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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 시 모음 45편
《1》
가난의 힘
신현림
나를 바꿀 기회, 복권을 사 본 적도 없다
사내 냄새는 맡고 살아야지 하고는 일하다 잊었다
해를 담은 밥 한 그릇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쌀 한 줌은 눈송이처럼 얼마나 금세 사라지는지
살아가는 일은 매일 힘내는 일이었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생각이 깊어지지 않지만
내일은 힘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일한다
온 힘을 다해 일하는 모습은 주변 풍경을 바꾼다
온 힘을 다해 노을이 지고 밤이 내리듯
온 힘을 다해 살아도 가난은 반복된다
가난의 힘은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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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을 빨래
신현림
바다가 보아는 곳에
빨래를 널어두었다
셔츠가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겠지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가지
자신이 그리워하는 것을
기다리면 언젠가 그대가 다가오듯
가을을 그리워하니
어느새 낙엽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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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갑자기
신현림
갑자기 한 바구니 오렌지가 먹고 싶고
갑자기 커피 냄새나는 사람이 그립고
그 사람과 신나게 춤을 추고 싶고
풀밭의 호랑나비처럼 태양을 입고 날고 싶다
갑자기 행인들이 둥둥 떠다니는 환상을 본다
꾸질꾸질한 재개발아파트가 무너질 듯 비바람이 불면
아랫집 옆집 연탄가스가 수의처럼 날려온다
창을 열고 산성비에 천사가 녹아버렸다
빌어먹을 인간들! 나는 욕하면서 부끄러웠다
왜 이렇게 살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나 자신이 답답해 죽고만 싶었다
액자 속의 그림같이 조용히 살다가도
갑자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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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겨울 정거장
신현림
겨울은 외투주머니에서 울고
추운 손들은 난로 같은 사람을 찾는다
오후의 저무는 해 아래 모두
깡마른 기타처럼 만지면 날카롭게 울부짖을 듯하다
싸구려 운동화처럼 세월이 날아가는데
생활은 변한 게 없고 아무도 날 애타게 부르지 않고
특별한 기억도 없다 어리석은 열망으로 뭉친
얼음덩이처럼 서로 가까워지는 일은 불가능한 듯
침묵의 물살에 떠밀려 가는 것이 강물 빛이 변하고
벌써 늙어간다는 것이,
어두워지는 창공에 흰 백지 장이 나부낀다
내 장갑을 누군가에게 벗어줄 기쁜 위안이 그립다
희망의 작은 손전등을 들어
내게 오는 자를 위해 길을 비춘다
나는 즐거운 타인이 있으므로 살아가고
삶은 그들에게 벗어나려 할 때 조차
그들에게 속하려는 끝없는 노력이므로
감미로운 고통에 싸여 길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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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멍
신현림
가끔 나는 네가 물개로 보였다
물개가 운전하는 차에서 본 은빛 바다와
물개가 들려주던 향기로운 노래를 생각하다가
나는 물수건처럼 푹 젖어버렸다
세상엔 흉기로 구멍을 내는 사람이 늘고
스스로 흉기가 되어 남도 나도 망쳐가는 동안
어떤 착한 구멍도 내지 못해 나는 답답만 하다
이사 가고 싶어도 집이 안 나가고
남은 통장이 가벼워지면 조바심치고
불편한 문제로 몸도 맘도 망가지고
먹구름 속에서 무언가 자꾸 시들고 죽어간다
입과 귀를 막고 단지 우울에 갇혀
깨져버린 화분처럼 미쳐버리고 싶은 때
도시까지 밀려든 등대를 끼고 돌아보니
해장국처럼 뜨거운 노을이 지고 있었다
먼 길 지루한 길 무모한 길
자꾸 헛바퀴 도는 길목에서
모든 시름 녹아버리게
네 몸에 구멍을 만들고 싶었다
네 구멍에 얼굴 파묻고 울고 싶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날
해처럼 그리운 구멍은 어디 있을까
부질없이 또 나는 헤맨다
꽃과 바람과 바다가
흘러가고 흘러오는 출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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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대는 혼자가 아니리라
신현림
그대 슬픔 한 드럼통 내가 받으리라
감미로울 때까지 마시리라 평화로운 우유가 되어
그대에게 흐르리라 또한 태풍같이 휘몰아쳐
그대 삼키는 고통의 식인종을 몰아내고
모든 먹고사는 고뇌는 단순화시켜 게우리라
술에 찌든 그대 대신 내가 술 마시고
기쁜 내 마음 안주로 놓으리라
그대 병든 살 병든 뼈 바람으로 소독하리라
추억의 금고에서 아픈 기억의 동전은 없애고 말리라
그대 가는 길과 길마다 길 닦는 롤러가 되어
저녁이 내리면 그대 가슴의 시를 읊고
그대 죽이는 공포나 절망을 향한
테러리스트가 되리라 신성한 연장이 되어
희망의 폭동을 일으키리라
하느님이 그대의 희망 봉일 수 있다면
물고기가 되어 교회를 헤엄쳐 가리라 험한 물결
뛰어넘으리라 간절히 축복을 빌리라
그대는 혼자가 아니리라
영원히 홀로치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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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신현림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자살한 장국영을 기억하고 싶어
영화 '아비정전'을 돌려 보니
다들 마네킹처럼 쓸쓸해 보이네요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해요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하고
아프지 않기 위해 아픈 사람들
따뜻한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전쟁으로 사스로 죽어가더니
우수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살자들
살기엔 너무 지치고,
휴식이 그리웠을 거예요
되는 일 없으면 고래들도 자살하는데
이해해 볼게요 가끔 저도 죽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죽지는 못해요
엄마는 아파서도 죽어서도 안 되죠
이 세상에 무얼 찾으러 왔는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마음을 주려 하면 사랑이 떠나듯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하면
절벽이 달려옵니다.
