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사 독성각(獨聖閣)...]
독성각은 대웅전 서쪽에 동향하고 있다. 1982년 원융스님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 한다. 도리통 3간, 양통 1간으로 도리통은 협간을 어간의 1/3 정도로 매우 좁게 설정하였음이 특징이다. 정면에는 어간에 4분합문, 협간에 외짝문을 달아 개방시켰고, 양 측면과 후면은 벽을 쳐 감실형으로 구성했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낮게 쌓았으며, 초석은 화강석을 원통형으로 다듬은 원형초석이다. 기둥은 세장한 형태의 원주로 상부에 창방을 돌렸다. 기둥 상부는 초익공식 짜임으로 보를 받도록 하였는데, 초익공의 높이를 높게 만들고 복잡하게 초각했음이 특징이다. 내부는 3단으로 연봉-연화-연봉을 초각해 보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후면의 익공은 일반적인 높이로 초각이 없는 것을 사용했다. 보머리는 원형단면으로 노출시켰으며, 봉취형을 초각해 끼웠다. 보는 직선형이며 단면은 방형으로 아래 양쪽 모서리를 둥글게 접었다.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으로 풍판을 설치했다. 우물천장을 가설했는데 소란대는 없고 반자틀도 매우 가는 단순한 형식이다. 초석과 기둥의 형태, 초익공의 구조와 형태 등은 영원전과 거의 동일한 모습이다. 같은 시대에 같은 목수에 의해서 조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이며, 공포를 구성하는 부재의 초각 형태는 앞서 조영된 대웅전을 따른 면이 있다.
[신원사 독성각 독성탱...]
독성(獨聖)은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수도하면서 부처님이 열반한 이후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아라한으로 나반존자(那畔尊者)로 잘 알려진 분이다. 깊은 산속인 천태산을 배경으로 길고 흰 눈썹을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나반존자가 계곡을 바라보며 홀로 깨달음을 얻으며 사색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밑의 보련당 진영은 보련당의 참된 모습을 그린 것이다. 얼굴은 자비로운 미소를 잘 표현하고 있는 반면에 신체는 불확실하게 그려 불안한 자세이다. 앞에 놓여져 있는 책상에는 보련당이 당시 사용했던 물건들이 진열하여 그렸다.
[신원사 독성각 보련당 영정(影幀)...]
[신원사 영원전과 오층석탑...]
[신원사 영원전(靈源殿)..]
영원전은 대웅전 앞마당의 동쪽에 서향해 위치하고 있다.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신 건물로 명부전에 해당한다. 조선 왕실과 관련된 건물로 영원전이라는 전각의 명칭은 다른 사찰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신원사만의 특징이다. 영원전의 창건은 조선 태조 3년(1394년) 무학대사가 신원사를 중창하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영원전은 1982년에 원융스님에 의해 조영된 것이다. 정면 어간의 ‘靈源殿’이라 쓴 현판에는 ‘辛卯’라는 간지(干支)가 명기(銘記)되어 있는데, 1891년에 해당한다.
고종 13년(1876년)에 보련(寶蓮)화상이 중건하고 고종 22년(1885년)에 관찰사 심상훈이 중수한 후에 씌어진 것으로 1982년에 영원전을 새로이 중건하면서 옛 현판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2층의 축대 위에 지었으며,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2간이다. 정면 3간에는 모든 간에 걸쳐 띠살의 사분합문을 달았고, 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을 들였다. 원통형의 다듬돌 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양 측면 중앙의 것이 방주인 것을 제외하면 모두 원주로 세장한 편이며 흘림을 두지 않았다.
[신원사 영원전 불단...]
깍은 머리의 스님 모습으로 결가부좌한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젊은 수도승인 도명존자(道明尊子)와 문인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그 왼쪽으로는 홀수대왕, 오른쪽에는 짝수대왕의 시왕상(十王像)이 늘어져 안치되어 있다. 지장보살은 원래 인도의 지신(地神)에서 유래한 보살이다. 이 보살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등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서원을 세운 분이다.
[신원사 석등...]
화사석은 8각형 평면의 각 면마다 세장한 형태의 화창(火窓)을 두었다. 옥개석 역시 8각형으로 모서리에 귀꽃을 조각했으며, 지붕면에는 상하 2중으로 연꽃을 새겼다. 옥개석 위에는 다시 크기만 작은 옥개석을 올렸고, 그 위에 와권형(渦卷形)을 새긴 얇은 석재를 하나 놓은 위에 보주형(寶珠形)을 두어 마감했다. 보주형은 상부를 불꽃 모양으로 조각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신라계 고복형 석등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다양한 조각을 한 세부형태와 보주와 안상 등의 형태에 변형을 준 점 등은 이 탑의 새로운 창안이라 할 수 있다.
