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임정일
깨어나고 싶지 않은 잠을 허무는
자동차 경적소리 들려온다.
어둠을 동침한 밤
가까스로 미명에 낯빛을 씻고
짊어지고 앉는 새벽
오토바이 페달을 밟는 건장한 사내의
고르지 않은 숨소리 묻어 있는 신문을 편다.
흙빛 잉크를 입고 죽어 있는 글자들의 나열
죽음에 애도하는 한 송이 꺾여진
들꽃의 향기가 진동한다.
희망은 또다시 수채로 흘러들고
포르말린 듬뿍 얹은 아침 수저를 든다.
누가 나를 박제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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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시계
임정일
그것은 아버지의 심장이다
쩡쩡 강심을 울리며 숨을 쉬고 있는
삐뚤어진 틀니에 박혀
소실한 자존심보다
자랑스러운 자화상이다
노동의 힘보다
풍류를 즐겼던 아버지에게
분칠한 계집을 기다렸을
중요한 도구였으리라
그것은
추종자를 은닉한 권모술수의 웃음
나누어 마신 술잔의 객기였으리라
아니 그것은
금장 벗겨진 아버지의 세월을
끌고 가고 있는
마지막 완력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잠 든 머리맡
고요한 심장을 일깨우듯
철컥 이며 시간을 넘기는 소리
힘에 겨운 아침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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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침묵
거드름을 피우며
달이 구름을 밟고 올라 서면
도시는 참았던 봇물을 쏟아 낸다.
도시를 씻겨낸 오물이
강으로 흘러가고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잔 속에 술을 채우고
조명에 몸을 흔들며
참아온 한낮의 헐떡임을
달을 향해 내 던진다.
뒤섞여 흐르는 강은 말이 없는데
혼탁한 물 위로 반쪽 된 달 하나 빠져
허우적거리다, 이내 잠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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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2
누르던 이파리
힘겹게 붙잡은 어미손
제풀에 손 놓던 날
봉당으로
장독대로
여윈 햇빛 가로막은
낮은 돌담을 휘돌아
바람은 왔다.
빛 바랜 이파리
바람 따라 쿨럭이다
병든 오후
햇살은 담장 밑에 가만히
드러 누웠다.
꽃이었나 보다
알록달록
가을중턱 물들이며 피어나던 나는
온몸이 부서져라
산을 오르며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고
내가 되고
삼천 겁 악연의
바람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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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
詩: 임정일
허기를 면하려
천원에 6개 하는 만두를 먹은 날
변기통 깔고 앉아 밤을 보냈다
토막토막 잘려나가는 창자를 끌어안은
밤의 고통은 길고
여의도를 건너는 원효대교 다리 위
휘황한 불빛들이 강물에 젖었다
어둠을 수뢰한 도시의 침묵
불면한 대지의 열기가 하루를 토해 놓는 시간
둥지를 뛰쳐나온 어린 새들이
굉음을 울리며 아스팔트에 곤두박질치고 있을 때
비대한 창자의 검은 탯줄을 가르는
백정들의 빠른 손놀림에
아침이 오기전 강물 위로 안개가 피어 올랐다
먹성 좋은 불가살이의 밥통은
흔적없이 모든 것들을 소화하고 비대해져 가는데
만두 6개가 전부인 가난한 밥통은
침묵하기를 강요하는 도시의 빈 둥지에서
먹이를 주우러 휑한 몰골의 아침이 일어선다.
ㅡ 2003년 겨울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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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그리고 여자
詩: 임정일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은 날
아내의 고무장갑은 푸른색이거나 초록색이었다
그럴 때 나는
아내가 머리모양을 달리 하거나 유난히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을 때처럼 불안하다.
쏴쏴쏴
수돗물소리 거칠고 발자국 소리 쿵쾅거릴 때
술잔 기울다 분위기에 휩쓸려 오입질하고 오던날
현관문을 여는 아내의 낡은 스웨터처럼 안쓰럽다.
구멍난 양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신고 tv 리모컨을
돌리는 아내에게서 나는 쉰 김치냄새에서 약수터를
오르며 스친 비구니의 웃음이 스친다.