시를 쓰려는데 두 살배기 딸이
함께 있자며 제 다릴 붙잡고
사이렌처럼 울어댑니다.
당신도 매일 내리는 비를 맞으며 헤매는군요.
저도, 홀로 어둠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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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물
신현림
그물에 걸려
거친 목소리 따라
그저 떼쓰고
무리 지으며 무얼 흉내 내는가
자기감정, 생각이
참으로 자기 것인가
사람들은 혼자 있기보다
무리 짓는 걸 좋아하니
그저 신나게 속이나 풀고자
그 헛헛한 환상 그물과
촛불 기억에 휩싸여
혼자가 아니었다고
물고기 떼같이 실컷
바다를 흔들어 보고 싶은 것만 같아
성장이 멈춘 아이들처럼
그저 떼쓰고, 눈과 귀는 닫고
자신이 보려는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니
저마다 같은 사람이면서
너무나 다른 우주인으로
소리 지르는 몸들은
금세 버려질 바나나 껍질처럼 슬프다
버려지는 게 두려워서
선동의 그물에 걸려서라도
쓸쓸하지 않으려는 걸까
흰 소금이 아무 소용없는 시끄러운 이들과
흰 소금을 찾아 묵묵히 견디는 이들 속에
텅 빈 밥그릇만 하늘에 떠다니고
이 땅의 무섭도록 고요한 열기는
그저 진영 전쟁 속에 꺼져 들고
이 나라의 배는 자꾸 물속에 빠져든다
물결 위에 구한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뱃머리에 어느 생계형 가장은
물속에 빠진 얼굴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그물에 긁힌 쓸쓸한 얼굴을
출처 : 격월간 《현대시학》 (2020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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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꿈꾸는 행복
신현림
행복은 행복하리라 믿는 일
정성스런 내 손길이 닿는 곳마다
백 개의 태양이 숨 쉰다 믿는 일
소처럼 우직하게 일하다 보면
모든 강 모든 길이 만나 출렁이고
산은 산마다 나뭇가지 쑥쑥 뻗어 가지
집은 집마다 사람 냄새 가득한 음악이 타오르고
폐허는 폐허마다 뛰노는 아이들로 되살아나지
흰 꽃이 펄펄 날리듯
아름다운 날을 꿈꾸면
읽던 책은 책마다 푸른 꿈을 쏟아 내고
물고기는 물고기마다 맑은 강을 끌고 오지
내가 꿈꾸던 행복은 행복하리라 믿고
백 개의 연꽃을 심는 일
백 개의 태양을 피워 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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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신현림
서른 번째 생일날에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마흔 번째 생일날에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개구리가 셰익스피어를 이해할 수 없듯이
네가 나를 이해 못 하고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라는 구름 울타리가 있어 자살하지 않았다
사람처럼 키스하는 산비둘기 보며
인생이 신기하고 궁금해서 자살하지 않았다
커피 향과 따순 밥이 너무나 맛있어 자살하지 않았고
꽃과 나비와 해와 바람을 선물 받고
세상에 진 빚을 갚지 못해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자식을 키워야 해서 자살하지 않았고
쓸쓸한 나와 같은 너를 찾아
슬픔에 목메며
슬픔의 끝장을 보려고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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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라는 연장을 어떻게 닦아야 하나
신현림
가질 순 없는 건 다 상처랬죠?
가질 수 없는 건 다 상처랬죠?
