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소
방문일자 : 2006년 6월 3일 토요일
포은 묘소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판교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57번 지방도로를 타고
성남방면으로 들어가면 분당신도시를 지나게 됩니다.
약간의 오르막이 시작될 즈음 오른쪽에 근대화의 상징인 높은 굴뚝이 여러 개 보이는데
바로 한국전력공사 복합화력발전소입니다.
좌측으로 "강남300컨트리클럽"을 지나 큰 도로를 따라 곧장 가면 43번 국도를 만납니다.
여기서 오른쪽 수원방면으로 조금 들어서면 "레이크사이드 골프장" 직전
"포은 정몽주 선생묘"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니 바로 묘소입구입니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포은 정몽주 선생
우리 국민들은 누구나 정몽주 선생은 고려말의 충신으로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 일당에게 개성 선죽교에서 맞아 죽은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필자의 경우 국사를 배운지가 매우 까마득하므로
먼저 정몽주라는 인물을 한번 살펴보고 묘소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고려 말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달가(達可)이고,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선생은 영천(永川) 출생으로,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1376년(우왕2년)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 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9년(창왕1년) 예문관대제학, 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2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 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선생은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1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묘소의 아래에 사위 이석형(李石亨)의 묘와 신도비가 있고, 입구에는 1699년 송시열이 찬하고 김수증이 쓴 선생의 신도비가 있다.』(자료 : 인터넷검색).
이 글을 읽어보면 정몽주가 이성계일파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그의 아들인 이방원일파로부터 먼저 죽임을 당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포은의 묘소
묘소입구에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크게 세워져 있지만 관리사무소도 없고
또 누구하나 출입자를 안내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맞아 주는 것은 대문 앞에 누어있는 개 한 마리입니다.
가까이 다가가 카메라를 들이대도 눈만 한번 뜨고 감을 뿐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대문 앞에 개가 있으면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인데도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안쪽 묘소아래 잔디 위에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나들이를 나왔는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목격됩니다.
왼쪽에는 옛날 가옥이 몇 채 서 있는데 잔디아래에는
정몽주의 단심가,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은 백로가가 비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모친의 백로가>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묘소를 향해 올라가는데 체험학습을 나온 선생님이
정몽주선생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면
학생들은 동그라미와 가위표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살아있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묘소는 아주 잘 조성되어 있고 오른쪽 아래에는 정몽주의 사위인 이석형의 묘소도 보입니다.
그리고 기와집이 있는 뒤쪽 언덕에는 여러 기의 묘소가 별도로 조성되어 있는데
묘소의 크기와 봉분, 그리고 망부석등으로 보아
한 시대를 풍미한 선조 들의 무덤으로 생각됩니다.
아래로 내려와 마당을 지나려는데 넓은 터에는 토종닭들이 그늘에 모여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더위로 지친 표정이 역력합니다.
아까 대문 앞을 지키던 개는
이제는 자세를 조금 바꾸었을 뿐 인기척이 들려도 눈도 뜨지 않습니다.
묘소입구에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의 비각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눈길을 끕니다.
연안이씨 비각공원
묘소안에 개와 닭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가옥에는 사람이 거주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곳은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역사적인 유적지이므로
보다 잘 관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