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풍수지리 - 이씨 할머니와 남원 양씨 종가
인기멤버
hanjy9713
2024.02.02. 19:17조회 1
댓글 0URL 복사
한국의 풍수지리
이씨 할머니와 남원 양씨 종가
한 집안을 꾸려나가는데 있어서 결코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요소가 여인의 힘이다. 특히나 꺼져 가는 집안의 불꽃을 다시 지핀 사람들은 꼭 여인네들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고창의 울산 김씨들이 중시조로 극진히 모시는 민씨 할머니와 연산의 광산 김씨네가 우러러 받드는 허씨 할머니가 좋은 예이다.
남원(南原) 양씨(楊氏) 가문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할머니가 한 분 계시니, 그 분은 이씨 할머니이다. 이씨 할머니는 남원 양씨를 일으켜 세웠을 뿐 아니라, 순창에서 남원으로 들어가는 즈음의 고개에 비홍재라는 이름을 남기신 분이다.
고려 말의 일이다. 남원 양씨의 후예 양이시(楊以時)과 그의 아들 양수생(楊首生) 부자는 문과에 급제하여 개성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액운이 끼었던지, 이씨 할머니가 시집을 간 지 1년 만에 두 부자가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자 친정에서는 유복자를 뱃속에 품은 할머니에게 개가를 종용하였다. 아이를 낳은 뒤에 개가를 하겠다고 둘러댄 할머니는 아이를 낳자, 아무도 모르게 시댁이 있는 남원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노비를 앞세웠다고는 하지만, 갓난아이를 들쳐 엎은 연약한 여인이 개성에서 남원까지 그 먼길을 걷는 과정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였겠는가? 우리는 쉽게 상상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남원의 교룡산(蛟龍山) 아래 옛집에 도착해보니, 시댁에는 아무도 남아있는 이가 없었다. 당시에 왜구의 침입이 있었는데, 최무선이 화약을 제조하여 진포(鎭浦)에서 정지(鄭地) 장군과 함께 왜선 500척을 격파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에 살아남은 잔당들은 금강 하구에서 내륙으로 도주하여 남원의 운봉산성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나중에 이성계에 의해 완전히 토벌된다. 이른바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이런 위험한 때를 당하여 남원의 시댁 식구들은 벌써 하나 둘 흩어져 멸문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이씨 할머니는 몸을 의지할 곳이 전연 없었다.
살 길이 막막한 이씨 할머니가 처량한 마음에서 오른 곳이 오늘의 비홍재이다. 어디로 가야하나 고민하던 이씨 할머니는 고개 마루에서 간절하고도 애타는 마음으로 나무 기러기 세 마리를 깎아 날렸다. 그저 기러기들이 날아가는 곳을 따라가 뿌리를 내리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이로 인해, 뒷날 ‘날 비(飛)’에 ‘기러기 홍(鴻)’이라고 쓰는 비홍재란 이름이 이 고개에 붙여졌다.
희한한 일이지, 세 마리 나무 기러기는 허공을 훨훨 날아 각각 흩어지더니 지상에 사뿐히 내렸다. 이 때 세 마리의 나무 기러기가 점지해 준 곳은 하나같이 길지였다. 할머니의 간절한 소원을 하늘이 들어준 것이었다. 두 마리 나무 기러기는 동계면 관전리와 구미리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한 마리는 적성면 농호리에 내려앉았다. 할머니는 순창의 무량산(無量山) 너머가 아름답게 보이기에 구미리(龜尾里)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무 기러기가 날아 내린 곳은 구미리의 어느 민가였는데, 그 집에는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방 한 칸을 구걸하기 위해 할머니가 주인을 찾자, 노인은 이상한 답을 하는 것이었다.
