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들추는 책장] ① 볼로냐 미식기행문… 땀 한 방울, 침 한 모금
By 배소라
■ 첫 번째 책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권은중, 메디치미디어
‘다시 들추는 책장’ 코너는 30년 차 편집자가 쓰는 책 이야기입니다. 저자 섭외부터 기획, 편집, 제작과 출간 이후 반응에 이르기까지 출판업에 종사하는 기획자만 알 수 있는 숨은 이야기들이 매달 펼쳐집니다. 잘 살피면 저자와 편집자의 밀당, 흥행 성공의 법칙이 수시로 등장합니다. [편집자 주]
✔ 신문사를 그만두고 이탈리아 요리학교에? 독특한 이력의 작가
✔ ‘맛’, ‘향기’, ‘빛깔’로 구성된 책… 수많은 사진을 보고 고르고
✔ 볼로냐의 붉은 빛과 멋진 회랑 사진까지… 표지를 가득 채운 타이포
✔ 맛의 중심지·협동조합의 도시·학문의 자유도… 볼로냐의 매력
✔ 볼로냐를 향한 애정과 동경, 그곳에 머물렀던 순간을 그리워하다
이탈리아 볼로냐의 어느 화창한 날. 산 피에트로 성당이 보인다. (사진: 셔터스톡)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볼로냐를 선택한 이유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코로나에 대한 공포감이 진정되고, 제한적이지만 다소 일상이 회복되었던 2020년 3월의 어느 날. 메디치미디어 필운동 사무실의 작은 회의실에서 권은중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겨레> 기자로 일하다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홀연히 이탈리아로 떠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다닌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권 작가는 현지 레스토랑에서 인턴 실습을 마치고 몇 달간 더 이탈리아에서 머물다가 돌아온 직후였다. 이탈리아 음식과 이탈리아 와인을 애정하는 나로서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첫 만남임에도 우리는 ‘폭풍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음식과 와인, 문화와 역사, 사람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요리 여행 다큐 <누들로드> 시리즈를 비롯해 음식과 여행이 어우러진 다큐멘터리를 섭렵했고, 볼로냐 도서전에 다니면서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매력에 푹 빠졌던 내가 이런 필자를 놓칠 리가 있나. 흐뭇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치면서 ‘무조건 책을 쓰게 해야지.’ 하는 결심을 마음속으로 굳히던 참이었는데, 권 작가는 내게 한 가지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시칠리아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사실 시칠리아를 절반밖에 못 돌았어요. 그런데 코로나가 이렇게 심하니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네요.”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죠. 이제 쓰셔야 해요. 다시 가지 않고도 바로 쓸 수 있는 지역이 없을까요? 오랫동안 머물러 계셨던 곳이 어디예요?”
“학교 다니느라 피에몬테에 제일 오래 있었지만, 공부하고 일하느라 별로 둘러보질 못했어요. 편안하게 즐긴 곳은 시칠리아와 볼로냐였죠.”
“볼로냐에는 어떤 매력이 있었나요?”
나의 질문에 볼로냐에 대한 매력적인 이야기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이탈리아 음식의 중심지인 미식의 도시, 소상공인들과 장인들을 보호하고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게 지원하는 협동조합의 도시, 세계 최초의 대학이 탄생했고 학문의 자유를 보장했던 도시, 중세의 암흑시대에 수많은 여성 인재를 길러낸 미녀의 도시 등등. 권 작가의 이야기보따리는 끝이 없었다.
“됐네요. 그럼 볼로냐 얘기를 쓰세요.”
내 답변이 너무 선선한 것이 미심쩍었는지 권은중 작가가 염려를 나타냈다.
“한국 사람들이 볼로냐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요?”
“볼로냐 도서전에서 우리나라 작가들이 각종 상을 받으면서 ‘볼로냐’라는 이름은 많이 알려져 있어요. 요리 다큐 보니까 볼로냐가 맛의 중심지던데요. 그렇다면 출판계나 음식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도시가 아닐까요? 그리고 볼로냐가 낯선 독자들에게는 말씀하신 매력을 잘 보여주시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는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볼로냐로 갔다.
볼로냐 음식을 맛보면 누구나 행복해진다
사실 ‘한국 사람들이 볼로냐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 하는 권은중 작가의 염려는 타당한 것이었다. 흔히 ‘이탈리아’ 하면 절대다수가 로마를 떠올린다. 그다음은 패션의 도시 밀라노와 피렌체, 베네치아 등이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들이다. 반면에 롬바르디아주(주도 밀라노), 베네토주(주도 베네치아), 토스카나주(주도 피렌체)에 둘러싸인 에밀리아로마냐주(주도 볼로냐)는 볼로냐 도서전 외에는 한국인들의 관광 경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점에서 북부 피에몬테주의 요리학교를 거쳐 시칠리아와 볼로냐로 이어진 권 작가의 이탈리아 행보는 특이했다.
