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당전쟁사
ⅴ.당나라의 군사조직체계
고수 제 2차 전쟁에서 수양제는 좌우익 24군과 친위 6군에 113만 명을 동원하였다고 하며 이것을 근거로 계산한다면 수나라 1군의 규모는 3만 7천5백명이 된다. 『논어(論語)』<술이편(述而篇)>에서 1군의 규모를 1만 2천명이라고 한것에 비한다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수나라 1군은 기병 4개단(團)과 보병 4개단, 치중병(輜重兵:수송병)4개단의 2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병 100명, 보병 200명을 1대라 하고 10대를 1단이라고 한다. 즉 수나라 1군의 기병 4개단 4000명과 보병 4개단 8000명 그리고 치중병 4개단 2만 명을 합하면 3만 2천명이라는 결과를 볼 수 있고 논어의 기록과는 차이가 나지만 위에서 본 단순계산의 3만 7천5백 명과도 근접한 수치가 되어 수나라의 병력이 100만에 육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수나라시대 1군의 병력인 3만 2천명으로 당태종의 친위 6군을 계산하면 19만 2천명이며, 이적의 6만명과 장량의 수군 4만 3천여명을 합해 29만 5천명이 되지만 친위부대가 이적이 이끄는 주력부대보다 3배나 많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당나라 군의 규모는 어느정도 될 것인가...
당나라의 기본적인 군사체제는 부병제(府兵制)다. 부병제란 20∼60세에 이르는 장정들에게 병역의무를 주어 농사철에는 농사짓게 하고 농한기(農閒期)에는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 제도이다. 당나라초기 전국에는 농한기에 장정들을 훈련시키는 곳인 절충부(折衝府)를 두어 세 집중 한 집의 장정을 뽑아 훈련시켰다. 다시 말해 3년에 한집 꼴로 징집하여 병사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본래 당나라는 관중을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당나라의 군사제도는 관중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건국직후 당 고조는 관중지방을 12개의 도(道)로 분할하였고 각 도에는 군부(軍府)를 설치하여 표기장군(驃騎將軍)과 거기장군(車騎將軍)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620년 12도를 폐지하고 12개의 군(軍)으로 편성하여 각 군에 최고 책임자로 장군(將軍)을 한 명씩 두었고 623년에는 12군을 폐지하고 표기장군은 통군(統軍), 거기장군은 별장(別將)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돌궐과의 전쟁이 치열해지자 625년에 다시금 12군을 복구시키고 장군 1명과 부장(副將) 1명씩을 배치시켰다. 그리고 636년에는 통군을 절충도위(折衝都尉), 별장을 과의도위(果毅都尉)로 개칭하고, 각도에 설치한 군부들을 절충부라 명명했다.
당나라 초기 이렇게 생겨난 절충부는 이후 전국에 630여개를 만들었고 효율적인 군사운영을 하였다. 이 절충부를 40∼60개를 묶에 16개의 위(衛)로 분속시키고, 여기에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장군(將軍)·절충도위(折衝都尉)등을 배치시켜 놓았으며 절충도위가 대부분의 절충부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리고 위(衛) 위에 사령부 총부(總部)가 중앙에 위치하여 중앙과 지방의 군령권(軍令權)을 행사하였다.
각 절충부는 단(團)여(旅)대(隊)화(火)로 구성으로 되어 있고, 절충도위 밑으로 교위(校尉)여수(旅帥)대정(隊正)화장(火長)이 각각 통솔하게 하였다.
