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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알바트로스
제53차 정기합평회
(2023. 7. 20.)
순서 | 제목 | 작가 | 합평 담당 |
1 | 기타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 | 변미순 | 이시언 |
2 | 시누이 | 엄옥례 | 최선화 |
3 | 귀후비기 | 오수미 | 공도현 |
4 | 마지막 커피 | 백금태 | 김 경 |
5 | 아버지의 하루 | 옥경자 | 김경애 |
6 | 603호실 웃음꽃 | 아가다 | 김미숙 |
7 | 나프탈렌 | 이시언 | 아가다 |
8 | 늑대를 피하는 법 | 서소희 | 김영희 |
기타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 / 변미순
1) 기타의 줄은 여섯 줄(현)로 되어 있다. 같은 줄이 아니다. 줄의 굵기는 제각기 다르다. 또 그 줄의 재료가 통기타는 쇠줄이고, 클래식기타는 나일론 줄이다. 줄의 굵기와 성질에 따라 전혀 다른 음색을 낸다.
2) 기타의 긴 목을 가로지르며 줄받이 역할을 하는 프렛(fret)의 수는 스물이다. 그들의 간격도 일정하지 않다. 위에서부터 조금씩 좁아지며 구획을 나누어 두었다. 여섯 줄의 재료와 굵기, 프렛의 간격 그리고 손으로 잡는 코드의 위치에 따라 천상의 소리를 낸다.
3) 대학다닐 때 나는 “내가 제일 잘나 가”라는 노래제목처럼 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대학 1학년만 마치고 남학생들은 우루루 입대를 하던 시절이었다. 대학 새내기들은 갑자기 찾아온 자유를 어떻게 누려야할지 몰라 하였고, 무작정 놀기만 하니 학점을 날린 친구가 수두룩했다. 시험 결과는 당연히 농땡이 치지 않는 여학생들이 높았다.
4) 동기들은 모두 군에 갔고, 두세과목을 F학점을 받아 두었던 재수, 삼수를 한 나이 많은 학생들이 수두룩하게 복학하였다. 그래도 그들 역시 알콜과 대학의 낭만이라는 묘약에 중독되어 학과에 집중하지 못하였으니 나는 조금 공부하고도 대학 8학기 내내 성적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더욱 내가 제일 잘난 줄 알았다. 그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뛰어나서 일 처리하는 능력이 높은 줄 알았다.
5) 살아갈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가만히 보니 사람들은 제각기 재능 한가지씩 가지고 있었다. 기타 여섯 줄과 스무 개의 프렛이 만들어 내는 각각의 소리는 다르지만 함께 만지고 우려내는 기술이 멋진 연주가 되듯 한 사람의 재능으로 잘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6) 행사 때마다 지인들의 역량은 다르게 쏟아졌다. 기획을 잘 하는 김씨, 홍보용 슬로건을 멋지게 뽑아내는 이양, 작품의 색상을 멋지게 만들어 내는 칼라 정양, 관람자의 마음을 읽어내는 박씨, 화룡점정을 생각해내는 최씨. 딱히 할 일이 떠오르지 않으면 전시회 작품의 받침대를 제단하고 견적받고 기한 내 가지고 오는 일이 맡겨지고 완벽하게 해냈다.
7) 십수년이 넘게 이어온 모임이 있다. 각자의 단점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반면 개인의 장점은 칭찬하고 박수를 치리고 했다. 갈수록 장점은 더 부피가 커져갔고, 모임의 힘은 맨손으로 소라도 때려잡을 기세가 되었다. 어떤 행사가 잡혀도 우리는 각자가 잘 해낼 한가지의 일을 정확하게 찾아냈다.
8) 내가 제일 잘났다는 오만에서 한칸 내려앉으니 보이기 시작했다. 1보다 2가 크고, 2보다 3이 큰 수인 이유를 알게되었다. 첫 모임할 때 각 개인의 단점으로 염려했던 걱정은 서로 하지 않기로 한 것이 신의 한수였다. 그리고 12명은 기타 줄에 녹아 들어 제 음색을 정하였고, 프렛의 위치와 간격으로 기타의 멋진 연주 실력을 뽐내는 만남이 되었다.
9) “다윈의 사도들”이라는 책은 ‘아미는 BTS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다윈에게도 아미가 있다’로 시작되었다. 세상은 잘난 한 사람을 돋보이게 해 주기 위해 다른 조력자들이 반드시 있다는 설명이다. 다윈도 BTS도 한 사람, 한 팀으로 세계적인 입지를 굳힌게 아니라는 말이다.
10) 기타를 구성하는 많은 것들이 같은 재료, 같은 간격이 아니었다. 한 사람도 같은 성향이 없었던 모임에서 “함께” 만들어 내는 연주가 무엇인지 골골이 아는 명품 기타가 되었고, 최고의 연주가가 되었다. ‘오래 이어갈 수 있을까’ 염려로 시작한 모임은 이제 이십년을 이어가려 한다. 다인공부방 식구들의 익어가는 숙성의 향기와 깊어지는 사랑이 행복으로 커져가고 있다.
시누이 / 엄옥례
1.사람들은 흔히 뿌린 대로 거둔다고 말을 한다. 이 말은 보편적 진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닌듯하다.