이탈리아 지도 (그래픽: 조주희)
그러나 그의 행보에는 이유가 충분했다. 피에몬테주의 요리 학교 선생님들이 이탈리아 맛의 원조로 추천한 곳이 시칠리아와 볼로냐였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그 진가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존심 강한 피에몬테(프랑스와 접경한 피에몬테의 사람들은 다른 지역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좀 더 선진국에 산다는 자부심이 있다.)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볼로냐는 이탈리아 맛의 중심지인 미식의 도시이다. 권은중 작가는 볼로냐에 머무는 동안 그 도시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했다. 단순히 내가 권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기에 내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인 것이다.
우선 집필의 방향성을 잡기 위해 ‘왜 볼로냐의 맛과 역사, 문화를 탐구하는지’ 프롤로그를 먼저 써달라고 했다. 그래야 흔들림 없이 써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권 작가는 생각보다 프롤로그를 빨리 썼고, 세부 목차를 작성해서 보내왔다. 나는 동의했고 콘텐츠에 대한 기획자와 저자의 합의가 끝났다. 이제 본격적인 집필의 시간이다.
우선 1장 ‘맛’에 대한 샘플 원고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전체 원고의 톤 앤 매너를 결정할 샘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들어온 ‘돼지의 맛’에 관한 샘플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볼로냐 중앙역에서 내려 시내의 마조레 광장까지 들어오는 동안, 거리 전체에 가득한 돼지국밥 냄새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부추와 소면을 넣은 부산의 뽀얀 돼지국밥을 좋아한다. 돼지국밥은 소고기로 끓인 설렁탕과는 다른 구수한 풍미가 느껴진다. 이탈리아에서 많은 도시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시내에서 돼지국밥의 구수한 향기가 나는 곳은 없었다.”
결국 돼지국밥 냄새는 골목 안에 자리한 푸드코트 안의 수많은 가게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어지는 이탈리아인들의 살루미(이탈리아 가공육을 통칭하는 말)에 대한 자부심과 레스토랑에서 파는 탈리에레(햄과 치즈, 빵을 한판에 내놓는 모듬요리) 이야기에도 군침이 돌았다.
스폴리아 리나의 로비와 볼로네제, 토마토소스의 원료인 토마토, 볼로냐식 모듬안주 ‘탈리에레’.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사진: 권은중, 셔터스톡)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좀 더 구체적인 감각 묘사를 넣어 현장감을 생생하게 살려달라고 피드백을 했다. 피드백을 받아 수정을 해서 보내온 원고를 보니 훨씬 그럴듯했다.
“수정 원고 좋습니다. 세세하게 손보는 건 1장 전체 원고가 들어온 다음에 할 테니 일단은 주욱 가시죠!”
나는 메시지로 ‘Go’ 사인을 보내면서 이런 톤으로 1장 맛에 관한 원고를 완성해달라고 요청했다.
1장 ‘맛’은 파스타의 맛, 돼지의 맛, 토마토의 맛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돼지의 맛을 먼저 쓰기 시작했지만, 초고가 완성된 뒤에 순서를 바꾸었다. 아직 한국 독자들은 프로슈토나 살루미 같은 이탈리아식 생햄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파스타라면 너무나 익숙하고 사랑받는 음식이 아닌가. (탄수화물을 멀리하는 이도 무작정 배격할 수만은 없는 게 파스타라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볼로냐라는 도시의 생소함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파스타 이야기가 먼저 등장하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이었고, 권 작가도 이에 동의했다.
1장 집필 속도로 봐서는 빨리 완성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원고 완성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2장 치즈, 커피도 별 무리 없이 진행되었지만 문제는 3장이었다. 붉은색 회랑의 도시, 현자의 도시, 미녀의 도시 이야기는 1, 2장과 달리 음식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역사와 인문학을 주제로 담고 있었다. 검색하다 보니 자료가 너무 많아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담아내야 할지 고민하던 권 작가는 의논할 게 있다며 3장의 일부 원고는 메일로 보낸 뒤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편집장님, 쓸 얘기가 너무 많은데 다 담다 보니 지루하고 분량도 너무 길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부분을 잘라내야 할지 도저히 판단이 안 서네요.”
“저자가 직접 잘라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전부 쓰려 하지 마시고 원래 주제에 맞는 이야기들 중심으로 일단 풀어가시고, 도저히 못 자르겠다 하면 그냥 주세요. 편집자들은 가위질 잘해요. 제가 팍팍 줄여 드릴게요. 그런 다음에 작가님이 보시고 더 뺄 거나 다시 붙일 것들을 정리하시면 되지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업을 통해 3장 ‘빛깔’의 원고가 원래 분량에서 30% 정도 덜어졌다. 첫 미팅부터 원고가 완성되기까지 약 9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사진 선택과 디자인에 두 배의 시간을 쓰다
이 책은 맛, 향기, 빛깔의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1장의 주제는 맛이다. 처음부터 강렬한 비주얼로 독자를 사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권 작가님이 준 사진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완성된 1장 원고를 받아든 디자이너는 계약 요금을 내고 사용하는 포토 라이브러리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일일이 검색하며 가장 내용에 어울리면서도 근사해 보이는 각종 파스타와 생햄, 식료품점, 볼로냐의 레스토랑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세심하게 고르고 고르는 작업이 본문 디자인을 정하고 1장 원고와 권 작가님의 자료 사진을 넘긴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1장이 끝이 아니었다. 2장은 ‘향기’로, 치즈와 커피에 관한 이야기다. 이 또한 사진 품질에서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주제다. 사진 찾기 삼매경은 3장에서 정점에 달했다. 붉은빛 도시 볼로냐의 매력을 보여주는 지붕과 회랑, 각종 건물의 사진이 지면을 채웠다.
