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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에 유실된 [효종실록] 권지20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37)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꼭 백 년 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59분 일본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중부에서 사가미만(相模灣) 동부, 스호(房總) 반도에 걸친 일대를 진원지로 한 대지진이 일본 간토(關東) 지방을 엄습하였다. 지진의 진도는 7.9였다.
마침 그때가 점심시간이었기에 지진이 일어나면서 대화재가 발생하였고, 피해는 남간토 일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시즈오카(靜岡)와 야마나시(山梨) 두 현의 동부에까지 미쳤다. 첫 지진 이후 5일 오전 6시까지 여진(餘震)은 936회에 이르렀으며 해안지대에서는 해일의 피해도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순간 전화가 불통하였고, 교통기관은 파괴되었으며, 수도와 전기도 끊겼다. 도쿄에서는 대화재가 일어나 관청가 일부와 가옥 밀집지대를 태우면서 9월 3일 새벽까지 계속 연소하였다. 이 대화재로 인하여 기온이 상승하여 도쿄(東京)의 밤 기온이 46℃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동경제국대학에 기증하였던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의 대부분이 불에 탔다. 일제는 이런 와중에서 민심 악화를 우려하여 조선인 폭동설을 조작 유포시켜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시킨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도록 하였고, 자경단과 군경(軍警)이 합세하여 9월 2일부터 6일까지 수많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 23,000여 명 정도를 무차별 학살하였다.
2. 오대산 사고의 『조선왕조실록』
원래 오대산 사고는 1606년(선조39) 경에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본을 제외한 나머지 실록이 모두 소실되자 조선왕조는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전주 사고본을 바탕으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4부를 재간행했다. 그리고 강화도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지에 사고를 새로 건축하여 서울의 춘추관 사고와 함께 5곳의 사고에 실록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당시 실록을 재간행할 때 4부 중 3부는 정본(正本)으로 인쇄했지만, 전란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과 종이의 부족으로 인하여 나머지 1부는 정본 인쇄를 하지 못했다. 이에 조선왕조는 최종 교정쇄본을 장정(裝幀)하여 정본을 대신하도록 했는데, 이 교정쇄본이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었다. 따라서 오대산 사고본 실록 중 임진왜란 직후에 재간행한 태조~명종실록은 교정쇄본이고 이후에 소장된 선조~철종실록은 정본이다.
관동대지진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에도 막대한 피해를 줬다. 일제에 의하여 약탈당한 많은 문화재가 불에 타 사라진 것이다. 특히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다가 191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이관됐던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대부분이 이때 소실(燒失)됐다.
관동대지진 시에 화를 면한 오대산 사고본 실록 중 27책이 1932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오대산 사고본 실록 27책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후 일본에 남아있던 오대산본 실록 47책이 2006년에 환수되어 2007년 2월 26일자에 국보로 추가 지정되었고, 이후 2017년 11월에 필자에 의하여 환수된 『효종실록』 권지20, 1책이 2019년 6월 26일자로 국보에 추가 지정되어 최근까지 75책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며칠 전인 11월 12일 자에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오대산에 개관하여 이관되었다.
3. 『효종실록』 권지20과 만나다
『효종대왕실록』 권제20. [사진 제공 – 문화재청]
이제 2017년 11월, 필자가 입찰하여 환수한 『효종실록』 권지20, 1책에 관한 입수 전말(顚末)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필자는 지난 20년 이상을, 해마다 11월에 개최하는 ‘동경고전회’의 ‘고전적전관대입찰회(古典籍展觀大入札會)’에 참여하여왔다. 동경 모 서점의 S 사장은 지난 20여 년간 나의 오랜 입찰 대리인이었고, 그는 해마다 10월 말이면 입찰회 목록을 내게 보내왔다. (금년에도 수일 전에 2023년도 목록을 받았다.)
2017년 11월초에 받은 목록에는 1091번으로 『조선왕조실록, 효종대왕실록 권지20』 1책이 올라있었다. 일반 공개는 11월 17~18일이었고, 입찰일은 19~20일이었다. (금년에도 일정이 2017년도와 같다)
나는 17일 한국의 수집가 K씨에게 전화하였다. “효종실록 원본 1책이 동경 경매에 나왔습니다. 낙찰가에 대리인 경비 10%와 제 수수료 및 경비로 10%만 얹어 주면 입수하여 전달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구입을 권유하였다. 한국의 수집가 K씨는 나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나는 18일 아침에 나리따를 향하여 출국하였고, 오후 2시쯤 예년과 같이 동경고서회관의 입찰회 현장을 찾았다. 먼저 1091번을 찾아서 혹 과거에 실물대(實物大)로 나온 영인본이 아닌가 확인하였다. 원본이었다. 나의 오랜 대리인을 만나 내정가를 탐색하여보니 일화 500만 엔에 나왔다고 한다.
동경고전회 입찰회는 회원만이 입찰이 가능한 구조이다. 그래서 대리인이 필요하다. 18일 오후에 돌아가는 것을 탐색하여보니 일화 500만 엔 호가로 동경고전회의 여러 회원이 이미 주문을 받은 상태였다.
