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 뜬 사람인가?
출 34:5-9, 요 9:1-7 / 부활절 셋째주일/장애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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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눈이 좋은 편입니다. 시골 길이나 이차선 도로의 경우 자동차로 운전을 할 때 60km 이하면 길섶 풀 속에 어떤 꽃들이 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계절에 피어나는 꽃들에 대한 지식과 그간의 경험 덕분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길섶의 꽃이 보입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던 분들도 내려서 그 꽃을 보여주면 신기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내려서 보면 제가 보지 못했던 꽃들이 더 많습니다. 제 눈의 한계지요.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 보는 것 같아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눈은 그렇게 한계가 있고 상대적입니다. 자기의 관심사가 눈에 잘 보기기 마련입니다.
■ 누구의 잘못 때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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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눈먼 사람의 눈을 밝혀주신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눈이 먼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었으니, 본다는 것 자체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그런데 이 사람을 보고 제자들은 묻습니다. 이 사람이 눈이 먼 것이, 이 사람 자신의 죄 때문이냐,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 때문입니까?” 이것이 제자들의 물음입니다.
이 제자들의 물음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물음이었습니다. 특히 당시의 종교인들과 신앙인들은 어떤 고통이나 아픔을 당할 때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질문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물음은 ‘인과응보’ 사상을 토대로 한 물음입니다. ‘인과’, 즉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인데, 상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자연의 법칙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도 어떤 고통이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분명히 알아야 해결할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도 마찬가집니다. 역사가 혼란에 빠졌을 때, 왜 이런 진통이 왔는지, 그 원인을 묻고 깊이 성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야,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과’를 밝히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 인과응보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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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 특별히 구약성서에서 ‘인과응보 사상’은 아주 중요합니다. ‘인과응보’는 삶과 역사를 성찰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인과응보 사상은 사람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고, 역사를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기에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34장 5-9절의 말씀은 ‘인과응보’ 사상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무엇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고,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수천 대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그냥 넘기지 않으십니다. 죄에 대하여 반드시 벌을 내리시는 분이시고, ‘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삼 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리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이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은 인간이 잘하면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주시지만, 죄를 지으면 삼 사대까지 벌을 주시는 ‘인과응보’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조상이나 혹은 자신이 잘해서 복 받은 사람이고,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 혹은 조상 중에서 중대한 죄를 지은 사람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중보기도단과 제주도 여행길 셋째 날에 종달리 앞바다에서 장엄한 일출을 만났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일출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해무 때문인데, 저도 제주도에서 6년 이상을 살면서 일출다운 일출을 몇 번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행길에 제주 일출을 만나는 분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조상 중에서 덕을 쌓은 분이 있나 보다. 그것도 3대에 이어서.” 이런 말들도 ‘인과응보’ 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 교리의 맹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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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눈으로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났던 눈먼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무엇인지는 몰라도 잘못이 있는 사람이겠지요. 당사자가 아니라면 부모가 죄를 지은 사람이겠지요. 그래야 인과응보가 이뤄진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죄를 지었을까요? 아니면 부모의 죄가 삼 사대까지 이르는 응보의 법칙을 따라서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일까요? 부모의 죄도 아니면, 조부모의 죄 때문일까요?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일까요? 잘한 사람에 대해서 수천 대까지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사람의 조상은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잘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이렇게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고 ‘죄’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당시의 통념에 따라서, 자신들의 신앙의 원리를 따라서 ‘죄’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은 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의 고통 앞에서 죄를 묻는 물음, 죄를 따지는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가 엄청난 재앙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향해서, 예수 믿지 않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참담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완악한 교리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 출애굽기의 깊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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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의 말씀도 가만히 읽어보면 하나님이 ‘인과응보’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산술적이고 기계적인 ‘인과응보’가 없습니다. 수천 대까지 복을 주시는 것이 맞는다면, 수천 대까지 벌을 내리셔야 맞는 것이겠지요, 문자적으로도 수천 대와 삼 사대는 ‘응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삼 사대까지 죄를 물으신다는 것은 죄에 대한 연좌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변함없이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함부로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런 하나님 말씀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삼사대’라는 문자에 얽매인다면, 성경 말씀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이 잘했습니다. 그들은 문자에 매여서 정작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 말씀의 참뜻을 놓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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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들의 장애와 고통은 그 사람의 죄도 아니요,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사람에게서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고, 그의 장애를 보면, 그의 죄가 무엇인지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차별하고, 정죄하고, 더 큰 고통을 줍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과 장애로 고통당하는 사람을 부정하다고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본다면, 그 사람이 누구로 보일까요? 죄인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낼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이 먼 한 사람을 바라볼 때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교리와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제자들 역시도 그런 일반적인 통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고통을 보지 못하고 죄를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이시라면,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요? 하나님도 그의 죄를 드러내려 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긍휼하신 하나님이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통당하는 자녀를 보시며 견딜 수 없는 사랑으로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식이 고통스러울 때에,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그 눈먼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실까요? 예수님은 바로 그 일, 눈먼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서, 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발라주십시다. 그의 고통당하는 눈을 직접 손으로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셔서, 그의 눈을 밝혀줍니다. 그리하여 그를, 그 지독한 고통으로부터 풀어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정죄하고 차별하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고 해방하시는 분이십니다.
■ 우리가 맹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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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고쳐주신 것은 나중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눈먼 사람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녀를 보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 사람을 쫓아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반문한 말이 참으로 절묘합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 우리가 눈이 먼 사람인가? (9:40)” 그들은 자신의 교리에 갇혀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볼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일도 볼 줄 몰랐으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볼 수 없었습니다. 고통당하는 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볼 줄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눈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맹인인가?”하는 이들에게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9:41)”고 하십니다.
■ 눈 뜬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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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올림픽이 끝난 후, 패럴림픽이 열렸습니다. 패럴림픽은 국제 신체장애인 올림픽인데, 패럴림픽이라는 말은 파라(para)라는 단어와 올림픽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파라’는 ‘나란히, 함께’라는 뜻입니다. 장애인의 반대말을 무엇일까요? 장애인의 반대말은 일반인,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입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 중에 89%가 후천적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인간은 모두가 잠재적인 장애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장애인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 함께 더불어 나란히 살아가야 할 형제요, 자매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한 장애인에게서 ‘죄’를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았고, ‘하나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눈을 뜬 사람이었습니다. 고통당하는 장애인이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요,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약자들이 차별당하고 고통당하지 않고 모두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것이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이기도 합니다. 눈뜬 분들이 되시어, 그 일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복을 주시어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인자하심으로 변함없이 돌봐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장애인주일 설교는 총회에서 제공한 장애인주일 목회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