“이 집의 주인은 지금 없습지요. 주인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고, 제가 다만 주인이 오실 때까지 이 집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요. 주인은 양씨라고 하는데, 기실 저도 이 집의 주인이 누군지 아직 모르는 걸요.” 말을 마친 노인은 두 모자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어느 틈엔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 때가 우왕이 집권한 지 5년째가 되던 기미년으로, 서기로 따지면 1379년이었다. 이씨 할머니는 기이한 인연으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는 유복자를 정성껏 키워 마침내 과거에 급제토록 하였다. 그 후 할머니의 자손들이 번창해지자 남원 양씨 가문이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4대를 연달아 문과 급제자를 내는 등 도합 8명의 문과 급제자와 30명이 넘는 진사를 배출하여 남원 땅의 명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개성에서 이곳 구미리로 올 때까지 가문의 영예를 상징하는 물품을 두 가지 지니고 왔다고 한다. 하나는 남원 양씨 문중에서 입었던 그들만의 가승복(家乘服)과 하나는 나라에서 문과 급제자들에게 주었던 홍패(紅牌)였다. 그 중 홍패는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도 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구미리는 양씨들의 종택 보다는 도선 국사가 금구예미형(金龜曳尾形)이란 이름을 붙인 혈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금구예미형이란 금빛 거북이가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있는 형용을 한 혈의 이름이다. 금구예미형 혈은 아직도 그 존재를 감추고 있는데, 전국의 지사들이 이 자리를 찾아내기 위해 일년 내내 이곳 구미리를 방문한다는 것이다. 이 금구예미형의 혈에 대해 도선 국사는 『유산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적성읍 동북 20리에 금구예미(金龜曳尾) 평지혈락(平地穴落)하였구나. 사방이 비습(卑濕)하여 물이 날까 하겠지만 혈을 찾았으면 세사황토(細沙黃土) 나겠구나. 차후에 사람들이 이런 혈을 얻었으면 용지삼년(用之三年)에 속발하여 만년명부(萬年名富)하리라. 이 산 주인 찾아보면 사람마다 주인이라.
도선 국사는 이 혈을 소개한 다음에, 자신의 이야기가 전혀 허언(虛言)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누구라도 자신과 알면 이런 혈을 주겠지만,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는 감회까지 붙였다. 이런 연유에서 오늘날에도 전국의 지사들은 이곳 구미리에 와서, 금구예미형의 혈처를 찾아내기 위해 산야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구미리 마을의 입구에서 하차를 하자, 정려각(旌閭閣)이 먼저 눈에 뜨인다. ‘고려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려(高麗直提學楊首生妻烈婦李氏閭)’라는 글씨가 크고도 뚜렷하다. 이 정려문은 조선 건국 후 최초로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정려각에 해당하는 셈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뒤쪽 오른편으로 은행나무 몇 그루가 푸른 잎을 드리우고 있다. 남원 양씨의 종택은 그곳에 자리한다. 종택의 입구는 두 곳인데, 좌측의 것은 아무런 이름이 없고, 우측의 것은 영승문(永承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문 안에는 사랑채 한 채가 길게 늘어섰다. 왼쪽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는 뜻의 양호재(養浩齋)란 현판이, 오른쪽에는 쌍지당(雙指堂)이란 현판이 마루 위에 따로따로 붙어있다. 사랑채를 돌아가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의 오른쪽에 선 작은 건물은 구문각(龜文閣)이다. 구문각에는 남원 양씨의 종중(宗中) 문서가 보관되어 전해진다. 이 종중 문서는 조선 숙종 46(서기 1720)년에서 고종 42(서기 1905)년에 걸쳐 남원 양씨 종가에서 수집, 보관하고 있는 일종의 진정서인 소지(所志)와 상소문(上訴文), 국왕이 5품 이하의 관리들에게 발급해 주었던 일종의 명령서인 교첩(敎牒) 및 사마시 급제자들의 명단인 사마방목(司馬榜目) 등등의 고문서 98점이다. 이 가운데 고려 문건 2점은 고려시대 과거제도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전방을 내다보니, 품(品)자 모양을 한 산들이 다정하게 포개져 있다. 좌우의 두 봉우리 사이로 또 하나의 봉우리가 우뚝 솟은 것이다. 해발 586m의 무량산이다. 이런 품자 모양의 안산을 화개안대(華蓋案對)라고도 하는데, 고관대작을 기약하는 귀한 모습이다. 안산의 바로 앞에는 일자문성이 길게 누웠다. 좌우의 청룡과 백호는 첩첩으로 뻗어 혈을 감싸고 있다. 짧지만 아주 단단하게 혈을 품고 있다. 특히 지난날의 청룡은 대문 앞의 공터까지 뻗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은 평평하게 손을 본 공터의 모습인데, 자세히 보면 공터 앞의 집들이 아래로 푹 꺼져있다. 제법 솟았던 청룡을 등지고 지은 집들이라는 증거이다.
우리 일행은 종택으로 들어간 용을 보기 위해 뒷담 한 쪽에 난 쪽문을 통해 대숲으로 들어갔다. 쪽문을 지나자 곧장 집채만한 바위가 앞을 막는다. 대략 두 길 정도의 높이이고, 올라보면 어른 30명도 충분히 앉을 만큼 널찍한 바위이다. 이 바위가 목마른 사슴의 형상을 닮은 갈록암(渴鹿岩)이다. 갈록암에 올라보니, 서쪽으로 세 마리의 새끼들이 작은 바위가 되어 조로록하다. 어미에 비해 아주 작은 새끼들이다. 그러나 어미나 새끼 모두 종택으로 머리를 향하였다.
