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버린 종교. 사 47:8-15.
https://www.youtube.com/watch?v=bFV8h0cJWNk&t=2140s 이학권
https://cafe.daum.net/rnjstlgur/9oZC/527 권시혁
새해 예배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복된 자리고, 축복합니다. 이제 나뉨이 분명해졌습니다. 특별히 성회 메시지 전체가 다 그러하지만 11번, 12번 말씀은 이해가 되는, 이해는 다 하실 거예요. 이해 못 할 것이 없으니까.
그때 가슴이 아픈 분도 있을 거요. 아! 이거였는데 나는 전혀 다른 것을 하고 있었구나. 이해하신 분은 머리로 하신 것이고, 아! 내가 왜 이걸 모르고 다른 짓을 하고 있었나? 그분은 가슴이 열린 분이에요.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이제는 허락되었다. 그래서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그러셨는데, 있는 것도 빼앗기는 것은 종교예요.
종교는 갈수록 힘들어요. 전에 80년대일 때는 주일 성수는 당연하고, 새벽기도회에 많이들 나왔습니다. 지금 새벽기도회에 새벽 5시에 모이면 모일 사람이 있을까요?
종교는 있는 것도 빼앗겨요. 왜냐하면 내 힘으로 하는 것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제는 종교의 종교 생활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이 명확하게 이번 성회를 통해서 나뉘어졌습니다.
점검해 보고 싶으시면 11번 12번을 다시 한번 들어보세요. 들어보셔도 들리지는 않을 거예요. 이해가 다 되어도 잘 안 들려요. 그게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그렇지만 안 들려요.
하나님 나라는 영의 타는 목마름으로 사모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나라를 취미 생활로 그렇게 하면 좋겠다. 그렇지 나에게 임하기를 바라지.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은 영의 타는 목마름, 그 모든 존재가 갈망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신앙이고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역사 없이는 구원, 은혜, 하나님 나라의 누림이 없어요. 성령님의 역사 없이는, 종교에는 성령님의 역사는 세 가지를 말씀드렸지요.
첫째로 주님의 왕권이에요. 주님이 보좌에 등극하셨기 때문에, 그 왕권이 온 만유에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요. 입술이 아니고, 머리로 배워서가 아니고, 가슴에서 예수님이 내 주인이시다. 이게 고백 되어집니다.
두 번째 주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주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기를 기다려요. 우리는 뭘 기다려요? 내가 좀 더 잘 되기를, 내 장래가 더 잘 되기를, 어떻게 잘 돼야 해요? 뭐가 잘 돼야 해요?
그리고 증인 되어요. 성령님 받은 사람은 반드시 증인 돼요. 증인은 전도지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 아니에요.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저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똑같은데 뭔가 달라. 뭔가 다른 것이 있어.
왜 다른 거지? 나 저걸 좀 알고 싶어. 자기가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끌리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성령의 역사예요. 종교인은 이 모습을 다 가지고 있지요. 예수님을 主(주)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기도하고, 전도지 돌리고, 이러지요. 그러나 본질이 없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아시지요.
이어서 새해에는 우리 하나임 교회는 정말 남은 자들이에요. 여기는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에 말씀은 부담스러워요. 그게 아픕니다. 그래서 종교의 사람은 남아 있기 힘들어요. 무수히 떠나갔어요. 보면 안타깝기도 해요.
저렇게 세상을 원하면서 왜 교회를 그렇게 다닌다고 할까? 나가서 또 자유하지도 못해요. 교회당 다니면서 종교 생활해요.
정말 여기에 남은 자들은, 남은 자가 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남은 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 붙드셨을 거예요.
제가 은퇴하기까지의 짧은 기간이지만, 이 기간은 이제까지 예비 된 것이 싹 터 나오는 기간이에요. 싹은 잠시 트는 거지요. 그래서 남은 자를 남은 자로 세우는 기간으로 우리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그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지 제가 인도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요. 다음 주일은 우리가 신년 예배로 드립니다.
2024년에 남은 자를 남은 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바라봄으로 우리가 새해 사역을 위한 연보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정 주일은 2월 10일이 구정인데 그 전주는 너무 멀어서 11일을 구정 주일로 우리가 지냅니다.
친교와 강단 장식, 각기 싸인 업 해 주세요. 교회를 다 섬기는 복된 나눔이지요. 또 섬김 일정표 게시판에 공고되어 있는데 서로 간에 조정하실 수 있고 조정하는 경우에는 사무장님께 통보만 해 주시면 됩니다.
모래부터 말씀 만나기는, 화요일 수요일이지요. 8시에서 9시 반으로 조정되었습니다. 3 기브온 하셔야 해요.
영의 타는 목마름으로 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인데 3 기브온도 안 하면서 하나님 믿는다. 나 구원받았다. 그러시면 안 돼요. 자기가 자기를 속이면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3 기브온은 겨자씨보다 작은 것 아니에요? 신앙에. 그게 또 신앙의 출발점이에요. 하셔야 하고, 안 되면 하나님께 구하세요. 하나님, 내가 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도와주세요. 구하면 반드시 되게 되어 있어요.
1820 데일리 브레드 순에 새 이름을 원하시면 바꾸십시오. 별 이름이 다 있어요. 귀순자도 있고, 북한에서 내려왔나? 그다음에 우리 당회와 단기 선교팀 모임이 있습니다. 기억해 주시고,
000성도님이 넘어지셔서 다행히 아직까지 검사에는 별일이 없는데 MRI 결과는 저는 몰라요. 기도하시기를 부탁드리고, 기도할 분들이 점점 많아지네요. 꼭 기억하셔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기쁨도 능력도 없는 종교 생활 2023년으로 끝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2024년은 십자가의 생명,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음을 누리는 기쁨이 충만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내가 나를 스스로 속입니다. 버려두지 마옵소서.
