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기도하고』 10. 20
누가복음18:1-7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들어가며
할렐루야!!
복되고 즐거운 날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크신 주님 은총과 사랑이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반가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옆에 계신 분들하고 인사 나누실까요?
“당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우리 뒤에 계신 분들하고도 같이 인사 나누실까요?
“당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번에는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고백하겠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백하십니까?
깊어 가는 가을 주님의 큰 사랑에 물들어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복된 인생들 되시길 주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안아주시고 또한 감사와 행복에 충만하도록 인도하시는 살아계신 주님께 영광의 박수 올리겠습니다. 할렐루야!!
2.살다보면
살다보면 참 억울한 일 당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지방 한 작은 교회 목사님께서 연세대학교 정문 바로 앞에 있는 서울 창천감리교회에서 7년 동안 부목사 생활을 하시다고 평창으로 목회를 나오게 되셨습니다. 전임자 후임자가 인수인계하는 과정에서 교회 자동차 보험이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딱 하루! 딱 하루만 보험 적용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이 원주인지라 차를 끌고 원주로 가는데 마침 눈이 오는 와중에 차를 끌고 나가셨습니다. 신호등을 미처 발견 못하고 브레이크를 밟는다고 밟은 것이 또 겨울철이라 미끄러지면서 앞에 서 있던 0 4개가 달린 아우디 승용차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그냥 부딪혔으면 다행인데 속도가 있다 보니 뒤에서부터 뒷문까지 접촉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할 것도 없고 100% 뒤차 잘못이죠. 그런데 문제는 보험이었습니다. 보험으로 하면 간단한 문제인데, 지금 이 차가 보험이 적용이 안 되는 차요, 목사님은 졸지에 무보험 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아우디 승용차 주인은 병원부터 갔고 병원 치료비와 자동차 수리미 기타 등등해서 1500만원을 물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법이 없습니다. 평창 시골교회 그것도 비전교회 목사님이 그동안 서울에서 부목하면서 모아둔 퇴직적립금이 고스란히 합의금으로 나갔습니다. 마침 그 피 같은 돈은 이 목사님 결혼자금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자녀를 셋 두고 목회도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얼마 전 우리 장로님들이 다녀오셨는데 그 목사님께서 그 당시에는 얼마나 억울하고 또 답답하셨겠습니까?
저는 저희 교회가 그런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 억울하고 고단한 일을 겪고 있는 교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난 사천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온 뒤 몇몇 권사님들께서 사천교회에 다녀와도 되겠냐고 제게 물으셨습니다. 이유인 즉 기도만 하면 사천교회가 떠오른다는 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또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우리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주고 품어주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여하튼 여러분들은 이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셨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나 혼자 감당하지 못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 거기다 억울해서 하소연이라고 하고 싶을 때 여러분은 누구를 찾아가십니까?
지난 봄 심방 때 가정마다 심방을 드리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이 아팠던 이야기, 많이 힘들었던 이야기 그래서 부도요 파산 밑바닥까지 갔던 이야기 그러나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선 이야기, 치유 받은 이야기. 그런 간증과 고백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 이분은 이래서 예수를 믿는구나! 이분은 이래서 온 가족이 인가귀도가 되었구나!’ 참 많이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가정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그런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가정이오니 하나님 영광 나타내는 가정되게 하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인가귀도가 되었으니 저 가정이 축복의 증거가 되게 하소서. 저 가정의 자녀들 아시지요?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로 저 가정의 자녀들이 흥하게 하소서.”
그런데 그 중에는 기쁜 이야기 좋은 이야기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 집사님은 예배 후에 눈물을 흘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저는 남편뿐만 아니라 생때같은 아들도 셋이나 가슴에 묻었어요. 제가 살아온 지난 시간은 말도 못해요.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거칠었는데요.”
한 권사님께서는
“남편이 애를 일곱이나 낳고는 그만 죽었잖아요. 그런데 관에 누워있는 남편은 편해보여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더라고요.”
“왜요?”