종택이 앉은 혈의 이름은 목마른 사슴이 물을 마신다는 갈록음수형(渴鹿飮水形)이다. 그런데 이 네 마리 사슴 가족이 찾는 우물은 보이질 않는다. 종택에서 생활의 편의를 위해 우물 위를 콘크리트로 덮고 수도꼭지를 달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네 마리 사슴 가족이 사람의 눈을 피해 신새벽에 내려와 물을 마시던 우물 대모정(大母井)은 이제 장독 앞의 수도꼭지 아래에 몸을 숨겼다. 아주 큰 어미 사슴이라서 대모정이란 이름이 붙었나보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새파란 이끼가 둘려진 정다운 샘 하나를 보자 했건만 틀려버린 일이 되고 말았다. 바위 뒤가 아주 큰 결인속기처이다. 힘차게 내려온 용맥은 갈록암을 앞세우고 종택의 오른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갈록암의 몸집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집을 향해 뭉쳐 들어가는 지기(地氣)가 이 바위의 무게를 감당치 못하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지기를 주입하는 호스의 끝단이 너무나 크고 무거운 바위에 눌려 좌우로 지기가 새어나가는 형용이다. 그래서 남원 양씨 가문에서는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만한 아주 큰 인물이 태어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통상 이렇게 숲과 바위로 주변이 구성된 혈의 이름을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갈록음수형이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대나무 숲 때문이다. 호랑이는 대숲을 꺼린다. 대나무가 호랑이에게는 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안 듣는 호랑이가 있을 경우, 산신령들은 대나무로 호랑이를 치죄하고 밥을 굶긴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옛날 산중에 살던 사람들은 집집마다 대나무 장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호환을 미연에 막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종택은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정남향을 하였다. 좌수도우(左水到右)에 정미파(丁未破)이니, 자왕향(自旺向)에 해당하는 좋은 향을 취하였다. 자왕향은 총명한 사내와 수려한 자태의 계집으로 후손이 번창하며, 부귀에다 장수까지 기약되는 향이다.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이 동네에 사시는 분이 한 마디 들려주셨다. 종택의 현무봉이 거북이 모양이란다. 이 거북이는 머리를 북쪽으로 두었으니, 마을이 꼬리에 해당한단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구미(龜尾)라는 것이다. 이 거북이는 앞쪽의 진흙 펄 계곡이나 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며 앞쪽의 산자락으로 기어가는 형국이다. 목숨을 보전키 위해 발버둥치는 거북이이니, 그 기가 얼마나 셀까? 그리고 거북이의 기는 꼬리에 다 모아진다고 풍수학은 말하지 않던가? 구미리의 거북이는 또 바위로 존재하고 있었다. 버스가 적성강을 향해 직진하면서 약 500m 쯤 나왔을 때였다. 마이크를 잡은 정 선생이 우측 길가의 바위를 보라고 한다. 떨어져 나간 목인 듯 작은 바위 하나가 앞에 꽂혀있고, 그 뒤에 영락없는 거북이 몸통이 서 있다. 꼬리도 분명하게 돋아 나와 구미리를 가리키고 있다.
이 거북바위의 머리가 잘린 내력은 구미리 마을과 인근에 있었던 어느 절 사이의 다툼에서 기인한다. 서로 꼬리를 자기 쪽으로 놓으려고 이들은 계속 다퉜다는 것이다. 거북이는 꼬리가 향하는 곳이 좋다는 풍수학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다툼에 지친 중 하나가 마침내 화가 나서 거북 바위의 목을 내리쳤고, 그 절은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뒤로 거북 바위의 꼬리는 구미리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거북 바위를 지나 곧장 다리를 건너자 아름다운 물길이 나타난다. 시원한 강물이 괴석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었다. 구미정(龜尾亭)이 날아갈 듯한 자세로 한켠에 서 있다. 강의 바닥조차 바위로 이루어진 곳도 보인다. 여기에서 상류 쪽으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순창군의 또 다른 자랑거리 장구목 유원지이다. 돌이켜보니, 갈록음수형의 자리에 와서 사슴 대신 거북이 얘기만 실컷 듣고 가는 꼴이 되었다. 슬며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연관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