닿지 않는 하늘 닿지 않는 바다
돈이 없어 닿지 않는 외투
빌릴 수 없는 방 두 칸짜리 집
닿지 않는 사랑
절망의 아들인 포기가 가장 편하겠죠
아니, 그냥 흘러가는 거죠
뼈처럼 흰 구름이 되는 거죠
가다보면 흰 구름이 진흙더미가 되기도 하고
흰 구름이 배가되어 풍랑을 만나고
흰 구름 외투를 입고
길가에 쓰러진 나를 발견하겠죠
나는 나를 깨워 이렇게 말하겠죠
<내가나를 가질 수 없는데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서 뭐하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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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의 시
신혐림
나의 시는
오르는 물가를 잠재우지 못하고
병든 자의 위로도 못 되고
뜨거운 희망을 일깨우는 망치소리도 못 되고
네 상처의 주름살도 지우지 못하고
그래, 아무 힘도 못 되지
그래도 날 여류시인이라 부르진 마
여류가 뭐야? 이쑤시개야, 악세사리야?
여류는 화류란 말의 사촌 같으니
여자라는 울타리에 가두지 마 폄하하지 마
세상을 향해 품을 열어놓고
나는 돌아본다
뭣보다 진하게 느끼는 세기말을
도시의 우울과
슬픈 열정의 그림자를
사람의 욕망과 쓸쓸함을
솔직하게 비춰내고자
괴로움을 넘고자 내 노래는 출렁인다
거침없이 일렁이며 흘러가고자
사무치는 아리랑처럼 격정의 록처럼
푸른한 재즈, 블루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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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의 싸움
신현림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한 쓸쓸함
줄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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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내 여인이 당신을 생각한다
신현림
저녁 태양은 빵같이 부풀고
언덕은 아코디언처럼 흘러내립니다
거리에 북풍이 넘치도록 그녀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연히 만난 길과
알 수 없는 희망에 들뜬 날들을
소리가 아픈 풍금이 북풍 따라 노래하고
당신에게 나던 사막의 붉은 냄새가 몰려옵니다
잠시 바라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렸나요
그냥 앞에 계시는 것만으로 기쁨에 넘쳐 봤거든요
소중해서 숨긴 애정의 힘이 비탈길을 오르게 합니다
정든 이의 행복을 빌고 하늘에 새들이 날아드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헤어져야 합니다
그녀는 당신이 그린 수묵화입니다
수묵화 한 장이 비바람에 젖습니다
뱃사람이 풍랑을 이기며 바다를 밀고 가듯
사람들은 저마다 추억을 견디며 오늘을 건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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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너에게로 가는 손
신현림
나날은
떠나는 새처럼 떠나지 못하고
흐르는 물처럼 흐르지 않고
거친 파도처럼 고동치지 않았다
아무 위안도 없고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없는 슬픔에 갇혀
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너와 함께 하는 희망이
수레바퀴처럼 구르지 않아도
먼 마을의 개가 짖듯이
백일홍이 울부짖듯이
나의 손은 너에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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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노란 꽃을 드릴께
신현림
귀다툼의 바닷물을
오래 끌고 다니면
어둠은 하얘지기도 했어
철로 위엔 노란 꽃도 피어났어
무덤들은 흙을 풀어헤쳐 쉬기도 했구
물결치는 관 위에
호수를 뜨위기라도 하면
웃음의 향기가 메아리쳤어
철로 위의 꽃도 손에 와 앉았어
손가락 새로는 세상의 눈물도 보이구
푸른 빵에 주린 몽유병으로
강물을 오르면 넘어지기도 하겠지
이 큰 눈에 가득 담겨오는
헐벗어서 더욱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면 노란 꽃을 드릴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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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시간
신현림
이불 틈으로 거친 바람이 들어왔다
이불 틈으로 구름이 들어왔고 잔디가 깔리기 시작했다
이불 속으로 잠시 비가 내렸고 해가 떴다
이불 속에서 꽃이 자랐다
당신이 이 많은 걸 데리고 왔다
당신 사랑으로 이 많은 걸 얻었지만
이불만한 자유를 잃었다
당신 사랑마저 없었다면 이불조차 없었겠지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질 때까지
꿈의 포도알이 여물 때까지
손, 발을 벗어놓고
엉덩이와 가슴도 풀어놓고
당신의 따스한 회오리바람과 춤추다가
문을 여니
저녁밥향기가 나는 바다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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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당신이 나를 부를 때까지
신현림
당신이 나를 부를 때까지
이 푸른 나비가 날아다녀요
문은 열어 놨어요
몸이 가벼워질 슬리퍼를 신으세요
아무도 없어요 햇살이 흰 눈같이 반짝일 뿐
아무도 우리를 부를 사람은 없어요
어떤 소식도 당신을 무겁게 하지 않을 거예요
오늘은 아직 아무도 자살하지 않았고,
빚쟁이도 없고, 먼바다 고래는
1000개의 비닐을 삼키지도 않았어요
1000개의 비닐이 녹아 수돗물로 쏟아져도
우리 놀라지 말아요 비닐을 안 쓰면 되어요
당신은 용수철같이 너무 긴장하며 지냈어요
일터에 가기 위해 튀어 오를 필요 없어요
제가 안전띠가 돼 드릴 테니
방금 끓인 커피니까 천천히 드세요
사약 빛깔의 커피 향은 미치도록 살고 싶게 해요
저는 커피 매니아, 당신 매니아예요
우리는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어요
그리웠어요 그리워도 티를 낼 수 없었어요
당신이 나를 부를 때까지 저는 숨어 있을 거예요
이 기쁜 푸른 나비들을 보시어요
☆★☆★☆★☆★☆★☆★☆★☆★☆★☆★☆★☆★
《19》
당신이 나를 생각한다
신현림
당신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흰 풀뿌리 같은 목소리에 이끌려
비바람 속에서 내 발은 부푼다.
