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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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다니엘처럼: 세속적 도시에서 선교적 소수로 살기 (12)
하나님의 구속에는 시간표가 있다
단 9:20-27
제가 목회자로서 자주 받는 기도 요청 중 하나는 “가족의 구원”입니다.
“목사님, 우리 아들이 하나님을 여전히 부정합니다.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기도해 주세요.”
“목사님, 우리 남편이 언젠가부터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남편의 신앙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목사님, 부모님이 사이비에 빠진 것 같습니다. 도와주세요.”
우리의 삶은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다음 주 주제가 영적 전쟁인데요,
치열한 전쟁 중에 있기에 다니엘은 금식함으로 육신의 소욕을 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끊게 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혈과 육의 방식만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의인의 강력한 중보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던 다니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다니엘이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그에게 보내셨습니다. 23절입니다.
(단 9:23) 네가 간구하자 마자, 곧 응답이 있었다. 그 응답을 이제 내가 너에게 알려 주려고 왔다..
어떻게 이렇게 기도의 응답이 빨랐는가? 한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이는 그가 큰 은총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23절 후반절을 개정판으로 보시면,
[단 9: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왜냐하면)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지금까지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은 그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구체적인 평가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꿈도 보여주시고 해몽도 주셨지만, 다니엘을 어떻게 보시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를 천사를 통해 이렇게 부르십니다. “큰 은총을 입은 자여”
새번역에는 “하나님이 크게 사랑하시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크게 사랑하신다, 은총을 입었다는 말의 원어 하무돗의 기본 동사의 의미는 십계명에서도 사용된
“탐내다(hamad)”입니다. 하나님께서 “탐내는 대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명사형으로 바꾸면 그는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보물(들)”이란 뜻입니다.
“다니엘아, 너는 내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나의 보물이란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객관적으로 보기에 다니엘은 가장 존귀한 보물이라고 하기에는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일단 그는 청소년 시기에 포로로 끌려 왔잖아요. 환관장 밑에서 환관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세속 도시에서 거의 세뇌수준의 바벨론 교육을 받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음식들이 즐비한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마음 터놓을 수 있는 자들이 주위에 별로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다니엘은 크게 은총을 받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관점이며 인본주의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는 그 누구보다 가장 큰 은총을 받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존귀한 나의 보물이며 하나님이 크게 사랑하시는 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속 도시 한복판에서 뜻을 정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전심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다른 이들의 죄도 함께 고백하며 겸손히 낮은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약 4: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고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다니엘은 더 큰 은혜, 큰 은총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어떤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 다니엘은 자기 죄라는 겁니다. 자신의 허물 때문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다니엘은 하나님의 성전이 회복되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의 기도를 보세요. 20절입니다.
[단 9:20] 내가 아직 아뢰어 기도하면서, 나의 죄와 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하고, 나의 하나님의 거룩한 산 성전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주 나의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나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하나님의 성전 회복에 대해 누가 더 관심 갖겠습니까? 하나님이죠.
그런데 다니엘은 마치 성전이 무너진 것이 자기 책임인 양 마음 아파하면서,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예쁘겠습니까?
제가 매월 1일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한 몸 기도회를 가면,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모두 교회를 위해 기도하러 오신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찌나 울부짖으며 주여, 주여 하면서 기도하는 분들이 계신지 몰라요. 아니, 제가 담임목사인데 저보다 더 애통해하며 기도해요.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아세요? 고마워요. 너무 감사해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환우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는 것이 그렇게 감사하더라고요. 하물며 우리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왜 다니엘이 큰 은총을 받았나요? 딱 이 각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진 채로 수십 년 방치되어 있는 것이 무슨 자기 책임인 것 마냥,
“주님 나의 죄, 우리 죄 때문에 그랬습니다. 거룩한 성전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시오.”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 거죠? “야... 이 놈 정말 탐나네... 이 놈 정말 보물이네.. 다니엘아 고마워..”
이것이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분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에요.
혹시 현재 상황이 다니엘처럼 썩 좋은 환경은 아닙니까? 주위에는 시기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신앙 생활하기에는 더 안 좋은 환경입니까? 그런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큰 은총을 입은 자여 너는 내 존귀한 보물이야.”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차원의 응답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즉각적인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응답이라고 해서 다니엘이 생각했던 응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다니엘이 생각하고 구했던 것을 뛰어 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간구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값지고 근본적인 역사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3절과 25절에 반복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깨달아라”입니다.
