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심
‘미디안’은 호렙산에 가까운 곳이다. ‘호렙’은 시내산을 말함인데, 그 산의 서쪽을 ‘호렙’이라고 한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기 장인의 “양 무리를 치던” 미천한 처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바울이 말한대로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시고 심령을 구원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듯이(고전 1:28-29) 모세 역시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에 부름 받았다면 교만했을지 모르나 광야에서 일개 양치는 목자로 있을 때 택하신 것은 미천한 처지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받게 하심이다.
박윤선 목사는 말하기를,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 자격으로 어떤 큰 권세를 잡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말한 길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서 신약 시대의 교회를 예표하셨기 때문이다(고전 10:4, 6, 11).
하나님의 교회는, 이 세상 세력으로 성립되는 것도 아니고, 그 구원을 완성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한 지도자는, 낮게 떨어져 미천한 목자의 자리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사명을 자기의 힘으로 실행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권능으로만 이루도록 되어 있다. 신약 시대의 교회에 있어서 하나님 백성의 구원 성취도 역시 그러하다.
여기에 대하여 이근섭 목사는 말하기를, 모세로서는 물에서 구원함을 받은 애굽에서의 40세가 지나고, 이 때는 목부 생활로 광야에서의 둘째 40세의 마지막 고개를 넘어야 하며, 또 다시 셋째 40세의 생애를 개척하려하는 어느 한 날의 일이었다.
모세는 여전히 이드로의 양 무리를 충성되이 치고 있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는 말씀과 같이…이스라엘 민족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던 기드온도, 하나님의 선지자 아모스도, 소를 몰고 밭에서 일하던 엘리사도, 곰과 사자와 싸우며 충성스럽게 아버지의 양을 치던 어린 다윗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열심히 일하던 그 일터에서 부름을 받아 큰 일을 하였음과 같이, 충성스러운 모세도 그대로 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모세가 양 무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했다(출 3:2). 이를 바라보던 모세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만약 저 불이 보통 산불이라면 그 근처의 나무도 타야 할 것이며 또는 지금 불이 있는 가시덤풀도 사라져야 할텐데 그렇지 않고 가시덤풀은 그대로 있는데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었다. 모세는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이 불길에 호기심이 일어나 이 이상한 광경을 더 가까이 가서 보리라.
모세가 그 곳을 향하여 가는데 ‘여호와께서 그가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시고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라고 그를 부르셨다. 이때 모세는 가든 발 거름을 멈추고 서서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출 3:4)고 대답하였다.
주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부르실 때에 그는 ‘주여 뉘 시오니까?’하고 물었는데, 모세는 ‘예 무엇을 말씀하시렵니까? 내가 여기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한 것과 같은 대답이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곳으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참으로 애굽이란 율법의 신을 벗고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하여 복음으로 예비된 신을 신어야 할 것이었다(엡 6:15).
과거에는 아무리 살인범이라고 자기 방범으로 인한 실패자며 광야의 무명 목부로서 가시밭 같은 괴로움의 40년 동안의 생활을 하면서도 그 중심에서부터는 언제나 꺼질 사이 없이 점점 더 맹렬하게 타오르는 동족을 사랑하는 그 정열의 불꽃만은 사라질 수가 없었다. 참으로 가시떨기에 피어오르는 불꽃은 일면 자기 민족에게 향한 애국 사상의 발로임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향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 하나님의 불은 가시밭 같은 애굽과 사람들의 심령을 정복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승리를 보여주심이며 또는 무력하고 가시와 같이 완악한 사람들의 심령 가시밭에 사라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선하신 생명이 머물러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심이다.
이 하나님의 불길(생명)은 지금도 우리의 말라 빠진 심령밭 가시나무에 이 불꽃이 피어 생명의 열매를 맺는 이적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며 또한 죄와 사망의 무덤을 터치고 일어나는 생명의 말씀이 들려와야 하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하였느니라”(요 5:25-26).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참으로 이 곳은 옛 모세를 새롭게 만들어 주는 거룩한 변화산이었다.
이드로의 양을 치던 목자가 이제는 하나님의 양 이스라엘 백성을 치는 목자로 바꿔지는 곳이었다. 그런고로 가시떨기가 완전히 불꽃에 삼켜 버림 같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입어야 하며, 사망이 생명에게 삼켜져야하며(고전 15:42-44, 54) 옛 사람이 새 사람에게, 땅의 가시가 하늘의 불에 완전히 정복을 당해야 하며, 애굽의 노예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꿔져야 할 것이다.
이는 마치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마른 뼈들에게 힘줄과 살과 가죽을 씌워 그 속에서 생기를 불어넣어 여호와의 군대를 삼으심과 같이(겔 3:7-10), 저 아람 광야에서 유리 방황하던 야곱을 애굽에서 번성케 하시고 이스라엘이란 한 나라를 형성할 수 있게 될 때 여호와께서 친히 생기로 임해 주심이니, 그 가시나무에 불이 붙었음은 위에서 말한 모든 것에 상징이 되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5절 발에 신을 벗으라 함은 광야의 길을 걷던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명을 갖고 새 출발을 하라는 뜻이다. 이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는 것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을 치고(시 100:3) 인도할 사명을 호렙산에서 주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역과 고통을 친히 보고 듣고 아신다고 하셨다. 모세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에 무관심할 리가 없다. 40년 전에 자력에 의한 동족 구원에 실패한(출 2:11-13) 그는 자신의 무력을 통감하는 동시에 다시 부르시는 사명감에 통절히 느꼈을 것이다.
(1) 가시떨기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이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족을 인도할 사명이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아니했다. 예레미야의 민족 사랑도 그러했다(렘 20:8-9).
(2)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 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과거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사명의 신발, 복음의 신발을 신으라는 것이다(엡 6:14-15). 과거 그 신을 신고 이드로의 양을 쳤으나 이제는 새로운 신을 신고 하나님의 양을 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