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정월)에 관한 시모음 15)
1월 /노정혜
임인년 새해
호랑이 닮은 기상으로
한해 시작
1월 새봄이 걸어오고 있다
한아름 꽃 바구니 안고
열두 달 희망
무엇을 채울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원하는 것 전부
안을 수 있는 긴 시간
하늘이 나 위해
열두 달 주셨다
희망
씨 뿌려 땀 흘려 열매 맺아
곳간이 가득 채워
아이들 등록금
가년한 자식 시집 장가
가을 오면 잔치 잔치 열리네
꿈이 있는 1월
대망의 꿈을 꾼다
꿈은 살아서 맹호처럼 달린다
일월의 창턱 /남수우
바람은 가볍고 말 많은 입술을
걸음마다 매달아 놓았습니다
오늘도 화분은 둘레를 쏟지 못하고
잘 지냅니까 이곳 사람들은 나에게 친절합니다 달아나는 것만이 전부였다면 끄덕일 수 있겠습니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아나고 더 이상 디딜 곳 없는 벼랑 끝에서야 멈추게 된 줄행랑이었습니다
이곳에선 흰 양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구름을 배웁니다
한 사람씩 입을 열 때마다
구름은 코끼리였다가
겨울 나무였다가
아홉 번째인 내가 발음한 이름 하나에
모두가 뒤돌아봅니다
엎지르고 싶은 날엔 모퉁이에 돌아선 채 숨을 골랐어요
꼬리 감추고 기다립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는 이야기
선생이 건넨 낡은 나무 상자 속엔 눈이 소복했습니다
뭐가 보이니
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간밤에는 이마를 짚어주던 사람
있었습니다 손금 아래 저녁 속으로 눈
내리고요 부연 눈발을 길게 빗던 창살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와 그리고 둘
맞은편 절벽에서도 건물이 보입니까 불타던 목초지를 두고 보던 옛날 일처럼
내가 도착한 이곳에선
당신이 디딘 구름들이 보이질 않습니다
돌아보면 불 밝힌 창 속 흔들리는 손바닥 있을 겁니다 쏟아지지 않습니까 쏟아지지 않습니다
썰매와 언덕과 불
떠올리던 창턱이 아침 쪽으로 시들 때
검은 재 털며 밤새 떠나가던 맨발
일어나야죠
이곳에서도 걸레는 잘 마르더군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1월 어느 저녁 /황학주
구멍 난 짝짝이 양말밖에 없는 1월이 가고 있다
거실에 늘어놓은 옷가지들이 마르지 않았는데
절을 하러 내려온 사람처럼 소나무는 창밖에 서 있다
진흙 바른 해가 절벽 가에 눈알처럼 튀어나왔다 들어간 오후부터 진눈깨비가 끼어든다
저물 무렵 전부가 진눈깨비인 바다, 나는 좋다
바다를 넘어 한참을 가고 마는 일이 있지만
내 허튼짓은 그 옛날 무나물 먹는 저녁처럼
꼬막 까먹는 밤처럼 사랑할 때 내는 숨소리처럼
가끔씩 이름도 분명치 않는 내 꿈이 바다 위를 걷는다
생일이 온통 진눈깨비뿐인 애초에 나에게 이름이 있었을까
오죽하면 끊긴 줄을 끌며 언덕을 넘어갔다 오는 흰 염소가
문짝에 내 이름을 들이대려구
사랑도 못해본 돌들 위로
제 몸의 수장과 풍장을 끌고 돌아오는 열애한 파도들이
퍼렇게 퍼렇게 해안을 덮는 고흥군 도화면 구암리
온갖 이름을 둘러대며 있는 힘껏 쏟아지는 진눈깨비 속으로
1월이 가고 마르지 않은 1월이 또 남겨진대도
이미 사랑에게 드러낸 창자를 철썩철썩 씻는
내 방 안은 환하다
정월의 노래 /법륜
화당산 전망대에서
해맞이 행사를 할 때
붉은 점 하나
천지를 환하게 만들었고
내 작은 가슴도 열었다
산새는 비행기 따라 가는지
가다 빈 나뭇가지에 앉아
굽은 세상을 바라본다
사람이 자연을 대하듯
자연은 사람을 보고
말없이 그대로 서 있다
이내 침묵 속에서 보낸다
저 지리산 영신봉 따라
낙남정맥을 이은 산
사시사철 그 자리 지키며
오늘 정월 초하루의 노래로
한오백 살 요량으로
하산을 서둘렀다
1월의 메모 /신성호
한해의 시작이 1월이라면
소중한 시작이요 출발 일진데
돌아보니 1월이 다 지나 가고
매달린 달력장엔 고독이 눈에 보인다
작은 것도 챙기지 못하는 여린 마음에
다짐하던 그 꿈들은 진정 이루어지는가
1월이 가면 또 다른 2월을 보며
새꿈을 갖는 그것이 좋지 않으랴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의 톱니바퀴에
후회없는 시간들로 점철 된다면
아름다운 1월의 모습이 아닐런지....