2.삼십여 년 전, 한 남자에게 콩깍지가 홀딱 씌어버렸다.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그 남자는 사겨 온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청혼을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뇌종양 수술로 자리보전하고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며 성씨가 다른 여동생, 남동생과 달동네 단칸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결혼할 형편이 못 된다고 하는 남자의 옆구리를 살살 간질여 결혼식을 올리고 몸만 달랑 와서 함께 살았다.
3.사글세 열두 달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결혼하면서 남편과 뜻을 모아 벌여놓은 가게의 벌이는 방세를 모아둘 여유도 없이 하루하루 먹고사는데 다 쓰였다. 방세와 분가 문제를 고민 중이었다. 당시 동네에는 집이 낡아 살 수가 없어서 비워놓은 집이 더러 있었다. 형편상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분가하지 않고 식구가 함께 빈집으로 이사하는 것이었다.
4.이사 갈 집은 사람으로 치자면 회갑 나이쯤 되었다. 공동수도관은 삭아서 누수 량이 많아 새로 수도를 넣었다. 쳐진 지붕은 나무 기둥으로 받치고 구멍 난 벽은 합판으로 덧대었다. 얽힌 거미줄을 걷고, 쥐똥을 쓸어내고, 벽지를 바르고, 새 장판을 깔아서 보금자리를 꾸몄다.
5.나름대로 집을 단도리했지만, 겨울에는 갈라진 틈새로 황소바람이 쳐들어왔다. 서향집이라 여름에는 밤에도 열기가 식지 않았다. 화장실은 집 뒤편 언덕배기에 있어서 밤에 볼일이 생기면 식구 중에 누가 동행해야 했다.
6.그런 집에서도, 아이를 가졌다. 입덧을 하면서 성격이 까칠해졌다. 불편한 환경이 싫어졌다. 가난하게 살아 온 식구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렸었는데, 좀 더 절약하지않아 그렇다고, 좀 더 부지런하지 않아 그렇다고 마음 속에서 비난이 부글거렸다. 출근하는 시누이 도시락 싸기도 싫어지고 예쁘게 화장하고 거침없이 사는 모습도 샘이 났다. 식구들 밥하는 것도, 빨래하는 것도 다 귀찮아졌다. 친정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 꿀떡 같았으나 잘살 때까지 가지 않겠다고 큰소리치고 와서 그러지도 못했다. 착한 식구들은 나의 이런 못된 심리상태를 눈치채고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주려고 애썼다.
7.드디어 아이를 낳았다. 뱃속의 아이를 부려놓자 몸이 가벼워졌다. 아이를 안고 젖을 물려 보니 그런 행복이 없었다. 예민해졌던 나로 인해 불편했던 식구들은 다시 웃음을 찾았다. 가라앉았던 집안 분위기는 아이가 태어나자 다시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워졌다. 친정 식구들도 나를 보러 찾아왔다. 어머님은 손자를 봐서인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시누이는 형편에 과하게 하루가 멀다고 조카의 옷과 장난감을 사다 날랐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겨드랑이에 끼고 왔다.
8.어머님은 날로 건강을 회복하여 손자를 봐 줄 수 있었다. 살림을 어머님께 맡기고 남편과 가게 일을 보았다. 가끔 모임에 나가기도 했는데, 알게 모르게 시누이 옷과 신발을 입고, 신고 나가기도 했다. 시누이는 그런 내게 종종 옷과 신발 사주었다.
9.시누이가 결혼할 때였다. 어머님은 음식 솜씨가 좋아서 사돈댁에 보낼 갖가지 음식을 집에서 장만했다. 당연히 며느리인 나도 손이 바빠졌다. 사실 나는 친정이 허락해주지않은 결혼을 해서 어머님께 드릴 정성을 해 오지 못했다. 보란 듯 솜씨를 발휘하여 음식을 장만하는 어머님께 미안함도 있었지만, 형편껏 하지 않는 것에 빈정거리는 마음도 들었다. 좋아라고 바리바리 싸가지고 가는 시누이에게는 샘이 나기도 했다.
10.결혼한 시누이는 곧 외국에 살러 갔다. 지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음식도 만들고 손님을 태워 오고 태워주는 일을 하며 먹고 살았다. 통 크고 활달하며 인정스러운 수완을 인정받아 게스트하우스를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사업은 날마다 눈덩이처럼 몸피를 키우며 굴러갔다.
11.삶이 늘 성장의 길로만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누이에게 곤두박질 치는 시기가 왔다. 게스트하우스가 성업을 이루어 모은 돈으로 호텔을 인수했는데, 번듯한 외관만 보고 산 호텔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겉모습과 달리 속은 사흘이 멀다고 수리할 곳이 생겼다. 불편한 시설로 알려져 손님도 끊겨 적자가 쌓여 감당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결국 고생해서 번 돈을 날리고 다시 게스트 하우스에 나가서 일해야 했다.
12.유별나게 추운 나라에서 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지 않고 지냈다. 아이들을 꼭 껴안아 체온으로 냉기를 녹였다. 독한 생활로 모은 자금으로 다시 게스트하우스를 인수했다. 거금을 치르고 인생 공부를 한 시누이는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아이들 자라는 것 보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았다.