메마른 가시 같은 여자
볼품없이 드러난 가슴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여자
그러나
품안에 안으면 군불 덥혀진 아랫목 같이 따뜻하고 아늑해서
금방이라도 평온한 잠속을 빠져들게 하는 여자
아내의 젖가슴이 비릿해질 무렵
잦아든 수돗물 소리 들린다.
실로 옭아맨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쌕쌕 숨소리 어깨 들먹이도록 집어 삼키는
주방 빨래 집게에 파란 고무장갑 초록 고무장갑이
들숨 날숨으로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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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락눈
詩: 임정일
푸실 푸실 싸락눈 내려와
마당에 쌓이고
나는, 빈 아궁이에 먹이를 넣는다.
솔가지 흔드는 어머님의 잔기침 소리
소복소복 바람기 없이 싸락눈이 내리고
타락 타락 잔솔가지에 엉겨 드는 불길
닷새장 주막거리 화선이가 저고리 고름을 푼다.
사립문 밖
어둠 뒤엉켜 신음하는 소리, 아궁이에 쑤셔 넣고
문풍지 사각사각 숨 고르고 마주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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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그리고 혼돈
詩: 임정일
마른뼈 앙상하게 드러내는 십일월의 숲
비와 바람이 아귀다툼으로
마흔의 늪을 건너온다.
구두 뒷축을 갉아 먹는
거대한 도시의 회충들
삶이 드나드는 문턱에 내려진
셔터에 굳게 채워진 자물쇠
30촉전구 헐렁하게 풀어져
흐릿한 문지방을 타고
철커덕 거리며
어머니는 재봉침을 돌리신다.
구겨진 양복 안단에 말아 넣은
노비문서에 갈구 하지 않았던 자유
신이 허락지 않은 날개짓이
마감 뉴스를 통해 추락하던날
도시의 불빛이
하나 둘 태어나고
하나 둘 죽어갔다.
경비구역 안 1423동
쇠창살 틈을 헤집고 쿨럭이는
일흔 노파의 늦은밤의 기도가
혼돈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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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반달
詩: 임정일
아픔도 없다.
칼날은 뭉뚝한 새끼손가락 끝을
사정없이 지나다 멈췄다.
원단 쪼가리로 싸맨 손가락은
쉼없이 쏱아져 나오는 붉은 피로
흥건하다.
발은 병원을 향해 걸어 가는데
나는 집으로 달려간다.
선물을 기다리며 생일상 미루고 있을
아들놈 얼굴이
반쯤 잘려나간 달빛에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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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다.
詩: 임정일
토큰도 사라진 줄 몰랐다.
천원짜리 한 장을 박스 안에 넣자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를 내며 잔돈을 토해 낸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내려야할 곳을 알려주는 여자의
기계성 멘트가 흘러 나오면 벨을 누르고
세상 밖으로 통하는 출구에 서서
내릴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길 양편에 늘어선
건물 수 만큼 부자들이 사는 천국
옆으로 달리는 고급 승용차의 번호를 합쳐
짓고땡을 한다.
지금은 힘들게 달려온 다리에게 쉬는 시간과
미안한 마음이면 충분하다.
아직 목적지는 멀고 잠이 온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풀리는데
힘든 하루를 잠시 내려 놓고 앉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엔
미동도 없다.
네온이 열사 하는 도심의 불빛을 질주하며
토해내는 거칠은 함성이
내 눌린 심장의 포효처럼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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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詩: 임정일
그대를 기다리는 시간
햇볕 속에 고슬한 바람을 날리고 있는
오후의 적막이
불빛도 없는 가로등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매어논 자전거들이
육교 아래 오즘을 깔기듯 즐비하게 서서
미니스커트를 한 여자의 정강이를
힐끔거리며 고개를 쳐드는 순간
핸드폰 단말기의 낯선 숫자를 익히려
바람난 사내의 목젖은 가라 앉고
아스팔트에 버려지는 존재 없는 가래침들
사람들 저마다 주머니의 동전 몇 닢쯤 쭈물거리다
이제는 까마득히 잊어 버렸을 공중전화부스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많은 이름들을 떠나 보내고
가을은
육교계단을 내려오는 늙은이의 허리춤 마냥 구부정히
구로공단역 플랫트홈에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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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아이
詩: 임정일
저 구부린 용과 같은 바다의 후예
해를 먹는다.