보통 절충부는 1000명으로 구성되었고, 절충도위 1명, 교위 5명, 여수 10명, 대정 20명, 화장 100명으로 체계가 이루워졌고 화 다섯을 대라 하였고 대 둘을 여라 하였으며 여 둘을 단이라 하였고 단 다섯을 절충부라 하였다. 당나라 630여개의 절충부에 각각 천명 씩 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 최대 병력은 약 63만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수도방위를 맡은 병사들과 각 변방을 지키는 방병(防兵)들의 20∼30만명을 제외하면 실제 유동병사는 3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대규모의 원정이 감행될 때에는 별도로 행군(行軍)을 조직하여 부족한 군사를 충당시켰다고 한다. 외정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을 30만명으로 제한시킨다면 당 고종이 661년 조직한 35군은 아무리 그 병력이 많다 한들 30만∼40만명을 넘을 수는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661년 조직한 35군은 당나라 외정의 최대 군사규모였다. 그러므로 이 때의 35군을 30∼40만명의 수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을 근거로 당나라 1군의 규모를 추측해 본다면 1군에 약8천명∼1만명 정도가 배속되어 있으며, 35군이라는 병력은 28만명∼35만명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서 당나라 35군을 35만군이라고 기록한 것과도 일치한다. 물론 당 태종의 6군은 이런 계산만으로도 추측이 가능하지만, 당 고종의 35군은 그야말로 대규모의 원정군이기 때문에 행군이라는 특수한 부대도 고려해 봐야 하기 때문에 단순 계산만으로 35만명정도라는 계산에는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661년 당시 당나라의 인구수(640년경 인구수:약 1000만명)를 생각해 본다면 35만명∼40만명을 최대병력이라 하여도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당 태종의 친위 6군은 4만 8천명 내지 6만명정도 였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해지고 고·당 제 1차 전쟁에 투입한 병력은 당 태종의 6군(4만 8천∼6만명 )+이적의 보기 6만명+장량의 수군 4만 3천명+장검의 호군(+α) 로 약 17만명+α 라고 볼 수 있다.
ⅵ.고·당 제 1차전쟁(645년)
당 태종은 그 전까지 고구려로 공격하였던 나라들의 전략과는 달리 군대를 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육군은 2갈래로 나눠어 갔다가 요동성에서 합치는 분진합격(分進合擊)이라는 작전을 세워 수행하였으며, 육군과 수군도 최종목적을 평양으로 진격하는 수륙분진합격의 전체적인 전략을 세워 전쟁을 수행하였다.
제 1차 전쟁에서 당군은 요하(遼河) 상류를 건넌 이적과 요하 하류를 건넌 당 태종으로 육군을 구성하였고, 산동(山東)에서 출발하여 요동의 비사성(卑沙城)으로 향하게 한 장량의 수군으로 군대를 편성하였다.
당태종 이세민의 6군은 요수를 넘어 이적의 군대와 합치는 것이었고, 이적은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6만의 군대를 통솔하였으며, 강하왕 이도종은 요동도 행군부총관 그리고 장검또한 오랑캐 군대를 이끌고 이적의 군대와 함께 통정(通定:현 금주시 - 요하 중류에 위치)을 지나 요수를 건넜다.
육군의 주력군인 이적은 현도(玄 :개모성,현 무순시)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장량은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하여 수군 4만명을 통솔하고 평양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이후의 전쟁상황은 삼국사기와 신당서 구당서를 보고 한 것으로 철저히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쓴 전쟁의 모습이다.(삼국사기는 자치통감을 보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실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기록을 검토해야 한다.
645년 3월 이적은 영주치소 유성(柳城)을 출발하여 회원진으로 향하는 척하면서 고구려군을 속이고 북진하여 4월 1일 통정에 도착하였다. 이적은 통정에서 장검은 오랑캐의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서 요수를 건너 건안성(建安城)으로 향했고, 이적은 통정(通定)에서 요하를 건너 개모성(盖牟城)를 공격하였고, 개모성을 공격하면서 군대를 나누어 부총관 이도종을 신성(新城)으로 보냈다.
이도종은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랑(曹三良)과 기병 10여명을 선발대로 보내 성문에서 시위를 벌였으나 고구려군은 수성으로 일관하였다. 신성함락이 어렵다고 생각한 이도종은 4월 15일 남진하여 이적이 있는 개모성으로 합류한다.