비바람 속에서 당신을 찾아 떠난다.
얼굴 한번 어루만지고 싶어
착한 마음 비치는 눈을 보고 싶어
멀리서 흰고래처럼 춤추는 당신
닿을 듯 닿지 않는 당신을
훔쳐만 보고 잠잠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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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뜻깊은 인생이라고 속삭여 줘
신현림
여기 한 여자가 무너지다
한 시절을 지배한 젊음과 애인
가족과 삽시간에 헤어지다
상심의 덩굴손이 지붕을 뚫고
문 밖으로 사랑의 붉은 원피스가 달려가고
무엇 하나 되흘러오는 것 없이
이곳은 하염없이 빠져나가기만 하다
여기 한 여자가 무너진다
밤마다 대머리가 되는 여자
파산한 성찬대 처럼 썰렁한 여자
춥고 무서운 여자 가엾은 여자
여기 한 여자가 무너지다
사랑한 애인이 울린 여자
모든 시간이 버린 여자
그의 삶을 가볍게 해 줘
자선냄비처럼 기쁘게 해 줘
죽음의 피서지로 떠날 때까지
푸른 우산 푸른 이불을 덮어 줘
그가 헛디딘 곳마다
격려의 십자가가 피어나게 해 줘
뜻깊은 인생이었다고 속삭여 줘
그는 나와 나의 너니까
내일의 끝이니까
☆★☆★☆★☆★☆★☆★☆★☆★☆★☆★☆★☆★
《21》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신현림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멀어져서 아득하고 아름다운 너는
흰 셔츠처럼 펄럭이지
바람에 펄럭이는 것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내 눈 속의 새들이 아우성친다
너도 나를 그리워할까
분홍빛 부드러운 네 손이 다가와
돌려가는 추억의 영사기
이토록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구나
사라진 시간 사라진 사람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해를 보면 해를 닮고
너를 보면 쓸쓸한 바다를 닮는다
☆★☆★☆★☆★☆★☆★☆★☆★☆★☆★☆★☆★
《22》
바람은 황소떼
신현림
바람이 크오
바람이 클수록 길이
넘어지오 사지가 뒤틀리오
바람은 황소떼요 소떼의 통곡이오
사랑스런 공포 욕정이오
둔한 나를 치고 찢는
저 소를 잡고 싶소
잡을 만하면 날아가는
저 소에 소의 뼈 속에
들어가 박히고 싶소
어딘가 박히는 것은
항시 외롭지만 따스하오
인간의 소중한 흔적이 있소
그리움이 있소
지금은 견딜 수 있소
소의 날개를 붙들고
조금씩 너덜대는
생을 느끼고 싶소
강하게 더욱 완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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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백수의 나날
신현림
외로움에 찌든 쓴 물을 마시고
잉여 인간이란 슬픈 깨달음 속에
향기 없는 나날에 몸부림쳐도
내 소망 비춘 달이란 달
사랑의 외투란 외투 나를 감쌀 수도 없이
까마득한 구덩이 속으로 처박힌
나의 계급은 신빈곤층
나의 부양가족은 어린 딸과 우울의 늑대
나의 습관은 만성적인 절망과 희망의 시소 타기
말라 가는 나뭇잎 같은 존재로 사는 일에
진저리가 나 시퍼런 구역질이 나
가슴에 번개를 내리고 상처의 비석을 부수고
다시 독하게 세상과 맞짱을 떠보시지
인생의 독이란 독 다 토해 보시지
광활한 고독의 젖가슴 위에서
모든 것 걸고 탐구하고, 펄펄 살아나 보시지
미치도록 생존의 얼음장을 깨 보시지
미치도록 쩌엉, 쩡
미치도록 쩡
☆★☆★☆★☆★☆★☆★☆★☆★☆★☆★☆★☆★
《24》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신현림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폴레옹의 이 말은 10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이었다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내 많은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송곳은 가차없이 찌르고 찔러왔다
모든 불행엔 충고의 송곳이 있다
자만치 말라는, 마음 낮춰 살라는 송곳
불행의 우물을 잘 들여다보라는 송곳
바닥까지 떨어져서
다시 솟아오르는 햇살의 송곳
송곳은 이제 지팡이처럼 내게 다가와
신들린 듯 거친 바다처럼 밀어간다
☆★☆★☆★☆★☆★☆★☆★☆★☆★☆★☆★☆★
《25》
빵을 가진 남자
신현림
먼 빛 속에서
출렁거리는 아침 바다로 오십니다.
