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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시작 1,1-8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5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1-9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 함은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직 목자이신 당신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돈주머니 대신 당신께 대한 ‘믿음의 주머니’를 차고 여행보따리 대신 ‘희망의 보따리’를 매고 자신의 발에 맞춘 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복음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라” 함은 머뭇거리거나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열중하라는 말씀이요,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함은 더 좋은 집과 대우를 위해 찾아 나서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평화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되 자신의 평화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15)
‘평화’는 또한 부활의 첫 번째 선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도 평화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루카 24,36).
그리고 인사를 받으려하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나누라 하십니다.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함은 음식물에 대한 유다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방해 받지 말고 친교를 나누며, 동시에 이는 “차려주는”대로 먹으로라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곧 유대 율법에 따라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이 차려주는 대로 음식을 받아먹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일꾼으로서 삯을 받음이 정당함을 말해줍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함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을 전파하고 증거하는 것이 소명임을 알라 하심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무엇이 해야 할 일인지,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 그리고 ‘무엇이 본질적이고 우선적이며, 무엇이 부차적이고 부수적인지’를 잘 분별하여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루카 10,5)
주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신뢰를 두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탄생, 믿음의 성장>
한 사람에게 있어서 믿음은 어떻게 탄생할까?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일까?
또 믿음은 어떻게 성장할까?
이것에 대해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생각게도 하고 답도 주는 것 같습니다.
예외적인 사람 외에 믿음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생겨나고 성장하는데, 바오로 사도와 오늘 축일을 지내는 두 성인의 관계가 바로 이런 관계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 설날 저희는 가족이 없거나 갈 곳이 없는 분들과 보냈는데 그중에는 탈북자들이 여럿 있었지요.
올해는 거의 모든 탈북자가 비신자여서 제상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며 강론 중에 북에서는 제사 때 조상들께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지 물었는데, 북에서는 김일성만 믿을 뿐 조상도 신도 믿지 않는다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것은 사실로서, 제가 북에 갔을 때도 여기저기 김일성을 신격화한 구호들, 예를 들어 “우리의 위대한 수령님은 영원히 살아계신다.”라는, 오직 신에게만 쓸 수 있는 구호가 돌에 새겨져 있곤 했지요.
제 생각에 사람은 다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지요.
무엇을 믿든 어떻게 믿든 믿고, 자기를 믿든 다른 사람을 믿든 믿고, 다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믿든 도둑놈으로 믿든 믿고, 하느님이 없다고 믿든 계신다고 믿든 다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있다고 믿지 않고 없다고 믿는 사람은 왜 그렇습니까?
스스로 믿음을 시작할 수 없으면 믿게 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다시 말해서 앞서 얘기한 탈북자처럼 신에 대해 한 번도 얘기들은 바 없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선배, 믿음의 전달자가 있어야 하는데,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탄생에는 믿음의 엄마, 믿음의 선각자, 믿음의 선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고, 계시의 주님께서 탄생케 해주시는 거지만, 사도 바오로처럼 자기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 줄 알고 신나게 가다가 엎어지고, 눈이 먼 사람 그러나 그때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를 먼저 들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의 엄마, 믿음의 선각자, 믿음의 선배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말로 가르치기 전에 존재와 삶으로 가리킵니다.
가정에서는 엄마 아버지가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느님을 가리키고, 교회에서는 성인 성녀들이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느님을 가리키고, 세상에서는 믿는 이들 특히 수도자 성직자들이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느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이제 말로서 하느님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교리 교육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신앙 간증의 형태가 될 수도 있지만, 행복한 사람의 힘이 있는 가르침 곧 바오로 사도처럼 확신에 찬 가르침이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디모테오가 자기의 아들이라고 함은 믿음의 아들이라는 뜻이겠지만,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먼저 디모테오에게 믿음을 심어줬고, 그 믿음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심어진 믿음을 성장케 한 것이 바로 자기라는 듯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확신에 차서 얘기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바오로 사도와 디모테오와 티토는 이런 면에서 참 부러운 관계입니다.
