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달 화첩
이상구
다랭이논 쟁기질로
거품 물던 황소처럼
고단했던 과거가
땀을 훔친 풍경처럼
아버지 굽은 등짝에
내려앉은 노을, 꽃
시경詩境을 읽다
오늘 또 꿈틀대는 방랑벽 짊어지고
봄 오는 남해대교 좌표로 설정한 채
불현듯 보고 싶었다
비파나무 춤사위
해풍에 나풀대는 시금치밭 그 너머로
쾌속선 포말처럼 갈매기의 군무처럼
무작정 내달리고 싶은
욕망을 짓누른다
바다가 펼쳐놓은 햇살들의 화폭 속에
흘러가는 흰 구름 세필로 그려넣고
지겟길 다랭이 마을
새파랗게 붙안은
봄, 우포
에굽은 바람의 길 나이테로 감추었나
속병 난 내 몸에도 그예 봄은 찾아와
자운영 뒤쪽에 앉아 가려운 등 긁는다
왕버들 늘어지게 둘러앉은 물가에서
실바람 끝을 물고 술렁이는 나절가웃
넓은 품 그늘막처럼 사람들 반짝인다
햇살이 풀어놓은 물빛 한참 바라보며
뻐꾹새 한 마리 길 밖으로 날려 보내
하늘의 속살을 물고 풋잠 속에 빠진다
쉰,
ㅡ욕망을 채록하다
팔월 땡볕 속에서
무성해진 호박 넝쿨
먼 하늘 더듬는다
전봇대 끌어안고
만 볼트
오르가슴에
감전이 되고 싶어
불면의, 서책
저항하기 위해서 풀은 저리 웃자랐나
뿌리째 뽑혀지는 절박한 순간에도숨겨둔 짙푸른 함성사방에다 흩뿌려
수정되지 않은 밤 온몸에 저장한 채묵정밭 갈아엎을 밝은 날을 꿈꾸면서가난한 들판에 앉아길 하나를 새긴다
물려받은 꿈 없어 곱씹은 생이지만흙 속에 묻혀 있는 서러움을 떠올려마지막 고백인 듯이꽃대 밀어 올리는
여름 별사別辭
또 하루 뭉실하게 떠오른 꽃대처럼
거친 내 숨소리를 숭어리에 숨겨놓고
흘러온 구름의 시간
평상 위에 펼친다
말라버린 상처를 지문으로 매만지며
퇴고한 지난날을 다시 한번 살핀 뒤
요란한 새들의 질문
침묵으로 답한다
어질한 생각들이 나비처럼 날아가면
한세상 쓰다듬어 평평해진 마당귀에
오래된 돌확 하나를
달처럼 앉혀놓고
달맞이꽃 보법
누런 강 허리춤을 감아올린 저 보름달
장마가 남겨놓은 웅덩이를 훤히 비춰
긴 방천 따라가면서 젖은 세상 귀 밝혀
풀 속에 감추어둔 그림자를 끄집어내
얼룩진 살림살이 다시 닦는 풀벌레들
늦도록 수런거리다 허공 훌훌 건너네
가냘픈 아랫도리 한 움큼 또 뜯어먹고
허기진 여름밤을 달빛으로 말아 올려
없는 듯 솟구쳐 올라 고요하게 흐르는
월곡리 세한도
어둠의 숨소리를 껍질마다 쟁여 놓고
또 하루 까치발로 기웃대는 세상 풍파
불어온 바람이 질문 솔 향기로 답한다
읽다가 덮은 시집 다시금 짚어가며
퇴고 못한 내 인생 행간 속에 들앉혀
떠오른 물음표들을 온몸으로 감싼다
해장술에 취해버린 빈속을 다독거려
들떠오른 생각들 깊이 읽은 하늘처럼
뼈 시린 바람의 보폭 새김질하는 남자
여름 장바우
빗소리 음표들의 높고 낮은 장단 속에
산허리 껴안으며 는개가 서성거린다
내 불면 스케치하듯, 지난날 운필하듯
젖은 머리 털어내는 강바람 몸짓 따라
맹꽁이 옹알이가 음 고른 시간을 안고
어머니 은비녀 같은 감자꽃 피어났다
고여서 범람하는 사람들 욕망 끝에서
지난날 헛꿈들이 눈을 뜬 오후 2시
- 이상구 시인의 시조집 『윤달 화첩』 (2023.10.도서출판 도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