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를 담은 말
Daum카페/ 아내는 '시댁'에 남편은 '처가'에 간다…이런 말도 성차별
⑥ 차별을 부추기는 말
아니나 다를까,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니 일터에서 가장 먼저 ‘잘리는’ 이들은 여성들이다. 그중에서도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요새 같은 불황에 직장에 붙어 있기가 쫓겨나기보다 더 어렵단다. 땅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부드럽고 약한 흙이 가장 먼저 쓸려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불경기니 뭐니 할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있다. “아빠, 힘내세요!” 그리고 후렴이 이어진다. “우리가 있잖아요!” 그러면서 ‘엄마’들과 ‘아이’들은 손으로 깜찍한 심장 모양을 그려 보인다. 이 ‘응원부대’에 다 큰 아들은 없다. 그러니까 ‘노동력’이 있는 남자들은 모두 일터로 가고, 그러지 못한 아이들과 일터에서 잘린 여자들은 응원이나 열심히 하란 소리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펄쩍 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슨 소리야? 요새만큼 여성들 사회 진출이 자유로운 적이 언제 있었다고? 이젠 되레 역차별을 걱정해야 할 판인걸. 당장 교사나 공무원 비율을 봐. 너무 ‘여성화’돼서 오히려 문제 아냐?”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여자 선생님들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 교육에 해롭다느니, 공무원을 뽑을 때 남자들에게 점수를 더 줘서 ‘성별 균형’을 맞춰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도 들리더라. 세상 걱정하는 마음이야 고맙다마는 경우 바른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여성들이 교직이나 공무원직에 몰리는 까닭은 다른 곳에 문이 좁거나 굳게 잠겨 있기 때문이다. 다른 데선 아예 여성을 뽑지 않거나, 뽑아도 차 심부름만 시키다가 결혼하면 쫓아내니 어떡하란 말이냐. 그나마 차별이 덜 하다는 공직에 목숨 걸고 몰려들 수밖에. 게다가 학교에 남자 교사들이 많을 때는 아무도 ‘남초’ 현상이 심각하다고 걱정하지 않았다. 요새도 직장에 따라서는 여성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열에 한둘 있어서 ‘홍일점’이니 뭐니 하는 곳도 있지만 그걸 두고 시비 거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러니 ‘여초’ 현상이니 뭐니 하는 건 억지거나 기우일 뿐이다.
요새는 좀 줄어든 것 같지만 한때는 ‘여류’란 말도 버젓이 떠돌았다. 이 말은 ‘여류명사, 여류화가, 여류시인’처럼 대개 신분이나 직업 앞에 붙여 썼다. 아실 테지만 이 말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왔으며, 옛날 가부장사회에서 남자들만 득시글대는 분야에 가뭄에 콩나듯 여성이 섞여 있으면 ‘여자도 그런 일을 하다니 신기하다’는 뜻으로 붙여 준 것이다. 대접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차별하는 말이다. 여류는 있지만 ‘남류’는 없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그렇다. 옛날에 남학생 다니는 학교는 그냥 ‘중학교’라 부르면서 여학생이 다니는 학교는 별나게 ‘여자중학교’라고 일컫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여류라는 말속에는 이런 뜻이 들어있다. “여자들은 집에서 밥이나 하고 빨래나 할 것이지만, 그중 ‘발칙한’ 여자 한둘쯤 남자 일에 끼어드는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여자들이 다 그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이렇듯 여자들이 집안일 아닌 ‘바깥일’을 하는 것을 ‘불온’하게 본 눈길은 그 뿌리가 깊고도 단단하다.
한번은 아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라.
“어떤 글에 보니 ‘가사노동’이라는 말에 어머니를 ‘비하’하는 뜻이 들어 있대요.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키우는 ‘신성한’ 일을 두고 웬 ‘노동’ 타령이냐고 하던걸요.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헛갈려요.”
