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순회 연주회는 결국 파가니니의 건강에 치명타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 걸린 매독이 평생 완치되지 않았고, 수은 치료법으로 인한 부작용까지 더해지며 그의 몸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관객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입장료를 매기고, 무리한 일정도 마다하지 않은 덕분에 한 재산 모아놓은 파가니니였지만, 말년에 가서는 투자 실패로 인해 그중 상당 부분을 날려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후두결핵으로 인해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자, 그때부터는 아직 어린 외아들이 늘 곁을 지키며 대변인 역할을 해 주어야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요양을 위해 들른 니스에서 꼬박 7개월 동안 앓아누웠다가 결국 사망한다.
역사상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파가니니지만 음악사적 평가는 의외로 야박한 데가 있다. 작곡가로서보다는 연주가로 더 뛰어났고, 악보 출판보다는 즉흥 연주를 더욱 중시했으며,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아서 특유의 바이올린 연주 기법을 후대에 전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물론 개성 넘치는 비르투오소(명인)의 시대를 열고 낭만주의를 예고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당대에만 해도 진지한 음악가로서 파가니니의 진면목을 파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난이도로 유명한 그의 <24개 카프리치오>의 악보를 본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조차 “이건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신기에 가까웠다는 그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로선 알 수 없고, 다만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추측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놀라운 남국의 마법사의 연주는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불가사의해진다. 그를 알면 알수록 그의 연주는 도무지 납득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느 명민한 이의 말대로, 우리의 생각이 멈추는 순간, 파가니니는 연주를 시작한다.” (베를린 공연 직후, 한 신문에 실린 기사 중)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들,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빈 공연 직후,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 E장조>에 관해 논평한 어느 신문 기사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