나는 한국의 K씨에게 급히 전화하여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 효종실록은 무조건 잡아야 하겠습니다. 중국인들도 입찰 주문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 놓치면 영영 사라집니다. 호가가 일화 500만 엔인데 호가를 일화 1,000만 엔까지 놓겠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10%의 낙찰 경비도 포기할 생각으로 나의 오랜 입찰 대리인 S 사장에게 “1,000만 엔이 넘어도 좋습니다. 얼마가 나오던 매입해 주십시오”라고 긴히 부탁해 놓고, 19일 항공편으로 귀국하였다.
20일 입찰을 마감하면, 21일 동경고전회의 회원들이 모여 입찰을 집계하고 발표한다. 입찰을 집계한 결과 일화 1,000만 엔을 훨씬 넘겨서 내게 낙찰되었다.
4. 반입을 시도하다
나는 21일 낙찰을 통보받고, 22일 오전에 일본 동경으로 출국하였다. 그날 오후 2시에 실물을 선(先) 인도(引導) 받았고, 대금 지불 기일을 11월 28일로 약속하였다. 수십 년간 S 사장과는 오랜 거래로 인하여 항시 나는 낙찰받은 미술품을 선 인도받고 한 달 내 후불로 결재하여왔다. 그러나 이번만은 1주일 내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국내의 수집가 K씨에게 전달하는 대로 지불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S 사장에게 청구서를 받은 후, 하루를 동경에서 체류하고 다음 날 심야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나는 억대 금액의 송금 근거를 위하여 반입을 분명히 밝히어야 했기에, 24일 오전에 인천공항세관에 수입품 신고를 하려고 하니. 인천공항세관에서 문화재감정관실 감정관을 부르자 감정관 2인이 세관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세관에 반입 사실이 보도되지 않도록 비공개를 요구하며 문화재청에 보고하였고, 문화재청에서는 나에게 전화했다. “인수증을 써줄 테니 감정관에게 인도해 주십시오”라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며, “문화재청이 압류하려 할 경우에는 아직은 이 책이 보세구역에 있어 법적으로는 해외에 있는 것이므로, 원위치로 환원하겠다”라고 통보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수집가 K씨에게 전화하여 상황을 설명하였다. “선생님은 절대 노출하지 않습니다. 제 선에서 해결하겠는데, 반입할 때 인수 의사는 변함이 없으십니까?” K씨는 이를 곧바로 문화재청 지인에게 물어본 모양이다. 즉각 답변이 왔다. “포기하겠습니다.”
25일 아침에 나는 인천공항세관 현장에 수입신고 철회서를 달라고 하니까. 철회서가 없다고 한다. 내가 출국하며 찾아 나갈 것을 염려한 “문화재청에서는 『효종실록』을 내주지 말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였습니다”라고 확인하여 준다. 그래서 철회서가 없다고 한 것이다.
나는 그 즉시 수입 철회서를 임의로 만들고 팩스 번호를 물어 팩스로 넣었다. 철회 의사가 담긴 문건을 팩스로 넣으면 재판에서는 일단 접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관에 유치한 것은 아직 국내로 반입한 것이 아니다.
5. 문화재청의 압력과 대결
27일, 문화재청 담당자와 문화재위원이 인천공항세관으로 가서 실물을 확인하고 감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날 옭아낼 법률 검토에 들어갔다. 나 역시 일본 법률과 한국에서의 판결문 조사에 들어갔다. 나는 합법적인 공개된 시장에서 선의의 취득을 하였으므로, 그 경우 분명 소유권은 내게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28일이 대금 지급을 약속한 기일이었다. 문화재청과의 문제로 반입이 지체되어 송금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일본으로 전화하여 11월 중으로 방일을 약속하며 며칠을 미루었다. 다시금 수집가 K씨에게 물품 인수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재삼 확인하였다.
30일, 저녁에 인천공항세관에 들려 세관 측 입장을 청취하였고, 심야에 일본 동경에 도착하여, 12월 1일 오전 11시에 나의 오랜 대리인인 S 사장을 면담하고 12월 12일~13일 중으로 대금을 지불하겠다며 연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S 사장은 “전화로 말해도 되는데, 그 일로 왔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렇습니다. 얼굴 보며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원칙이라서요.”
세관 유치물은 장기전으로 가면 안 된다. 세관에 오래 두면 세관에서는 임의로 처분할 수 있어 속전속결 해야 한다. 그러나 문화재청에서는 나의 입국 시점을 파악하고 인천공항세관 인근에서 무단 압류하려고 잠복해 있을 우려가 있어, 나는 유치물을 찾지 않고 일단은 집이 있는 제주시로 귀환하였다. 귀가 후에 문화재청에서 전화가 왔다. 만나자고 한다. “제가 7일 아태재단 행사에 참석하려고 상경합니다. 동교동으로 오세요.”