그러나 이때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 나중에 당군의 후미를 잡는 결과를 발생시킨다. 이적과 도종은 4월 26일 개모성을 함락시킨후 양곡 10만석을 획득하였고 포로 1만여명을 얻은후 개모성을 개주(盖州)로 고쳤다고 한다. 장검또한 이때 남으로 진격하여 건안성을 공격, 고구려의 군사들과 전투를 벌여 이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고구려군과 싸운 전쟁에서의 한 승리만을 말할 뿐 건안성의 함락이나 그 이후의 장검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장검의 부대는 4월 초순에 요하를 건너 건안성을 공격했고 5월 초순 비사성을 함락시킨 장량군또한 건안성부근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장검의 건안성공격은 실패로 끝났거나 처음부터 건안성의 함락을 목적에 둔 것이 아닐 것이다. 장검의 부대 구성이나 군대성격을 고려하여 본다면, 호군을 이끈 장검의 부대는 단순히 선봉부대로서 건안성을 먼저 공격하게 하여 고구려군의 시선을 건안성으로 돌리게 한다음 주력군인 이적의 부대는 북쪽의 신성과 개모성을 공격하여 단기간에 함락시키자는 전술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장검의 부대가 건안성 공격직후 후퇴한 것은 건안성공격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한편, 2월 말 내주(산동)에서 출발하여 비사성으로 향한 장량의 군대는 5월 2일 비사성에 도착하였다.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서문에만 올라갈수 있었으므로 장량의 기습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총관 정명진(程名振)은 비사성주위를 정찰한 후 총관 왕대도(王大度)를 선두로 내세워 야간기습작전을 펼쳐 비사성을 함락시키고 8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비사성을 함락시킨 장량은 총관 구효충(丘孝忠)에게 일정량의 부대를 내주어 압록강으로 보내 정찰하게 하였고, 한편으로는 군대를 건안성을 향하게 하였으나 건안성부근에서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는다. 갑작스런 고구려군의 습격으로 장량은 당황해하며 책상에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량의 이 모습을 본 부하들은 장량이 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침착하게 앉아있다고 착각을 하였고 도리어 장량을 보고 용맹하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총관 장금수는 장량을 대신하여 군을 지휘하여 고구려군과 싸워 격퇴시킨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겼다는 수준이 단순히 고구려군을 쫓아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건안성을 직접 공격하지는 못하고 건안성의 군사활동을 견제하는 역할에 불과하였다.
이적이 개모성을 함락시킨후 요동성(遼東城)에 다다랐을 때 이적보다 늦게 출발한 당 태종은 요수를 건넜는데, 이때 요택(遼澤)을 건넜다고 한다. 요택이란 요동의 진흙벌판이라는 뜻으로 갯벌을 생각하면 적당하다. 요하는 보통은 넓이가 30m 불과하지만 홍수가 날 경우에는 10Km도 더 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계속됨에 있어 당연히 그 지방에는 퇴적물이 쌓여 갯벌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요택은 요하하류에서부터 요양시 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적의 군사처럼 요하의 중류로 돌아서 가지 않는한 요택은 반드시 건너야 하는 것이 된다.
당태종은 요택을 건넌후 이적과 군대를 합류하는데, 그 전 이세적의 부장인 강하왕 이도종의 무용담이 그려진다. 고구려는 5월 1일 국내성과 신성에 있는 군사 4만을 요동성에 원군으로 보낸다. 강하왕 이도종은 국내성와 신성에서 온 병사들은 먼길을 와서 지쳐 있을 것이니 먼저 선재 공격을 하면 이길 것이라는 작전을 세운다. 전쟁이 시작되자 과의도위(果毅都尉)마문거(馬文擧)는 자신의 용맹함만을 믿고 고구려진영으로 진격하여 고구려군과 싸운다. 이때 고구려군은 짐짓 도망가는데, 작전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마문거가 고구려군을 따라 깊숙이 따라가게 되자 고구려군이 반격하였기 때문이다. 고구려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당군의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는 재빨리 도망가서 당군은 패배하여 철수하였다. 행군총관 이도종은 당군을 수습하였고, 그러나 이도종이 재빨리 당군을 수습하여 효기위(驍騎衛)소속의 기마 4천을 이끌고 고구려군 후방을 공격하여 군사 1천명을 베었다는 것이다.
