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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곡-윤도현 밴드와 박정현
1.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들었오.
2.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 아가씨
가신님은 그 언제 그 어느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작사 한산도. 작곡 백영호. 이미자 노래>
"동백아가씨 이후에 이미자 있고 이미자 이후에 트롯트 있다"
고 할 정도로 우리 가요사에 있어 동백아가씨
만큼 헤일수 없이 많은 사연을 그 속에 보듬고 있는 노래도 드물다.
그 자체로 곡절많은 현대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노래.군사정권하에서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여야 했던 생채기를 간직한 노래.해금으로 사회에 불기 시작한 민주화바람을 실감케 했던 노래.
동백아가씨가 떠올리게 하는 단상들이다.
또 이노래는어려운 가정을 끌어가던 아미자가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취입한 노래다
1964년9월에 나온 이 노래는 이듬해까지 무려 1O만장이 넘는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당시의 1O만장은 지금의 1백만장보다 더놀라운 수치다.
하루 몇백장에서 많게는 몇천장까지 수요가 몰렸지만 수동식기계로 하루에 3백~5백장을 겨우 찍어내던
지구레코드로서는 더이상감당할 수가 없었다.
〈동백아가씨가 공전의 히트를 누리게 된 것은 우선 그녀의 노래가 우리 민족의 정서에
잘 어울린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노래는 가창 양식과 가사와 선율 화성 등 여러면에서 한국화에
상당한 성공을거두었다.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초 국내에 유입된 일본 엔카는 단순히 노랫말만 바뀐채 불려졌다.
그러나 〈동백아가씨〉는 국내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게다가 우리의 전통민요나 판소리같은
가창양식 을 자연스럽게 도입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트롯의 원류가 일본 엔카니 아니니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음악전문가들의 책상위에서나
다루어질 문제일뿐 노 래를 듣고 즐기는 서민들에겐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대중음악은 말 그대로 대중의 슬픔을 대신, 혹은 함께 울어주고 대중의 기쁨을 함께 웃어주면 그만이다.
유행가를 앞에두고 예술성이 떨어지느니 상업성에 너무 치우쳤느니 갑론을박하는건 지식의 사치일줄모른다
〈동백아가씨〉는 그런 면에서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성공한셈이다.
이 노래를 부른 이미자는 또 어떤 가수인가 우선 그녀는 잘생긴외모도 아니다.
그렇다고 매너가 세련된 것도 아니다. 어쩌면 노랫가락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게 간단한 몸짓도 좀 보이련만
그것마저도 없다.
그러나 그녀의 외모에는 삶에 대한 갖가지 애환과 그애환에서 배어나는 애잔한 연민 같은것이 자리잡고 있다.
슬픈 듯 따뜻한 눈빛, 부끄러운 듯 다소곳하게 움직이는 입술.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떠나버린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인, 부모를 그리는 효심, 부모잃은 동생들을 돌보는 누님의 모습이다.
그녀 얼굴엔, 그녀 목소리엔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가장 적절한 삶의 편린들이 하나 가득,그리고 잔잔히 고여있다.
〈동백아가씨〉가 아마도 요즘처럼 tv며 콘서트며, 게다가 ·CD까지 판을 치는 세상에 태어났다면
그만한 성공올 거두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미자의 얼굴 덜 세련됨으로는 말이다.
이미자의 목소리는 무기다. 목소리의 위력이 가장 잘 살아나는건 역시 라디오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나오기 직전 민간 라디오 방송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결국
〈동백아가씨〉 인기를 부채질했다.
64년 7월 동명영화(감독 김기.주연 엄앵란 신성일)의 주제음악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동백아가씨는
부산과도 각별한 인연을 간직한 노래로 기억 된다.작사자 한산도(본명 한철주)씨와 작곡자 백영호씨는 각각 부산
부평동과 서대신동이 고향으로 이곳에서 해운대 엘레지 (58년)를 같이 만들어 발표했으며,
영화 동백아가씨 역시 부산 다대포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 다대포에는 동백이 많이 피었다고 한다. 날이 좀더 추워져 두터운 외투차림의 한겨울이
오면 동백은 피빛보다 진한 그 농염하고도 뇌쇄적인 빛깔로 흐드러지게 핀다.
어째든 이런 동백꽃이 피어 밟힐 정도로 많았다던 다대포는 참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간직한
부산의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절경이자 생태자원의 보고이다
대부분 꽃은 질때 꽃잎이 한 장 씩 떨어지나 동백꽃은 꽃 전체가 통째로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짓밟힌 순결을 상징하며 노래처럼 사랑에 배신당한 비련의 여인과 비유되기도 한다.