가슴으로 말씀과 하나님을 느끼게 하여 주셔서 이제는 생명과 복을 누리는 기쁨이 충만한 시간으로 주님이 나를 붙들어 인도하는 시간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바벨론에 없는 것. 바벨론 사람들은 모든 것에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혹은 바벨론 된 내가 어리석게도 저주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에게 자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족함이 없는 삶은 욕망이 더 많이 라는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끝없이 우리를 단절의 삶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는 내가 없고 우리가 없습니다. 이유는 오직 나만 있습니다. 단지 바벨론은 땅을 정복하고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황무하게 짓밟았고 이유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바벨론에는 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는 긍휼이 없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용해 먹으려고만 했지, 생명의 가치라든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다는 가족 의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까지 도구화시키고, 모든 것을 도구화시켜 반대 입장인 하나님의 긍휼함이 없습니다.
바벨론은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당장 내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욕심을 쫓아 허무하게 사는 삶에 제 생각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절실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신 생명의 소명을 알아가고 피워 내고 가꾸어 내는 삶이 아닌, 삶을 생존의 틀에 가두어 버리는 잘못된 인식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죽음, 심판, 영생도, 생명 피움의 열매가 아닌 아예 무시하거나 생존의 열매 정도로 취급하고 전략 시킨 것이 아닐까요?
바벨론에 없는 것은 족구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같이 실력이 좋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분들이 우리 하나임 교회에서는 유일하게 주중 예배를 드리면서 이 교회당을 지키는 사람들이에요. 나누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뭔가 겉치레 종교에서 실제를 향한, 이해와 바라봄의 방향성이 보여서 기뻤습니다. 기쁘고,
바벨론에 없었던 것은 뭐 그 모든 것이 다 없었지요. 그렇지만 그 뿌리는 무엇인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누겠습니다.
이사야 47장 후반부입니다. 기쁨에서 생명과 생존이 나뉩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본성을 사는 것이고, 생존은 흙의 본성을 사는 거예요. 흙은 뭐 더스트,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무지막지한 욕심으로 살아요. 4943
말도 안 되는, 나는 좋은 것만 갖고 싶고, 나는 좋은 말만 듣고 싶고, 나는 항상 좋은 사람이어야 되고, 이런 것은 굉장히 허망하고 환상적인 일루시부한 욕심으로 살아요.
그러니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채워질 수 있는 길은 없어요. 그러니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돈이 있으나 없으나, 그렇게들 오기를 갈망하는 미국에서 사나, 저 어려운 제삼 세계에서 사나, 뿌리가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을 만나기가 참 힘들지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밖에 없지요. 하나님의 생명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좋았더라. 좋았더라. 느끼시는 거예요. 그래서 생명을 사는 것이 기쁨을 누리는 것이고 이게 부모의 본성이지요.
부모는 자식을 보면 기뻐요. 잘해도, 못 해도, 성공해도, 실패해도 자식을 보면 기쁨이 있습니다.
요시아 왕은 유대 역사 마지막에 참, 유대가 그 역사 속에 이루어 보지 못했던 어떻게 보면 다윗조차도 이루어 보지 못했던 신앙의 시간을 일으켜 낸 왕입니다. 그래서 저는 좋아하는데 이 요시아 왕의 사역이 시작될 때 스바냐 선지자가 사역했습니다.
사실 스바냐서를 읽어보시면 어쩌면 요시아라는 왕을 불러일으킨 말씀이 스바냐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스바냐서는 3장인데 3장 전체가 너희가 멸망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한다. 그래서 멸망한다. 그 말이 내내 계속돼요. 읽기 부담스러워요. 제일 끝에 가서 14절에서 20절까지 7절. 그 짧은 마지막에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는데 그 중심이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습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지금 멸망 선포했어요. 너희는 지금 심판받는다. 그런데 그 백성을 하나님 가슴에 너는 나의 기쁨이고, 너로 말미암아 즐거움이 있고, 이런 얘기를 해요. 요 짧은 구원의 단락 시작이 14절인데
습3: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래서 기쁨이 생명이에요. 기쁨이 생명이에요. 기쁨이 없는 생명은 생존, 목숨으로 살아나는 것이지, 생명이 뭔지?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알지 못해요. 하나님의 생명이니까.
그래서 생명은 영의 본질이에요. 영, 기쁨이라고 할 때 감정을 얘기하는 것 아니에요? 감정은 상황 반사지요. 상황의 re-act.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욕망하는 대로 어떤 현상의 결과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그것은 성령이 말하는 기쁨은 아니에요. 그런 즐거운 반응이 있지요.
그래서 기쁨은 생명을 순수하게 해요. 기쁜 사람은 악할 수가 없어요. 기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하지 않아요. 기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저럴 수도 있겠다. 힘들겠구나. 안타깝겠다. 이렇게 느껴요.
그런데 기쁘지 않은 사람이 남의 잘못을 보면 굉장히 왕성해져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자기는 마치 없는 것 같은 착각을 하지요. 그래서 생명을 어린아이같이 하는 것은 기쁨이에요. 기쁨이 없는 어린아이 같이는 있을 수가 없지요.
이 요시아 시대를 마감하는 선지자가 하박국 선지자예요. 하박국 선지자도 우리가 잘 알지요.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금방 짐작 가시지요. 요시아 왕이 그렇게 생명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어린아이 같은 왕이에요. 그 결국은 유다가 개혁되는 게 아니고, 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죽었습니다.
애굽의 느고를 저지하기 위해서 나갔어요. 왜냐하면 유다는 참 신기한 사람들이에요.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이사야 시대부터 말하는데도 그렇게 끝까지 애굽을 의뢰해요.
그러니 요시아 시대 때 최고의 도전은 나라 안에 친 애굽파입니다. 애굽이 출병하는 것 요시아가 막을 수 없는 것은 잘 알지요. 상대도 안 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이 원하는 대로 전쟁 나가는데 길을 비켜주면 유다는 그대로 애굽의 것이 되고 말지요.