하지만, 그 응답을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했습니다.
다니엘이 기도했던 것은 1) 자신과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9:19)와 2) 성전의 회복(9:17, 20)이었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응답됩니다.
먼저 “표면적인 차원”에서는 약속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그들은 포로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응답됩니다.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서 1차 포로 귀환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스룹바벨에 의해서 성전이 주전 516년경에 완공이 됩니다. 중도에 16년간 방해에 의해서 공사가 중단된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표는 정확합니다. 성전이 무너진 것이 주전 586년이고, 스룹바벨의 성전이 완공된 것이 주전 516년이니까 정확히 70년 만에 성전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른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지요.
성도님들 중에도 이와 같은 응답을 받는 분들이 계세요.
한 성도님께서 감사 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아내 되시는 분이 10대, 20대에 종교생활을 하다가
작년에 본 교회로 오셔서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소망이 일어났는데, 바로 거룩한 가정, 거룩한 부부가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울며, 남편에게 권면하기도 하고.
항상 기도제목이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한 달에 한번 예배를 드리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한 번이 두 번으로, 결국에는 지난주에 등록을 하셨다는 겁니다. 할렐루야!
등록절차를 밟을 때 아내의 눈에 그렇게 눈물이 나더랍니다. 항상 아내의 기도제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으니까요. 또한 응답하신 주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남편도 말씀을 들으며 가슴 속에 뜨거움이 일고, 말씀이 다 들리셨다고 해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는 시간표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들의 가정에도 있기를 축복합니다.
포로기를 마치고 유다 백성들이 본국으로 돌아온 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부흥회가 일어나지요.
사람들은 말씀을 몰라 범죄하였던 죄를 회개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완전히 변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중에는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이후에 현장예배가 재개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진정한 예배가 다 회복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정말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릅니까?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마음이 돌아섰나요? 그런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오히려 신앙이 더 약해진 분들도 계세요.
2023년 5월, 목회데이터 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코로나 이전보다 신앙이 더 좋아졌다고 응답한 장년과 청소년은 불과 17%입니다. 반면, 신앙이 더 약해졌다고 응답한 비율은 장년이 32%, 청소년이 40%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포로기가 끝나는 70년이 거의 다 되었어도 그가 재 위에 앉아 금식하며 기도한 이유입니다. 이 상태로 본국으로 돌아가봤자 포로기 이전과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진정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코로나는 끝났지만, 정말 우리의 중심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까?
만일 아니라면, 우리는 다니엘처럼 21일간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12월 11일부터 31일까지, 1차 다니엘 금식기도가 시작됩니다.
2차 금식기도는 연초부터 21일간 진행됩니다.
매일 금식에 대한 묵상 구절과 합심기도제목, 자기 점검표가 담긴 가이드 책자를 드릴 겁니다.
이 다니엘 금식기도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다니엘은 이벤트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개인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개인을 뛰어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지만 분명 골방의 기도입니다. 동시에 나라의 부흥과 각성을 위한 공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기도해야 할 때가 있으니 지금입니다.
하나님의 표면적인 응답은 70년 만에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응답하신 약속은 다니엘이 구한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층적인 차원의 용서와 회복이었습니다.
심층적인 차원의 응답: 일흔 이레 동안의 용서와 회복
“심층적인 차원”에서의 응답은 죄가 끝나는 겁니다. 속죄가 이루어지며 영원한 의가 세워지는 일입니다.
24절에 나옵니다. 개정판으로 보겠습니다.
(단 9:24, 개정)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4절은 일흔 이레라는 기한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표가 있다는 겁니다.
일흔 이레를 해석할 때, 70 곱하기 7이므로 490년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25절부터 보면 다시 490년을 세 가지 기간으로 나눕니다.
#490년 (일흔 이레) = 49년 (일곱이레 7x7, 25절), 434년 (예순두 이레 62x7, 25절), 7년 (이레, 27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속의 시간표입니다. 오늘 저희는 이 연도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 관계상 불가능하고, 또한 여기서 문자적인 숫자의 의미를 붙잡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냐고 물었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어요(마 18:22).