창공을 흔들고 제 가슴을 치며
야생화 보다 풋풋하게 오시는
당신은
해저같이 캄캄한 제 영혼이
끝없이 다다를 역입니다.
인간이 결국
무덤이라는 둥근 빵을 얻기 위해 살듯
빵을 가진 마음처럼 둥그래져야 겠지요
빵 속의 해와 강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끌어안은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무덤까지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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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사랑 밥을 끓이며
신현림
내 눈물은 빚더미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내 발은 사막을 건너는 법을 익히고
내 길은 무엇을 잘못했나 살핀다
내 생의 반은
실수와 부끄러움으로 얼룩졌다
꿀이 흐르는 길을 잃고
일만 하느라 사랑을 잃고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내 손은 뒤늦게
일으켜세우는 법을 익히고
어두운 몸에, 새 봄을 지피고 있다
혼자여도 쓸쓸하지 않고
함께라면 누구도 부럽지 않게
꿈의 아궁이에 해를 넣고
사랑밥을 끓이고 싶다
내 마지막 사랑과 밥
당신들에게 다 나누어주겠다
☆★☆★☆★☆★☆★☆★☆★☆★☆★☆★☆★☆★
《27》
사랑은 변하여도 사랑이다
신현림
네가 티슈에 써준 시를 보며
'사랑은 변하여도 사랑이다'에 한참 머뭇거린다
그래, 막 구워낸 빵과 식어서
나무처럼 딱딱한 빵도 여전히 빵이다
'피차 사랑하라' 외치며
식은 빵 따순 빵 케익빵이 내게 쏟아진다
하늘과 땅에서 내 옆구리에서 빵이 구워져 나온다
이천십년이 되고 삼천년이 돼도
그 빵을 먹고 처치 곤란한 기운으로
나의 모두에게 애정을 기울여도
외로움은 보험처럼 남을 것이다
너도 그 누구도 때론 슬픔으로 다가오지만
고장 난 시계를 고치며
사람들의 바다에 가장 아름다운
고래 한 마리 띄울 것이다
☆★☆★☆★☆★☆★☆★☆★☆★☆★☆★☆★☆★
《28》
사랑이 올 때
신현림
그리운 손길은
가랑비같이 다가오리
흐드러지게 장미가 필 땐
시드는 걸 생각지 않고
술 마실 때
취해 쓰러지는 걸 염려치 않고
사랑이 올 때
떠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
봄바람이 온몸 부풀려갈 때
세월 가는 걸 아파하지 않으리
오늘같이 젊은 날, 더 이상 없으리
아무런 기대 없이 맞이하고
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져도
봉숭아 꽃 물처럼 기뻐
서로가 서로를 물들여 가리
☆★☆★☆★☆★☆★☆★☆★☆★☆★☆★☆★☆★
《29》
삼십 삼 세의 가을
신현림
삼십 삼 세란 무엇인가
아이 하나, 둘 유아원에 보내거나
미리 죽어 목화솜 같은 바람으로 떠돌거나
우울의 강둑을 거닐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 달래거나
좀더 넓은 아파트
좀더 안정된 살림을 위해
고되고 답답한 나날을 장승처럼 견디는 것인가
돈을 모아 자유로울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일로 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성취와 만족은 얼마나 먼 등대인가
등대와 가을 태양을 보며 사무치는
나의 삼십 삼 세란
무엇에든 용감해지는 일이다
바람 속 장작불처럼 거친 외로움은
죽음의 공포쯤은 커피 마시듯 넘겨주는 일
지금껏 사랑했는가 무얼 제대로 사랑했는가
슬프다면 대신 울어주마
불쾌하다면 기분을 바꿔주마
손을 내밀어 정인들을 편안히 맞이하고
내 안의 깊은 산책길을 따라
잊고 지낸 것을 생각하는 일이다
간소하게 사는 매력과
초조하게 들린 시계소리가