그래서 그걸 막아서서 장렬하게 싸우다 죽습니다. 삶도 참 귀한 삶이었지만, 죽음도 귀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요시아 얘기 아니에요. 그렇게 했는데도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백성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요시아가 잘했으니, 현상적으로 더 좋은 것이 생기느냐? 그런 게 전혀 없음에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왜냐하면 이 멸망 뒤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살아 역사하기 때문에, 이 멸망이 끝이라면 절망하겠지만, 이 포로를 통해서 하나님은 남은 자를 세우시고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의 역사로 나타나게 하시기 때문에 나는 멸망 속에서도,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이건 또 일상의 상식적인 얘기지요. 최고 건강한 것은, 기쁘게 먹고 자고 일하고 관계하는 것 같아요. 먹으라는 데 대해서 말이 많아요. 영상도 엄청나게 많아요. 뭐를 먹으면 된다. 이렇게 먹어라. 저렇게 먹어라. 그걸 너무 많이 생각하다 죽어요.
아니 뭘 먹는데 복잡하게 먹어요? 저는 그냥 즐겁게 먹으면 좋아요. 아마 제가 먹는 삼겹살의 양을 다하면 나는 콜레스테롤이나 혈압에 총화를 이루어야 해요. 아침에도 먹으니까.
그런데 콜레스테롤도 문제없고, 건강해요. 건강해야 성도들을 괴롭히지요. 사람 관계도 자꾸 머리 써서 요리조리 하는 사람들. 그 관계가 진정도 아니고, 잘 하지도 않고 복되지도 않아요. 그냥 즐겁게 하세요.
괴롭히는 사람에게는 즐겁게 괴로움을 당하면 되지 뭘 그래요? 난 괴롬 당하면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혹시 내가 또 괴롭게 했다. 그러면 즐겁게 용서를 구하면 되지요? 용서해 주지요? 안 해 줘도 좋아요. 치아라 (치워라) 마.
간단하지 않아요? 가정이 행복하려면 뭘 하면 돼요? 기뻐하면 돼요. 뭐를 기뻐해요? 서로 부족하니까. 저 사람이 이 세상 어디 가서 사랑과 용납과 그 존재 자체로 존중받겠나? 받을 데가 없잖아요.
가정에서는 그걸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에는 기쁨이 있지요. 그래서 기쁨이 있으면 생기가 활성화되어서 면역 체계가 활성화 된다고 했어요. 그런 발표는 지금 무지하게 많아요.
웃으면 면역 체계가 활성화된다. 긴장이 완화되고, 혈액 순환이 잘되고, 스트레스와 신경 질환이 내려가고 약장사 하는 것 같네요.
그래서 기업들은 웃음 세미나를 많이 해요. 업무 능력이 향상되고, 집중력이 향상되고, 그래서
이렇게까지 말 안 해도 상식적이잖아요. 기쁨이 있으면 모든 것이 복되어져요. 기쁨이 있으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져요. 그러면 간단하잖아요. 하나님과 나의 관계 출발이 어디 있어야 해요? 기쁨에 있어야 해요. 10026
종교인들의 불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이 없어요. 그러면 할 것 다 한들 하나님이 기쁘시겠어요? 하나님이 더 괴로우시겠지요. 기쁨이 없다면 차라리 안 하면 그건 뭐? 네가 기쁘지 않은 걸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겠지만, 기쁘지 않은데 하는 것은 다 흉내 내요.
이게 하나님한테는 고문일 거예요. 기쁨이 나 됨이지요. 우리는 나를 몰라요. 내가 누군지? 내가 정말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하고 싶은지 우리는 몰라요.
그러나 그것이 가장 확실하게 하는 방법은 기쁠 때 나를 보시면, 기쁠 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즐기는지? 무엇을 할 때, 내 에너지가, 열정이 솟아나는지? 기쁠 때 홀이 되거든요.
기쁠 때는 나 전체요 기쁜 데 동시에 기분 나쁜 생각, 기쁜 데 남 미워하는 생각. 이게 불가능해요. 그래서 이 기쁨은 속사람의 본질, 생명 실제란 말이지요. 그래서 생명 누리는 유일한 길이 좋았더라. 기쁨이에요. 기쁘지 않은 것은 생존은 했지만, 생명은 누리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때 기쁘다는 말은 항상 좋았더라. 그런 게 아니에요. 헬렐레한다. 그러면 약 먹은 거지요. 기쁨은 품는 거예요. 품는 것.
윤동주 시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 하잖아요. 십자가까지도 행복하게 품을 수 있었던!
조금 있다가 그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 볼 텐데요. 이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부모는 자식을 품잖아요. 자식이 잘해 줄 때만 품어요? 부모는 자식이 괴롭게 해도 자식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어요.
자! 이 기쁨이 없는 것을 ego라고 합니다. 에고. 기쁨이 없는 사람은 겉사람으로만 살아가요. 다른 말로 하면 머리밖에 없어요. 가슴이 열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에고는 스스로 속이는 거예요.
우리는 다 에고로 살 수밖에 없어요. 에고로 모든 것을 다 해요. 에고를 배제할 수 없어요. 그런데 에고에서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하는 딱 한 가지가 있어요. 그것만큼은 허용해서는 안 돼요. 그게 뭐요? 스스로 속임이에요. 스스로 속임이에요. 자기 거짓을 자기가 힘 삼는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벨론이에요.
나뿐이다. 나만 잘되면 세상은 전쟁 속에 있어도 난민이 되어서 이 추운 겨울에 굶주리고 굶어도 상관없어요. 나뿐이야. 또 나만은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다 과부 되고 자식 잃는데 나는 절대로 과부 안 되고 자식 잃지 않는다. 나만은 괜찮아.
이게 어디서 나왔다고요? 자기 주문과 주술. 자기 종교예요.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 가지고 있습니까? 성 삼위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그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여기저기 나름대로 주워 모은 것을 자기 유리한 대로 조작하고 편집해서 자기 종교. 자기 종교에 자기는 반드시 구원받아요. 자기 종교니까.