뜨겁게 용솟음 치는 푸른 혈맥
해일로 일어서 굽이치고
소년은 꿈을 꾼다.
깊고 푸른 바다의 꿈
죽어
바다의 장수가 되리.
소년의 꿈이 자라는 섬마을
바다가 바위에 다투는 소리로 해가지고
뭍으로 흐르는 별들이 내려와
지껄이며 노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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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이야기
詩: 임정일
어디서 매미 한 마리 옷을 벗겠다.
할머니는 솥단지 가득 강냉이를 익혀 내고
모깃불에 그을린 계집아이 눈물이
그렁하게 달린 밤이 까맣게 익을 무렵
반딧불이 총총히 별 되어 떠올랐다.
머슴아들 기름불 말아 뱀장어 따라 돌고
할아배 등짝에 초롬이 엎드려 귀신 얘기 듣던 밤
무당거미 베틀 올려 실 잣는 소리
낭낭히 성황당 고갯 마루 넘을 때
바람이 달빛 한자락 끌어 덮고
계집아이 배시시한 잠결에 살며시 누우면
어느 집 감나무 나뭇가지엔
쓰름매미 한 마리 허물 벗어 걸어 두고
백설같은 날개 아련히 하늘 접어
고요히 새벽을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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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詩: 임정일
한낱 고양이의 밥이 될까
파헤쳐진 심장의 갈퀴
너절한 내장에 기생하는
수많은 목숨의 파리떼 같이
도심의 깨어진 보도블럭사이
축축이 기어드는 육신의 찌거기
까마귀도 울지 않는밤
꽃상여가 온다.
꽃상여가 온다 .
퀭한 살쾡이 눈빛 어슬렁 거리는
회색 도심의 깊은 골짜기를
곡도 없이
영혼이 지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s.nate.com%2Ffiles%2Fbbs%2Fimages%2Fgeneral%2Fadult07%2F45%2Fv19-1%5B20031007204037%5D.jpg)
별을 기다리며
詩: 임정일
아이들은
별을 주우러 개천을 달린다.
와르르 쏟아지는 별빛에
허기를 채우고
가난한 영혼을 구제한다는
신을 기다렸다.
거뭇한 산 그림자 호령하며 달려든다.
하얗게 떼지어 달려드는 별빛
땟국물 누더기진 낡은 옷소매에
한아름 별을 안고 달음질을 친다.
머리 위로
사뿐히 이고온 푸른 달빛이
잠 든 머리맡을 비추면
가난한 굴뚝 낡은 지붕에
한옹큼 별이 솟아올랐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기다리는 신은 오지 않고
오늘도, 가난을 채우러
밤하늘 가득 별이 열린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s.nate.com%2Ffiles%2Fbbs%2Fimages%2Fgeneral%2Fadult07%2F45%2Fv19%5B20031007204037%5D.jpg)
첫댓글 나비님도 건강 하시고,복 많이 받으시길...
임정일 시인님 뵌적은 없지만 글은 자주 접하죠..여기서 느껴보니 더욱더 멋있는 글이네요..선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엔 소망이 모두 이루어 지시길 빕니다...^^
친구야 여태것 못한것 한참에 다 올렸나보다 잘 지냈지........ 해를 못봐 아쉬워 어쩌누 ~ 산행 자주하니 해는 언제던 접할수있겠지 독같은 해 이지만 의미를 부여시켜 보는것과는 좀 다르지만 ~ 건강하고 가정에 행운가득하길 빈다.
유난히도 따뜻한 올해 눈 구경못한 남녘에서 설경 너무 아름다왔고 임정일님 시 감상 잘 했습니다.
감사하구요..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얀 눈처럼 맑고 깨끗한 한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