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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내용은 부운장학회 유홍근 국장이 2017년12월12일에 카페에 "기계유씨 시조 유허지"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입니다. 과거 부운보[제3호(85.10.10)]에 게재된 내용들입니다. 그 아래의 "유허비연혁(遺墟碑沿革)"은 문장어른(휘 치웅)께서 이를 다시 요약하여 부운보에 게재하셨군요 차제에 <기계문헌> 에서 원문을 취해와서 해석내용을 찬찬히 확인해 보았더니, 그 내용은 두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한모(兪漢模)공의 <유허지>와 유석환(兪錫換)공의 <유허비각중수기>를 한데 모아서 요약하셨군요. 두분 다 경부부윤을 역임하신 분들입니다 . 내용중에 흥미로운 기사는, 요즘처럼 시조시향을 올리기 하루전에 부운재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묘소에 올라가 시향을 올린다는 점인데, 이런 관례는 참 오래 된 가문전통으로 보아야 하겠군요. 그리고 당일 계전동 묘소도 함께 향사를 올리고 있는데, 1795년 당시에도 비석이 마모되어 글씨를 알아볼수 없어서 그 묘소가 "고려 공진사 진경(晋卿)"의 묘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는 대목이 보이는 군요 무엇보다도 기계들에 논을 갈던 한 농부가 "유씨우물[兪井]"을 발견했던 당시에, "출렁거리던 샘물"과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라는 대목에서 "이상스럽다"고 기록하고 있고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아도 자못 흥미를 끕니다. 그래서 유허비각을 지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절을 올립니다. 아마 유교수의" Who am I ? "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르지요 ------------------------------------------------------------------------------------------------- 유홍근(根, 1954, 處, 고양 - 일산) 17.12.12 <기계유씨 시조 유허지>
효정공 [휘 한모(諱 漢謨)]께서 경주부윤이 되었을 때 고로(故老)들에게 물어 시조 사시던 터와 우물(井)을 기계면에서 찾아 단비를 세우고, 신라 아찬(阿飡) 유공(兪公) 유허비(遺墟碑)라 표하면서, 그 비 세운 전말을 부운재에 두었다고 하며 그 글을 을병기사라 한답니다. 그런데 그 전말을 기록한 편액을 분실하여 현재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을병기사의 해석문을 찾아 게재합니다. 을병기사
을묘(乙卯) 중추(정조 19년) 불초(휘 漢摸)가 이 지방 경주부윤이 되었는데 마침 10월 상순을 맞으니, 기계 답계리(현 미현동) 시조산소에 해마다 지내는 시향의 날이다. 하루 전에 약간의 제수를 갖추어 산아래로 나가 부운암에서 자게 되었다. 족제(族弟) 한인(漢人)이 자인 수령으로 왔으며 근읍에 사는 유씨(兪氏) 성의 일가들 상하로 모신분이 38명이나 되었다. 족질(族姪) 영주(永柱)가 몇해전 산아래로 들어와 살면서 손님을 접대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산소에 올라와 봉심하고 행사한 후 재실에 들어와 여러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며 음복하고 나서 다시 도동(현 계전동)으로 가서 선조묘소에 전작 참배하였다.
이 산소는 곧 족대부(族大父) 주기(胄基)가 경상좌병사로 전임해 와서 이묘소를 찾았더니, 마을 사람들이 표석 각자를 깎아버려 어느 분의 산소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유씨 선산이라고만 전해지고 있었다. 어떤이는 "고려 공진사 유진경(兪晋卿)묘"라고 했다.
날이 저물어 창사[倉舍; 관아]에 와 자게 되었다. 이 창사는 기계고현으로 답계(현 미현동)와의 거리는 10리쯤 되는데, 읍내 한 들판이 예로부터 신라대 유씨 세거지라고 하며 또 "유씨우물[兪井]"이 있다 한다. 읍내 이씨가 10여대 이 땅에서 대대로 살아왔는데, 그 선조의 저술 가운데 또한 "유씨우물[兪井]"이 있다 는 "고치지 못할 문자(不改文字)"가 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전설이 확실치 않고 우물은 이미 덮어버렸지만 듣고보니 새롭고 그리울 뿐이다.