얼마나 어여쁜 노래인가 느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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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술 마시기 좋은 방
신현림
햇빛에 내어 말린 고급 속내의만큼
사랑도 우정도 바래더라
변하지 않는 건 무엇인가
속이 텅 비면 견디지 못해 마시는
술과 음악은 세월을 썩게 하는 정겨운 습기라
겨울비 내리는 밤 빌리 홀리데이와
바하보다 절실한 '혼자만의 사랑' 열한 번
'백학' 일곱 번 번갈아 들으며
마음의 지붕인 쓸쓸함을 위하여
식구와 뭇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홀로 건배하는데 창 밖 깊은 연못에서
거북이가 솟아올라
맥주 한 상자 밀고 방으로 기어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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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슬럼프에 빠진 그녀의 독백
신현림
청춘의 벌판을 지나고
그곳은 타버린 무명옷으로 굽이치지
애인도 나만의 방도 없었지만 시간은 많다고 느꼈지
여린 풀잎이 바위도 들어올릴 듯한 시절
열렬하고 어리석고 심각한 청춘시절은 이제 지워진다
언덕을 넘고, 밧줄 같은 길에 묶여 나는 끌려간다
광장의 빈 의자처럼 현기증을 일으키며 생각한다
지금 나는 무엇인가?
내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닌데
사랑이 없으면 시간은 죽어버리는데
옷장을 열어 외출하려다 갈 곳이 없듯
전화할 사람도 없을 때의 가슴 그 썰렁한 헛간이란,
헛간 속을 들여다봐 시체가 따로 없다구
사람을 만나면 다칠까봐 달팽이가 되기도 하지
잡지나 영화도 지겹도록 보아 그게 그거 같고
내가 아는 건 고된 노동과 시든 꽃냄새 나는 권태,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란 기대나
애정이나 행복에 대한 갈망만큼 지독한 속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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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신현림
빈민가 담벼락 같은 가슴을 뚫고 겨울이 온다
슬픔은 미친 종처럼 울고 슬픔은 끝없이 나는 연
저 환장한 연을 잡았으면
내가 너 대신 아팠으면 너를 안고 나는 갈매기였으면
아우야, 추운 너를 안고 어머니가 금강산을 날으셨구나
너를 안고 나는 바 닷속을 달렸더구나
마음으로라도 날고 뛰지 않으면 살 수 없던 날들
열린 차창처럼 비명을 지르고 싶던 날들
불탄 아현동 사람들이 무덤으로 던져진 어제
저녁이 오기도 전에 식탁의 빵들은 부패했다
장송곡보다 무거운 원피스를 입고 너는 꿈 속 강변을 헤매고
버림받은 자들이 부르는 유행가가 싸락눈으로 날린다
의지대로 되는 일이 없다
우리는 토실토실한 쓰레기나 불리며 살고
작별의 꽃을 던지며 사나니
술잔은 자꾸 죽음을 향해 기울어지더라
기나긴 밤마다
아무 위로 없이 남겨진 나의 너여
더 이상 탄식의 나팔을 불지 마라
현세가 지옥인 때는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무자비한 세상, 지옥의 슬픔을 월경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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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시간 창고로 가는 길
신현림
어디로든 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때
무작정 밖으로 나서는 것이다.
좀 가다보면 바람도 불고,
성성한 빗발도 날리고,
비로소 우울한 일도
잊으리라.
밖으로 나가
내 안의 문제들을
살피면 아주 하찮아서
부끄럽다.