그럼 이 뜻이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인가요? 아니지요.
주님께서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용서해주시듯이, 우리도 형제에게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즉 490년의 의미는 완전 수 7과 7을 열 번 더한 70을 곱한 수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구속의 시간표에 따라 정확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24절에 의하면, 6가지가 이루어지는데, 처음 3가지는 죄와 관련이 있고,
마지막 3가지는 미래의 메시아 왕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첫 번째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24절의 첫 세 가지에 나온 허물, 죄, 죄악은 비슷한 단어 같지만, 각기 다 다른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1) 허물(פֶּשַׁע, pesha)이 그침: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불순종의 죄
2) 죄(חַטָּאת, hattat)가 끝남: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범죄 행위
3) 죄악(עָוֹן, awon)이 용서됨: 행위에 대한 죄책과 형벌
하나님은 유대 민족의 의도적인 불순종의 죄와 범죄 행위와 죄책과 형벌을 끝내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기도의 부담이었지요. 자신들의 죄 때문에 흩어지고 고통받게 되었잖아요.
어떻게 주님께서 이 일을 이루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겁니다.
그것이 두 번째 기간인 예순두 이레 기간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속죄할 희생 제물을 바침으로써 이루십니다.
그 희생 제물은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26절 보세요.
[단 9:26] 예순두 이레가 지난 다음에,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부당하게 살해되고...
왜 그가 부당하게 살해됩니까?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외쳤습니다(요 19:15).
열 므나의 비유에서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눅 19:14).
요한복음 1장에는 그가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요 1:10-11).
결국 예수님은 범죄자로서 로마 당국에 부당하게 넘겨져 대속의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대속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온갖 죄들, 즉,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범한 죄들,
모르고 지은 죄, 알고도 지은 죄, 계획적으로 지은 죄,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장차 범할 죄마저도 모든 죄가 그 십자가에서 구속(救贖)되었습니다.
보통 구속이라고 하면 법정에 구속(拘束)되었다의 의미로 쓰입니다.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 “대가를 치러서 소유권을 회복하거나 자유와 석방을 얻어낸다”는 의미의
구속(救贖)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죗값을 치르고 죽어야 할 우리 대신 예수님이 치르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셨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법정 구속이라는 말을 써도 의미가 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사실상 죽음은 하나님의 법정에 구속된 것이고,
사형 판결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죄와 사망의 죽음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24절의 약속이 뭡니까? 허물이 그치고, 죄가 끝나고, 죄악이 용서되었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에게는 미래의 약속이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 약속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새 마음을 부어주셔서 허물과 죄가 그칩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새언약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에도 나옵니다.
[히 10:16-17, 개정]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이 새언약입니다.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때가 되면, 새언약은 율법이 십계명 돌판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는 겁니다. 어떻게요? 성령을 통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을 넘어서 죄가 그쳐지는 겁니다.
죄를 지으려고 하면 성령이 근심하세요. 거짓말 하려고 하면 성령께서 근심하세요.
누군가를 미워하려고 하면 성령께서 근심하세요. 왜요?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고 살려주셨는데.
이기적으로 살려는 마음이 들다가도 어려운 이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요. 성령께서 마음을 주시니까.
하나님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의 시간표를 다니엘에게 계시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히 회개할 때, 죄를 완전히 용서하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의 의도적인 죄, 허물을 그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24절에 약속된 말씀입니다. 이미 십자가를 통해, 성령을 통해 주어진 말씀입니다.
제가 지난봄에 여호수아 시리즈 중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라” 말씀 중에 예화로 소개하였던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부모님의 통제가 닿지 않는 해외에서 살다보니 방탕하게 살았던 분입니다. 대학교 시절 매일 파티를 즐겼고 마약도 해보았으며 심지어 아이를 지운 것도 여러 번이었다는 거예요. 크리스천이라면 상상도 못할 나쁜 짓을 너무나 많이 저질렀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자기가 젊은 시절 얼마나 생각 없이 살았는지 깊이 깨달았다고 해요.