요즈음 조영되는 석등으로서는 전체적인 비례는 물론 세부적인 조각수법까지 비교적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붕면이 거의 직선을 이루는 등 직선적인 성향이 강해 부드러움을 느낄 수 없음은 요즈음의 석조물 조영에서 나타나는 특성과 한계를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석등과 대웅전이 어울어져...]
[신원사 오증석탑...]
1989년 운담스님이 조영한 5층석탑은 대웅전 앞마당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1990년 3월에 미얀마에서 4과, 태국에서 3과, 모두 7과의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모셔다 봉안하였다고 한다. 대웅전과는 종축을 맞추고, 마당 동쪽의 영원전과는 횡축을 맞춤으로서 기존의 건물에 맞추어 마당의 중앙에 배치하고자 의도하였다. 탑의 좌우에는 석등 1기씩이 있는데, 탑과 함께 조영한 것으로 탑과 횡축을 맞추어 배치하였다. 오층석탑은 신라계 석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기법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탑 앞에는 석조의 단을 마련하고 석조 촛대를 올려놓았으며, 그 앞에 역시 석조의 불전함을 두고 돌향로를 올려놓았다.
[신원사 오층석탑의 위상...]
[대웅전 옆뜰에는 배롱나무 꽃이 활짝...]
[중악단으로 오르는 길목엔 멧돌이...]
중악단은 신원사의 동쪽에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며 위치하고 있다. 묘향산의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왕실의 기도처로서 중악단은 조선 고종 16년(1879년)에 설치하였다. 중악단은 중악전(中嶽殿) 또는 계룡단(鷄龍壇)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 초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이성계가 창건을 명했다고 한다. 효종 2년(1651년)에 이르러 제단이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년)에 명성왕후의 명에 의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왕조의 몰락과 함께 왕실 주도의 제사 의식은 중단되었고,
현재는 신원사에서 불교식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중악단은 서남향으로 신원사와는 좌향을 다르게 하였다. 신원사가 계룡산의 연천봉을 주산으로 삼은 반면 중악단은 계룡산 정상인 천왕봉을 주산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중악단은 대문간채와 중문간채, 중악단 본전을 일직선 축선상에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일직선 축과 좌우대칭에 의한 배치로 인해 단묘 건축으로서의 엄숙함과 건물간의 위계를 느낄 수 있다.
[신원사 중악단 정면 솟을 삼문...]
대문간채는 중앙 한 간의 지붕을 높게 한 솟을삼문 형식으로 전면은 7간이다. 중앙의 3간을 문으로 하였고, 좌우의 2간은 관리를 위한 건물로 뒤쪽으로 꺾여 2간이 연장된다.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과 익사 및 담장으로 둘러싸인 마당이며, 마당 뒤쪽에는 다시 중문을 두었다. 중문은 정면 5간으로 중앙의 3간에 문을 설치했으며, 좌우에 온돌방 1간씩을 들였다. 중문을 들어서면 담장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뒤편에 중앙단 본전이 있다. 중악단 본전은 고종 16년(1879년) 단주화상(丹珠和尙)이 중건하였으며,
명성황후도 이곳에 와서 친히 기도를 올린 바 있다고 전해진다. 정면 어간에는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中嶽壇’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그 한편에 ‘辛卯直指御史 李重夏書’라는 기명이 있다. 신묘는 고종 28년(1891년)이다. 왕실에서 이중하를 내려보내 직접 편액을 쓰게 한 것이다. 내부에는 목판에 음각한 ‘懸板謄文’이 있는데, 고종 29년(1892년)에 쓴 것이다.
[중악단 들어서는 내삼문...]
[신원사 중악단(中嶽檀)...]
도리통 3간, 양통 3간으로 정면 3간에는 분합문을 달아 개방시켰다. 좌우측에는 전퇴에 외여닫이문을 달아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머지 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을 들였는데, 목조의 판벽임이 특징이다.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어간의 후벽에 의지해 1간 너비의 불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감실을 설치해 산신탱을 모셨다. 기단과 계단은 장대석을 이용해 만들었다. 정면에는 3개의 계단을 두었는데, 중앙의 계단 앞으로 답도를 마련했다. 초석 역시 다듬돌 초석으로 방형의 초반 위에 운두가 높은 주좌를 새긴 원형초석으로서 주좌 좌우에는 고막이돌과 연결시키기 위한 인방받침까지 갖추고 있다. 왕실과 연관된 건물로서 격식을 갖추기 위해 궁실건축의 기법이 적용되고 있는 모습이다.
