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우리나라와 이탈리아의 월드컵 8강 경기가 있었습니다.
안정환 선수의 머리에 맞은 공이 맞았습니다. 그 공은 이탈리아 명골키퍼 지안루이지 부폰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안정환 선수는 팔을 펼쳐 들고 그라운드를 달렸습니다. 이 순간 그 장면을 보는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환호했습니다.
직접 운동장에서 뛰지 않고 관람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동시에 같은 감정을 가지고, 환호할 수 있었을까요?
과학자들은 스포츠나 드라마를 보며 몰입하는 이유를 ‘거울 신경’(mirror neuron)으로 설명합니다.
거울 신경이 무엇인가요?
거울 신경은 1996년 이탈리아 파르마대 지아코모 리졸라티 연구팀이 처음 제안한 이론입니다. 뇌의 신경세포 중에 거울 신경이라는 것이 있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마치 거울처럼 비춘다는 이론입니다. 이 때문에 타인의 행동과 감정까지 마치 자신이 그렇게 한 것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을 자주 만나는가? 누구와 대화를 자주 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2절~20절, “거울 신경의 무서운 요소?!”, 성경하브루타코칭
사람은 같이 지내다 보면 닮아 갑니다. 말도 행동도 다 닮습니다. 부부는 그래서 같이 살다 보면, 비슷해집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오래 같이 살기에 닮아 갑니다. 대화 수준도 생각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가 요즘 친해지고 닮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거장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루터와 칼빈을 산에 비유하면 알프스 산맥, 청교도들은 히말라야 산맥이라 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합니다.
이 조나단 에드워즈 책을 읽는데 조금만 읽어도 참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자 하였습니다. 시간 사용에 있어서 철저하게 자신을 컨트롤하고 목회와 연구에 매진하였습니다. 그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완전한 거룩한 크리스천이 있다면 바로 그 자신이 그런 인물이 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음식을 먹을 때 소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소화하는데 에너지를 덜 쓰고, 더 잘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잠도 줄이며 새벽에 일찍 일어나 생활하였습니다. 개인적 종말의 때가 올 것을 염두에 두고, 하루 하루 마지막인 것처럼 불꽃처럼 살다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고, 같은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바울은 갈라디아에 지체들이 자신이 그들과 같이 되었은즉, 그들도 자신같이 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갈라디아 지체들은 바울의 약점을 업신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진정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13절과 14절 말씀입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 전할 때 육체의 약함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것을 업신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버리지 않고,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님 같이 영접하여 주었습니다.
때로 죄를 범하고,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면 우리는 그런 악행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지체를 버리려고 하지는 않나요?
함께 하는 지체를 천사와 같이, 예수님 사랑하는 소자처럼 받아들이고 있나요?
갈라디아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바울과 함께 있을 때는 그렇게 약점을 업신여기지 않고 버리지 않았습니다.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 있자 마음이 멀어진 것을 넘어 바울의 리더십을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사랑하여 눈이라도 빼어 주려하였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러나 과거에는 그리하였지만 본문 속에 갈라디아인들 중에는 변심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늘 문제는 많은 사람보다 문제를 일으키고 그 문제에 동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분란과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갈라디아에는 바울과 원수가 되도록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참된 말(복음)을 전하였지만 몇몇 사람들은 원수처럼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16절에 이렇게 묻습니다.
16절,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가만히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진리를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게 하고, 사역자인 바울과 원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거짓 형제들이 열심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도는 갈라디아 지체들과 바울 사이를 이간시키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율법주의자들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이단들이 열심을 내듯 그러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한 영혼을 해산하는 고통을 감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바울은 시기적으로 약간 늦은 감이 있었지만, 언성을 높여서라도 의혹을 풀려고 하였습니다.
19절, 20절입니다.
19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데이비드 폴리슨은 <악한 분노, 선한 분노>에서 분을 내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분명, 분노를 잘못 내면 악한 분노가 되지만 분노 중 선한 분노도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사랑하고, 더 이상 리더십을 의심하고, 전하여 준 복음이 훼손 되지 않도록 소리를 높여 의심과 의혹을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주님! 공동체를 온전히 세워 가게 하시고, 악한 자를 품되 악은 방관하지 않게 하소서!
오늘 말씀 중 받은 도전 혹 은혜는 무엇인가요?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