이게 이 시대 기독교의 문제예요. 자기 종교니까 자기는 절대로 구원받지? 설마 내가 지옥 갈 리가 없지.
두 번째가 뭐예요? 지혜와 지식이에요. 자기가 만든 교리예요. 교리, 똑바로 아십니까?
성경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부 신론이 무엇입니까? 말하면 성경에 구절을 딱 맞춰서요. 이건 안개 잡은 것보다 더해요. 왜요? 그런데도 신앙이 여기저기 들은 대로 자기 교회를 딱 세워서 자기가 다 알아서 해요.
말씀은 뭐라고 하던지 나는 내가 알아서 구원의 길을 가고 있다. 이렇게 하는 거지요. 이게 바벨론의 문제예요. 왜 이런 문제가 있나요? 이게 얼마나 복잡한 일이에요? 이게 얼마나 힘들고 혼란스럽고, 정말 말도 안 되는 길인데 왜 이걸 하느냐?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쁨 있는 사람은 항상 너가 같이 있는 게 좋아요. 너가 얼마나 잘했냐? 이런 게 별로 상관없어요. 나는 이렇기 때문에 정당해. 이렇기 때문에 나는 옳아. 네가 잘못된 거야. 이렇게 하지 않아요.
기쁨이 있는 사람은 그냥 자기 자신도 품고, 이웃도 품고, 상황도 품고, 설교가 길어도 품고. 웃지도 않고,
에고는 실체가 없는 게 에고잖아요.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어요.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실체가 있는 거요. 에고는 실체가 없어요. 실체가 없기 때문에 대립밖에 없어요.
너가 있어야 내가 비로소 생기는 거예요. 항상 너에 대한 나요. 그래서 항상 나는 너보다 잘나야 해. 성공해야 해. 그런 건 일루젼이에요. 그게 자기가 아닌 걸 몰라요. 참으로 기뻐할 때가 자기인데 그게 자기인 줄 알고, 그걸 가지고 또 맹렬히 싸우기도 해요. 심지어 부부 사이에서도.
그래서 에고는 항상 대립이 필수예요. 그리고 나 중심적이에요. 내 식이 옳은 거예요. 내 주술과 믿음은 내 지혜와 지식이에요. 이게 본질 없는 반사뿐이니까 현상이 없는 반사뿐이니까.
겉사람으로 살아요. 항상. 그냥 남에게 보이고, 남이 그럴듯하다고 인정해 주면 그냥 마음이 놓이는 거예요. 실제는 뭐예요. 단절이지요.
이 사람은 자기 자신과도 단절된 사람이에요. 사실은. 그래서 그 영원한 결과가 예수님은 한 알 그대로. 또는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이래요. 지금까지 제가 나눈 말씀 이해하시지요. 이해 못 할 분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혹시 그런 분 있으세요? 아! 이게 내 모습이구나. 가슴 아프고, 저렇게 살고 싶은 게 아니고, 왜 내가 그렇게 살까? 이건 가슴이 열린 사람이에요.
종교인! 들음과 동시에 정당화해요. 난 그거 다 이해했으니까. 나는 다 이해한 사람이야. 삶으로의 전환이 전혀 일어나지 않지요. 그 전환은 에너지가 필요해요. 높은 에너지가 필요해요. 그 높은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지요?
생명의 기쁨을 모르면 전환의 에너지가 아니고, 정당화예요. 이 말씀을 듣는 순간까지도. 기쁨이 생명이에요. 생명이 기쁨이에요. 10924
어린아이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이 죽음과 악을 넘어서는 유일한 것은 기쁨밖에 없어요. 우리가 죽음에서, 죽음의 권세, 사망에 이기는 것, 사망의 쏘는 것에 우리가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왔을 때 죽음을 또 하나의 다른 단계로 맞이해서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본질 세계로
이제 허상의 육을 벗어버리고, 본질을 피우고 장성하는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능력은 기쁨이에요. 하나님이 오셔서 내 대신해 주시는 게 아니에요. 내 안에 기쁨이.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함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에요. 가장 강력하고 복된 가족은 서로 기뻐하는 가족이에요. 속지 마십시오. 돈 많이 버는 가족 아니에요. 성공 많이 하는 가족 아니에요.
저는 미국 이민 가정에서는 최고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자녀들이 차관, 차관보, 대학교 학장, 그것도 아이비리그의 학장. 이런 가족들인데도 모이면 기쁨을 느낄 수 없어요. 뭐가 그리 싸늘할까? 가족 사이에 그것 때문에 너무 안타까워요. 모이면 잘하던, 못 하던, 좋아야지요.
가족끼리 모이면 철이 좀 없어지고 이러는 건데. 가족끼리 모이면 너무 똑똑하고 말 또박또박하고 이렇게. 무슨 정치 회견 밝히는 것처럼 하면 저는 그런 자리가 굉장히 불편해져요.
성경은 구약에서 신학까지 바벨론은 얘기했잖아요. 앗수르는 바벨론보다 훨씬 잔인했습니다. 헬라와 로마는 바벨론보다 훨씬 더 악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벨론은 참 순진한 제국이었어요. 그런데도 왜 바벨론을 시비 걸지요? 바벨론을 멸망의 모델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거지요?
바벨론은 앗시리아나 페르시아에 못지않은 부와 병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간단하게, 너무나 어이없게 와르르 무너져 버린 제국이 바벨론이에요. 70년 만에.
그것도 상징적이잖아요. 70년이면 한 사람의 생애잖아요. 왜 그랬어요? 그것은 행복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바벨론은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고레스가 들어올 때 성문 열고 환영해 주었어요.
고레스는 뭐가 그렇게 행복하냐? 제가 보기에 겨자씨만큼, 야! 이거, 전쟁에 졌다고 사람을 끌어와서 대대로 노예로 살게 하는 것. 이건 뭐 그 사람들도 좋지 않지만, 우리도 그렇게 좋은 건 아니지 않느냐?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주고, 심지어 임금 계산해서 보상해 주고, 그러고 여기서 살아도 좋고, 본국으로 돌아가도 좋고. 다 못 돌아갔지요. 왜냐하면 그때 벌써 3-4대 5-6대 이렇게 되었으니까. 돌아간 것은 유대인밖에 없어요.