5월 5일 당 태종은 이적의 군대와 합류하여 요동성근처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친후 마문거를 중랑장(中郞將)으로 승진시켰으며 도망쳤던 행군총관 장군예를 잡아 참형시켰다.
당태종과 이적의 군대는 요동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나, 성 주민들의 방어로 인해 12일이나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다. 요동성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어 고구려사람들은 주몽사당에서 기원을 하며 성의 방어를 행했다고 한다. 중국사서는 이것을 매우 신기한 듯이 적어놓았지만, 고구려는 주몽을 시조신으로 모셨기 때문에 요동성에 주몽사당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뿐더러 주몽사당은 요동성뿐만 아니라 다른 대성(大城)에서도 모셔놨을 것이다.
이적은 3백보(약 300m)길이를 날아가는 포차(砲車:발석차)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면서 충차(衝車:돌격수레)를 성벽과 성문에 부딪쳐 성을 공격하여 곳곳을 허물어 놓았다. 고구려군은 이 허물어진 곳에 동아줄을 묶어 매꿔놓으면서 방어했으나, 피해는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10일간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과 당군사이에는 사상자만 날뿐 전쟁의 진척은 보이지 않았디. 그러나 5월 17일 남풍이 강하게 불자 당군은 위치를 성의 서남쪽으로 옮긴 후 충거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의 남쪽 성루에 불을 질러 요동성의 군사들을 혼란케 만든후 성에 올라가 고구려군과 백병전(白兵戰)을 벌여 마침내 함락시키고, 군사 포로 1만 명과 남녀 5만 명 그리고 양곡 50만석을 얻었으며, 요동성을 요주(遼州)로 고쳤다.
요동성을 함락시킨후 이적은 5월 28일 요동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백암성(白巖城)에 도착하였는데, 요동성의 함락소식을 접한 백암성 성주인 손대음(孫代音)은 당나라의 군사를 두려워하여 자진 항복을 하겠다고 하였으나 오골성(烏骨城)에서 1만의 원군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는 생각을 고쳐 항전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당의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이사마(李思摩)가 백암성의 군사들이 쏜 쇠뇌를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 한편 오골성에서 출발한 원군 1만은 백암성 동남쪽 200리 지점인 연산관(連山關)에서 계필하력의 경기병 800명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계필하력은 고구려군대에 포위되었고 창에 허리를 찔리는 부상이 당하여 위기를 맞았으나 때마침 당의 원군이 와서 고구려군을 격퇴하여 1천명을 죽이게 되자 오골성의 원군은 퇴각하였다. 오골성의 원군이 퇴각하고 당군이 성의 포위를 풀지 않자 결국 성주 손대음은 6월 초 당군기(唐軍旗)룰 세워 놓고 항복하였다.
당군은 백암성이 스스로 항복으로 하자 성을 암주(巖州)로 고치고 항복한 손대음을 암주자사(巖州刺史)로 임명하였다. 백암성을 함락시킨 당군은 6월 20일 안시성에 도착하여 군영을 정비하였다. 6월 21일 연개소문은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南部褥薩) 고혜진(高惠眞)가 말갈·고구려군대 15만명을 이끄는 원군을 안시성에 보냈다. 6월 21일밤 당태종은 작전회의를 벌였고 고구려의 움직임에는 세가지가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였다. 지구전이 상책이고 성안사람들을 데리고 도망가는 것이 중책, 당군과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하책이라 하였고, 당태종은 고구려군은 하책을 쓸 것이다라고 예측하였다.
삼국사기와 신·구당서에 의하면 대로(對盧:구당서) 혹은 대대로(大對盧:신당서)인 고정의(高正義)가 지구전(상책)을 펼치자고 하였으나 고연수는 고정의의 말을 무시하고 진격했다가 이적의 유인작전에 말려 주필산 위로 진을 치게 되었고, 기습 매복작전을 사용한 당 태종의 계책에 의해 고연수·고혜진은 결국 당군에게 패해 항복하였다고 한다. 항복한 고연수군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구당서와 삼국사기가 차이를 보인다. 구당서에서는 15만 6천8백명이 항복했다고 했지만, 삼국사기에는 3만 6천8백명으로 기록하고 있어 두 사서간에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쨌든 당군을 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였다고 생각하여 고연수가 진을 치고 있던 산을 이른바 주필산(駐 山)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주필산전쟁의 전개과정에는 의문시되는 점이 있다. 김용만박사는 고연수·고혜진의 군사는 15만명이 아닌 1만 5천명이었을 것이다 라고 추측했다. 1만 5천명이라 주장한 근거는 모르겠으나, 15만명이라는 숫자 자체는 충분히 의심할 여지가 있다.