13.시누이는 여유가 생기자 한인 모임에 나갔다. 그곳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의 법인장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서 한 가지 사업을 추천 받았는데, 현지에서 필요한 인력과 장비를 구해주는 사업이었다. 시누이는 실패의 경험이 떠올라 손사래를 쳤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야망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망설임 끝에 그 사업에 닻을 올렸다. 외국에 나가 산 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폴란드에 기반을 두고 헝가리에서도 사업장을 운영한다.
14.자리를 잡고부터는 한국을 왕래한다. 올 때마다 내가 주문한 그릇이며 가방을 사 오더니 어느 때는 놀라자빠질 만큼의 거금도 보내주었다. 현재, 나이 들어 직장에 나가고 싶어도 갈 데가 없는 오빠와 '공시족' 3년 차에 어깻죽지가 축 처진 조카를 불러 일자리에 앉혀 주었다.
15.다음 주 수요일, 나도 방학을 맞아 시누이의 초대로 남편과 아들을 보러 간다. 내가 뭘 해준 게 있다고, 기껏해야 한솥밥을 해먹고 심술부린 것 밖에 없는데 이런 정을 베푸는 시누이. 그녀를 업고 폴란드를 한 바퀴 돌고 또, 헝가리를 한 바퀴 돈다 한들 고마움을 다 갚을 수 있을까. 나는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에 한없이 겸연쩍어지는 한 사람이다.
귀후비기 / 오수미
1)귓속이 가렵다. 멀쩡한 면봉만 서너 개 꺾였다. 귀이개를 집어넣어 긁어보지만 귀지가 나오기는커녕 시원조차 하지 않다. 오히려 아프다. 내가 내 귓속을 볼 수 없으니 어쩌랴. 이렇게 귓속이 가려울 때면, 누가 내 귀를 좀 후벼주면 좋겠다.
2)“엄마!”
아이가 부른다. 귓속이 간지럽다고 한다. 알았노라고 말이 끝나자마자 귀이개를 가져온다. 아이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내 다리를 베고 얼굴은 나를 향해 눕는다. 가려운 쪽 귓구멍을 보이며 눈을 감는다. 익숙한 행동이다.
3)숟가락 모양 귀이개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의 귓바퀴를 잡고 조명이 있는 쪽으로 당겨 귓속을 들여다본다. 아무리 조명이 밝아도 귓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다. 감각이 있어야한다.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귀이개 끝에 온 신경을 쏟아야한다. 깊숙이 자리한 귀지까지 말끔히 제거하려면 초집중력이 필요하다. 어둡고 좁은 동굴탐험을 능가한다.
4)노란 귀지덩어리 하나 있다. 건드리는 순간, 안으로 깊이 들어가 버릴까 움찔한다. 조심스레 살살 밖으로 긁어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제거한다. 내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아이도 이 느낌을 안다. 아이의 감은 눈이 웃는다. 입 꼬리가 올라간다.
5)나도 어렸을 때 엄마가 귀 후벼주는 시간이 참 좋았다. 엄마의 다리를 베고 누워 눈을 감았다. 내 얼굴은 엄마의 배를 향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형광등 불빛아래서 허리를 구부린 채 뚫어져라 귓속을 들여다보는 엄마의 모습이 느껴졌다. 엄마 냄새를 맡으면서 깜박 잠이 들기도 했다.
엄마는 쇠로 만든 귀이개를 사용했다. 딱딱한 쇠로 만들어져 아플 것 같지만 엄마가 귓속을 간질이면 솜털 같았다. 간질간질한 느낌은 조바심을 일으키다가 쓱 긁어내는 동시에 시원함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느낌을 기억한다.
6)이제는 내가 아이의 귀를 후벼준다. 귀후비기,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처럼 들리지만 아무나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편안하면서 특별한 그 느낌을 알기 때문이다. 엄마만큼 가려운 그곳을 잘 긁어내는 사람은 없다. 엄마만큼 정성을 다해 귓속을 들여다보며 귀청소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7)아이에게 다 되었다고 하며 머리를 밀어내니 깜박 잠을 잤나보다. 고개를 들고 게슴츠레 웃는다. 네 발 자세로 방향만 바꾸어 다른 쪽 귓구멍마저 들이대고 눈을 감는다.
8)아, 귓속이 가렵다. 나도 엄마를 부르고 싶다. 그 시절 그 때의 시원함을 느끼고 싶다. 이제는 안경을 끼고도 글씨가 보이지 않아 돋보기를 찾는 엄마만 있다.
마지막 커피 / 백금태
1) 선생님 영정사진 앞에 섰다. 선생님께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신다. 생전의 살가운 눈빛 그대로다. 50여 년 전에도 그랬고, 며칠 전에도 그랬다.
2) 선생님을 뵈러 병원에 갔다.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곳은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장소가 아닌가. 선생님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병실 밖으로 나오셨다. 수척해진 모습에 마음이 저렸다.