프랑스 뒤마의 소설 춘희(椿姬)는 원래제목이 '동백꽃을 들고 있는 부인'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너무나 유명해진 비올레타가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으로 보아
서양인 들에게도 동백은 역시 비극의 꽃이었다.
동백나무는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늘푸른나무로서 다른 나무들이 활동을 멈추고 겨울넘기기에 여념이 없는
1-2월에 벌써 진초록 바탕에 타는 듯 붉은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래서 동백꽃은 예부터 시조나 노래가사의
단골메뉴이었다. 멀리는 동국이상국집에 동백화(冬栢花)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있으며,
고려 충숙왕 때는 채홍철이란 이가 동백나무 노래를 지어 죄를 면하였다 한다.
조선왕조 때는 동백 혹은 산다화(山茶花)라 하여 뭇 시인과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근세에는 미당 서정주와 신석정의 시에서 동백꽃이 상징하는 슬픔과 아픔을 읽게된다.
동백섬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30년이 넘게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던 고향의 정서가 노래속에 녹아있음을
작곡가 백씨도 부인하지 않는다.30년이 넘게 그렇게 오랜동안 우리 가슴에 머물고 있는 노래이지만
동백아가씨 의 작곡에 걸렸던 시간은 놀랍게도 2시간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 동백아가씨 의 김기 감독이 한산도씨에게 작사를 의뢰한 것은 64년 4월.영화의 줄거리를 압축한 가사가
퇴고를 거쳐 작곡가 백씨에게 넘겨지는 순간 영화제작사에서 곡을 받아든 백씨는
거침없이 악보를 오선지에 옮겨놓기 시작했다.
몇차례 기타를 튕겨보면서 떠오르는 악상 그대로를 정신없이, 그러나 만족스럽게 완성시켜놓고 보니
2시간만에 옥동자 동백아가씨가 완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곡을 발표하기도 전에 제목이 촌스럽다며 우려를 나타내던 작곡가 선배들의 예상대로 지구레코드사에서 판을
내놓은 이노래는 처음에는 별 빛을 보지 못했다.당연히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음반에서도 동백아가씨는
타이틀곡을 최무룡이 부른 영화주제가 [단둘이 가봤으면 ]에게 넘겨주고 뒷면에 자리하게 되었다.
작곡가 백씨가 직접 레코드 5장을 옆구리에 끼고 다방을 돌아다니면서 DJ에게 애걸복걸하면서 한번씩 틀던
이노래는 그러나 좌중의 분위기를 압도하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급격히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서울 명보극장에서 별 반응을 얻지 못하고 간판을 내려야 했던 영화 동백아가씨도 을지극장으로 상영장소를
옮겨가면서 노래와 더불어 매진사례를 거듭해 나갔다.당시 화폐가치로 3백30원이라는 결코 적지않은
금액이었지만 동백아가씨 L.P판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레코드사 앞에는 2일이 넘게 기다려서야 겨우 한장의 L.P판을 구입하고도 만족스럽게 돌아서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영화와 음악이 동시에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빅히트를 기록하던 동백아가씨 음반이 몇장이나 팔려나갔는지는
정확히 집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의 지구레코드사 사장 임정수씨가 KBS 일요스페셜 에서 밝혔듯이 2백만장은 훨씬
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90년대 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김건모의 음반이 2백만장이 넘게 팔려 공식적으로 한국최고의
음반판매량으로 기록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60년대 당시 동백아가씨 의 인기가
어느정도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거칠것없이 인기의 최정점에 자리하던 동백아가씨 는 음반발매 2년만인 66년에 곡이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방송금지를 당하게 되고 70년에는 판매금지까지 당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가요관계자 4명과 클래식 음악전공자 6명으로 구성된 당시의 심의위원회가 판매금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실로 다양했다.
처음에는 가수 이미자의 창법이 소위 굴리는 식의 왜색이라고 했다가 이어 가사가 저속하다는 이유로,
급기야는 군사정권 당시의 최대무기인 색깔논쟁 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클래식음악전공자들의 대중가요 천시와 동백아가씨 의 거침없는 독주에 타레코드사가 담합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은 어쨌든 불후의 명곡을 방송금지 이후 21년동안이나
공식적으로 접할 수 없는 불행한 시대의 사생아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 여기서 왜 방송금지를 당했는지 직접 이미자 본인에게 들어보자
「동백 아가씨」가 세상에 나온 지 불 과 일년 만에 십만 장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大히트를 치는
도중에 금지곡 으로 묶였을 때 저는 놀랐어요. 어떻게 이 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리둥절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1967년에 「섬마을 선생 님」이 묶인데 이어 1969년 「기러기 아 빠」까지 금지곡으로 묶였을 때는
「아, 날 더러 노래를 하지 말라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죽고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방송도 금지되고, 음반 제작과 판매도 금지되 고…. 누군가가 목줄을 죄는 기분이었어요. 몇 달 동안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 지 않았습니다. 가장 한심한 것은 금지 이 유가 분명하지도 않고 사리에 맞지도 않다 는
점이었어요. 비록 저의 노래 중 가장 크게 히트한 노래 세 곡이 모두 금지곡으로 묶이기는 했으나
무대에서는 여전히 저의 인기가 上終價(상종가)였습니다.