유대인이 돌아온 이유는 그 공동체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있었고, 이미 포로 공동체는 숫자가 굉장히 많았어요. 선지자라고 해야 몇 사람이에요. 그래도 말씀 앞에 모였던 사람이 유대인이에요.
나라가 멸망했는데 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회복하고, 재건한 것은 인류 역사에 유대인밖에 없어요. 무엇이 돌아가게 했겠어요? 그들에게는 기쁨이 있었어요.
여러분!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데 52일 만에 했는데 지금 중장비 동원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무엇이 그렇게 했을까요? 기쁨. 기쁨.
내가 예루살렘을 잊을진대 내 손이 재주를 잃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어다. 이렇게 외칠 만큼 귀향을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극소수의, 하나님 약속을 믿고 돌아올 약속을 기다렸던 사람들. 그들이 돌아온 기쁨이 그런 일을 이루게 한 거지요.
바벨론에 한 가지 없었던 것. 그러니까 여러 가지 나왔어요. 영원 경외심 긍휼 자비심 성찰, 사랑, 용기 임재 돌이킴 자족 회개, 말씀 감사 우리 야다-긴 말씀, 이게 다 맞아요. 다 맞는 거지요. 그런데 저것들은 보세요. 어떤 실체의 개념을 표현한 거예요. 그런데 기쁨은 그 자체로 very high energy
기쁨은 어떤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고, 개념적이고 추상적이기도 하지만, 기쁨이라는 자체가 굉장히 강력하고 높은 에너지예요. 그래서 웨스트민스트 소요리 문답 제1 문답이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종교인이 이걸 들으면 “저렇게 해라”로 들려요. 그러니 짜증 나지요. 살기도 힘든데 무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만 즐겁게 하고, 뭐예요 이게. 왜 그렇게 들리지요? 가슴이 없으니까.
가슴에 하나님 있는 사람이 들으면 어떻게 들려요? 내게, 내가 네게 준 생명을 무한 즐기고, 내 무한 사랑을 무한히 받아서 누려라. 즐겨라. 그렇게 들리지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굴까요? 하나님의 창조를 즐거워하는 사람.
하늘과 땅과 바람과 나무들과 새. 이 모든 신비한 세계.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굴까요? 은혜를 누리는 사람. 이 모든 생명과 창조의 신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라고 주시는 거예요.
종교인들은 자기가 뭘 잘해야 해요. 자기가 뭘 지키고, 진짜 이상해요. 정말 이상해요.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이상의 신앙은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그 기쁨조차도 우리가 기뻐하는 것 아니에요. 우리는 흙에서 온 존재로 기뻐하지를 않아요. 기쁠 때도 짜증 내요. 기쁠 때도 신경질 내요. 어느 집에 그랬데요. 꽃을 사다 줬더니 먹지도 못하는 걸 왜 사 왔냐고, 반찬거리를 사 오지. 그랬데요. 내가 궁정은 성도라고 안 했어요. (이학권목사 사모님)
이런 말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우리는 기쁨의 존재가 아니에요. 흙은 무지막지한 욕망의 존재지요. 그냥 항상 목마르고 짜증 내는 존재예요. 우리의 기쁨은 어디서 와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기쁨에 붙들림, 받았을 때 우리가 기뻐하는 거요.
그래서 예수님의 생에 시작이 뭐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1:11
여러분 사람이 제일 원하는 게 뭔 것 같아요? 나를 기뻐해 주는 것을 가장 원해요. 아내가 가장 행복한 것은 남편이 나를 기뻐해 주는 거예요.
남편이 제일 기뻐할 때도 마찬가지지요. 목회자가 제일 행복할 때는 성도들이 기뻐해 줄 때. 은퇴하기 전에 한번 기뻐해 주려나? 다들 표정이 꿈도 크다. 꿈도 커.
사람이 누군가가 나를 기뻐해 줄 때 비로소 생명이 열리고 피어나고 생수의 강이 솟아나고, 그러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바벨론 멸망과 저주의 뿌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왜요? 우리는 다 바벨론을 살고, 바벨론은 원해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육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세상으로 엄마 자궁에서부터 기름부음 받은 우리는 바벨론을 원하고 바벨론을 살아요. 11930
그래서 이 말씀을 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 47장은 바벨론이 주인공이 되어서 센터 스테이지에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것이 13, 14장과 47장. 두 군데지요. 그런데 47장의 전반부 지난주의 본문은 뭐예요? 바벨론의 멸망, 현상적인 멸망을 얘기하지요.
오늘은 그 멸망이 왜 오느냐? 멸망의 본질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13장과 14장과 똑같은 구절이에요.
13장에서 소돔과 고모라같이 멸망한다. 14장에서 그 본질은 뭐야? 내가 내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야. 나만은 괜찮아. 나는 구원받아. 절대로 지옥 가지 않아. 자기 종교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 9절을 보시면 멸망에 이기성 때문에 자기의 주술과 자기의 지혜를 계략으로 씁니다. 그게 우리 삶이에요. 거기에 구원이 없다. 이걸 알아야 해요. 왜요? 내 속셈. 그게 악이에요. 내 속셈을 아무도 못 봐요.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다 보이지 않아요? 서로. 그런데 아무도 못 본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너의 재앙이요. 파멸이다.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47:8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나만은 괜찮다. 나는 과부 되지 않고 자식 잃지 않는다. 이런 거지요. 너는 이제 들어라.
사47:9 한 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
일시에 너는 과부 되고 자식 잃는다. 네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이 모든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네가 만든 네 종교의 거짓은 반드시 심판받는다.