[신원사 중악단 산신탱...]
불단에 여닫이문을 달아 따로 모시고 있는 산신탱이다. 이 산신탱은 산의 신령(神靈)으로 존경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호랑이를 불교화하고 산신(山神)으로 승격시켜 수용해 그린 것이다. 호랑이의 변화신인 산신의 옆에는 애교스러우면서 재미있게 표현된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주위에는 산과 나무, 바위, 새 등을 그려 자연적에 어우러져 표현되어 있다.
[중악단 내부의 천정...]
[중악당 대문간채 후면...]
그러나 출목 사이의 간격이 비교적 넓은 편이어서 살미의 길이가 긴 편에 속하고 초각된 살미 끝이 커서 무거워 보일 뿐 아니라 제공의 초각은 하면에 직선이 보이는 등 경직된 느낌이 강하다. 이것은 조선시대 후기에서도 시대가 많이 떨어지는 모습이다. 살미 내측은 각 단 살미에 연봉과 연화를 새겨 운궁형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보머리는 외부로 노출되어 있지 않으며, 주심포와 주간포에 관계없이 봉취형으로 초각한 운공을 두었다. 첨차는 소첨과 대첨을 사용하였으며, 단부를 직절, 하부를 사절한 교두형이다.
주심에는 평방 위에서 주심도리받침장여까지 여러 단의 판재를 겹쳐서 올렸다. 언뜻 일반적인 방법으로 첨차를 둔 것처럼 보이나 첨차는 이 판재 위에 단청으로 표현된 것이다. 주심첨차를 두고 그 사이를 포벽으로 구성하는 일반적인 방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법으로 중악단이 지닌 건축적 특성이다.
[중악단 추녀마루 위엔 7 개의 잡상들이...]
[신원사 중악단 주위의 멋진 숲...]
[신원사 중악단쪽 오층석탑...]
중악단 앞쪽 넓은 마당의 한쪽 편에 오층석탑 한 기가 있다. 이곳이 원래 신원사의 중심영역이었다고 한다. 석탑은 이중기단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4층이나 원래는 5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석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1975년 12월에 해체 수리한 바 있는데, 하층 기단부에서 사리구와 함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은 청색 사리병, 개원통보(開元通寶) 1개, 개원중보(開元重寶) 2개, 함원통보, 황송통보, 토기호 1개 등으로 고려시대의 것이다. 석탑 서쪽에는 배례석이 있다. 기단은 석판을 이용한 지대석 위에 올려져 있다.
이중기단으로 하층은 하대석, 면석, 갑석으로 구성된다. 하대석은 상면에 쇠시리가 없는 단순한 판석 형태이다. 면석은 네 장의 판석으로 만들었는데, 탱주 하나와 우주를 양각해 각 면은 두 간으로 나누었다. 탱주와 우주 사이의 면에는 안상을 새겼는데, 면의 넓이에 비해 안상의 크기가 작은 편이다. 안상 안쪽에는 안상 하면에서 올라온 꽃이 피어오른 모습을 조각했다. 갑석은 상면이 바깥을 향해 약간 경사진 구배를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 쇠시리를 두어 상층기단의 면석을 받치고 있다. 쇠시리는 1/4원을 이루는데, 그 크기가 비교적 큰 편이다.
[신원사 중악단쪽 오층석탑...]
[오층석탑 뒤로 중악단이 보이고...]
[돌담길로 나오며 본 오층석탑과 중악단...]
[주차장으로 내려오며 만난 표지판...]
어두워질 때쯤 오늘의 여행이 끝을 맺는다. 물론 집까지 무사히 도착을 해야 끝이 나는 것이겠지만 통상 우리의 여행은 마지막 둘러본 곳을 끝점으로 잡는 습관이 있는데 오늘도 친구는 논산에서 기차타고 곡성으로 가고 나는 23 번 도로를 이용 공주로 가다 신원사와 앞에 있는 미륵정토사를 둘러보고 떠나는 것을 여행의 끝으로 잡는다. 이제 편안하게 정안에서 고속도로로 진입 천천히 안전속도로 귀가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