그래서 지나치게
자신 안에 갇혀 있으면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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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아무 것도 아니었지
신현림
너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도 아무 것도 아니었지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메잉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도 괜찮아
옷에서 떨어젼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알아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 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 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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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양말 한 마리
신현림
당신이 선물 준 양말을 버릴 수가 없어
해진 곳을 기워 가니 비단길처럼 아름다워요
한땀 한땀 기울 때마다
돈황 가는 길목
명사산 모래소리가 흘러내려요
사르락 사르락
흘러내리는 것은 다 슬프고 이쁘죠
모래언덕, 폭포, 소나기, 철길, 나무뿌리,
나를 위해 흘러내릴 당신 몸 소리까지요
무어든 흘러내리면 어딘가로 가잖아요
무언가 바뀌잖아요
답답한 자신에게 흘러나가
점 점 점
북쪽과 남쪽을 하나로 기우고
다른 나와 다른 너를
끊어진 다리와 다리를 하나로 기워
버릴 수 없이 불쌍히 여기는 일
가엾이 여기는 사랑 끝에서 날개가 자라고
우리는 서로 버리지 못할 양말이 되어
붉은 저녁 하늘을 맘껏 흘러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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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어디에도 없는 사람
신현림
나를 중심으로 도는 지구는
왜 이렇게 빨리 돌지
우리가 세상에 존재했었나
손닿지 않는 꽃처럼 없는 듯 살다 가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 같아
생애는 상실의 필름 한 롤이었나
구불구불 뱀처럼 지나가지
그 쓸쓸한 필름 한롤
불빛 환해도 길을 잃기 일쑤고
축제가 열린다지만
축구공만 한 해는 내게 날아오지 않고
네 메일 왔나 클릭하면 스팸 메일만 가득하고
꿈꾸던 등대는 물살에 잠겨간다
더는 우릴 묶을 끈도 없이 되돌아올 것도 없이
창밖엔 흰 머리칼 더미가 휘날려 가
가혹한 세월에 축배
잊어도 기억나도 서글픈 옛 시절에 축배
지루하고 위험한 별거 생활에 건배
지치게 하는 것과 끊지 못하는
어정쩡한 자신이 몹시 싫은 날
할 수 있는 건 갈 데까지 가보는 거
피 토하듯 붉게 울어보는 거
또 다른 삶을 그리워하다
거미처럼 새까맣게 타서 죽어 가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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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엄마 목소리
신현림
물안개처럼 애틋한 기억이 소용돌이치네
한강다리에서 흐르는 물살을 볼 때처럼
막막한 실업자로 살 때
살기 어렵던 자매들도 나를 위한 기도 글과 함께
일 이만 원이라도 손에 쥐여주던 때
일이십만 원까지 생활비를 보태준 엄마의 기억이
놋그릇처럼 우네
내주신 전셋돈을 갚겠다 한 날
엄마 목소리는 뜨거운 메아리로 되돌아오네
“살기 힘들어도 그 돈을 내가 받을 수는 없는 거다”
엄마의 말들은 나를 쓰러지지 않게 받쳐준 지지대였네
인생은 잃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 받았다는 추억이 몸이 어두운 때 불을 밝히고
물기 젖은 따스한 바람을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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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신현림
담배불을 끄듯 너를 꺼버릴 거야
다 마시고 난 맥주 캔처럼 나를 구겨버렸듯
너를 벗고 말 거야
그만, 너를, 잊는다,고 다짐해도
북소리처럼 너는 다시 쿵쿵 울린다
오랜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십년 걸렸는데
너를 뛰어넘는 건 얼마 걸리까
그래, 너는 나의 휴일이었고
희망의 트럼펫이었다
지독한 사랑에 나를 걸었다
뭐든 걸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네 생각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어디에나 있었다 해질녘 풍경과 비와 눈보라,
바라보는 곳곳마다 귀신처럼 일렁거렸다
온몸 휘감던 칡넝쿨의 사랑
그래, 널 여태 집착한 거야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히 느껴질 때
너를 버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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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자화상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이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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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전 생애를 건다는 것
신현림
제 인생은 단단하게
빛나는 것이 사라진 후
아련한 향기를 맡고
아쉬워한 날이 많았어요
머뭇거리다 놓치는 게
어디 사랑뿐일까요
아차, 하는 순간에
뭐든 놓치게 되니
성서의 뱀처럼 지혜롭고 싶어요
전 생애를 걸듯이
빛나는 순간, 잠시 멈춰
재스민 꽃향기도 깊이 음미했어요
코끝에 걸린 세상이 향기롭게
이승과 저승을 연결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냄새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오늘
저렇게 꽃핀다는 건
전 생애를 거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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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신현림
1
불타는 구두, 그 열정을 던져라
지루한 몸을 후회의 쓸개즙을 토하고
나날은 잉어떼가 춤추는 강을 부르고
세상을 더럽히는 차들이 구름이 되도록
드럼을 쳐라 슬픈 드럼을 쳐라
여자인 것이 싫은 오늘, 부엌과
립스틱과 우아한 옷이 귀찮고 몸도 귀찮았다
사랑이 텅 빈 추억의 골방은 비에 젖는다
비오고 허기지면 푸근할 내 사내 체온 속으로
가뭇없이 꺼지고 싶다는 공상뿐인 내가 싫다
충치 같은 먼 사내는 그만 빼버리죠 아프니깐
당신도 남자인 사실이 고달프구요
인간인 것이 참 힘든 오늘 함께 산짐승이나 되어
해지는 벌판을 누비면 좋겠지만
인간이라는 입장권을 가졌으니 지루한 제복을 넘어
닫힌 책 같은 도시와 사람 사이에서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응시하고 고뇌하고 꿈꾸며 전투적으로 치열하렵니다.