종교 생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여기저기 주워들은 것. 한 번도 정성으로 정말, 진정과 진실로 씨름해서 나의 진실로 가꿔본 적이 없어요. 여기저기 들은 것 가지고 이리저리 짜깁기하고 조정하고 제단하고 편집해서 자기 종교 생활해요.
자기 편한 대로. 그뿐만 아니라, 자기는 꼭 구원받지요. 내 종교니까. 나는 절대로 멸망 받지 않아요. 말씀은 이해하지만, 사는 것은 내가 알아서 사는 거예요. 그 종교의 첫 번째 모습이 10절 11절입니다.
사47: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스스로 악을 의지하면서도 스스로 이르기를 아무도 못 본다. 나만은 괜찮다. 이렇게 말하는 거지요. 속셈을 다 보여요. 속셈이 그 사람의 삶이니까. 삶이 나타나 있잖아요.
자기 삶이 나타나 있는데 우리의 어리석음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척하고 있어요. 설교를 절대 길게 하지 않은 척해요. 아쉽지요. 그런데 왜 비웃어요?
그래서 11절에 내가 알지 못해요. 우리 번역은 좀 이상하게 했는데요. 그냥 소원에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악이 임하나 근원을 몰라요. 재앙이 임하나 물리칠 힘이 없어요. 파멸이 임하나 알지 못해요. 왜 알지 못해요?
내 종교에서 나는 구원 받으니까, 나에게 심판이 임할 리가 없지요. 나는 심판에서 멸망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심판은 도적같이 온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절대로 예상하지 않아요. 나에게 임할 리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정한 중독, 중독적 체면적 내로남불. 항상 그래요. 남이 하면 잘못되게 너무 잘 보여요. 그런데 내가 하면 너무 괜찮아.
이 가슴에 없는, 가슴에 없는 행함은 껍질뿐이에요. 모두가 다 알아요. 그러면서 자기는 겉으로 행한 것 가지고 다 괜찮다고 그래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지켜 행함이 없었어요. 그들의 행함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결코 하나님이 없었다. 왜 그래야 내 종교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결론은 내 종교의 첫 번째 모습은 내 지식, 내 지혜로 유혹해서, 나는 괜찮아. “아무도 나를 유혹해서도 내 속셈을 모른다.” 이러지요.
두 번째는 내가 쓴 주문과 주술로 혹 유익하게 할 수 있는지 해 봐. 다른 사람 놀라게 할 수 있는지 해 봐. 우리 성경이 이런데 너로 말미암아 상대방이 제압당하도록 해 봐.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네 많은 계략으로 피곤하게 되었다.
그 모든 계략이 뭐예요? 점성들과 점술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이 네가 쓴 주술. 네가 만든 종교가 너를 구원할 수 있는지 한번 해 봐. 그러지요.
14절에 불타는 지푸라기 같은 그들은 열도 비도 안된다. 열, 덥게도 못하고 가까이 모이지도 못하고, 모닥불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여 앉잖아요. 열도, 덥게도 못하고 빛도 안 된다. can’t even save themselves. 그들 자신도 구원하지 못해. 그들 자신의 주술과 주문이.
그래서 결과는 15절 내 동역자, 동업자가 각기 제 길로 흩어진다. 너와 함께 일하던 자들, 너와 함께하던 자들이 제 길로 흩어지고, 실제 없는 네 생각으로는 결코 구원은 없다.
너 종교에 의하면 너는 구원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는 구원받지 않았다. 이게 바벨론의 실제예요. 바벨론의 실체는 기쁨이 아니고, 비탄이었습니다. 실제 아니에요.
지금 참 안타까워요. 부부 사이조차도, 가족 안에서조차도 기쁨이 없는, 어쩌면 비탄이 더 많은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요.
기쁨이 없다는 말은 단말마적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기쁨이 있을 때 종말적으로 끝을 향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12713
올림픽에 나가는 사람은 올림픽 출전을 위해서 훈련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 종목이 뭐가 되든지. 설렁설렁하면서 올림픽 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가서 꼴찌를 하는 경우가 있어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를 보면 정말 오랜 기간을 그 힘든 훈련을 잘 견뎌 냅니다. 왜 그래요? 바람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바람 속에는 기쁨이 들어있어요.
내가 올림픽 출전 선수다. 소망이 어쩌면 가서 결승 진출만 한번 해 봤으면, 또 어떤 사람은 금메달을 바라보고 있어요. 금메달 바라보는 선수는 전체에도 얼마 안 됩니다. 극소수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 나가서 한번 같이 경쟁해 본다는 이것 하나가 길고 긴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요. 이게 기쁨이에요. 이게 없는 사람은 사건사건, 상황 상황에 손해냐? 이익이냐? 그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기쁨이 생명의 방부제예요.
지난주 말씀 기억하시지요. 성령이 임했을 때 베드로 사도도, 바울 사도도 성령님 임함의 핵심이 무엇이었어요? 썩음을 당하지 않는다. 이 땅에 모든 삶은 썩어가는 삶이에요. 성령이 임하면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마라나타. 이 기쁨이 임하면서부터 그들은 썩지 않는 생명이 된 것이에요.
그래서 기쁨이 없는 바벨론은 성경에 항상 비탄으로 끝납니다.
사14:11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계시록에서는 바벨론을
계18: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성경은 놀랍지 않아요. 이건 2천 년 전의 얘기예요. 그런데 바벨론의 멸망은 계시록 17-18장에서 세계의 멸망입니다. 세계의 멸망이 뭐라고요? 상품의 멸망이에요. 상품. 왜요? 우리는 그걸 살아요. 돈 열심히 벌어서 상품 사는 거예요. 무슨 상품? 나는 너보다 비싼 것 샀다는 거예요. 자식을 고문할 정도로 해서 좋은 학교 보내요. 좋은 학교 나와서 뭐 해요? 더 비싼 상품 살 수 있다. 세계의 멸망을 세상에 상품의 멸망으로 성경은 이천 년 전에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저는 성경이 좋아요. 미친 사람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예리하고 본질적일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통찰력이 예리하게 중심을 뚫어버릴 수 있을까? 우리 척하고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어요.
