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의 비유, 차유(差喩)
네이버블로그/ 부정적 감정에 대한 적절한 비유
④ 부정(否定)의 차유
‘부정’이란 기성의 권위에 대립함으로서, 현재적 의미와 질서를 파괴, 해체하고자 하는 정신과정이다. 시에 있어서의 부정은 개인·자연·사회·역사 모든 인간 영역에서 행해진다. 세계와 세계에 대한 일정한 인식, 시적 주체의 일관성마저 부정하기도 한다. 부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제멋대로 언어가 부정의 차유이다.
부조리의 고리로 가득한 세상, 이에 대응하는 시적 주체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인간 개개인의 의식 속, 자아의 역동적 실체라 할 무의식 세계는 억압(抑壓)의 잠재물들로 가득 차고 이들은 호시탐탐 투사(投射)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 분출은 무의식적 비현실성의 차원에서, 우연하게 이루어진다. 부정의 차유의 심리학적 근거는 억압과 투사의 무의식성, 무질서하고 우연한 분출과 내면의 콤플렉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의 차유’는 부정의 과정을 드러내거나 부정의 원인이자 결과인 제 3의 현실을 드러낸다. 자연 허무하고 난해하기도 하며 환상적이고 유희적인 분위기가 농후하기도 하다.
미학적으로는 ‘추(醜)의 미’와 같이 무형식성, 부정확성, 기형성 등에 관련된다. 미래파, 입체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해체주의 등등 현대 전위 시들의 핵심 전략이기도 하다.
―황지우, 「묵념, 5분 27초)
1983년에 출간된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제목만 실린 시이다. 내용은 백지인 셈.
창작 시기와 시인의 고향, 제목 등에서 유추해 보면 5·18 민주화 운동 당시의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追慕)의 마음과 지울 수 없는 눈앞이 하얀 절망의 심정을 짐작하게 한다. 시라거나 언어라거나 하는 표현행위 자체의 무기력함,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조차 용납되지 않았던 당시 권련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아니, 세상의 모든 정서와 진리에 대한 절망, 전면 부정의 허무(虛無)라 할 만하다.
이렇게 부정의 차유에는 반항적 유희적 분위기가 농후하다. 형식 파괴적이고 기형적인 언어로 현실에 대한 절망과 상실감을 표현한다. 차이의 차유와 모순의 차유가 상대적으로 현실성을 중심에 두는 데 비해, 부정의 차유는 반(反 ) 현실, 또는 비현실 환상을 내세운다.
일정한 의미나 이미지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비둘기는 날아서 너덜너덜
비둘기는 낡아서 너덜너덜
상징은 낡아서 너덜너덜
아침이면 창문마다 쓸모없는 헝겊들이 너덜거린다
비둘기는 한 마리 두 마리 늘어난다
한 마리는 쓸모없고
두 마리는 쓸모없고
세 마리 네 마리 늘어나서 쓸모없어진다
비둘기는 한 조각 두 조각 세 조각 늘어나서 너덜너덜해진다
비둘기는 상징을 띠려고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늘어난다
비둘기는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낡은 헝겊을 이어 붙인다
날개 하나에 너덜너덜이 한 조각 두 조각 세 조각
상징이 한 조각 두 조각 세 조각 누더기가 되어간다
고양이가 되어버린 한 조각 두 조각 세 조각
물고기가 될 수도 있는 한 조각 두 조각 세 조각
비둘기는 비둘기처럼 늙지 않는다
고양이는 비둘기처럼 늙을 수도 있다
헝겊이 되어버린 비둘기
낡아버린 비둘기
상징을 띠려고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이어 붙은
고양이는 낡아서 너덜너덜
―조말선, 「너덜너덜」 전문
정치, 경제, 언론, 출판, 영상, 예술 등 온갖 권력들은 이미지 조작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키워가고자 하는데, 이들의 언어는 세상을 자기 본위로 단순화해서 대중을 길들이고, 자유를 권하는 양하면서 자기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또는 의미 없는 난삽한 언어를 서로 부추기면서 그렇지 않은 인간들을 폄하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등 감추어진 폭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온갖 문화를 이용한다.
시 「너덜너덜」은 표면상 그 흔한 ‘비둘기’의 싱징성부터 부정한다. ‘너덜너덜’이라는 의태어가 ‘상징’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허물어내는 부정의 몸짓이라면, 비둘기가 한 마리에서 두 마리 세 마리로 늘어나는 것은 개별 상징이 복사되고 사회화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제에 이르는 이미지의 전개와 리듬이 세련되게 문맥을 뒷받침하고 있다.
비둘기는 헝겊이고 고양이가 물고기다. 헝겊이 된 물고기, 이어붙인 고양이다. 이 시는 기성 상징의 거부에서, 모든 언어의 의미(기어) 자체를 부정하고 문맥을 해체하는 데로 나아간다.
데리다의 차연―기표와 기의의 끝없는 차이, 기표와 기표 사이의 당연한 차이, 이로 인한 의미의 유예상태, 미결정상태, 이 시는 모든 언어의 의미가 미결정 상태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의 예를 들어 제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둘기의 상징성을 유지하려고 한 마리 두 마리 늘리는 것도 낡은 헝겊을 이어붙이는 짓에 진배없는, 텅 비었거나 쉬임없이 미끄러지기만 하는 헛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인간의 의식이란 주변과 자기를 의식하고, 심지어 의식을 의식하기도 하는데, 의식은 그 한가운데 무(無)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무의 존재―, 인간은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본질을 제조해내긴 하지만 결국은 무를 생산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무화하면서도 다시 무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인간이요 인간의 의식이다.
의식은 언제나 한때 끌어들인 과거와 현재를 무화해가며 미래라는 새로운 결핍을 맞게 되고 또 다시 세로운 것을 끌어들인다. 그러므로 무란 단순히 없음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결핍이며, 언제나 새로운 모험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허무이다. 부정 자체를 구현하는 부정의 맥락은 바로 무에 갇힌 주체의 결핍, 허무에 대한 언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허무와 해체를 시도한다고 해서, 독선과 독단의 언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독선과 독단은 제멋대로 된 전제를 세우거나 무슨 법칙 같은 것을 전제함으로써 성립된다. 그것은 의식의 결핍, 허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채워져 버린 격식의 항아리라 할 것이다.
‘차이의 차유’가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주제를 현실적으로 표현한다면 ‘모순의 차유’는 대개 보다 주관적이고 심층적인 주제를, 그리고 ‘부정의 차유’는 더욱 심층적이고 절대적인 주제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시 「너덜너덜」도 상징성 자체를 부정한다고 하나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상징의 부정, 의미의 해체라고 하는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보이고자 한다 할 것이다.
어떤 특수한 가치를 차이 나게 드러낸 언어라 해서 반드시 시적 성공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시적 성공의 여부는 모든 독선과 독단의 미몽(迷夢)에서 벗어나 어디까지나 엄정한 상호 텍스트적 검토, 문학사적 맥락과 당대의 풍토, 도덕적 감수성과 미래적 전망에 견주어보고 판단해야 할 일이다. < ‘차이 나는 시 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4. 4.21.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