2
저는 고요히 불타는 구두를 신은 여자가 좋습니다
실존의 화면을 꽉 채우는 여자 뭔가 대륙적인 여자
전혜린, 바흐만, 섹스턴, 베아트리체 달, 아자니, <적
그리고 사랑이야기>의 레나올린, 제니스 조플린, 프리
다 칼로, 그리고 익명의 불타버린 여자...
묘지로 가기 전의 흐뭇한 식사죠 대리만족의 기쁨
덧없을지라도 각성을 줍니다.
그들의 운명 그들의 영화는 왜 비극으로 끝나나요
당신은 인생께 뭘 기대하나요
지구폭탄을 위해 뭘 하시나요
제가 그리운 분 손 들어보세요 파리채만 손 드는군요
당당하고 기품있는 신한국여성으로
떠나기 전에 한계령을 따라 부릅니다
파스처럼 쑤시는 브래지어를 벗고
빈몸뚱이 저를 그립니다
자유로운 영혼과의 상봉이 그리우니까요
그래고 지겹게 믿고 희망하는 것은 무얼까요
<사랑은 죽음과 하나>를 씁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있을 때 비로소
나도 존재합니다
그것은 빨간 바위에서 뛰어 내리고 싶고
맹목적인 충동이겠죠
내가 너의 뺨을 만지면 나를 살게 하는 힘
서로를 잃지 않으려고 깨어있게 하는 힘
그래, 잃는다는 것은 죽음만큼 견디기 힘든 것
삶은 지겹고 홀로 괴롭고 잃는다는 것을 견디는 일
못 견디는 자, 진흙과 흰꽃을 먹으며
바다로 걸어가고 남은 자는
그가 남긴 가장 정겹고
슬픈 그림자를 안고 한없이 무너지는
바닷가를 배회하며 흘러갑니다.
불타는 구두가 싸늘한 눈보라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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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초록 말을 타고 문득
신현림
돌아본다
세월의 넝쿨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산
여전히 검다
산은 구겨진 땅에 욕된 얼굴들을
쏟아내고 흐린 빛을 깨문다
폐 속에 이끼를 뜯어내고
나는, 초록 말을 꺼내 탄다
하늘은 멀고 갈 길이 아득할수록
지상은 연한 환희로 가득 차 보인다
자주 늘어나는 목에선
우울의 가래가 튀어나온다
사람마다 지르는, 길고 축축한
비명에 뜨거워지는 철로변에서
얼마나 격렬히 끌어안아야 하나
이 죽음의 민둥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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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키스 키스 키스
신현림
떠도는 말이 부딪쳐 상처와 이별을 만들고
따뜻한 수증기로 스미면 마음의 키스가 되지
키스, 키스, 키스! 번역해서 뽀뽀는 얼마나 이쁜 말이니
삶이 아프지 않게 시원하게
말은 사려 깊은 타월이 돼야지
매순간 모든 이로부터 버려질 쓰레기까지
뽀뽀하는 마음으로
"네 일은 잘 될 거야 네 가슴은 봄 바다니까"
인사하는 바로 그것
삶이 꽃다발처럼 환한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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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행복
신현림
행복은 행복하리라 믿는 일
정성스런 손길이 닿는 곳마다
백 개의 태양이 숨쉰다 믿는 일
그리운 사람들을 부르며
소처럼 우직하게 일하다 보면
모든 강 모든 길이 만나 출렁이고
산은 산마다 나뭇가지 쑥쑥 뻗어 가지
집은 집마다
사람 냄새 가득한 음악이 타오르고
폐허는 폐허마다 뛰노는 아이들로 되살아나지
흰 꽃이 펄펄 날리듯
아름다운 날을 꿈꾸면
읽던 책은 책마다 푸른 꿈을 쏟아 내고
물고기는 물고기마다 맑은 강을 끌고 오지
내가 꿈꾸던
행복은 행복하리라 믿고
백 개의 연꽃을 심는 일
백 개의 태양을 피워 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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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혼자 사는 일
신현림
일어설 수도 없이
마음은 가랑비처럼 부서져 내린다
꿈도 희망도 없이
헤매던 맨발은
죽음 가까이 아주 가까이
저녁 강 따라 흘러간다
먼 창가 흰 등불 비쳐나면
환한 웃음 메아리치는
아늑한 집이 그리워
쓸쓸한 내 손 잡아줄
당신이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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