다시 고로(故老)에게 캐물으니, 한 농부가 말하기를 "왕년에 우연히 경작하던 밭에서 옛날 우물의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봄이 되어 밭을 갈려하니 큰 돌이 튀어나와 그 돌 밑에 과연 우물이 있어 물이 출렁거렸다. 샘물을 맛보았더니 달고 상쾌하였다. 이럴 즈음 홀연히 개인 하늘에 비가 쏟아져 모여 구경하던 사람들이 미쳐 피신할 겨를도 없었다"라고 한다. 이런 일이 우연한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우물 옆에 단비(短碑)를 세워 유허비(遺墟碑)를 표하였다. 막내 아우 한돈(漢敦)이 마침 서울에서 내려 왔기에 글씨를 쓰게 하고 각자(刻字)가 끝나 4월 1일 묘시에 입석(立石)하였다. 아우와 자인원[경산 자인현감 漢人]이 함께 와서 밭주인 이생(李生)과 경계를 정하여 땅을 매입하기로 계약하고, 관아로 돌아와 동족(同族)들이며 이웃 노소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놀았다. 이에 비(碑) 세운 내력을 기록해 둔다. - 후손 한모(漢謨)
☞ 출처 : 부운보 제3호(85.10.10) ------------------------------------------------------------------------------------------
正祖十九年(1795) 을묘(乙卯)에 後孫 兪漢模(刑曹判書)가 慶州府尹이 되었을 때 始祖가 살던 옛터를 杞溪古縣에서 찾아 碑를 세우고 "阿飡兪公遺墟碑"라 表하면서 그 顚末을 적었는데 이를 乙丙記事라 한다. 글을 要約하면 다음과 같다.
『乙卯中秋에 美峴里 始祖墓所 時享에 參禮하였는데 마침 族弟 漢人(당시 慈仁守掌 令)이 왔고 近邑宗人 三十八人이 모였다. 參拜後 杞溪古縣으로 돌아왔다. 古縣邑內 한 들판이 예로부터 羅代兪氏世居地라하며 또 兪氏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邑內에 十餘代를 사는 土豪家에 兪井이 있었다는 記錄이 있고, 古老의 말에 依하면 한 農夫가 밭을 갈다가 古井을 發見하였는데 튀어나온 돌 밑에 과연 우물이 있어 쌓아올린 돌이(築城) 完然하고 그 밑에 맑은 물이 출렁거렸다 한다. 드디어 우물옆 에 碑를 세워 遺墟를 表하였다』고 했다. 高宗三年(1866) 丙寅에 後孫 兪錫換이 慶州府尹이 되었을 때 碑閣을 重修하고 1984 年 甲子에 大宗會에서 이를 改建했다. 慶州府尹 兪錫換은 碑閣重修記에서 "慶州의 杞溪縣은 始祖 阿飡公의 舊居요 우리 兪氏의 貫鄕이다. 新羅로 부터 高麗를 거쳐 朝鮮朝에 이르기까지 繁榮과 顯達을 거듭했다. 또 後孫들의 道德, 節義, 經術, 文章이 江湖에 떨쳤으니 어찌 始祖府君의 陰德이라 아니하겠는가. 내가 본 고을의 府尹이 되어 山所에 省墓하고 遺墟를 찾으니 追慕의 情 懇切하다. 이에 族大父 判書 漢模公이 세운 碑에 閣을 짓고 글을 남긴다"고 했다. (飜譯 : 兪致雄.富雲報) 인당 유 동 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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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중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덕분에 공부 많이하네요.
감사합니다.
귀한자료 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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