2장은 ‘향기’로, 치즈와 커피에 관한 이야기다. 사진 찾기 삼매경은 3장에서 정점에 달했다. 붉은빛 도시 볼로냐의 매력을 보여주는 지붕과 회랑, 각종 건물의 사진이 지면을 채웠다. (사진: 셔터스톡)
장인 정신으로 사진을 한 장 한 장 골라내는 디자이너를 보면서 차마 마감 일정을 독촉할 수 없었다. 결국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가자’는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다른 책의 평균 작업 시간에 비해 2배가량 시간이 더 걸렸지만, 그 결과 모든 이들이 감탄하는 매력적인 사진이 가득한 책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공들여 사진을 골라냈으니, 이 멋진 사진에 어울리는 근사한 표지 디자인과 그 디자인을 뒷받침할 제작 사양이 필요했다. 어떤 색의 표지를 써야 할까? 볼로냐의 색깔은 붉은빛이었으니 큰 고민 없이 붉은색 낙점. 표지에는 반드시 볼로냐의 멋진 회랑 사진이 들어가야 했다. (사실은 붉은색이 식욕을 자극한다는 속설의 산물이다. 결과는 좋았다. 판매가 제법!) 그리고 본문 전체에 나오는 음식 이름, 지명, 인명의 이탈리아 타이포를 장식처럼 표지에 가득히 배치했다.
감탄이 나올 만큼 매력적인 사진으로 가득한 본문과 이를 감싸는 강렬한 붉은 빛의 개성적인 표지의 책을 들고 서점을 방문한 마케터들은, “메디치에서도 이렇게 예쁜 책이 나와요?”라는 서점 MD(서점의 책을 구입, 가공, 진열, 판매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전해주며 활짝 웃었다. 주로 정치·사회 책이 메인인 메디치미디어에서 나온 책의 결과 다른 내용과 디자인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표지
경험과 감각, 애정이 녹아든 볼로냐의 책장
볼로냐는 단순히 미식의 도시가 아니다. 첫 만남에서 권은중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볼로냐는 법학과 의학을 발전시킨 세계 최초의 대학을 세웠고 시민권을 지켜낸 현자의 도시이며 암흑시대인 중세에 여성의 활동을 보장해 여성학자들과 예술가들을 길러낸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수많은 협동조합을 만들어 소상공인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한 협동조합의 도시이기도 하다.
권은중 작가는 작은 도시 볼로냐가 어떻게 그런 성취를 이룰 수 있었는지, 볼로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친절하고 여유로운지, 그곳에서 지낼 때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와 책을 쓰는 과정에서 수많은 탐구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권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볼로냐는 왕이나 신이 아니라 사람을 최우선으로 여겼’고, ‘왕이나 교황으로부터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볼로냐 사람들은 그 공동체에서 서로를 믿으며 서로가 빛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말이다.
에필로그를 읽으며, 문득 그 언젠가 볼로냐 도서전에서 구매한 책을 부치기 위해 찾았던 이 도시의 우체국이 떠올랐다. 영어를 거의 못 하는 직원들 때문에 어찌할 줄 모르던 나에게 그들은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오랜 시간을 동동거렸다. 손짓 발짓과 영어 몇 단어를 이용해 겨우 책을 다 부치고 감사 인사를 하는 내게, 그들은 너무나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내가 권은중 작가와의 첫 만남에서 ‘볼로냐’를 택하고 전체 원고에 대해 세세한 피드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권 작가에 못지않게 볼로냐에 대한 애정과 동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도서전 동안 머물며 돌아보았던 붉은 빛의 아름다운 건물과 회랑들, 전시장에서 쉬는 시간에 마셨던 향기로운 카푸치노,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강렬한 라구 파스타, 깊은 맛의 파르미지아노 치즈, 생햄의 존재를 알게 해준 프로슈토와 살루미의 맛, 그리고 어디서든 다정했던 볼로냐 사람들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때때로 나는 이 책의 책장을 들추며 볼로냐에 머물렀던 순간을 그리워한다. 좀 더 많은 독자도 이 책을 읽으며 볼로냐를 꿈꾸고 볼로냐로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더 알아보기
글쓴이 배소라는
㈜메디치미디어 출판콘텐츠실 실장을 맡아, 메디치 출판 분야의 여러 일을 책임지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우연히 잡지사에 입사하게 되면서 편집의 매력에 빠져 30년째 출판업에 종사하고 있다. SBI 출판예비학교 강사, ‘밀리의 서재’ 콘텐츠 기획자로 일했으며 다산북스 실용서 편집장, 여행, 문화예술서를 만드는 컬처그라퍼 편집장을 역임했다. 홍차와 커피 마니아이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