“너 왔구나.” 선생님은 내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잡은 손에 금세 힘이 풀렸다. 내가 두 손으로 선생님 손을 감싸 쥐고 내 볼에 갖다 댔다. 선생님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3) 선생님의 연세는 올해 아흔다섯이다. 지난해까지 스승의 날에는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며 사제의 정을 나누었다. 아흔을 훌쩍 넘긴 스승님과 일흔을 바라보는 제자와의 만남은 화기애애했다. 수십 년 전의 호랑이처럼 무섭고 엄한 선생님도, 선생님 앞에 바짝 언 초등학생도 아니었다. 선생님도 제자도 머리에 백설이 내려앉은 인생 선배와 후배의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지난날 코흘리개 아이들을 조곤조곤 가르치듯 삶에 대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제자들은 선생님 옆에 바짝 붙어 엄마에게 하듯이 응석을 부렸다. 선생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제자를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선생님의 눈에는 사랑스러운 자식과 진배없는 제자들이었다. 선생님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행운이었다.
4) 선생님과의 인연은 50년이 훨씬 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다. 학년 초에는 옆 반 선생님이셨지만 우리 반 선생님의 사고로 합반이 되었다. 두 반이 합쳐진 학생 수는 무려 80명이 넘었다. 요즘은 20명 내외가 대부분이다. 지금보다 서너 배가 넘는 아이들이 협소하고 열악한 환경의 교실에서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작거렸다. 선생님의 고충은 어땠을까.
5) 그때는 중학교도 입시를 치러야만 했다. 관내로, 타지로 보내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선생님은 밤잠을 설치며 시험지를 쓰고 등사판에 밀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전기도 없는 시골 학교에서 촛불을 켜고 야간 학습을 시켰다. ‘찌지 직 찌지 직’ 여기저기서 머리카락 타는 노린내가 진동했다.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을 일일이 깨우며 한자라도 더 가르치려 애썼다. 우리는 그런 선생님을 원망하며 도망갈 구멍을 찾다가 혼나기 일쑤였다. 우리만 힘들지 선생님이 힘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선생님의 은혜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6) 선생님께서 환자복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커피를 사 오라셨다.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내 손에 꼭 쥐여주시며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그 돈을 받아들고 커피점으로 갔다. 선생님께서 사주시는 마지막 커피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7) 선생님께서 영면에 드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뵌 지 며칠만이었다. 너무 빨리 다가온 비보에 머리가 하얘졌다. 전화기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커피를 마시는 제자와 눈을 맞췄다. 유독 따스하고 애잔한 눈길이었다. 가실 길을 아셨나 보다.
8) 향불이 꺼질 듯 타들어 간다. 꽃에 둘러싸인 선생님이 편안해 보인다.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다시 못 뵐 선생님 앞에서 목놓아 운다.
“선생님, 커피 잘 마셨습니다.”
아버지의 하루 / 옥 경 자
(1) 아버지의 연세 올해 아흔세 살이시다. 얼마 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혼자 남으셨다. 당신께서는 살던 집이 편하다고 하여 그냥 살던 집에 계시니 자주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루에 한두 번은 꼭 들여다봐야 한다. 얼마 전부터는 요양 등급을 받으셔서 평일에는 오전 중에 요양사가 와서 반찬을 만들어 놓고 가기에 그래도 내가 한결 수월해졌다.
(2) 아버지 하루의 시작은 새벽에 일어나서 현관 앞에 있는 커다란 고무대야에 심어놓은 꽃에 물을 주고 잎들과 이야기를 하는 걸로 하루를 연다. 얼마 전에는 시장에 가서 고추와 상치 모종도 몇 개 사 와서 심어놓았다. 수도꼭지에 연결한 호스로 모종과 꽃에 물을 주고는 구부러진 허리를 토닥이며 힘들어하며 방으로 들어간다. 작은 소일거리에도 움직임은 예전과 같지 않다.
(3) 조금만 움직이면 숨이 차서 밖으로 나가기를 꺼리니 하는 일이라고는 종일 방에 앉아서 TV 리모컨만 누르고 있다. 그러다가 내가 가면 눈빛에 반짝 반가움을 담는다. 그 표정에서 적적하고 쓸쓸한 아버지의 외로움이 보인다. 이야기할 대상이 나밖에 없으니 매일 봐도 며칠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운 것이다.
(4) 친정집이라고는 하나 엄마가 있는 집과 없는 집은 천지 차이다. 명칭도 친정집에서 아버지 집으로 바뀌었다. 대화상대가 없는 아버지는 내가 가면 옛날 젊었을 때 이야기와 6.25사변을 겪은 이야기를 하지만 듣는 나로서는 공감이 가지 않는다. 하도 여러 번 들어서 레퍼토리도 꿰고 있다. 어떤 때는 그만하라는 말 대신에 티브이 채널을 돌려 아버지의 말을 끊어버릴 때도 있었다. 나도 할 일이 있는지라 마냥 아버지의 이야기만 듣고 있을 수만은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5) 아버지의 친구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밖에 나가면 아는 사람도 친구들도 없다. 같은 시대의 수다를 떨 대상이 없다는 건 쓸쓸한 일이다.
(6)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버지가 외출했다. 집에서 가까운 공원으로 박카스 한 병을 가지고 찾아갔다. 공원 의자에 앉아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박카스를 따 드렸다. 지나가던 어르신이 며느리인가 묻는다. 친정아버지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좋겠다고 하신다. 그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다. 아직은 아픈 곳도 없고 세끼 밥 잘 드시니 자식인 나로서는 복이기도 하다.
(7) 아버지는 공원에서도 멀뚱하게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만 보다가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결국은 또다시 TV 리모컨을 친구삼아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걸로 하루를 보낸다.