“자식을 일곱이나 낳고 나 혼자 어떻게 하냐고?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쥐어준 것은 하나도 없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랴는 말이냐”고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 권사님들 중에 한분도
“목사님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안 될 것 같아서 제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남편도 없고 빚만 잔뜩 남았고 자녀들도 엄마만 보고 있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권사님은 한분도 안 계셨습니다.
“일을 마치고 오면 그 때부터 다시 빨래를 걷어다가 빨래를 빨았어요. 한푼이라도 더 벌라고요. 악착같이 일했어요. 그 때 일한 거 생각하면 말도 못해요. 그렇게 죽자 사자 일했더니 그 많던 빚 작년으로 다 갚았어요. 하니까 되더라고요.”
그 권사님께서는 작년에 대학교에 입학하는 손자 녀석 대학입학금과 수험료를 본인이 내주셨습니다. 자녀들에게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말 그대로 산 아니겠습니까? 어떤 비바람에도 묵묵히 나를 위해 버텨주는 나를 품어주고 안아주는 넉넉한 산 말입니다.
전에 신혼 초에 저희 장인어른 벌초 때문에 대전시립공동묘지를 찾았을 때 일입니다. 막 벌초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목에 한 젊은 엄마가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와 함께 벌초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인가보다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낫이 아니라 큰 가위를 가지고 무덤을 깎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서 저도 모르게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보았습니다.
‘이 험한 세상 저 어린 것을 대리고 어떻게 살아갈까?’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남자 분들 건강하셔야 합니다. 어떻든 간에 남자는 그 집안에 기둥입니다. 기둥이 건강하고 기둥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그 가정에 바로 서는 줄 믿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남자 분들은 주일 성수를 하는 그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시길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억울한 여인들
지난 주 말씀 기억하세요?
열두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주님께 나왔습니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댑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여인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또한 억울하고 지치고 힘이 들었겠습니까?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사정을 하던 가나안 여인, 수로보니기아 여인 성경에 보면 하나뿐인 딸을 살리기 위하여 가지고 있던 모든 가산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 여인의 삶이 어땠을까요?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는지 모르고
좋은 것을 보아도 좋은 줄 모르고
재미있는 것을 보와도 재미있는 줄 모르고
오로지 관심은 누구에게 가 있겠습니까?
아파서 누워있는 딸!!
이 여인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랑하는 딸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포기하시겠습니까?
만약 내 아들이 집 나간 둘째 아들처럼 내 재산의 절반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탕진하였다고 해서 그 아들과 의를 끊으시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죠. 왜죠? 그 아들은 이 세상에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내 속으로 나은 내 피를 물려받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둘째 이 여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만 만나면! 예수님이 나와 내 딸, 우리 가정을 돌아만 봐주신다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21장을 보면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혹 하갈의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하갈은 ‘도망치다, 달아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힘들면 조금만 어려우면 하갈은 도망치는 겁니다. 사라에게서 도망치고 집에서 달아나고 지금은 자신이 나은 아들을 화살 한 바탕 거리에 놔두고 고개를 돌립니다. 왜요?
평생 도망치면서 살았으니까 평생 인생의 문제 앞에서 시험과 연단 앞에서 회피하고 달아나고 무책임한 채 도망만 다녔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하갈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일어나 네 손으로 네 아들을 붙들라.”
“차마 아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도다, 차마 아들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도다.”
그래서 또 도망치고 또 달아나고 또 포기하려고 하는 하갈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갈아 네 손으로 네 아들을 붙들라. 네 아들은 네가 붙드는 것이다. 네 아들을 위해서는 네가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네 아들의 영혼과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누구요?”
바로 내가 무릎을 꿇고 내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 아들 누가 붙들어야 합니까? 내 딸을 위해서 누가 무릎을 꿇어야 합니까?
내가 비록 회당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앉는 회당장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는 높은 사람 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내 딸의 문제 앞에서는 내 아들의 문제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하며 바로 내가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나셨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정말로 만나셨습니까?
그 경험과 간증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까지 여기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나주셔서 나를 고쳐주셨고 일으켜 주셨고 다시 한번 그 믿음으로 다시 한번 그 신앙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전진하게 하셔서
오늘도 이 자리에 앉아 주님을 예배하도록 하신 그분!! 여러분 가슴 속으로 여러분의 영혼으로 지금 만나고 계십니까?