우선 고연수와 고정의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고구려 후기 관등은 대략 이러했다.
<대대로-대로-막리지-주부-태대사자-조의선인-대사자-소대사자-대형-발위사자-상위사자-소사자-소형-제형-과절-불절-선인-자위>로 대략 18등급이었다고 한다.
주필산전쟁에서 고구려군을 이끌었다고 하는 고연수·고혜진은 욕살(褥薩)로 제 5등급인 태대사자가 임명되며, 행정권과 인사권, 군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이었다고 한다.
물론 태재사자가 군사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고구려구원군 15만명의 총 사령관은 기록대로 고연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고정의의 관등이 꺼림직하다. 구당서와 삼국사기에는 고정의의 관등을 대로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신당서에서는 대대로라 기록하고 있다. 막리지가 군사권을 장악하고, 욕살은 중국의 도독과 비슷한 존재이기 때문에 전장에서는 최고사령관의 역할이었다. 막리지 연개소문이 고구려군의 총사령관이었고 고연수가 고구려군을 이끌었던 총사령관 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컸다고 본다.
그리고 대로라는 관직은 군사권과는 별 상관이 없는 명예직내지 문관직이라고 하는 편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신·구당서의 이 기록은 맞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고정의가 대로가 아닌 대대로라고 한다면 주필산전쟁에서의 고연수가 15만명을 이끌고 당군과 싸웠다는 기록은 의심을 해봐야 하는 기록이다. 대대로란 고구려귀족의 수장이며 귀족회의를 주관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직책으로 임기는 3년이지만 그 직책을 잘 수행하면 독재도 가능하였다고 한다. 대대로에 대한 기록으로는 주서와 구당서등이 있는데,주서(周書)의 기록을 보면 『대대로는 강한자가 약한자를 눌러 스스로 취임하며, 왕은 임명하지 못한다.』라고 했고 구당서의 기록에는 『대대로는 그 관중에 으뜸으로서 1품에 해당하며 국사를 총괄한다. 3년이 임기이며, 그 직을 잘 수행한 자는 연한에 구애받지 않는다.
대대로를 교체하는 날에 혹 승복하지 않으면, 각각 무력을 동원하여 서로 공격해 이긴자가 대대로가 된다. 그때 왕은 궁문을 닫아 걸고 스스로를 지킬 뿐, 능히 사태를 제어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들을 토대로 대대로의 성격을 본다면 왕이 임명하지 못하고 무력을 통해 취임하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가문의 사람만이 오를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정을 통괄하며 귀족회의를 주관하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즉, 대대로는 현재로 말하자면 내각의원제에서의 국무총리와 같은 성격을 지닌 직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당서의 기록처럼 고정의를 대대로라고 한다면 당시 고구려구원병의 총사령관은 고연수·고혜진이 아닌 고정의였음이 당연한 것이다. 가문이 왕을 능가하는 군사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또한 국사전반을 통괄하고 있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나라의 국운을 건 전쟁에서 고연수(5관등의 귀족)의 보좌역할로서만 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노태돈 교수는 그의 저서 <고구려사 연구>에서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대로라는 직책은 잘못된 것이며 구당서에 기록된 대로를 잘못 옮긴 것이라 주장하였다.
물론 노태돈교수의 주장처럼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볼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구당서의 기록대로 대로라면 사서의 기록이 맞겠지만, 신당서의 기록이 맞다면 사서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구당서의 기록이 맞아 고구려원군의 총사령관이 고연수였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남아있다. 그것은 고연수가 항복했다고 하는 숫자인데, 삼국사기의 3만6천8백명에 비해 구당서의 15만6천8백 명은 너무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구당서의 기록에는 모순이 보인다.