그래서 어제 바오로의 회심 축일에 이어 오늘 두 성인의 축일을 지내는 걸 텐데, 우리 안에서도 이런 관계가 형성되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근본에 충실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고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 하시며 홀로서기를 바라셨습니다.
‘인사는 왜 하는가?’ 생각해 보면 사랑과 존경에서 합니다.
인사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래의 의미를 잃을 때가 많습니다.
잘 보이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며,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또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근본은 잃은 채 껍데기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인사까지 하지 마라.’는 것은 한 마디로 ‘한 눈 팔지 마라’, ‘양다리 걸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소명을 받았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마음을 쏟아야지 어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야 되겠습니까?
언젠가 익명의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그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라고 하시며 신자들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더 많은 관계를 맺어야 할 텐데 ‘끊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오로지 주님 안에 머물라는 사랑의 충고였음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을 간직합니다.
인사하다 보면, 다시 말해 사람에게 매이다 보면 진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는 일깨움을 주십니다.
사람이 정에 매달리다 보면 근본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으로 족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인기가 오르는 것 같은데 주님의 눈 밖에 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주님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고,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나의 가슴은 뛰노라”)(이사 61,10)
하느님만을 갈망하고 즐거워해야 하거늘 인간적인 욕망이 왜 그리 강한지 모르겠습니다.
바오로는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5-6)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도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테오 1,8).하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인간적인 것들에 매이지 않는 삶을 갈망하는 오늘을 겸손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산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단순한 입으로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을 거쳐 손발에서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하는 유일한 방법>
요즘 넷플릭스에서 흥행하는 우리나라 영화 ‘정이’의 줄거리입니다.
지구 종말 즈음 인류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들을 우주에 만들었는데 내전이 발생하였습니다.
몸이 약한 서현의 수술비를 위해 전쟁에 나간 엄마 정이는 영웅적인 전쟁 영웅이 되었지만 결국 정이가 수술하는 날 뇌사 상태가 됩니다.
큰 기업들은 정이의 전투 능력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 정이의 뇌를 로봇들에게 주입합니다.
이런 가운데 서현은 성인이 되어 엄마의 뇌로 A.I. 로봇들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습니다.
서현도 뇌를 다른 기계의 몸에 넣으면 영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기계인 줄만 알았던 엄마의 로봇에서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딸에 대한 사랑의 영역이었습니다.
서현은 이제 뇌사 상태로 누워 있는 엄마가 아닌 로봇에게 무언가 책임을 느낍니다.
그녀에게도 모성애가 발동하는 것입니다.
이제 엄마가 아기처럼 무언가를 배우는 로봇이고 아이가 엄마가 되어 폐기될 로봇에게 새 인생을 살도록 목숨을 겁니다.
한갓 로봇을 인격체로 취급하는 것을 알게 된 회사에서는 가만있지 않았지만, 서현은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로봇을 자유롭게 살도록 풀어주고 보내줍니다.
이 영화는 공상 과학 SF 물이지만, 실제로는 한 아이가 어떻게 어머니가 되어가는지 그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누군가를 또 키워내고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려는 과정에서 활활 타오릅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도 부모가 되려는 의지가 없다면 그냥 싹이 트지 못한 씨앗처럼 우리 안에서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많은 일꾼을 보내 달라고 주님께 청하라는 내용입니다.
목자는 부모가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탄생 시키는 하느님 자녀들의 어머니입니다.
이 역할을 맡았던 분들이 바오로 사도의 제자들이라 볼 수 있는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렇게 씁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2티모 1,6)
안수로 받는 것은 성령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냥 불에 타는 것이 아닙니다.
차에 연료를 넣어도 움직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 연료는 연소하지 않습니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은사를 불태우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가 준 성령은 어머니가 딸에게 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피 흘림입니다.
피 흘림은 피 흘릴 때 그 사람 안에서 불탑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2티모 1,7.8)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작게 타오릅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망을 채울 때 꺼집니다.