성도들의 결국이 뭐예요? 기쁨이에요. 혼인 잔치, 주님과 더불어 승리, 새 노래, 새 예루살렘 (예루샬라임) 그래서 할렐루야.
계19:6-7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얼마나 기쁜 시간이 도래했냐 하는 것이지요. 성경의 주제는 코이노니아예요. 이 땅에 더불어 살기예요. 그런데 그 더불어 살기는 기쁨의 열매예요. 우리가 뭘 잘 지켜서, 돈 많이 내서, 그렇게는 코이노니아가 안 이뤄져요. 재산 다 갖다 바쳐도 코이노니아가 되는 게 아니에요.
코이노니아는 기쁨의 열매예요. 다시 말해서 생명의 가장 복된 모습이 코이노니아예요.
행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걸 종교인이 들으면요. 이야, 어떻게 그렇게 살아? 말도 안 되는 걸 말이지. 이게 가능해? 이래요. 맞아요. 그 사람한테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아요. 왜요? 그 사람은 이 세계를 몰라요. 영원히 불가능해요. 4033
그런데 하나님을 가슴에 받은 사람, 가슴이 열린 사람이 보면 와, 나 한번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 나는 저런 사람 속에서 생명을 나눠보고 싶다. 저기서는 어떤 생명의 내가 태어날까? 이렇게 말씀이 가슴에 받아져야지 우리 보고 코이노니아 만들어라. 이게 가능하냐? 이게 될 일이냐? 그렇지. 저에게는 절대로 안 되지. 영원히 안 되지. 그다음, 요다음 이야기가 뭐요? 아나니아와 삿비라 얘기잖아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나니아와 삿비라가 그 재산의 얼마라도 받쳤다는 것은 이게 굉장히 좋아 보인 거예요. 이게 행복하고 기쁘게 보인 거지요. 그랬으니 자기도 좀 누리고 싶었으니까 그런 거지요.
누리고 싶었는데 가슴은 안 열리고 머리 계산은 빨리 돌아갔지요. 그게 불행이에요. 그게 불행이에요. 우리 삶은 뭐가 되었든지 가슴은 열리지 않는데 머리의 계산은 빨리빨리 돌아간다. 불행한 줄 아세요.
구약 제사가 함께 즐거워함이에요.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다윗이 춤춘 것은 이 언약궤가 들어왔다는 것은 백성들이 그 앞에 모여서 함께 잔치하는 거잖아요. 그 기쁨을 본 것이지요.
십일조는 법도 아니고 세금도 아니에요. 바쳐야 되는 게 아니에요. 종교는 이거를 법으로 만들고 세금으로 만들어서 바쳐야 되는 것으로 했어요.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함께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백 명만 모여도 함께 즐거워하는 것 힘들어요. 그래서 뭐예요. 두세 사람이, 내가 너에게 준 생명을 그 기쁨을 조금이라도 피워 봐. 싹만 트면 돼. 이 세상에서 싹만 트면 자라는 것은 영원한 세계가 있으니까.
이것까지 종교로 만들어서 뭘 갖다 바쳐야 되는 거로. 십일조는 시행 세칙이 없어요. 성경 어디에 시행 세칙 나와요. 그다음 벌칙이 없어요. 안 하면, 말씀 시간을 세 배로 늘려라. 이런 게 없잖아요. 완전히 자원함이에요. 십일조는 자원함으로 하나님과 묶여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예요. 그래서 아벨과 가인의 제사에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셨잖아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다른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첫 새끼입니다.
아벨은 첫 새끼를 드렸어요. 쓰다가 드린 것 아니에요. 남은 것 드린 것 아니고, 여유가 있어서 드린 것 아니고, 내 소유의, 내 얻은 것의 첫 것을 드렸어요. 그 말은 뭐요? 내 얻은 것 전체가 하나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가인은 드리다가 안 받으니까, 화를 냈어요. 왜 화를 내요? 내ㅠ것 드리는데 안 받으시니까. 왜 안 받으셨냐는 거지요. 하나님이, 성경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에요. 종교 만든 적이 없어요.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코이노니아고 그것은 기쁨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러므로 생명 최고의 복이 1820 데일리 브레드예요. 영적 가족의 회복이에요. 내가 이 땅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에요. 다른 것도 많지만 그것들은 없어도 되는 것이고, 절대로 있어야 되는 한 가지가 있어야 한다면 단절된 이 현상 세계에서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라는 것이 확인되는 관계. 그것이 유일하게 절대적인 일입니다. 그걸 가꾸는 겁니다.
그게 돈 바치라는 게 아니에요. 다 거짓으로 사는 이 세상 속에서 서로의 진실을 겨자씨만큼이라도 열고, 그게 정죄 받지 않고 위로받기 시작하고, 그게 아픔을 나누는 기쁨, 아세요?
아픔을 나누는 기쁨,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으로 함께하는 기쁨. 그것이 피어나서 나의 영원한 나라를 누리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선과 의는 코이노니아예요. 코이노니아.
하나님의 구원은 기쁨이 회복된 사랑의 무아. 삶은 가슴이 뛰어야 돼요. 이 시대는 가슴은 죽고 머리 계산만 돌아가요.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하나님과 관계, 가족 관계까지도 계산이 돌아가지, 가슴이 뛰지 않아요. 그런데 그 기쁨은 성경을 보시면 먼저 생명을 만난 열매예요.
부활을 만났을 때 무서움과 큰 기쁨이라고 그래요. 마28:8
말이 이상하지요? 무서운데 어떻게 기뻐요?
그다음 너무 기쁨으로 믿지를 못했어요. 눅24:41, 52. 주님 부활하셨는데 너무 기뻐서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복음을 받았을 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고 행13:52
다 크게 기뻐하더라. 행15:3 이방인들이.