구당서에는 고연수가 고구려군과 말갈군 15만명을 이끌고 왔다라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연수군대와의 접전에서 2만여 명을 전사시킨 후 15만6천8백명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니, 고연수의 군대가 15만명이 아니라 18만 명이란 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유인원(劉仁願)의 비문에는 당군이 전쟁을 끝내고 고구려인들을 포로로 삼아 중국내로 이주시켰는데, 그 수가 16만명이라고 하였다. 만약 주필산전투에서 16만명이나 되는 고구려군이 항복을 했다면 전쟁이 끝나고 끌려가게 되었던 고구려인들은 16만명이 아닌 20만명이상이 되었을 것이므로 이 기록에는 모순이 보인다.
그러므로 중국사서의 기록보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인 이적과의 전투에서 3만명의 전사자와 항복한 3만6천8백명을 합친 6만6천8백명이 맞을 것이며, 이것은 고연수가 총사령관이 아닌 고정의가 총사령관이었음을 반증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즉, 15만명을 이끈 고구려원군의 총사령관은 고정의였고, 고정의의 계책을 듣지 않고 고연수가 진격하기를 청하자 고정의는 고연수에게 7만군을 내주었고, 고연수는 전쟁에서 패해 항복하였다 라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그리고 나는 주필산전쟁이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났다고 본다. 그것은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유공권(1132∼1196)의 소설을 예로 든 것으로 그 근거를 들고 싶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사론에서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니 40리나 뻗혔으므로 태종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황제의 친솔한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위축되어 있을 때에 척후병이 영공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고하니 황제가 성을 내었다고 했다. 비록 나중에 몸은 탈출하였으나 그와 같이 겁을 내었는데,『신당서』『구당서』『통감』에 이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체면을 위하여 말하기를 피한 것이 아니겠는가?”하여 고구려 군이 주필산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을 말해주고 있고, 패배를 속이기 위해 중국 측은 고구려 군과의 전쟁에서 이긴 것만을 기록하고 진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주필산 전투가 끝난 뒤 당 태종은 군사회의를 열어 이 이후의 군사행동에 대해 의논을 한다. 이때에 당 태종은 안시성은 막리지(연개소문)조차 항복을 시키지 못했고 성이 견고하여 함락시키기 어려우니 남쪽의 건안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한다.
물론 이것도 당나라에서 꾸며낸 이야기일 뿐 이다. 왜냐하면 당태종은 세계유일의 황제이며, 그 누구도 당태종을 거스를수 없는 존재임에도 안시성성주는 당태종의 당군을 막아냈다. 이 전투는 당태종에게 있어서는 매우 수치스러운 전투였음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안시성성주가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에게 굴복하여 협조했다라고 한다면 당나라 황제가 고구려의 막리지만도 못하다는 계산하에 나온 술책이 담긴 기록인 것이다.
