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남편과 사별한 한모(73)씨는 그동안 아들 집에 살다가 2000년 10월 서울 근교의 Y 유료 양로원에
들어갔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부장까지 지낸 아들(52)이 98년 ‘IMF 명퇴’를 당한 뒤,
자신이 아들의 ‘짐’이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남편이 물려준 재산이 있었기에, 홀가분하게 여생을 마치겠다고 생각하고 양로원으로 갔다.
그러나 처음 마음 먹었던 대로 되지 않았다. 차츰 노환이 생기면서 치료비가 예상외로 많이 드는 바람에
노후자금은 빠르게 바닥났다. 한씨는 “이대로 5년만 지나면 입주금 2500만원 외에 아들 집에 갈
교통비도 마련하기 어려워질 것 같다”고 한숨 지었다.
김모(76)씨는 5년 전 아들과 두 딸에게 미리 재산을 분배했다.
한 살 아래 아내가 치매에 걸리기 전이었다.
요즘 그는 자식들에 재산 나눠준 일을 후회하고 있다.
1년 전 큰딸에게 따로 8000만원을 주면서 아내 수발을 부탁했지만, 6개월 만에
“더 이상 못 모시겠다”는 말만 들었다.
아내 병세가 악화되자 김씨는 작년 초 집 근처 은천노인회관을 찾았지만,
아내는 지난 9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씨는 “좋은 요양시설에서 삶을 마치게 하고 싶었는데 미리 준비를 하지 못했다”며
“고생만 시키다 보낸 게 가슴 아프다”고 했다.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정모씨. 정년 퇴임한 뒤 일본의 동업자와 사업을 벌이다 퇴직금과 재산을 다 날렸다.
이후 자식들이 냉대하기 시작했고, 치매까지 걸리자 박대는 더 심해졌다.
2001년 중순엔 자식들에 의해 반 강제로 노인시설에 보내졌다.
그러나 한 달 비용 36만원을 석 달간 못내 아들에게 돌려 보내진 뒤 작년 2월 81세로 숨을 거뒀다.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은천 노인복지회관에 있는 치매·중풍 노인 50여명 대부분은 김씨와 정씨 같이
노후대책 없이 늙어버린 뒤의 참담한 결과를 맞고 있다.
노후준비는 생각도 못했고, 가진 돈은 자식에게 모두 나눠준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3일 찾은 은천노인복지회관. 각 층 60평 정도인 5층 건물 안에는 병들고 지친 노인들이 넘쳐났다.
중풍 노인은 침대에 종일 누워 있었고, 치매 노인들은 방안을 이리저리 헤매며 큰 소리를 지르고,
이상한 행동을 하며 물건을 부수기도 했다.
안전을 위해 노인들에게 입힌 노란색 상의와 음울한 내부 분위기로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회관 이병만(李炳娩·여) 회장은 “자식만 믿다가 노환과 박대에 시달리고 있는 노인들이 동대문구에 만도
2000~3000여명에 이르지만, 대부분 집안이나 거리에 방치돼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요즘 노인들은 자식과 따로 사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쓰러지고 나면 버림받기 일쑤다.
20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딸 다섯을 혼자 키워 시집 보낸 이모(79)씨는 지난해 말 갑자기 쓰러졌다가
경기도 고양의 한 노인병원에서 깨어났다.
겨우 주변을 수습하던 이씨는 노후자금으로 모아 놓은 은행 예금 8000만원을
딸들이 모두 인출해 간 사실을 알게 됐다. 딸들에게 화를 내 겨우 되돌려 받긴 했지만,
이후 이씨와 딸들의 관계는 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다.
이씨는 “아내 사별 뒤 딸 키우는 낙으로 살아왔는데, 먼저 나 자신을 돌봤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노부부나 친구끼리 여생을 보낼 곳을 찾으려 해도 가진 돈이 부족한 이들에겐 좌절만 더해질 뿐이다.
수원의 서 모(75)·김모(73)씨 노부부. 경기도의 한 시니어타운을 찾았지만,
1억원 이상의 돈을 맡길 형편이 못돼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서씨는 “5남매 힘들게 키우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지금 남은 돈 갖고는 여생을 아름답게 끝낼 자신이 없다”며
“죽을 때까지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가지 않고 특히 병 났을 때 제대로 치료 받을 수 있는 시설이
신통치 않다”고 말했다. 경기도 양평의 김모(62)씨도 “아내가 심장병을 앓아서 병원시설이
잘돼 있는 곳을 찾는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입맛에 맞는 시설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통계청 인구 추계에 따르면 2003년1월 현재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396만9000여명.
보건사회연구원은 2000년 기준으로 요양시설에서 사는 노인을 제외하고 재가(在家) 노인의 11.6%인
39만300명이 일상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중증 장애노인, 7.3%에 해당하는 24만2000명이 일상생활을
혼자 하기 어려운 경증 장애노인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2001년 12월 현재 노인요양시설(양로원·요양원)은
전국에 296곳으로, 2만2518명을 수용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가정봉사원 파견, 주간보호 등
재가 복지시설 322곳(1만7000명)을 포함하더라도 병에 시달리는 노인을 돌보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박재간(朴在侃) 한국노인문제연구소장은 “자식과 떨어져 사는 노인들이 2000년에 전체 노인의 53%
수준이었지만, 10년 후에는 70%, 20여년 후에는 90%의 노인이 혼자 살게 될 것”이라며
“이들이 대책없이 늙어가는 것은 결국에는 젊은 세대의 부담으로 남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