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무렵 에스파냐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하였던 그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이후 요한은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요한 사제에게
온전히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열렬히 사랑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를 본받아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을 뵈옵게 하소서.
제1독서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1,13-20
13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15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6 네가 그것들을 까부르면 바람이 쓸어 가고 폭풍이 그것들을 흩날려 버리리라.
그러나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
17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18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19 나는 광야에 향백나무와 아카시아, 도금양나무와 소나무를 갖다 놓고
사막에 방백나무와 사철가막살나무와 젓나무를 함께 심으리라.
20 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손수 이루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음을
모든 이가 보아 알고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복음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1-1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를 폭행하는 것을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죄라고 해서 독성죄라고 합니다. 독성죄는 세례자 요한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의 것을 취하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것이 피조물인 인간에게까지 폭력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있을까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있을법한 한 부부의 이이기입니다. 어떤 남자는 직장 일을 열심히 하며 아내를 굳게 믿는 순정파 남편입니다. 둘에게는 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능력이 없는 남편을 무시하며 남편을 만나기 전 남자와 다시 만나는 아내가 있습니다. 길면 꼬리가 밟히는 법. 남자는 조금씩 아내의 불륜 사실을 눈치챕니다. 하지만 남편은 다시 아내가 뉘우치고 돌아왔을 때 어색하지 않도록 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점점 더 대범해져서 남편이 잠깐 집을 비워도 남자를 들입니다. 급기야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아기의 분유에 수면제까지 탑니다. 이런 아내와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남자를 보며 남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더는 아내가 아기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이 들면 아내를 떠나고 어쩌면 둘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를 떠나야 하는 남편도 슬프겠지만, 더 고통스러운 복수는 불륜을 저지른 둘의 몫이 될 것입니다.
부부는 일단 혼인했다면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혼인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결하지 못한 배우자와 혼인했다면 아무리 그녀와 헤어져 살 능력이 되더라도 한 번은 물려야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한순간에 모든 인간을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셔도 그분은 사랑이시기에 한 번은 폭행 당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독성죄까지 일어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설 마음이 없는 인간이라면 결국 어떻게 할까요? 관계를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 5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이 아들 벨사차르 왕은 큰 잔치를 벌이고 그와 그의 손님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신성한 그릇으로 포도주를 마십니다. 잔치 도중 신비한 손이 나타나 벽에 메시지를 씁니다. 벨사차르는 매우 놀라 그 글을 해석해 달라고 박사들과 마술사들을 불러왔지만, 그들은 글을 해석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왕비의 제안으로 다니엘을 데려옵니다.
지혜와 꿈과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유명한 다니엘은 글을 읽고 해석합니다. 다니엘은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이라는 메시지를 해석하여 하느님께서 벨사차르의 통치를 심판하시어 그의 나라를 메디아 인들과 페르시아 인들에게 주시겠다는 뜻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날 밤 벨사차르는 살해됩니다.
이 글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프레스’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다니 5,25-28)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되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분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지. 여기서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내가 죽고 내가 그분의 것이 되어 그분께 이용 당하는 것이 내가 살아서 그분을 나의 금송아지로 이용하는 것보다 더 행복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예수님은 처음에 그들에게 폭행 당하십니다. 그러니 먼저 회개합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파라오가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파라오로부터 이스라엘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이때가 세례자 요한의 역할입니다. 홍해를 건넌 뒤로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목자, 곧 메시아의 역할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파라오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파라오는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 그와 대치되는 ‘나’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의 뱀과 같습니다. 뱀을 긍정하면서 하느님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독성죄가 벌어집니다. 하느님을 폭력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선악과를 바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아가 강하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독성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감사의 봉헌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감사하게 봉헌하는 이들은 결코 성체를 영하며 독성죄에 빠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체를 영해도 구원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에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서와 신학을 두루 섭렵한 석학이었고, 그래서 하느님에 관한 강의를 많이 했으며 신학교에서도 강의 활동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풍부한 지식을 갖춘 신학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이제 사제로서의 직분을 떠나겠다는 충격적인 말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지요.
“나는 하느님의 지식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뒤진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은 하느님이란 말밖에 모르는 어떤 할머니보다도 못했습니다.”
지식과 신앙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식을 통해 신앙의 이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만 채우는 하느님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이 존경하는 신부들을 바라봅니다. 많은 신학적 지식을 갖춘 신부보다 사랑의 마음을 갖춘 신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신부보다 기도와 묵상을 열심히 하며 신앙적 열심을 보여주는 사랑 있는 신부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과연 사랑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합니다.
중요하다고 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을까요? 지식을 채우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마음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하느님에 대해 충만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지도자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등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식만 있을 뿐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나가서 오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 낙타털 옷과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충분히 사람들 위에 설 수도 있었겠지만,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께 대한 참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에 반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늘 나라를 폭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을 살면서도 마치 그 삶이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까지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폭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요? 주님께 대한 신앙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무엇인가를 해라. 잘 되지 않으면 다른 무언가를 해라.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없다(짐 하이타워).
사진설명: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