영과 육은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내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가장 활활 타올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받기만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그 성령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와 단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멈추지 말고 이웃의 영혼을 성장 시키기 위해 나도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바로 서현이 어머니를 닮은 하나의 로봇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죽음을 감수한 것과 같습니다.
이때 어머니에게서 받은 성령이 가장 활발히 타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 그리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령이 활발히 탈 때 육체적으로는 죽는 것 같지만 그 생명은 가장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만약 사제가 본인 혼자 묵상하기 위해 기도한다면 성령의 불이 탈까요?
물론 불씨가 꺼지지는 않을지라도 활활 탈 수는 없습니다.
신자들을 위해 피를 흘리려고 할 때 그제야 부어진 성령이 불이 되어 나를 태웁니다.
성령은 내가 이웃 사랑의 뜻으로 불살라지기를 원할 때 우리 안에서 타게 되는 것입니다.
유튜브에는 가상현실 VR을 쓰고 일주일, 혹은 100일까지 살아본 이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에 그들이 느끼는 것은 자유입니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허무함’ 자체입니다.
그들이 가상 세계에서 나와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진짜 자기 친구를 만나 그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 할 때야만 우리 안에 심어진 성령의 불씨가 타오르고 그제야 기쁨과 평화도 생겨납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합시다.
성령의 불을 태우는 방법은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목자는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초세기 교회 바오로 사도의 역할과 사명이 얼마나 막중했었는지는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티모테오 주교와 티토 주교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직제자로서 이방 선교 활동의 최측근 협력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 친히 두 사람을 선발하여 양성시켰고, 일정 지역의 사목 책임자, 즉 주교로 임명한 것입니다.
당시 바오로 사도는 주교조차 임명할 권위와 역량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소유하고 있었던 권위와 힘은 오로지 사랑과 봉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초세기 교회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손톱만큼의 권위나 자리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주님을 위한 것이며, 주님 나라 건설을 위한 것이며, 이웃 사랑의 실천과 봉사를 위해 주어진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티토를 얼마나 극진히 총애했는지는 다음의 표현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티토서 1장 4절)
바오로 사도는 당신의 제자 티토를 친아들처럼 여겼습니다.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한은 또 어떻습니까?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합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티모테오 2서 1장 3~5절)
보십시오.
그들의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은 스승 제자 사이를 넘어 연인 사이에 주고받은 연서(戀書) 이상의 분위기를 풍깁니다.
초기 교회 바오로 사도와 영적 제자들 사이에는 이토록 끈끈한 가족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인연은 혈연이나 지연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티토는 원래 이교도였으나 바오로 사도를 만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인 개종자였습니다.
티토는 바오로 사도를 도와 마케도니아 교회와 코린토 교회 신자들을 위해 열심히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비록 성경 이름은 티토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내용을 보면 초대교회 지도자들, 더 넓게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사목서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티토 1장 7~9절)
정말 바오로 사도 대단하십니다.
어찌 그리도 핵심을 찌르시는지요?
언행일치가 안 되는 지도자, 자기관리 등 기본도 안되는 지도자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지도자는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어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거만하지 않고 겸손해야겠습니다.
여간해서는 분노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기도를 통해 열심히 내공을 닦아야겠습니다.
술도 조심해야겠습니다.
말도 신중히 가려서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흠 잡힐 데 없는 사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지도자가 되어 이웃을 지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생활>
오늘 복음 말씀은 표현되어 있는 대로 읽으면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도들과 선교사들이 지켜야 할 ‘한시적인 실천 지침’인데, 넓은 뜻으로 읽으면, 신앙인들이 평생 지켜야 할 ‘삶의 지침’입니다.
1)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이 말씀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구원받을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다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일꾼’이라는 말을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으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넓은 뜻으로 ‘충실한 신앙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리는 것은 당연히 할 일입니다.
그런 뜻에서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사실 모든 신앙인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입니다.