무대에 서 면 가는 곳마다 이들 금지된 곡들을 부르 라고 성화예요
저는 걸리거나 말거나 불렀습니다. 교포들 이 와서 판을 구해달라, 아니면 녹음 테이 프에 복사라도 하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사 람들이 부지기수였어요. 이렇게 잊지 않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수 의 생명을 끊을 수도 있는 딱지를 달고서 도 지금까지 저는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수들의 생명은 의외로 短命(단명)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22년 만에 해금된 「동백 아가씨」를 들고 데뷔 30주년 기념공연으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서니 그 많은 팬들이 기립하여 함 께 노래를 불러 주셨어요. 팬들이 있는 한 노래는 사라지지 않고,
가수도 죽지 않습니 다. 그 때 저는 「이 힘으로 내가 살아왔구 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동백 아가씨」가 금지곡으로 묶인 이 유는 무엇입니까?
일설에 의하면 당시 정 부가 경제개발 자금 마련을 위하여 국민들 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회담을 성사시키고,
그에 대해 격렬한 반대 데모가 일어나자 反日(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 희생양을 찾던 중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李美子씨의 애조 띤 노래들에 대해 「왜색」이라는 올가미를 씌웠다고들 합니다만.
『그런 얘기들도 합니다만 사실과 달라요. 그것은 모든 문화적 현상과 사건을 정치적 음모의 시각으로 보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 들이 갖다 붙인 추측일 뿐입니다.
그 증거 로 정부 고위층에서는 「동백 아가씨」가 금지된 곡인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朴正熙 (박정희) 대통령은 후쿠다 일본 수상을 초 청한 자리에서 「동백 아가씨」를 청해 듣 기도 했어요.
만약 이 노래를 「왜색」이라 는 이유로 금지한 사실을 국가원수가 알고 있었다면 일본 수상 앞에서
이 노래를 부 르게 했겠어요? 다른 정부 고위층도 비슷 했어요.
[여기서 우리는박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른사람은 이미자 본인 자신이라는 것을어렵사리 짐작할수 있다]
「섬마을 선생님」은 1967년 홍종 철 문공부장관으로부터 작곡상, 가창상을 받은 작품이었어요.
「동백 아가씨」 뿐만 아니고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 빠」 등 전성기의 제 노래 세 곡이 히트할 때마다
재갈을 물린 것은 「정치적」인이 유가 아닌 상업적인 이유, 즉 지구레코드사 의 대중가요 시장 독점을 시기한
다른 레 코드업계의 장난이었어요. 한 마디로 라이 벌 회사들의 꾸밈이었지요.
금지」는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방송윤리위원회 같은 공공기관의 이름으로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음모가 때 마침 불었던 한일회담의 역풍을 타고 「왜 색」이라는 도금칠을 한 거지요.
지금은 상 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그런 식으 로 일을 꾸미는 것이 통하는 시대였어요』
─방송과 레코드 제작 판매를 일시에 모두 금지시킨 것입니까?
『처음에는 방송만 금지하고 레코드 제작 판매는 금지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방송을 금지해버리면
노래가 죽을 줄로 알았는데 레코드 판매 열기는 더 뜨거워져가니 추가 조치로 레코드 판매까지
금지시켜버린 거예요』
음반 제작업계의 라이벌社(사)라고 했는 데 어느 회사인지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알고는 있지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와서 그런 것을 새삼스레 들출 필요가 없 으니까요.
얼마 전 일본 NHK에서 한일 문 화개방에 앞서 한국 대중문화를 소개하는 40분짜리 다큐멘터리 프로를 만들면서
저 에게 와서 인터뷰를 해간 일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집요하게 묻는 것도 「동백 아가 씨가 한일회담의
逆(역)작용으로 정치적 희 생을 당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지요』
「동백 아가씨」를 「왜색」으로 모는 데는 그럴 만한 개연성이 있다고 보십니 까?