(8) 가만히 아버지의 일상을 지켜보다 생각에 빠진다. 인생 백 세 시대라고 좋아들 하지만 시대를 공감할 친구 하나 없고 요양원 아니면 병원에 누워 있는 백 세 인생을 살면 행복할까? 아버지의 경우 아프지도 않고 요양원에도 가지 않았는데도 사는 데 낙이 없다고 하신다. 내가 봐도 그래 보인다.
(9) 엄마가 곁에 있을 때, 지병으로 끼니를 거르고 치매로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태웠지만 그래도 잔소리하고 티격태격할 대상이 있어서 호시절이라 하셨다. 하루해가 지겹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삶이 지겹다는 말이다.
(10) 오래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 꿈꾸는 희망 사항이다. 하지만 나는 요즘 아버지의 하루를 보면서 과연 친구도 없고 대화에 공감해 줄 이 없는 외로운 인생을 오래 살아도 좋을까 하는 물음표가 생긴다.
(11) 아버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늙은이가 자식들한테는 짐이 되고 나라의 돈만 축내면서 살고 있다고 자책하신다. 자식 앞세우지 않은 지금 빨리 가야 할 텐데 하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렇지만 몸에 나쁘다는 것은 절대 드시지 않는다. 삼대 거짓말 중의 하나가 노인들이 빨리 죽어야지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12) 꼿꼿하게 앉아있던 아버지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말수가 적어졌다. 흔들어 깨우면 세상만사가 귀찮은 표정이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도 아픈 데는 없다고 하신다. 메마른 잎처럼 축 처져서 매사에 생기가 없다. 요양원에 있으나 집에 있으나 누워 있는 건 매한가지인 것 같다.
(13) 친정집으로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막걸리 한 병을 샀다. 감자전이라도 구워 아버지와 마주 앉아 막걸리 한잔해야겠다. 아버지의 하루에 잠깐이라도 생기가 돌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옛날이야기에 맞장구라도 쳐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니 발길이 바빠진다.
603호실 웃음꽃 / 김아가다
1, 자동차 사고로 병원 생활을 한 지 벌써 넉 달째이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옴짝달싹 못 하고 용변까지 남의 손을 빌리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는 휠체어를 타도된다는 의사의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실형에서 집행유예라고 할까. 휠체어를 타고부터 몸도, 마음도 자유로워졌다.
2, 재활치료가 시작되면서 전인병원 603호실에 입원했다. 사고로 입원은 처음이라 분위기가 낯설고 어색했다. 환자 셋에 간병인 두 명, 나까지 여섯 명이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잤다. 혼자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인지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잠자리가 바뀌면서 한동안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뿐이랴. 밤이면 가스를 배출하는 생리현상 때문에도 고역이었다. 강약과 높낮이, 여기저기서 난리 블루스였다. 노인이 되면 괄약근 조절에도 이상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그들의 표정이 좀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3, 정형외과 병동은 특히 노인들이 많다. 다른 병원에서 무릎관절을 수술한 환자들이 재활치료를 하려고 입원한다. 나는 친화력이 있는 편이지만 처음에는 낯가림하는 축이다. 일단 마음의 문을 열게 되면 최선을 다하지만 친숙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정이 들고 좋은 인연 맺어봤자 겨우 보름이다. 환자들은 물리치료와 전기치료를 하고 나면 걷기 연습을 하다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기 때문이다.
4, 우울증이 올 것 같았다. 나 자신을 위해 병실에서 할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었다. 이 자리에 내가 있음은 어떤 역할이 분명히 있으리라. 낯가림이 아니라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친근감을 느끼게 해야 했다. 머릿속에 설핏 조폭과 아줌마의 공통 단어가 떠올랐다. 연세 많은 분께 언니라는 호칭이 거식해서 형님이라 부르면서 살갑게 굴었다. 밤새 앓고 일어나기 힘들어하면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노래를 불러주면서 어르신들의 아침을 깨웠다.
5, 노인들을 보살피는 간병인이 있지만, 침상마다 다니면서 등을 긁고 쓰다듬어 주었다. 스킨십은 효과 백 퍼센트의 상한가로 치솟으면서 점점 내 편이 생기고 자존감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유튜브를 이용하면 못 할 것이 없는 기막힌 세상이다.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엉덩이 실룩대며 막춤을 추고, 비음을 섞어 간드러진 트로트도 한 가락 불렀다. 한바탕 웃음소리가 새어 나가면 간호실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달려오기도 했다. 몸도 아픈데 우울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야 될까. K 할머니는, 밥 주고 잠재워 주고 맨날 웃고 살게 되어서 퇴원하기 싫다 하셨다.
6,노인들이 건강을 찾아 퇴원할 때는 너나없이 눈물을 찍어내며 전화번호를 주고받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의 넋두리를 들어주면서 가족처럼 지냈기 때문이다. 보름을 주기로 교체되는 침상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보호자 없이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였다. 좀 완쾌된 병실 선배가 밥을 먹고 나면 식판을 들어내 주었다. 선행은 돌고 도는 것이리라. 이제는 내가 그 몫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착하다면서 마음이 천심이라고 했다.