7일 오후 2시에 문화재청 단속반 소속 직원 2인이 동교동 김대중도서관 인근에 와서 전화했다. 토론회 청강 중인 내가 나가자 그들은 나를 “차에 타세요”라고 한다. 마침 현장을 지나가던 김종규 회장이 이것을 보더니 소리를 친다. “어이, 이양재를 잡아가는 거야?” 단속반 과장이 답변한다. “아닙니다. 부근 커피숍으로 가서 대화할 겁니다.”
김대중도서관 뒤편 커피숍에서 나는 문화재청 직원에게 “저 안에 전⸱현직 장관 6명이나 있는데. 그분들 토론회 청강중에 나왔어요. 빨리 끝 냅시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법률을 검토하니 소유권은 이 선생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매도하면 장물 유통이 됩니다. 효종실록을 국가에 매각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며 요구한다.
이에 나는 “동경제국대학 구장본 효종실록 권지20은 관동대지진 이후 이번에 처음으로 존재가 확인된 책이고, 일본이나 국내에서 도난품이나 유실물로 공고된 사실도 없습니다. 경매에 오른 사실조차 문화재청은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 책을 영영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합법적으로 취득해 온 것도 문제가 됩니까? 나는 국가가 아닌 월정사나 조계사 등 다른 공익 종단에 매각하는 것도 검토하겠습니다. 그러다 정 안되면 국회 정각회나 언론을 동원하여 국민 모금한 후 적당한 박물관에 기증하겠습니다”라고 항변(抗辯)하였다. 이러한 일은 1945년 해방 후 2017년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6. 반입
12월 초에 모 경매사에 국가 박물관이 매입하지 않으면 우선 매도권을 주는 것으로 협의하고, 책값과 제반 경비의 대출을 요구하였다. 모 경매사는 나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였다. 다행스럽게 12일 오전에 대금을 지급하겠다는 S 사장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반입을 할 때 문화재청에 통보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한 나는 12월 11일 새벽 6시를 반입 시점으로 잡았다. 새벽 6시가 좀 넘어서 인천공항세관을 찾아가 기습적으로 반입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모 경매사에 인도하였고, 반입 과정과 소유권을 분명히 밝혔다. 모 경매사는 즉시 1억3천만 원을 내게 송금하였고, 나는 그날 오전에 S 사장에게 송금하였다.
송금한 돈이 동경에 도착하는 날이 14일이기에, 나는 다시 13일 오전에 동경으로 출국하여 오후 2시에 S 사장을 면담하며 송금 사실을 확인시켜준 후, 조선왕조실록의 동경제대 구장본이 더 남아있는가 확인을 부탁하였다. S 사장은 “더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한다. “더 찾아 주십시오”라는 부탁을 남기고, 나는 14일 오후 항공편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나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화하여 모 경매사에 맡겼으니, 매입할 것을 권유하였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는 고궁박물관과 협의하겠다고 하였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에는 잔여 예산이 없고, 2018년 2월 중순 이후에야 예산 지출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경매에 올려야 자신들이 응찰하여 사들이는 것이 원활하다”라고 조언을 한다. 그러나 경매에 올리면 경매사나 필자나 장물 유통에 걸려들 수도 있다. 이에 나는 문화재청 단속반에 “국가 기관은 올해에 불용 예산이 없다”라는 사실을 문자로 통지하였고, 그러한 사실을 모 경매사에도 알려 주며 박물관과 협의하여 매도하는 방안을 상의하였다.
7. 반입 후 이야기
2017년 12월 말, 국내의 다른 모 경매사에서 『효종실록』 권지20의 국내 유입 사실을 알고, 누가 매입을 해 왔는가를 고서업계에 수소문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2018년 1월 3일, 영남지역의 모 불교종단에서 대리인을 통하여 가격을 제시하며 매입 의사를 전해 왔다. 1월 13일, 영남지역의 모 불교종단에서 대리인을 통하여 매입 의사를 재차 전해왔기에 매도권은 모 경매사에 있다고 통지하였다.
결국 이 책은 2018년 국립고궁박물관이 매입하고 공개하였고, 그 『효종실록』 권지20은 올해 11월 12일 자에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오대산에 개관하면서 이관되었다.
그리고 2018년 가을에 내가 중국의 ‘북경보리박매유한공사’에 중국 미술품을 출품하러 가니, 고적선본부 경리가 말한다. “앞으로 그런 책 나오면 우리 회사에 출품해 주세요”라고 한다.
그런데 2018년 문화재청은 동경제대 구장본에 대한 분실 공고를 내었다. 선의의 취득이더라도 국내로 들여오면 끝까지 가겠다는 의도이다. 이런 상황이면 아마추어 수집가들은 사들여 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현지에서의 합법적인 거래이고 선의의 취득이 인정된다면 두 번이든 세 번이든 사들여 오겠다. 그리고 똑같은 과정을 밟겠다.
우리 시대의 문화재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그 문화재에 대한 이력(履歷)을 남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전말을 여기에 남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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