주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머리로는 알지만 과거의 그 죄가 자신을 무겁게 짓눌렀기에 괴로웠다는 거예요. 결혼을 하고 아기를 임신했는데 결국 유산이 되고 맙니다. 수술 하는 의사가 보더니 이미 자궁에 오래된 상처 자국들이 많다며 그 낙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몸에 남아 있더랍니다. 아기가 자라야 할 집이 이미 망가져 있는 거예요. 그때 그분께서 이렇게 물으셨어요.
"목사님, 제가 회개할 때 그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씻겨졌겠지만, 제 몸에는 여전히 죄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제가 범했던 낙태의 죄들에 벌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사님 저는 궁금합니다. 저같이 하나님께서 여러 번 생명을 주셨는데도, 제 편의 때문에
살인죄를 저지른 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제가 다시 엄마가 되는 은혜를 주실까요?
저는 하나님께 이것을 놓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평일 불 꺼진 교회 밖 문 앞에서 무릎 꿇고 하나님께 저의 과거를 진정 용서해달라고 회개하며 많은 날들을 주님의 은혜에 매달렸습니다.
"주님, 다시 한 번 제게 생명을 맡겨주시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키울게요.
하나님이 태의 문을 닫기로 결정하셔도 히스기야 왕처럼 간곡히 기도하면 마음을 돌리시지 않을까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 지난 2023년 1월 말 편지였습니다. 저는 그때 말씀에서 다윗에게 하나님이 여디디야, 솔로몬을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디디야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뜻이지요. 그것이 제가 드린 답변이었습니다. 진정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고요.
그때 그분이 최근에 다시 소식을 전해 주셨어요. 이분이 예수동행일기를 쓰시는 분입니다.
지난 2023년 3월 3일 새벽에 눈이 떠져서 새벽기도를 가셨다고 해요.
그래봤자 미국교회는 새벽기도가 없으니 불 꺼진 교회 계단에 앉아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왠지 모를 강한 이끌림에 집을 나섰답니다. 어두운 교회 계단에서 홀로 기도를 하신 거예요.
“하나님, 우리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요, 제가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또한 평소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던 북한을 위해 선교를 위해 불임으로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먼저 기도를 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자신의 태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한 거예요.
그런데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마음이 들더랍니다.
"이게 바로 내가 기뻐하는 제사란다. 네 기도를 잘 받았다."라고 하시는 것 같더랍니다.
그리고 "내가 새 일을 행할 것이다."라고 속삭이시는 것 같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사야 43장 18-19절 말씀이었습니다.
[사 43:18-19]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그리고 이틀 뒤, 3월 5일, 시험관 시술 첫 미팅과 검사를 앞두고 있었는데 이미 임신이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건강한 아기를 출산하신 거예요.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셨어요.
“목사님, 좋은 소식이 있어 연락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돌보아 주셔서 저 이번 달에 건강한 아기 출산했어요!”
저도 얼마나 기쁘던지요. 다음은 그분의 고백입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저의 낙태죄로 인해 상처투성이인 자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임신 과정 내내 다른 누구보다도
더 순탄하게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고,
제가 원하는 것만 간구했던 부족한 기도에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는 성숙한 기도의 자리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또한 부끄럽지만 그동안 떼쓰기에 가까웠던 부족했던 저의 기도조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응답해주셨습니다.
목사님, 이토록 하나님의 때와 역사는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듯 완벽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함께 기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진정 회개할 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에는 정확한 시간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고 대속하시면
더 이상 죄가 지배하지 못합니다.
찰스 스펄전이 다니엘서 9장 24절 강해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죄악이여 그대의 종말이 기록되었도다! 못 박힌 손이 그같이 기록하였도다!
두껍기 이를 데 없는 너의 책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과 사람들에 대한 악으로 가득 찬,
통탄스럽기 짝이 없는 것들이 아주 길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이제 네게서 ‘펜’을 빼앗으신다.
그래서 너는 이제 예전과 다르게 더 이상 기록하지 못할 것이다!”
24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것은 다니엘이 기도하고 간구한 것을 뛰어 넘는 응답이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먼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부분적으로 성취되었고,
앞으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더 이상 눈물과 아픔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정확한 구속의 시간표가 있음을 믿고 깨달으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귀한 보물과 같은 분들, 크게 사랑하시는 분들입니다.
최후 승리를 믿으며 우리의 간구보다 더 크게 역사하실 주님을 신뢰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