7, 착한 아이 신드롬이 있다. 부모나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아이의 심성을 키운다고 한다. 나의 유년은 착한 아이라는 족쇄에 묶여 그렇게 자랐다. 매사에 착하니까, 잘하니까. 그 말에 세뇌되어 나의 존재는 없고 착한 아이만 있었다. 똑 부러지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성격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삶만 살아온 나 자신이 싫을 때가 많았다. 나도 사람인데 욕심이 없을까. 때론 불쑥하고 가시가 돋을 때가 있었지만 착한아이 신드롬에 빠져 자가당착으로 살았는데 오늘 이름 하나 또 얻었다.
8, P 어르신은 뇌경색으로 입원하셨다. 편마비로 불편한 몸을 간병인에게 의지하지만,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신다. “이만하길 다행이지, 하느님이 보호하셨지.” 그 말씀에 내가 엄지척을 해주면 “아가다는 우리 방에 웃음꽃이야.”
웃음꽃으로 이름 지어졌으니 꽃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르신의 하얀 박꽃 같은 웃음도 하늘하늘 참 곱다.
나프탈렌 / 이시언
1. 여러 가지 생필품들이 좌판 위에 진열되어 있다. 실, 바늘, 고무줄, 때수건, 각질제거제……. 방물장수의 보따리를 풀은 놓은듯 하다. 없는 게 없는 좌판은 보기만 해도 흥미롭다. 실 한 타래, 바늘 한 쌈을 바구니에 담았다. 살게 더 있나 둘러보는데, 망막을 비집고 들어오는 물건이 보인다. 찾는 손이 적은 탓일까. 분홍색 고무장갑에 절반은 가려졌다. 관심을 못 받는 천덕꾸러기 마냥 반쯤 나온 겉봉지는 때가 끼어 시크무레하다.
2. 봉지 끝을 잡아당기자 숨었던 반쪽이 끌려나온다. 한입 깨물면 화아한 향이 입 안에 퍼지는 박하사탕 닮은 나프탈렌. 엄마가 있었으면 잘 만났다 하면서 얼른 장바구니에 담았지 싶다.
3. 손목까지 내려오는 봄 옷에 땀이 베이면, 엄마는 나프탈렌을 샀다. 다락과 옷장에서 잠자던 좀들이 알에서 깨어나 극성을 부리기 때문이다. 제살을 깎아 냄새를 만드는 나프탈렌의 성질을 아는 엄마는 조심스러워 했다. 벌레를 잡는 것이 뭔들 못할까. 엄마는 목장갑을 끼고 철지난 교과서를 한 장씩 뜯어 나프탈렌을 일일이 쌌다. 그리고 정성을 보태어 옷 갈피와 이불장에 넣었다.
4. 이불장에는 기름을 바른 듯이 반들거리는 양단이불이 있었다. 양단이불은 덩치가 크고 무거워 들기도 힘들었다. 억지로 이불장에 올려놓으면 장에 가득 찼다. 다른 이불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5. 폭신한 이불을 좋아한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하얀 목화솜으로 속통을 만들었다. 속통은 빨강과 노랑이 삼대 칠로 섞인 양단 홑청으로, 끌어 안 듯이 감쌌다. 홑청을 다 꾸미기도 전에 나는 이불위로 올라갔다. 폭신한 감촉이 좋아 큰대자로 벌렁 누웠다. 솜 눌린다며, 때 탈까 걱정인 엄마는 당장 나오라고 팔을 당겼다. 방에 깔아 놓은 양단이불은 참 고왔다. 붉은 장미가 만발한 꽃밭을 수천마리의 노랑나비가 훨훨 날아다니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6. 대문 밖 세상에만 관심이 많은 아버지는 어쩌다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나비가 꽃을 찾듯 양단이불에서 정을 나누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엄마의 바람과 달리 아버지는 이불에서 병원 냄새 난다며 코를 막았다. 아버지의 타박에 엄마는 긴장했다. 궁여지책인지 엄마는 방망이로 이불을 두들겨 잠자는 목화솜을 깨웠다. 햇볕 아래서 이불을 매만지는 엄마의 눈에 외로움이 담겨 있었다.
7. 아버지를 기다리는 엄마 옆에 누웠다. 시들한 공기가 다가와 주위를 맴돌았다. 무슨 말을 해도 엷은 미소만 짓는 엄마는 물끄러미 천정만 바라봤다. 천정 벽지에는 수많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하트모양의 연분홍 꽃잎들은 꽃밥을 숨기려고 겹겹이 싸여 있었다. 마치 비밀을 감춘 것 같아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어 보고 싶었다. 어떤 꽃잎은 밖으로 말려 배시시 웃는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어떤 때는 새침데기처럼 뾰로통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순한 꽃잎을 받드는 초록색 줄기에 돋아난 가시는 어떤가. 독한 혀처럼 날카로워 함부로 덤볐다가는 된통 당한다. 연약한 듯 하면서도 콧대 센 여인처럼 도도하여, 멋져 보였다.
8.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장롱에 갇혀 있던 장미와 나비 떼가 냄새를 견디지 못하여 사라지는 꿈이었다. 애써 꿈은 반대라고 지웠다. 하지만 엄마의 온기가 닿을 때마다 꿈이 살아나 힘들었다.