당 태종은 건안성을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총사령관인 이적이 건안성을 먼저 친다면 요동에 있는 군량의 수송에 문제가 있을 것이므로 안시성을 먼저 공격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투에도 안시성이 함락되지 않자 다시금 회의를 열어 차후의 행로를 결정했다. 여러 장수들은 장량의 군대가 사성(沙城)에 주둔 하고 있기 때문에 장량의 군대와 합하여 오골성을 공격한 후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격하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 라고 하였으나, 장손무기가 신성과 건안의 군대가 10만이 넘기 때문에, 만일 안시성을 내버려 둔채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후방에 대한 대처가 늦어칠 것이기 때문에 안시성을 내버려 둘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도 주필산전투의 허구성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주필산전투에서 15만대군을 무찌른 당군이 건안과 신성의 10만 군사가 두려워 진격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 태종은 장손무기의 말을 따라 다시 안시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7월 5일 안시성 남쪽으로 진영을 구축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안시성의 상황을 좀더 면밀히 살피기 위해 간첩을 보냈는데, 그 중에 고죽리(高竹離)라는 첩자가 8월 17일 당군에게 잡혔다는 기록이 자치통감에 있다. 하지만 개모성과 요동성, 백암성이 함락된 시점에 연개소문이 첩자를 단 한명만 보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당군의 첩보망에 걸린 첩자가 있다 해도 고죽리 이외에는 언급이 없으므로 연개소문이 보낸 첩자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잘 수행하고 돌아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첩자들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왔다 하더라도 어떤식으로든 고구려의 첩자중 한 명이 잡혔다 풀려났기 때문에 그 이후 고구려군은 상당히 조심스런 움직임을 보였을 것이고 실제로 이후 당군이 요동성 밖에 진을 치고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음에도 고구려군은 공격을 하지 못했다고 하는 기록을 본다면 고죽리가 잡힌 이후 고구려군은 당군의 움직임에 상당히 조심스러운 면을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은 첩자를 보내는 한편 북방의 설연타에게 말갈을 보내어 당군과 맞설수 있게 연계를 맺는다. 그것은 거란에 대한 지배권을 돌궐에게 빼앗기고 돌궐은 당에게 멸망되어 거란의 지배권을 당이 차지하게 되자 고립된 외교를 어떻게든 풀어보자는 연개소문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연타의 진주가한(眞珠可汗)은 당나라에 복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제의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진주가한은 그 해 9월에 사망을 하고 그의 장자 다미가한(多彌可汗)이 등극하고 그 해 12월 당군이 요동에서 채 돌아오지 못했다는 정보를 듣고 당의 하남을 공격한다. 다미가한의 하남공격은 연개소문의 제의를 암묵적으로 동의한것이라 보여진다. 하지만 설연타는 그 다음해인 646년 당군의 공격으로 인해 항복하고 만다. 다시 전쟁상황으로 돌아가서...
당군은 안시성이 함락되지 않자. 성에 대한 공격의 한 방편으로 토산을 쌓기 시작한다. 60일간 인원 50만명을 동원하여 토산을 쌓아 겨우 안시성보다 높게 하였으나 토산이 무너졌다. 이 때 이도종의 부하인 부복애(傅伏愛)가 마음대로 자리를 비우는 실수를 저질러 토산을 오히려 안시성 성주가 보낸 기습병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에 화가 난 당 태종은 부복애를 참형시키고 사흘동안 토산을 공격을 해봤지만, 고구려군에게서 끝내 찾지 못하고 당태종은 9월 18일전군 철수를 명한다.
당군은 철수의 이유를 요동에 겨울이 빨리 찾아오고 군량도 다 떨어져 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시는 9월 하순이었다. 사서에 나오는 날짜는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므로 9월 하순이라고 한다면 양력 10월하순 혹은 11월초순이 된다 요녕성은 대륙성기후에 속하기 때문에 11월달이 오면 시베리아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에 상당히 추워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때 당군의 철수 이유중 기온문제를 언급한 것은 맞는 말이라고 본다. 하지만 식량이 다 떨어져 간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신당서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요주(요동성)에는 곡식 10만석이 남아있었으나 군사들을 더 모을 수는 없었다.」여기서 군사들을 더 모을 수 없었다는 의미는 모르겠으나 곡식10만석을 활용할 수 없었다 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군사들을 더 모을 수 없다는 의미는 예매하지만 요동성에 곡식 10만석이 남아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건져낼 수 있는 기록이다. 즉, 요동성에는 아직까지 군량이 남아 있다는 것인데, 당군은 군량의 문제를 빌미로 철수를 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량이 모자라다는 것은 당의 군량 수송이 원활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군량수송은 육로(陸路)수송과 해로(海路)수송이 있었지만 전쟁에서 사용한 군량수송은 해로수송이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당태종의 전쟁준비 상황 때 군량을 영주와 고인대성에 집결시켜 놓는 한편 하북·하남지방의 군량들은 해로로 운반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량수송이 원활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당의 수군의 군량수송을 고구려의 수군이 방해를 했거나 수군자체를 퇴각시키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나라 수군 대총관 장량의 비사성 점령과 건안성에 대한 공격, 그리고 별동대의 압록강출진이후 그의 군사적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안시성의 공격당시 작전회의에서 장량의 부대가 사성(沙城)에 주둔하고 있다고 한 것과 오골성에서 사성까지 하루 만에 올수 있다고 한 작전회의의 말을 본다면 사성의 위치는 대략 압록강 북쪽부근일 것이다. 그렇지만 장량의 사성주둔이라는 것 이외에 장량에 대한 언급은 없고, 군사철수 때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장량은 사성에 주둔은 하고 있었지만 고구려수군에 막혀 군량수송과 더불어 군사 활동을 전혀 못하다가 당태종이 철수할 때 수군을 이끌고 당나라로 퇴각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게 한다.