화목케 하신 이를 즐거워하였다. 롬5:11
그리고 그 생명은 궁극적이에요. 그 생명을 만났을 때 기뻐하며 다 팔아요. 보화와 진주를 찾을 때. 우리 보고 다 팔아 바쳐라. 그런 얘기 절대로 아니에요. 생명의 기쁨을 만났을 때 자기 것을 다 팔아, 살고 싶고 피우고 싶은 자기가 드디어 열린 거지요.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생명 길을 보이셔서 내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다. 구원의 목적이 기쁨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5-16장은 예수님이 십자가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밤이에요. 마지막 밤 말씀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내 기쁨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할 것이다. 요15:11
내 기쁨은 너희 안에 충만케 요17:13
너희 근심이 기쁨이 되리라. 요 16:20
기쁨으로 다시 고통을 기억 아니하리라. 21
기쁠 것,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 없다. 22
구하라.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4
그래도 기쁜 얼굴이 없네요. 기쁨이 왜 없어요? 기쁨의 반대는 옳음이에요. 옳음. 옳으려는 사람은 절대 기쁨이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부부 사이에도 옳으려고 하면 지옥이 되는 거예요. 간단해요.
옳음은 에고의 조작이에요. 내 중심적인 조작입니다. 그러니 항상 나는 옳고 너는 틀려야 하는 것 아니에요? 내 종교, 내 교리지요.
바벨론의 저주는 가장 화려한 제국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다니엘의 비전에도 바벨론은 금 머리로 나오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없었어요.
제가 신앙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말씀드렸지요? 지금은 하나님 앞에 죄는 행복하지 않은 것뿐이에요. 하나님 앞에 자기 몸 전체를 불사르게 내어줘도 기쁨이 없으면 하나님에게는 아무 소용 없는 거예요.
이 바벨론은 세 가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다시 정리해 봅시다.
스스로 속임. 이게 종교인 아닙니까? 스스로 속여요. 누가 속이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 교리 만들고, 자기 종교 만들어서 스스로 속여요. 나뿐이고 나만은 괜찮다 그래요.
지난주 본문, 제일 마지막에 자신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아요. 가슴에 두지 않아요. 마음에 종말도 생각하지 않아요. 왜? 내 종교에 의하면 나는 끄떡 없으니까.
2. 자신의 지혜 지식으로 꼼짝도 안 해요. 말씀을 선포하면 다 이해받아요. 그러나 말씀은 다 이해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지?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는 내가 정해요. 내가 정해요.
오늘 본문의 시작이 뭐예요.
사47:8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44장부터 계속되는 말씀이 뭐예요. 유일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차원이 달라요. 이 땅 살아가는데 뭐 한 20년 더 살게 해 주고, 병 안 걸리게 해 주고, 돈 좀 잘 벌게 해 주고, 그런 차원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도 만날 수도 없어요.
전혀 다른 차원이에요. 생명에 차원이에요. 이 생명이 임하고, 생명이 피어나는 곳에는 기쁨이 충만한 것이에요. 그러므로 심각하게 증명하셔야 해요. 나는 기쁜가?
기쁠 수가 있나? 이 긴 말씀에 지쳐서 생명의 의는 함께 나누며 즐거워하는 거예요. 단절된 삶. 제가 보기에는 불쌍해요. 여러분 자신은 괜찮습니까? 진정한 친구도 없고, 정말 나와 하나 된 생명이 있으십니까? 그건 놔두고, 하나님은 나와 하나이십니까? 내 가슴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가슴에 내가 있습니까?
바벨론은 구약에서 신약까지 바벨론을 목줄로 삼은 것은 제국의 본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저주가 그대로 들어있어요. 그게 뭐요? 스스로 기만이에요. 누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속여요. 내 교리. 내 종교 만들어서.
교만한 죄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 다 틀려도 나는 옳고 다른 사람 다 멸망해도 나는 멸망할 리가 없고, 환각적 야심. 환각적이에요. 환각적이라는 말은 너무 고상해요. 솔직히 우리 현실은 쥐약 먹은 야심입니다.
아무 근거 없이 나는 잘돼야 해. 나는 너보다 잘 돼야 하고 성공해야 해요. 그런 것만 생각하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어떤 섭리 속으로 인도하시는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내 욕심이 이루어지는 것만 바라보면 이제 우리가 바벨론은 사는 것이고, 우리가 바벨론이 된 것이에요.
계17:5에 이렇게 마감합니다.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성도님들 하나임 교회로 부르심을 받아서 끝까지 거짓 종교 생활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고 안타깝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데서처럼.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았다. 하나님의 자녀다. 복 주십니다. 이러면 그런대로 했을 만하지요. 여기는 말씀이 선포되잖아요. 정말 아픕니다.
말씀이 아프잖아요. 우리를 찔러 쪼개는 말씀이잖아요. 그것을 받으시고 견뎌내시는 데도 끝까지 거짓 구원에 붙들린다면 이거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잖아요.
2024년이 밝았어요. 올해는 우리 보고 뭘 잘하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뭘 더 바치라는 것도 아니고, 너의 가슴에 나로 인한 기쁨이 있느냐? 나로 인한 기쁨이 없으면 예배가 무슨 소용이며, 찬양이 무슨 소용입니까? 섬김이, 기도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우리가 아예 모른다면 모르지만, 십자가의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사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저절로 피어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2024년 우리 가슴에 마귀에게 빼앗겼던 하나님을 기뻐함이 회복됨으로 말미암아 나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하나님 허락하신 열매가 내 심령과 가정에 점점 풍성해지는 2024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기도할 때요. 올해는 하나님을 기뻐함이 내 가슴에 있게 하옵소서. 이 껍질밖에 없는 종교 생활 나는 끝냈습니다. 작년으로 십자가 밑에 내려놨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하나님 약속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 간절히 다같이 기도합니다.
첫댓글 아멘~^^ 목사님~^^ 감사감사합니다. 샬롬 샬롬 ~^^ 문정수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