신앙인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은 실제로는 신앙인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일하고 나서 보상이나 대가를 요구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성소자들을 더 많이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로 이해하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사고 청하여라.”입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각자 자기 자신이 충실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고 청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예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하는 생활입니다.
어렵든지 쉽든지 간에, 힘든 상황이든지 편안한 상황이든지 간에, 신앙인은 늘 주님의 도움과 보호 안에서 사는 사람이고, 그 도움과 보호 덕분에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행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입니다.
기도문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 교회의 모든 기도문에는 전부 다 그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이 세상에서의 신앙 여정은 이리 떼 가운데에 놓여 있는 양들 같은 처지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신앙생활이 위험하고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이리 떼에서 양들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려면, 양들은 더욱 양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키려면, 신앙인들이 더욱더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이 말씀은 물질에 대한 집착과 탐욕과 걱정을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집착과 탐욕은 죄이고, 걱정은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돈이 없어서 아무 일도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영적으로’ 살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돈이 많아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하느님이 아니라 돈의 힘에만 의지한다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5)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이 말씀은 실제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세속 일’에 연연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6)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는 생활이고, 그 평화를 ‘삶’으로 드러내고, 증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주려면 우선 먼저 신앙인 자신이 영적인 참 평화를 가득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 평화는 물질을 통해서 오지 않습니다.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에만 그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과 탐욕과 걱정을 버리지 않으면 평화를 잃게 됩니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복음을 전하는 활동은 호의호식하려고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8)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믿음과 사랑 실천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 같은 것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열린 공동체 - 부르심과 파견, 관상과 활동, 제자와 선교사>
오늘은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 어제는 문득 사람이 얼마나 허망하고 덧없는, 무의미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한번만 주어진 유일회적 선물인생을 정말 생각없이, 의식없이, 영혼없이, 길을 잃고, 자기를 잃고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묻는 자가 수도자라 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사람 누구나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신자라면 자주 질문하며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는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늘 새롭게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이래서 제 ‘행복기도’를 자주 바치시길 권합니다.
2. 창조자이시고 만유의 주재자이신 아버지 앞에 서면 하고 싶은 고백은 “주님, 참회합니다” 하나 뿐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보다 이 고백만 하게 되고, 또 하고 싶어집니다.
참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는, 또 하느님 아버지 앞에 갔을 때 우선적인 고백은 이 고백 하나이다 싶습니다.
3. 이 고백에 대한 어느 자매님의 반응이 고마웠고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신부님의 행복기도에 ‘주님, 참회합니다’ 고백이 전율케 합니다.
그리고 신부님의 주님을 향한 무한한 마음이 더욱 엿보여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신부님, 존경합니다!”
4. 어제 1월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에는 수도원에 경사가 있었고 공동체 형제들은 모두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김종훈 루카 형제가 수도원에 입회한 것입니다.
34세로 수도공동체에서 가장 젊은 나이로 공동체 형제들도 고무된 듯 아연 활기를 띠는 분위기였으며 성무일도 소리도 우렁찼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 제자들의 수도공동체에 합류한 형제입니다.
로마에서 수학중인 엘리야 수사와 더불어 이제 13명의 수도가족이 되었습니다.
5. 어느 자매의 면담성사 중 자매님의 가정 신앙 생활 소개에 감동했고 소박한 정성이 담긴 곷감도 선물받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알아온, 수도원 성전에 자주 기도하러 오는 자매로 안팎으로 참으로 치열히 열심히 살아가는 아름다운 자매입니다.
“남편과 아들 둘에 모두 네 식구입니다.
아침에는 각자 기도하고 저녁에는 함께 기도합니다.
아침 출근전에 저는 남편에 이어 아들 둘 이마에 성수를 찍어 이마에 십자인호를 긋고 두손을 펴서 기도문을 외우며 십자가를 크게 그으며 축복기도를 합니다.
세상에 가족들을 내보내며 모든 어둠과 악으로부터 보호해주시기를 청하며 해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남편부터 가볍게 차례대로 포옹합니다.
아이들도 아빠랑 차례로 포옹합니다.