나는 깜짝 놀라 그런 말에 속지 말라고 일러 주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속셈은 뻔하다. 신성하다느니 아름답다느니 잔뜩 추어주면서 끝끝내 그 틀 안에 가두어 두려는 속셈이다. 전에 교사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자 벌떼처럼 일어나 나무라던 사람들 논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가르치는 일은 신성한 일이거늘, 어찌 교사가 노동자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이렇게 ‘노동 비하’를 하는 사람들은 집안일과 학교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오로지 약자들이 진실을 깨닫고 권리를 주장할까 봐 겁낼 뿐이다.
신사임당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아는 ‘현모양처’다. 요새는 안 그렇겠지만, 한때는 현모양처가 거의 숭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도 떠받들어서 그런지 여자아이들 중에는 장래희망을 물으면 현모양처라고 대답하는 아이도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이 숭고한 현모양처에 맞서는 말이 있으니 바로 ‘자유부인’이다. 아실지 모르지만 이 말은 몸가짐이 정숙하지 못한 여자를 가리켰다. 여자가 자유롭다는 건 곧 몹쓸 사람이라는 뜻인가? 그런데 참 이상하다. 현모양처를 그렇게 기리면서도 남자더러 ‘현모양부’라고 칭찬하는 말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남자가 아이들 잘 키우고 아내 잘 보살피면 이런 지청구쯤 쉽게 듣지 않을까. “뭐야? 사내자식이.”
남자는 장가를 가도 자기 집 식구로 남지만 여자가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이 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남편 집은 ‘시댁’이라 하면서 아내 집은 그냥 ‘처가’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우리가 무심고 쓰는 말에는 여자를 낮추보는 생각이 곳곳에 숨어 있다.
‘남녀’부터 시작해서 ‘부모, 자녀, 아들딸, 소년소녀, 선남선녀’에 이르기까지, 보기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부모’ 대신에 ‘양친’을, ‘자녀’ 대신에 ‘자식(아이)’을 두루 쓰자고 주장하는데 그럴듯한 제안이다. 뭐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굴 것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은 생각을 담은 그릇이자 생각을 지배하고 조종하기로 하니 어쨌든 조심해야 한다.
전에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에 이런 것이 있었다. “너도 나도 씩씩하게 어서 자라서 새 나라의 기둥 되자 우리 어린이. 너도 나도 곱게 곱게 어서 피어서 새 나라의 꽃이 되자 대한 어린이.” 못 박아놓진 않았지만 들어보면 누구든지 앞 구절은 남자아이 몫이고 뒤 구절은 여자아이 몫이라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니까 ‘씩씩하게’ 자라서 ‘나라의 기둥’이 되는 건 남자아이가 할 일이요, ‘곱게 곱게’ 자라서 ‘나라의 꽃’이 되는 건 여자아이가 할 일이라는 거다. 이런 틀은 여자아이뿐 아니라 남자아이까지도 억압한다. 씩씩한 여자아이가 자기 용기를 부끄러워하듯 부드러운 남자아이는 자기 섬세함을 숨겨야 하니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줌마’라는 말은 좋은 뜻으로 쓰지 않는다. 말하자면 ‘음식점에서 떼를 지어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지하철에서 자리 쟁탈전을 벌이는 뻔뻔스러운 여성, 촌스럽게 화장한 얼굴과 문신한 눈썹과 뚱뚱한 몸에 나이 든 추레한 여성, 창피함을 모르고 물건 값을 깎아 대며 시장에서 악다구니를 써 대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요새 여자들 몸이 ‘규격화’되고 ‘상품화’되면서 처녀들은 참 살기 힘들게 됐다. 마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정해진 옷 치수에 자기 몸을 맞추려고 끼니까지 굶어야 하니 말이다. 그것이 자본의 몸종 되는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그 미친바람에 휩쓸려 가는 이 땅의 가엾는 처녀들! 거기에 견주면 아줌마들은 남의 눈치 안 봐서 오히려 당당해 보인다. 대한민국 씩씩한 아줌마 만세! < ‘누구나 쉽게 쓰는 우리말(서정오, 도서출판 보리, 2020.)’에서 옮겨 적음. (2024. 4.12. 화룡이) >
첫댓글 대한민국 씩씩한 아줌마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