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아침의 기도
새천년의 일출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동해로 몰려갔다. '새해 일출맞이'가 여행사의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 그때 나는 새해 첫날을 산 속에서 지내고 싶어 몇몇 가까운 사람들과 백아산으로 향했다. 마침 밤이어서 백아산 산길을 돌아 오를 때 자동차 불빛은 지척을 조금 열어줄 뿐 불빛 너 머 어둠 속을 보지 못했다. 나는 불빛 밖의 어둠조차 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에 절망했다. 맑고 서늘한 기운들이 머리를 맑게 해주리라 믿으며 올라온 산 속은 제법 추워 밤이 깊자 대부분 통나무집 불빛은 꺼져 온통 어둠뿐이었다. 몇몇은 침묵피정을 하다 잠이 들고 몇몇 은 늦도록 술을 푸고 있을 때 잠들지 못하는 나는 통나무집을 나와 어둠을 응시하였다. 어둠 속에는 자작나무였는지 오리나무였는지 딱딱하고 차가운 것들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인기척에 새가 나뭇가지에서 어둠 속으로 빨려갔다. 새가 날아간 쪽을 바라 보았다. 새의 자궁인 어둠 속에서 새는 잘도 유영하며 다녔다. 다시 나무 등걸을 쥐었을 때 나무가 부드럽고 따스하다고 느껴졌다. 나무처럼 한참을 서서 어둠이 된 산을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내 시력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어둠뿐이었다. 그 무렵 나의 영혼은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문득, 반짝이는 시린 물소리가 유성처럼 내 영혼을 관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가까운데 약수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였다. 나는 약수 터로 다가가 물을 마셨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뜨거운 기운이 흘러내렸다. 정신이 번개를 맞은 것처럼 전율하였다. 비로소 정상으로 오르고 있는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바라보였다. 그리고 어둠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눈을 감았다. 물소리가 보였다. 그렇게 신들린 듯 어떤 기운에 의해 나는 한없이 기쁨으로 충만한 채 날이 밝을 때까지 잠 들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새로운 천년의 첫 일출과의 서기 어린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개가 끼어 일출 무렵 동녘하늘에 붉은 햇무리만 나타날 뿐 끝내 태양은 구름 속에서 나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까지 나는 마음이 한없이 기쁨으로 충만한 채 산을 내려왔다. 새해에는 바르 고 맑은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심란하거나 마음이 방황할 때 그날 밤의 전율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유년의 정초에는 폭설이 내리는 마을 뒷산 두루봉에 올라갔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푹푹 빠지는 눈 구덕을 헤치며 산 정상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고 새해 다짐을 하곤 하였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새해 첫날 친구들과 무등산에 올라가곤 하였다. 사실 그때는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새해 첫날 해맞이를 위해 산에 오른 사람들에게 따뜻한 커피를 팔기 위해서였다. 발 시럽고 손 시러웠지만 그래도 산 위에서 새 해를 맞는다는 것이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에 나와 서는 옥상에 올라가 가족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티 하나 없이 맑은 마음과 미소로 가족들을 떠올리며 건강과 사업과 공부 등 뜻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도하였 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의 소원성취를 기원하였다. 그중에 특별히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나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과 돈을 떼 먹은 사람들이다. 기도에 약발이라도 서게 된다면 그들이 나를 좋아할 것이며, 그들이 돈을 많이 벌어 내게 빚을 갚아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기도를 드리는 대상은 바로 자신이다. 올해도 여전히 복권을 사지 말게 하 시고, 주식투자도 하지 말게 하시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 린다. 물론 지금껏 지켜온 기도 제목이다. 기도를 하면서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마음을 다 해 정성껏 드린다는 것이다. 기도가 하나의 매너리즘이 되어 형식적으로 변해버린다면 그 것은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는 정성이며 사랑이다. 올해도 지난해 또는 재작년과 마찬가지로 기도 제목이 크게 다르지 않다. 크게는 남북통일 이 이루어지길 간구하는 것이고, 작게는 무사안녕과 소원성취이다. 우리는 흔히 기도만 하 지,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도는 정성과 사랑과 함께 노력의 대가인 땀방울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주변에 아주 유능한 후배 시인이 한사람 있다. 그는 늘 가난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한 삶을 살고 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정신없이 생활한다.그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많이 한다. 그 러나 그의 기도는 요행 같은 것이다. 스스로 땀 흘려 일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바라고 있다. 이런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설사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음이 기쁨과 충만감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백아산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음을 절망하다가 어둠 속에서 소리를 통해 전해 지는 약수터의 물 떨어지는 소리를 보았을 때 차디차고, 혹은 그 뜨거운 기운이 내 영혼을 일깨울 때의 충만감 같은 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물 떨 어지는 소리! 나는 그것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만이 아 니라, 물소리처럼 듣기도 한다는 것, 또는 오감을 통해 마음을 열었을 때 사방팔방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이 깨달음이 나를 기쁘게 하고 충만하게 하다니, 기도는 바로 진정한 기쁨의 충일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충만 됨을 위해 올해는 물가가 오르지 말 것이며, 곗돈을 한몫 더 넣을 수 있게 할 것이 며,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게 할 것이며, 그리고 건강한 영육으로 한 번 더 웃을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그래서 언제나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진정으로 기도하 는 것이다. 글 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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