기도를 받은 가족들은 성호를 그으며 “아멘”이라고 대답하고 대문을 나섭니다.
오랜시간 이렇게 기도해 주다보니 자연스레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성혈과 거룩한 상처의 공로를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형제를 축복합니다. 아멘.”
그대로 하느님과 세상에 활짝 열려있는 ‘하느님 중심의 열린 공동체’, 가정교회같습니다.
자매님을 “성녀요 여사제”라 극찬했습니다.
흡사 주님께 강복받은후 파견되는 제자들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하느님 중심의 열린 공동체 - 부르심과 파견, 관상과 활동, 제자와 선교사”입니다.
그대로 교회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우리의 복된 신원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 중심의 부르심의 공동체, 관상 친교의 공동체, 제자들의 공동체가 우선입니다.
물론 닫힌 공동체가 아니라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린 공동체로 다음 고백기도 그대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믿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반드시 지녀야 할 앞문과 뒷문입니다.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마침 문재인 티모테오 전 대통령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티모테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다’ 뜻입니다.
두 성인 모두 바오로의 신뢰와 사랑을 온몸에 받았던 애제자이자 선교활동의 협력자로 디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티토는 크레타 교회를 섬긴 주교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오로가 제자공동체에 속한 애제자 디모테오에게 보낸 따뜻한 사랑이 가득 담긴 감사와 격려의 편지로 오늘 공동체 생활중인 우리 하나하나를 향한 격려말씀으로 받아 들여도 은혜롭겠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제자로서의 공동체 삶이나 선교사로서의 복음 선포의 삶에 얼마나 적절하고 유익한 바오로 사도의 충심과 애정이 가득 담긴 위로와 격려의 조언인지요!
참으로 이렇게 준비된 공동체만이 비로소 세상에 활짝 열린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보다시피 때가 되자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세상에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선교여정 중 영원한 도반인 주님과 함께 눈에 보이는 형제도반은 필수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관상과 활동은 삶의 리듬이요 제자와 선교사는 우리의 이중 신원입니다.
안으로는 제자요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선교는 공동체의 숨통입니다.
선교없는 공동체는 곧 시들어 죽습니다.
부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공동체에 뿌리를 둔 다음 복음 선포자로서의 파견은 필수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 말씀은 복음 선포 삶의 자리로 파견받는 우리에게도 크게 도움과 참고가 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수확할 밭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라는 청과 더불어 나부터 주님의 일꾼으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이리 떼 세상에 주님의 신망애信望愛와 겸손과 지혜, 용기로 무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한 무소유의, 무욕의 정신으로 최소한의 의식주에 자족하며 자발적 가난을 살라는 다음 가르침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성령’의 도우심과 곳곳에 믿는 형제들의 ‘환대’가 있어 가능한 이런 자발적 가난의 삶이겠습니다.
동서방 막론하고 옛 사람들에게 나그네들에 대한 환대는 기본적 덕목이었습니다.
참으로 이런 무소유의 영성이 텅빈 충만에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텅빈 충만의 사랑에서 샘솟는 주님의 평화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민폐를 최소화하면서 치유와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집 저집으로 다니지 마라.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우리 제자들이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이 평화에 치유요 하느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자 평화 자체요 힐링 자체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 때 우리 역시 주님의 평화가, 주님의 힐링이,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저절로 주님의 제자로서 선교사로서의 사명도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나 수도공동체는 평화와 힐링의 공동체요,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평화와 힐링 센터도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하느님의 나라가, 주님의 평화가, 주님의 힐링이 되어 살게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또 오늘 이 강론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요즘은 제대 봉사자들이 많아서 제의방에서 사제들의 제의를 펴고, 세탁하는 것을 봉사자들이 주로 합니다.
제가 본당 신부로 있을 때는 봉사자들이 저의 제의방 구두를 깨끗하게 해 주었고, 강론 원고는 정리해서 서류철에 보관해 주었습니다.
제대와 제구를 청소하고, 제의 방을 관리하는 봉사자들에게 늘 감 사했습니다.