군량의 해로수송차단은 이러한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육로수송에 대한 고구려군의 차단도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우선 위에서 본 요동성의 10만석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당군은 10만석이나 되는 군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퇴를 하였다. 그것은 요동성에 군량은 있으나 활용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요동성 부근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당군의 육로수송로를 차단하고 건안성과 신성에서 안시성에 주둔한 당군을 앞뒤로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군은 철수를 할 때 당태종이 요수를 건너 올 때처럼 요택을 건넜다고 한다.
요택은 위에서 말했듯이 요하 하류에 위치한 것으로 만약 삼국사기나 중극측 사서의 기록대로 느긋하게 철수를 한 것이라면 말과 수레가 지나가지도 못하는 요택을 건너서 갈 이유는 없었다. 당태종의 요택 도하를 고구려군을 기만하기 위한 전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고구려군이 추격하고 있는 상황에 굳이 위험한 길을 골라 간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고구려군이 당군의 수송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요하 중류에서도 당군을 압박했기 때문에 당군은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라 보여진다. 당은 고구려의 침공으로 현도(玄 )·횡산(橫山)·개모(盖牟)·마미(磨米)·요동(遼東)·백암(白巖)·비사(卑沙)·협곡(夾谷)·은산(銀山)·후황(後黃)의 10개성을 철폐시키고 요주·개주·암주의 주민 7만명을 중국으로 끌고 갔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 10개성에서 고구려가 빼앗긴 성은 없으며 이것은 당군이 자신들의 패배에 대한 수치심과 복수심 때문에 사서에 일방적인 기록을 남긴 것뿐이다.
<신당서>와 <자치통감>은 전쟁후의 피해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군사는 1천명 죽고 말은 10에 7,8 죽었고 수군은 7만 중 수백 명이 죽었다.』
말은 전 숫자의 80%가 죽었는데, 군사는 10만중 천명 밖에 죽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말이 안되는 것이며, 만약 군사가 1천 명밖에 죽지 않았고, <삼국사기>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의 기록처럼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안시성전투에만 졌다면 전쟁직후의 당태종의 말인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번 원정을 중지시켰을 것이다”라는 말이나 장안 도착후 “내가 전국의 군사를 가지고 작은 오랑캐에게 욕을 본 것은 무엇 때문일까”이라는 말은 하지않았을 것이다. 이말이 의미하는 것은 요동정벌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며 단순히 안시성싸움에서만 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태종의 이말은 분명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당서>와 <자치통감>의 이 기록은 중국의 수치스런 기록을 감추기 위해 당군의 피해규모를 축소·왜곡한 것이다.
고구려와 당과의 1차 전쟁이 끝난 뒤에도 당 태종은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계속한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당 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한 것일까...
요동지방은 중원에서 볼 때 변방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요동이나 만주는 중원지역에 비해 자원이 빈약한 편이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별 필요성이 없는 땅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이들이 지니고 있는 중화사상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중국만이 문명국가이며 중국만이 중심이고 중국의 주변민족들은 지엽(枝葉:본체에서 갈라져 나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 중국을 나무라고 한다면 주변민족들은 그 나무에서 뻗어나간 가지나 잎정도)적인 존재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이외에 문명국가는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면으로 봤을 때 단순히 군사력만 강한 유목국가들 보다 만주와 요동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가 당나라 입장에서는 더 위험한 존재이고 없애야 할 존재라고 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