중요한 것은 주님은 우리가 왜 이 자리에 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 무슨 기도를 하는지 어떤 기도의 제목이 있는지 주님은 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로보니기아 여인을 만나주신 하나님 회당장 야이로를 붙들어 주신 그 하나님, 열두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을 돌아보신 그 주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줄 믿습니다.
4.솔로몬의 재판 속 진짜 어머니
열왕기상 3:17 이하 솔로몬 앞에 두 여인이 한 아이를 안고 찾아왔습니다.
“임금님 이 아이는 제 아이가 맞습니다. 어찌 제 속으로 낳은 아이를 몰라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아이는 제 아이입니다. 지금 저 여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참을 듣던 솔로몬이 판결을 내립니다.
“둘 다 이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주장을 하니 법은 공정해야 한다. 여보라 이 아이를 정확하게 둘로 나누어 두 여인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 때 진짜 이 아이의 엄마는 소리치는 겁니다. 성경에는 내장이 녹아든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진짜 엄마는 자기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내장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외치는 겁니다.
“임금님 저에게 이 아이를 안 주셔도 됩니다. 다만 제발 이 아이를 살려만 주십시오. 저는 그걸로 족합니다. 이 아이가 건강하기만 하다면 살 수만 있다면 저는 그걸로 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마음이 갈대상자에 모세를 담아 나일강에 흘려보내던 요게벳의 마음이요, 기도가 아니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이 마음이 자신의 아들 사무엘을 위해 평생 주님의 성전에 나와 기도하던 한나의 마음이요 그녀의 기도가 아니었을까요?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의 전무후무한 사무엘에 대해서만 나오지만 사무엘이 그토록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여 하나님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생을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던 어머니 한나 때문 아니었을까요?
5.갈무리
오늘 말씀 정리하겠습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억울한 일을 당한 여인에 관련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시면서 주님이 이것만은 꼭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우리 1절 말씀 같이 합독하시겠습니다.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
여기서 낙심하다는 헬라어 ‘엥카케인’은 ‘지치다’, ‘상심하다’, ‘절망하다’, ‘소망을 잃다’는 뜻입니다.
특히 영어 성경 중 많은 이들이 보는 NIV 성경 말고 KJV는 이 대목을 Not to paint 약해지다. 기가 죽다라는 고어를 사용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왜 기가 죽습니까?
기도하면서 왜 약해집니까?
기도하면서 왜 지치고 상심하고 절망합니까? 그리고 왜 소망을 잃습니까?
사랑하는 대화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떤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떤 심정으로 주님을 만나길 원하십니까?
오늘 본문 속 여인은,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수로보니기아 여인, 가나안 여인, 그리고 한나와 요게벳은
기도할수록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수록 지치고 상심하고 기가 죽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할수록 확신에 찼으며 기도할수록 가슴이 뜨거웠으며 기도할수록 소망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평생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뵙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평생을 성전에서 기도하던 안나라는 여인과 시몬은 아기 예수께서 할례를 받기 위해 성전에 왔을 때 누가복음 2장 30-32절에서 소망에 차고 기쁨과 감사와 감격에 차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
이것이 진짜 기도 아닐까요?
그래서 기도와 염려는 다른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기도와 걱정 기도와 다짐, 기도와 맹세, 기도와 결단은 다른 것입니다.
기도란 그래서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며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며 주님의 음성과 뜻대로 순종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완성인 줄 믿습니다.
우리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이 자리에 어떻게 나왔는지 다 아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그 주님께 간절히 이 시간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5.마무리기도
좋으신 하나님! 나를 지으신 분, 나를 이끄시는 분, 나와 동행하시는 분. 그 은혜와 사랑 잊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게 하소서. 기도하면서 염려하고 기도하면서 걱정하고 기도하면서 상심하고 기가 죽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요게벳과 같이 한나와 같이 수로보니기아 여인과 같이 간절함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주님 옷자락을 붙들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