제대 봉사자들과 피정도 가고, 소풍을 가기도 했습니다.
제대 봉사자들이 없던 때는 그 일을 주로 수녀님들이 하였습니다.
첫 서원을 한 수녀님들이 제대 방의 소임을 맡곤 했습니다.
대부분의 수녀님들은 제대방의 소임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미사를 마치면 대부분 제의를 정성껏 벗어서 놓지만 바쁠 때는 대충 벗을 때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제의를 정리하는 수녀님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제의나 정리하려고 수도자가 된 것은 아닌데..”
스쳐가는 말로 들었지만 한편으로 미안했습니다.
그 뒤로는 가능하면 제의를 잘 벗어서 놓았습니다.
사제가 되면서 잔치에 초대 받으면 윗자리에 앉을 때가 많았습니다.
화장실 청소를 할 때면 신자들이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줄을 서서 식사를 할 때도 맨 앞에서 음식을 골랐습니다.
여행을 갈 때도 독방을 사용하였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대접 받는 일에 익숙했던 저도 부끄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교구 사목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안면도로 지역 대표 총구역장님들과 단합대회를 갔습니다.
저는 미사도구를 챙겨서 갔습니다.
저녁에 잠자리를 정하면서 방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총구역장님들은 그래도 신부님은 독방을 드리자고 했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말고 저도 같이 자겠다고 했습니다.
같은 방을 사용하면서 총구역장님들이 불편하게 지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는 지하철을 타고 명동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동안 제가 참 편하게 지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비난하셨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행동을 저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이스라엘 순례 중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의방을 담당하는 수사님을 보았습니다.
미사는 부활성당, 무덤성당, 십자가 성당에서 있었습니다.
요셉 마리아 수사님은 30분 단위로 시작되는 미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제의방에 제의를 준비하였고, 미사도구를 준비하였고, 언어별로 미사경본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는 미사가 취소된 시간에 무덤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영광도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경배를 갔기 때문에 수사님도 우리를 알아보았습니다.
수사님은 신부님들이 대충 벗어놓은 제의도 정성껏 다시 정리하였습니다.
수사님의 배려와 정성 덕분에 순례를 온 많은 순례단들이 차질 없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꽃이 피어서 아름다운 모습을 주로 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꽃들은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눈빛으로 정성껏 미사를 준비해주던 수사님도 참 좋은 몫을 택했다고 생각합니 다.
요셉 마리아 수사님께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관우와 함께 전쟁터를 달리던 적토마도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마부와 함께 시골에서 짐을 나르던 이름 없던 말도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던 나귀도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원망과 불평의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그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중용 23편도 이렇게 이야기합니 다.
“작은 일에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 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삶의 성공은 물질을 많이 남기는 것도, 출세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의 일에 기쁨으로 정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서양의 고전음악 작곡가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자기에게 음악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혹시 전에 어디선가 음악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배운 적이 있다고 하면 수업료를 2배로 청구했고, 배운 적이 없다면 오히려 수업료를 절반만 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를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음악을 배웠다고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우선 그 찌꺼기를 털어내야 하는데 이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새로 가르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힘들단 말이오.”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 탁구를 배웠는데, 처음에는 기본기를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배워서 기본기가 엉망인 사람은 자세를 다시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만큼 실력이 향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처음 탁구를 배울 때 기본기부터 먼저 탄탄하게 익힌 사람은 금세 실력이 향상됩니다.
성당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성당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은 주로 오랫동안 성당에 다녔던 열심한 분이십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자기 생각과 다른 점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툼과 논쟁을 계속하면서 분열을 가져오지요.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똑같은 모습으로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습니까?
그런 주님을 자기의 좁은 마음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고정관념까지도 버릴 수 있을 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며 일흔두 명의 제자를 둘씩 보내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루카 10,4)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떠나는 사랑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가지고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사람에게도 의지하지 말라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모든 것을 버려야 주님의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나아가는 기본기는 오로지 하나, ‘비움’이었습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모두 버려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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