고, 주님께서 이루실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게 하는 사명을 지닙니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과 사랑으로 따릅니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사 49,6)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빛에서 나신 빛이시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요한 1,4-9 참조).
그분은 세상에 짙게 드리운 어둠을 물리치시고 새 빛을 선사하십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
증언은 단순한 해설 이상의 선언입니다.
게다가 증언하는 이의 공신력이 증언 내용에 무게를 더하지요.
요한은 온 이스라엘이 예언자로 인정한 존재이니 이 증언은 과연 참되고 진실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우리도 매일 미사 때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시라고 고백하며 자비와 평화를 청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희생된 어린양, 율법에 따라 희생제물이나 번제물로 바쳐진 어린양이고, 또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바로 그 어린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이사 53,6)지요.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영성체송)
예수님께서 기꺼이 내놓으신 당신의 살과 피로 상을 차리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 앞에 놓인 잔에 넘치도록 가득 부어진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이고, 또 그분과 우리의 혼인잔치에 마련된 사랑의 포도주이며 성령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그 답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 받은 여러분"
(1코린 1,2)
그렇습나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 정체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무리, 거룩한 제자를 가리키는 "성도"라는 말씀 안에 곧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일은 참 행복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그분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존재라면, 우리의 사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분의 본질까지 받아들여야 합니다.
곧 어린양이신 그분처럼 되어야 합니다.
피 흘리고 죽어간 창백한 모습의 희생된 어린양을 관상합니다.
약하고 힘 없고 아무 보호장치도 없이 제단 위에 누워 있습니다.
그의 살은 세상을 풍요롭게 할 생명의 양식이 되고 그의 피는 세상을 정화하고 흥겹게 할 포도주가 됩니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악의와 독기 앞에서 무장해제가 된 존재입니다.
저 어린양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자기애로 똘똘 뭉쳐 살아온 우리가 저항도 항변도 없이 침묵하며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작고 소소한 일에서라도 세상을 돌고 돌아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악의와 독기가 우리에게서 더 확산되지 않고 멈출 수 있다면 세상은 한층 더 선량해지고 더 밝아지고 구원의 길도 더 확장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위한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만큼은 못되지만, 보복과 앙갚음을 포기해 악과 독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닮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친한 이라도 섣불리 이 선택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린양이신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죽음이니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더 애틋하고 더 감미롭게 느껴진다면, 지금 그분이 함께 어린양이 되자고 부르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남은 건 응답입니다.
주님의 종이고 어린양이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그래서 작은 빛이십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이 땅에 터를 닦으시고’라며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그냥은 외우기 힘든 것도 곡조를 붙이면 외우기가 수월한 경우가 있습니다.
학생 때 조선의 왕 이름도 그렇게 외웠고, 어려운 원소기호도 그렇게 외웠습니다.
100명의 위인 중에는 왕이 많았고, 장군도 많았습니다.
학자와 선비도 있었고, 스님도 있었습니다.
예술가도 있었습니다.
안중근은 애국, 이완용은 매국이라는 노래 가사도 있었습니다.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도 있었습니다.
제게 가장 인상적인 이름은 ‘순교 김대건’입니다.
노래 가사를 만든 사람이 천주교 신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사가에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대한민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한류의 바람을 타고 최근에는 예술 분야에서 한국을 빛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BTS는 춤과 노래로 감동의 무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의 스마트폰과 자동차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빛낸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아 최초의 천주교인이 되었던 이승훈 베드로가 있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과 124위 복자가 있습니다.
머나먼 땅에서 사목을 하다가 순교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사제들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렸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한국인 첫 사제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님이 있습니다.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던 정하상 바오로, 여성 전교회장 강완숙 골롬바가 있습니다.
어린 아기와 생이별을 하며 관노로 제주도에서 살았던 정난주 마리아가 있습니다.
얻어먹을 것만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이라며 ‘꽃동네’를 일구어 가난한 이, 병든 이들의 쉼터를 만들었던 오웅진 요한 신부님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참된 사제의 길을 보여주었던 이태석 요한 신부이 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아름다운 참 신앙인들이 있기에 교회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마음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들의 빛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어버렸고, 앗시라아로,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갔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참담한 현실입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과 굶주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는 희망의 눈으로 보았고, 언젠가 이루어질 하느님나라를 선포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을 볼 수 있었습니다.
헤로데, 바리사이파 사람, 율법학자들은 결코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권력, 명예, 재물, 욕망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권력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면 경쟁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욕망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면 예수님의 허물과 단점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분의 신분, 학력, 직책이 먼저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성령과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가 많았습니다.
성공, 성장, 물질, 자본주의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절망 속에서 피는 희망의 꽃을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편견과 아집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곤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명예, 권력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하느님나라’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무시하는 위험한 집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잡아 가두어야 했고,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했고,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는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오로 사도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매 미사 때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었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삶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지친 삶의 일상에서 위로를 얻고 희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신앙이 언젠가 교회를 빛낸 위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책을 읽다가 저자가 수도원에서 피정하면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매일 바치는 시간경이라고 하는 성무일도를 함께 한 체험을 적었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바쳤던 기도보다 훨씬 길고, 또 시편이 주를 이루기에 이해하기 힘들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신심이 깊지 않고 전례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은 시도하기 어려운 과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 한 번 참석했다가 끝나자마자 지쳐 쓰러졌다고 자기 책에 적었습니다.
아마 이 작가의 글을 읽는 사람은 성무일도를 끔찍할 정도로 어려운 기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성무일도를 바쳐온 저로서는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쩌다 한 번 경험하는 것과 30년 넘게 해오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 큽니다.
성인이라면 그 누구도 매일 아침 씻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머리 감기도 너무 어렵고 무서웠던 일로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좋아하는 연인도 처음에는 만남에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요?
아직 만남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이렇다고 봅니다.
신앙생활이 어색하고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알지 못하고 또 주님을 많이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질수록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말합니다.
거친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 세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모두의 구원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자를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본인 스스로 “나도 저분을 알지 못했다.”(요한 1,31)라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을 알기 위해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사람들 앞에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요.
예수님의 인기보다도 압도적인 인기였습니다.
요한의 말 한마디면 군중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알기에 자신을 높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는 겸손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라는 메시지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1코린 1,3 참조).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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