9. 나프탈렌 냄새 떠도는 외롭고 쓸쓸한 방에 엄마 혼자 남겨진 그림이 그려졌다. 연한 꽃잎 같던 엄마가 종일 밥벌이에 매달리는 동안 젊은 아버지는 떠났다. 나프탈렌 냄새가 엄마의 향기까지 소멸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냄새가 싫다며 멀리 멀리 날아간 것이다.
10. 아버지가 돌아오는데 삼십년이 걸렸다. 환갑이 훨씬 지나 칠순에 가까운 어느 날, 엄마 옆에 앉아 있었다. 속도 없는 엄마는 기운이 딸려 날지 못하는 늙은 아버지를 품었다. 세월의 무게에 살이 녹아, 앙상한 뼈만 남은 엄마가 제 정신인가 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아버지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길 원했다.
11.엄마는 기다린 보람이 있어 이제야 주인을 만났다며 양단이불부터 만졌다. 장롱에서 이불을 내려 방바닥에 폈다. 종이 쪼가리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나프탈렌을 감쌌던 종이들이었다. 종이들은 누렇게 탈색되어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12. 이불도 잠자는 동안 엄마처럼 늙었다. 폭신했던 솜은 눌리고 눌려 딱딱해졌다. 반들거리던 이불 홑청도 촌스럽게 물이 날렸다. 시든 장미와 늙은 나비의 초상화가 방바닥에 뒹구는 것처럼 흉물스러웠다.
13. 다행이라면 엄마가 이불솜을 방망이로 두드려 깨우는 집착이 사라진 거였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순리를 따르는 엄마는 편안해 보였다. 해마다 먹이를 주듯이 나프탈렌을 이불 사이에 넣는 것도 멈추었다. 좀이 슬든 말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았다. 병원 냄새에 예민한 아버지의 후각도 늙고 둔해져 더 이상 냄새를 맡지 않았다. 아버지 옆에 누운 엄마가 다복해 보였다. 따뜻한 공기들이 엄마 주위를 서성거렸다.
14. 장사꾼이 살건교 하며 묻는다. 새삼스레 가슴이 먹먹하다. 나는 나프탈렌의 먼지를 손바닥으로 대충 닦아낸다. 그리고 좌판 위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돌아선다.
늑대를 피하는 법 / 서소희
1) 어린 시절 늑대를 본 적이 있다. 친구들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들판에 들개 같은 짐승 두 마리가 멀찍이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꼬리가 밑으로 내려가 있었고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눈빛은 어딘지 슬퍼보였다. 마을은 멀리 있었고 들개가 흔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2) 고향마을에는 흔하게 개를 키웠다. 그래서 개의 얼굴을 많이 보았다. 두 마리는 그 동안 보던 개의 모습과 미묘하게 달랐다. 이목구비가 굵직하였고 잘생겼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쳐다보다 녀석들은 멀리 뛰어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말하니 늑대일 것이라 했다. 항상 학교를 오고 갈 때는 혼자 다니지 말고 친구들과 함께 다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3) 갓난아기를 업어가 잡아먹는다는 늑대, 동화 속에 등장하는 무서운 늑대를 그날 만난 것이다. 늑대는 무리를 지어 다니는 맹수이다. 사냥을 할 때도 사냥감이 지칠 때까지 몰고 간 후에야 사냥감을 잡는 녀석이다. 생각해보면 그날 친구들과 나는 운이 좋았다. 어쩌면 우리 쪽 무리가 많아 그냥 보내 주었는지도 모른다.
4) 이제 늑대는 한반도에서 멸종된 동물이다. 단지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멸종된 동물은 사람에게서 잊히기 마련이다. 자연스레 사람들이 늑대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않는 세상이다. 그런데 멸종된 줄 알았던 늑대를 이십 대 중반에 만나고 말았다.
5) 나는 난치병 환자다. 처음 발병할 때 많이 아팠다. 동네병원을 가면 감기 몸살이라고 했다. 감기 몸살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도 병은 호전되지도 않았고 점점 심해졌다. 약을 먹어도 아픈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병이기에 이렇게 아프단 말인가.
6) 이 병원 저 병원을 건너 도착한 곳은 서울에 있는 모 대학병원이었다. 그곳에서 병의 이름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병명은 ‘루푸스’였다. 라틴어로 늑대란 뜻이다. 피부에 나타나는 발진의 증상이 마치 늑대에게 공격받아 긁히고 물린 것 같은 모양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7) 또 늑대를 만나 버렸다. 이 병은 가임기 여성에게서 주로 발병되었고 아직 정확한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 처음 발병할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 나의 경우 온 몸의 살과 뼈와 피에 염증이 생겼다. 근육염, 위염, 관절염, 혈액염, 뇌수막염, 포도막염, 백내장·······, 온갖 병들이 몸속에 있었다. 몸에 열이 펄펄 끓는가 하면 한기로 오돌오돌 떨기도 했다. 다리가 퉁퉁 부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두통도 심했다. 그 모두를 아우르는 이름이 ‘루푸스’ 즉 늑대였다. 사망률은 낮지만 한번 걸리면 완치가 어려운 병이었다.
