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를 어째서 불경으로 공부할까 ! 다른 책도 있을텐데
현재 인도어는 인구가 확산되면서 사투리가 너무 많이 늘었다
중국을 예로 들자면 돈황 사람들이 산동성 발음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도 서울 사람이 원조 경상도와 제주도 사투리는 알아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인도어나 스리랑카 언어를 공부하는 데는 현대어는 복잡하게 만들었고
그 해석 조차 옥스포드 사전과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옛 말들이 남아 있는 자료가 불경 외에는 없다
물로 불경보다 먼저 태동 한 것이 자이나교에서 활용하는 우파니사드 라는 경전과
두 경전으로 공부해야 원조 산스끄리뜨 실담자를 공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파니사드 ㅡ 한 단어 조차도 현대 사전으로 대비하면 전혀 어원과 들어 맞지 않는 해석이다
필자는 법구경을 해석 하면서
어떤 승려에게 ㅡ 왜 어째서 없는 말들을 붙여서 해석 하냐고 했더만, 의역으로 해야되며
동문서답 뿐이다
그래서 오늘날 불교는 좋은 말로 평가하자면 원문에 없는 가공된 신비로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한편 고구려 실라 백제가 히말라야 아래 살았다는 것을 앞 글에서 소개한 것 외에
단편적이나마 살펴 볼 필요가 잇다 (이는 실오라기 같은 단서일지라도)
이스라엘 역사서엔 실라를 바실라 라고 칭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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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국인 부다가야에 진실
[출처] 인도 구자라트지역의 6가야와 한반도 남부로 이주한 6가야와의 관계|ㅡ작성자 조종용
* 여기에서 小伽倻: 固城+固城. 久差(구차)·古嵯(고차) 의 고차는
고대에 龜滋(구자)국이며 현재 庫車(고차)라고 하며 ,
영어로 쿠처(kuchea), 쿠차(Kucha)로 불리는데 '타림분지' 입구에 있는 신강성의 한 지명이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한반도에 6가야가 없었다는 증좌가 된다.
(중국의 신강성은 이슬람권으로 신강자치주(지금에 위구르족: 일제는 하남 옆을 신장이라 이름지었다)로 통치되고 있다.)
소가야 이름에 고성(固城)은 아주 오래된 성으로
타림분지 사막의 누란제국(타림분지)의 성터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경상도 고성에 아주 오래된 성이 있는지?
물론 한반도 김해의 이웃인 경남의 '고성'도 지명 이동하여 붙인 이름으로 본다.
필자가 연구한바 기원전 약 7세기경에 중앙아시아에서 진출한 '6가야 연맹'이었으며
계가(鷄加)사람들이었다..
삼국이 건국되기 약 600년 전에 인도 북서부에 'Kekaya, Kekayas 연맹으로 간다라의 주변에 위치하였다.
구자국의 龜(땅이름 구, 거북 구,귀)로
금관가야의 구지봉, 구지가에 나오는 구는 모두 거북 구의 이름이다.
구지가가 있으며 김수로는 구지봉(龜旨峰)에 안장되었다.
모두 거북 '구' 를 사용함이다.
상기의 지명은 인터넷에 떠 도는 것을 인용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어떠한 책에 기록된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소가야가 구차, 고차라는 이름은
비단길 입구인 신강성의 구자국(고차, 쿠차, 코차)을 말 하는 것이 틀림없다 할 것이다.
한반도의 지명에서 고차, 구차의 지명은 경상남북도, 아니 한반도 전체를 통 틀어 찾을 수 없는 이름이다.
2013년 필자는 김수로의 금관가야가 소월지이며 소가야 집단인 '구자국'으로 부터 출발하였다고 학술 발표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김수로는
한나라의 질자(質子 -인질,볼모)를 피하기 위하여
갓난 아이를 비단 보자기(금꽤)에 넣어 성도(사천성)에 도착하여 건국하였으며,
허 황후는 인도 여자가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진출한 6가야 연맹체의 사람들로
그중 코살라의 가신인 아요디아(Ayodhiya)왕국의 공주인 것이며,
같은 '묘족'의 사람이었다.
혹자는 태국의 아유타(Ayuttaya)로 지목하는 사람이 있으나
역사를 깊이 연구하지 아니한 데서 나오는 무지로 보며 태국의 아유타 제국은 1,350년에 건국한 왕조이었다.
대륙 백제, 대륙 신라, 대륙 고구려는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진실로
고구려의 첫 도읍인 '졸본'은
키르기즈스탄의 이식쿨 호수 그옆의 촐폰(Cholpon)이며
(인도유럽어로 표기시에 경음화(파열음, 마찰음)로 이루어 진다)
신라와 백제는 중국의 한수(漢水)를 사이에 두고(한수는 양자강의 지류이며 강단사학에서 부르는 한강이다.)
성장, 투쟁해 나간 것이다.
그동안 여러 재야학자들이 지명 연구로 증명하엿으며
,남제서 연구에서 백제의 6자사가 밝혀졌으며,
필자의 삼국의 전투기록에 의한 지명 연구등으로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고 증명한 바 있다.
이와 맞불려 김수로의 가락가야가 한반도에 늦게 들어왔다는 점이다.
어찌 바늘과 실이 따로 논단 말인가?
일단 식민사학의 핵심인 '가야'의 건국이 한반도에서 이루어 지지 아니하였으며,
그것도 약 600년 정도 삼국 의 건국에 앞선다는 점이다.
우리가 새로운 이 시대에 식민사학을 타파하려면
가야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
실로, 한반도에서 발굴된 가야 유물은 기원전 유물이 없다.
거의 약 4세기 이후의 유물인 것으로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 한다 할 것이다.
한반도의 김해는 중앙아시아의 "황금이 많이 나오는 벌판"을 김해(金海)로 지은 것이며
이 때 해(海)는 바다를 뜻하는 것이 아닌 넓은 벌판, 영토의 개념에서 사용되었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고로 알타이 산을 중국에선 금산(金山-황금의 산)으로 부른다. 김씨는 재천금인(在天金人)의 사람이었다.
참고로 지난번에 언급한 바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Kabul -광명의 집단)을 한서에서 '월성(月城)이라 부르며,
그 인근 지역을 '경주(慶州)라 불렀다. 한나라 시에 경주는 아주 척박한 땅<사막>으로 불렀다.
신라의 국호가 계림(鷄林)이었으며 월성이었고 경주였다.
실라는 신라가 아닌 실을 만든 , 비단을 만들어 서역과 교류하던 나라이며
중앙 아시아 동맹국과 서역 변방을 지키던 나라였다
추신 : 김씨는 금씨인데 일제가 김씨로 바꾸었다(김씨는 재천금인(在天金人)
굽타제국 = 월지국 , 대월지국 ,대월씨국 , = 백제를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