1월 1일 /이선영
어리어리 길을 잃고 주춤주춤 찾아든
눈 오는 작은 마을 갈피에
서표인 듯 숨어 있는 아늑한 도서관
책으로 난 갈랫길 찾아 불쑥 들어서는
찬 공기 채 떨치지 못해 떨리는 입술을 다무는 객
파묵의 새로운 인생이나 키냐르의 은밀한 생,
빈사의 바퀴를 굴리는 밤버스와
빈사의 불꽃에 이르는 사랑의 여정을
서가에서 골라 권해 주는
말 없지만 두 볼이 달아오른 사서
그 사서의 반은 일렁이면서도 반은 잠겨 있는
동공이고 싶은
1월을 보내며 /은석 김영제
째깍째깍 시간속
또 새해 첫 달 1월도
떠나 갑니다
하루하루는
짜증나고 안 가지만
일주일 한 달은
금새 갑니다
돌아오는 2월도
날짜가 28일밖에 없어
빨리 감을
느낄 겁니다
그렇게 우린 겨울을
두려워 하면서도
보냈습니다
첫 1, 2월을 쉽게
보낸 것 처럼 다음 달
또 그 다음 달도
그런 편안 마음으로
맞고 보낸다면
기억은 쇠퇴하지 않고
좋았던 시절속에 머문 답니다
1974년 1월 /김지하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 날
그 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정월 일기 /이원문
섣달 그믐 정월초
정월 초하루의 설도 아니고
남은 명절 대보름
그 보름도 아니다
그저 어중간한
정월의 하루 한 나절
추워 찾은 양지녘
쓸쓸하기만 하니
빈 집 찾아 들어가야
누가 있어 말을 하나
이제 이 보름 명절 지나면
다 지나는 정월일진데
이 정월 지나 찾는 이 월
봄 맞이에 바뻐지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남은 며칠 보름 명절
쌀독의 쌀 반쯤 내려 가고
김치광의 김치도 얼마 않남았다
1월 1일 /김행숙
공중으로 날아가는 풍선을 보면 신비롭습니다. 손바닥만한 고무풍선에 공기를 모으면 점점 부푸는 것. 점점 얇아지는 것…… 꼭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놓치면 영영 잃어버리는 것……
추운 겨울밤 손바닥을 오므려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길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지붕 위로 둥둥 떠오를 거예요. 이들은 언젠가부터 마음에 공기가 가득해진 사람들이었어요. 지붕 위에서 수레를 잃은 노점상과 지갑을 잃은 취객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에요. 두 사람은 허공에서 잠시 얼어붙은 허깨비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겠습니다."
"형씨, 혹시 담배 가진 거 있습니까?" 추운 겨울밤 손바닥을 비벼서 불을 피울 수 있다면……
우리는 저마다 기다란 불꽃 같을 겨예요. 우리가 감추는 꼬리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는 재를 보면 오늘이 1월 1일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도 꼭 이랬어요. 그날도 나는 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구걸을 했어요. 아침에 본 거울처럼 그가 나를 슬프게 건너다보고 있었어요.
1월 /임우성
한 달이면 넉넉할 줄 알았어
서른 개나 되는 날이라면
뭘 해도 한 가지는 할 거라 여겼는데
서른 날 하고도 하루를 더 살아
새해 첫 달
서른 한 날 째 저녁이 되었거늘
돌이켜 더듬고 더듬어도
때 되어 밥 먹고
주시(酒時)되어 술 마시고
취하여 잠들었다
깨어 또 밥 먹고
출근으로 반복되는 날들
새해 첫 달이 이렇게 간다
성취해야할 뚜렸한
어떤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허송세월이랄 수도
허무한 삶이랄 수도 없는
행복쪽으로 훨씬 가까운
담담한 일상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일 잔 해야 쓰것다.
1990년 1월 1일 /서효인
친척 집 중 가장 큰 평수의 아파트에 아이들은 모여들어, 어른들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것을 관찰했다. 금발에 파란 눈의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현관에 서 있었다. 시작은 미약했다. 대낮부터 아이들은 똑같은 비디오테이프를 몇 번이고 돌려봤다. 뒤로 감기는 소리를 듣기 위해 영화를 보았다. 어린 순서로 잠이 들었고, 늙은 순서로 농담했다. 연예인이 복을 기원했다. 그와 그의 처와 처의 언니 동생들과 언니 동생의 남편 되는 사람들이 술을 마신다. 텔레비전의 세계가 12시를 알려주었다. 머리 큰 아이부터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 그들은 멱살을 잡고, 그들은 울었으며, 그들은 화를 냈고, 그들은 죽었다.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동그란 두 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휘휘, 뒤로 돌린다. 연기대상이 발표되고, 눈물의 소감을 말하고, 내일 아침으로 간다. 태양이 아파트를 중심으로 뒤로 감기고 있었다.
1월도 소리 없이 간다 /이범철
전봇대를 잡고 버텨보는
수세미 줄기는
아직도 열매를 말리느라 힘겨운 날
나무 아래 앉아 오전 내내
작은 발을 수세미처럼 문질러 얼굴을 씻고 있는
고양이 눈처럼
눈망울 소리처럼
1월은 무심하다
크리스마스트리에게로 가는 길을
마른 고추밭을 지나
꾸물거리며 기어가는 전선에는
아직도 흘러가는 무엇이 있는데, 그렇게 한나절이
가고 없는 1월
텃밭 빈 밭고랑에서
싹을 입에 문 채 썩고 있는 노랑고구마처럼
아무도 말이 없는데
그것들을 시라고 받아 적고 있는 나의, 머릿속
시끄러움만 오직
이 없는 소리의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데
푸른 잎으로 겨울을 나는
주목나무만 귀가 아프다 하는데
다 저녁 때
어둠은 슬쩍 이 고요의 빛을 바꾸자는데
고양이처럼 자꾸 눈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