8) 그것은 늑대란 짐승만큼 무서웠다. 그때만 해도 면역억제제를 평생 먹어야 한다고 했다. 면역억제제는 스테로이드제이다. 독한 약이지만 그것만이 펄펄 끓는 몸 온도를 낮출 수 있었다. 먹으면 신기하게 아프지가 않았다. 힘도 생겨서 가끔 콧노래도 부르게 만들었다. 얼마나 고마운 약인가. 하지만 독으로 병을 치료하는 격이었다.
9) 면역억제제는 부작용도 많았다. 부작용의 하나로 식욕이 왕성해졌다. 머리카락도 많이 빠졌다. 얼굴이 달덩이처럼 동글해지고 이상하게 변했다. 그것 뿐 아니라 몸도 많이 부었다. 오래 먹으면 위장장애, 악성 종양, 관절의 변형 등, 여러 가지 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먹어야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10) 약으로 늑대란 녀석을 잠재웠다. 나는 병을 핑계로 게을러져 갔다. 하루 중 대부분을 누워서 지냈다. 사람과의 관계도 단순해져 외출하는 날이 줄어들었다. 그나마 두통이 사라져 책이라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다. 성격이 병에 맞추어 변해갔다. 역설적이게도 시간은 잘 흘렀다.
11)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공주병’이라 불렀다. 혹은 ‘우울증’이라고도 했다. 안 아픈 것이 아니었다. 안 아픈척하며 살았을 뿐이었다. 단지 게을러야 덜 아팠다. 정말 공주병이나 우울증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이유 없이 몸에 멍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앉았다 일어나도 어지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12) 체력이 약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며 살아야하는 삶은 슬프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때 일하는 분야에서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사회에서의 지위를 굳건히 해 전문직 여성을 꿈꾸었다. 악기도 하나 배우고, 운동도 마음껏 하고 싶었다. 그것이 큰 욕심이었을까.
13) 무엇이라도 열심히 하면 녀석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발소리도 죽이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시끄러우면 늑대란 녀석이 깨어 버릴지도 몰랐다. 루푸스와 함께 한 세월이 이십오 년을 훌쩍 넘어간다. 물론 열정은 거세당했다. 평생 먹어야 한다는 약을 십 년 정도 먹지 않고 잘 버텼었다. 그래서 녀석이 떠나버린 줄 알았다.
14) 놈은 악착스러웠다. 몸속 어딘가 납작이 엎드려있다 다시 이빨을 드러내며 미열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던 것이다. 불혹의 끝자락, 아버지를 보냈던 해이다. 그해 여름, 세계적으로 살인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15) 어느 날 밤, 잇몸이 아파 잠에서 깼다. 몸을 만져보니 뜨거웠다. 너무 아파서 해열제를 먹어야 했다. 약통을 열어보니 약은 알맹이가 모두 빠져나가고 껍질만 남아 있었다. 분명 약을 산지 며칠이 되지 않았다. 언제부터 아팠던 것일까.
16) 생각해보니 피곤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따라오는 미열, 처음에는 단순 감기라 여겼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갱년기가 되면 다들 겪는 증상이라고 했다. 많이 피곤하고 안하던 여름감기도 걸리게 하는 것이 갱년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17) 미열은 고열로 바뀌었다. 목 여기저기서 작은 혹들이 만져졌다. 림프선이 부은 것이었다. 열이 떨어지지 않아 동네 병원에 가서 몇 가지 검사를 했다. 빈혈이 심했고 혈소판 수치가 정상인의 반에 반도 못 미쳤다. 의사는 직접 대학병원 의사에게 전화까지 해서 예약을 잡아주었다. 그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18) 빈혈과 혈소판 수치가 낮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알아차렸다. 빈혈과 고열, 혈소판의 감소, 백혈구 수치의 증가, 그 모든 것들은 루푸스의 증상이었다. 곱씹어 보니 늑대란 녀석은 항상 감기몸살로 위장하고 나를 찾아왔다. 계속된 아픔이 갱년기 증상이 아니었음을. 늑대, 그 녀석이 깨어난 것이다.
19) 다행히 불혹의 끝자락에 나타난 녀석은 힘이 조금 약했다. 며칠 대학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었더니 그나마 고열은 사라졌다. 예전처럼 극심한 통증도 없었다. 심한 감기 몸살을 앓는 정도였다.
20) 백혈구 수치가 높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몹시 피곤했다. 의사는 만날 때마다 “무조건 쉬어야 합니다” 말했다. 그것이 처방 중 하나였다. 또 갱년기가 다가올수록 병의 증상도 희미해져 완치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놈도 몸 따라 늙어 간다니 그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21) 다시 늑대를 만나버렸다. 전에도 겪어봤으니 늑대를 피하는 방법을 기억해 내야 했다. 다시 스테로이드제를 먹었다. 그리고 더 게으르게 살았다. 하루 중 대부분 텔레비전을 봤고 낮잠을 잤고 저녁이 되면 또 잠을 잤다. 이상하게 잠이 잘 왔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몸에 힘이 붙었다. 피곤도 덜했다.
22) 지천명을 훌쩍 뛰어넘은 지금도 게으른 삶을 산다. 아픈 것 보다 그것이 낫다. 독 같은 약을 먹는 것 보다 몸에도 더 좋다. 아직도 현실에서 늑대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납작하니 엎드려 있어야만 녀석이 나를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늑대를 피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훌쩍 가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오래전 하교 길에서 만났던 늑대처럼 말이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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