일본의 엔카와 닮았다고 하는게 그 이 유인데, 원래 태생적으로 우리나라의 대중 가요,
그중에서도 트로트는 일본 엔카와 끊 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독립적인 특징을 가지고 성장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엔카와 닮았다면 우리나라 트로트 전체가 닮았 다고 할 것이지 그중에서 유독 李美子의
「동백 아가씨」만 닮았다고 우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노래라는 것은 국경을 넘는 언어인데 서로 닮기도 하고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합니다.
특히 이웃 나라일 경우 더하지요. 새삼스레 「왜색」을 문제 삼는다면 오늘날 넘쳐나 는
「洋色(양색)」들은 다 어떻게 물리칠 작정입니까.
늑대가 양을 잡아먹을 구실을 만들 때처럼 구실을 위한 구실이었습니 다』
「섬마을 선생님」이나 「기러기 아빠」 는 무슨 구실로 금지 당했습니까.
「섬마을 선생님」은 표절이라는 이유였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네 소절 이상 유사하면 표절로 판정하는데
이 노래는 끝부분이 일본의 「국민 가수」라 할 만큼 유명했던 미조라 히바리의 무슨 노래를 표절했다는 거예요
. 이 곡은 朴椿石 선생님의 곡이었는데 朴선생님은 일본에 가서 미조라 히바리 에게도 여러 개의 곡을 주어
취입할 정도 로 한일 양국에서 왕성한 활약을 할 때였 어요.
문제가 된 이후 朴선생님이 일본에 가서 찾아본 결과 미조라 히바리가 부른 곡과 세 소절이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미조라 히바리가 그 노 래를 부른 시점이 저의 「섬마을 선생님」 보다 뒤였어요.
그러니 표절 시비를 하려면 미조라가 표절했다고 할 것이지 「섬마을 '선생님」을 표절작이라고 하는 것은
본말 이 거꾸로 된 논리 아니겠어요?
그러나 이런 소명 자료를 아무리 내놓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기러기 아빠」는 한창 재건 국민운동으로
「잘 살아보자」며 씩씩한 기상을 돋우고 있을 때 「너무 비탄적인 노래는 안 되겠다」는 것이 이유였어요.
이 런 식으로 당시 저의 노래는 빅 히트할 때 마다 재갈이 물리고 손발이 묶여 사형선고 를 받았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세 곡을 금지당하고도 李美子씨의 당시 인기는 정상이었지요.
방 송에서 상도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무지하게 많이 받았어요. 民放(민방)인 MBC가 연말 결산으로 실시한 10대가수상 이 당시 가요계의 최고
권위였어요. 저는 이 상이 시작되던 해부터 11년간 계속 10 大가수에 선정됐고, 그중 세 번은 가수왕으 로
선정됐어요. 1973년에는 특별상을 수상 했고요. TBC의 가요대상도 여러 번 탔어요.
저의 몇몇 노래를 금지해버리면 가수의 생명도 단절될 줄로 기대했겠지만 팬들의 사랑이 저를 버리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일 어나지 않은 거예요. 가수왕이 되었는데도 정작 제 노래는 인기 차트에서 빠져버리는 기이한 일이
해마다 반복됐지요. 진짜 올라 야 할 노래는 빠지고 사람만 가수왕이 된 거예요.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으니 마침내 저들도 손을 들고 말더군요.
명분상 노래를 해금해 주지는 못해도 더 이상 밟지는 않았습니다. 남들은 한두 번도 견디기 어려운 일을
세 번이나 겪었고, 게다가 개인적인 일(이혼과 재혼, 전 남편과 의 사이에 난 딸 정재은씨와의 관계 등을
말하는 듯)로 황색신문 같은 주간지들의 악의에 찬 흥미위주 보도에 참기 어려운 고통을 참아내면서
살아나왔습니다』
그 생명력은?
물론 팬들의 사랑이에요. 그것 없으면 당 장 죽고마는 것이 가수의 운명이에요』
87년부터 불어닥치기 시작한 민주화의 열기는 가요계에도 파급되어 당시한국공륜윤리위원회(위원장 이영희)
는 6.29 선언이후 첫 문화해금조치로 국내 가요 금지곡 3백82곡 가운데 1백86곡을 해제시켜 동백아가씨가
국민가요로 복귀하는 길을 터놓았다.
노래가 복권되자 판권을 소유하고 있던 지구레코드사측은 재발매에 들어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60년대
초 서민의 삶을 구슬려 달래주면서 대중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던 동백아가씨 의 향수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무명에 가깝던 가수 이미자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고 작곡가 백영호를 한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올려놓은
동백아가씨는 이렇듯 수많은 아픔과 사 연을 뒤로하고 민족의 노래로서
굳건히 우리들 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참조-박상용(노래로 세상엿보기)-글구성-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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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해설도 참고생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