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High Class들이 선호하는, 가장 갖고 싶은 브랜드로 샤넬과 함께 에르메스가 꼽힌다. 그 가격 또는 품격만큼이나 한국내에서의 인기가 치솟고 있는 브랜드 에르메스. 사륜 마차와 마부, 그리고 큰 원형안에 H자가 박힌 로고로 상징되는 프랑스 명품 에르메스는 여전히 전통을 고수하면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품을 만들기위해 고심 중이다. 토탈 브랜드로 거듭나기에 아직은 미흡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에르메스사 전통의 고집을 생각한다면 토탈 브랜드로서 세계 시장을 장악할 날이 먼 미래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느 시대에도 매력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는 브랜드라는 명예로운 칭송을 받고 있는, 이제 곧 200년의 전통을 고수하게 될 에르메스. 사람들은 말한다. 시대를 초월한 장인정인이야말로 에르메스의 힘이라고. 그러나 500여 명의 장인들에 의해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칠세라 세심하게, 일일이 수작업을 하는 에르메스가 결코 시대에 뒤떨어 지지 않고 함께 흘러올 수 있었던 것은 융통성을 발휘하는 고집 때문이리라. 온고지신이라 했던가. 전통과 함께 파격을 추구하는 CEO와 함께하는 에르메스는 최고의 명품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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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잇는 명성, 에르메스 |
에르메스 Hermes, 200년을 바라보는 역사
에르메스의 창시자 '티에리 에르메스 Tierry Hermes'는 1801년 독일 크레펠드에서 태어났다. 당시 신교도였던 그의 가족은 종교적인 이유로 프랑스 파리로 망명, 1837년 파리의 마드레인 광장의 바스 듀 름파르 Rue Basse-du-Rempart로에서 마구상을 시작한 것이 에르메스 브랜드의 출발이었다. 당시 티에르는 당시 교통수단인 마차를 끄는 말에 필요한 용구, 안장, 장식품 등을 직접 수공으로 제작, 1867년 세계 박람회에서 1등 메달을 받음으로 인해 에르메스 마구제품의 섬세함과 튼튼함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878년 창업자 티에리 에르메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선친의 일을 계승, 새로운 사업들을 창출해내며 기존의 가죽제품 위주의 생산에서 부티크 사업으로 확장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에르메스의 사업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게 되고, 각국의 정,재계 유명인사 및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사람들이 에르메스의 주고객이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 윈저 공작 부부,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잉그리드 버그만, 재키 케네디와 같은 사람들이 에르메스의 단골 고객이 된 것. 이들이 에르메스 제품을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계인들이 충분히 주목할 만 했을 것이다.
한편, 자동차의 출현으로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하게 되고 , 이러한 사회흐름에 따라 에르메스사는 고품질의 가죽 제품 외에도 현대적 여행 스타일에 걸맞는 소품을 만들어내기 시작. 패션, 장신구, 식탁용 은제품, 다이어리 및 실크 스카프에 이르는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였으니 역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패션 시장에선 중요한 일임이 분명하다.
1929년, 뉴욕에 첫 부띠끄를 오픈한 에르메스. 비로소 국제적인 브랜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향수, 타이, 맞춤복 및 기성복, 비치 타올, 에나멜 장신구, 그리고 여성 및 남성복에 이르는 다양한 아이템을 선보이며 미국, 서부 유럽, 태평양 연안 등 전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뻗쳐나갈 수 있는 시발점이 생긴 것이다. 이후, 1978년 그룹의 회장으로 선출된 '장 루이 뒤마'는 시계 및 식탁 장식 용품 등 새로운 라인을 도입했다. 또 아시아와 호주까지 매장을 확대, 현재 에르메스사는 전세계에 2백 50여개 부티크를 운영 중이다.
연간 매출이 50억 프랑스 프랑에 달하는 국제적 그룹으로 성장한 에르메스. 그러나 말과 마구로 상징되는 인간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은 에르메스의 정신으로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현재 에르메스는 '마르땡 마르지엘라'가 여성복 디자이너로 영입된 이후 과거의 수공제품에서 보여줬던 최고의 장인정신이 깃든 가죽제품이나 화려한 패턴의 스카프 뿐만이 아니라 매년 컬렉션에서 선보이는 남녀 의상에 있어서도 에르메스 고유의 고급스러우면서도 편안한 실루엣의 의상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온 최고의 명성에 걸맞는 브랜드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장 루이 뒤마 Jean-Louis Dumas-Hermes & '말, 말, 말'
엄청난 고가에도 에르메스의 가방을 원하는 사람은 늘고만 있다. 그러나 수작업을 고수하는 에르메스에서 가죽가방 1개를 생산하는 데 쏟는 시간은 무려 16시간. 에르메스 가방을 손에 넣으려면 매장에서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후 몇 개월씩 기다려야 하는 끈기가 필요하다. 프랑스 고급 명품의 꽃, 에르메스. 원래 승마용 액세서리를 전문으로 취급, 말 장식품, 승마용 부츠, 그리고 특히 맞춤 안장이 에르메스 회사의 초기 주력 상품이었던 에르메스 집안의 5대째 대표인 장 루이 뒤마. 현재 회장의 자리에 있는 그는 다음과 같은 가풍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 우리는 단순함과 품격과 우아함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지구성까지 판다. 우리의 고객은 지구성에도 민감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에르메스라는 이름은 고급 사치품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막상 장 루이 뒤마는 이 말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급 사치품을 파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신경쓰는 사람은 고객들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상품과 고객을 위한 최고의 품질을 추구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이자 가치관.
에르메스 회사의 모토는 하나하나의 작품 속에 현존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원칙 때문에 장 루이 뒤마가 1989년에 유명한 패션 저널리스트 '클로드 브루에'를 남녀 프레 타 포르테 콜렉션의 기획실장으로 채용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기획실은 '새로운 영혼으로 에르메스 작품을 옷 입힌다'라는 이념을 가진 세 명의 '자유로운' 디자이너 팀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편, 전통을 고수하는 에르메스는 지난 1998년, 전통을 파괴하는 '해체주의자'로 유명한 아방가르드적인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마르탱 마르지엘라 Margiela를 영입, 세상을 놀라게 했었다. 이에 대해 뒤마 회장은 "마르지엘라는 일시적 유행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훌륭한 재단사이며 뛰어난 장인"이라고 영입 배경을 설명. 그에 대한 신뢰와 기대로 인해 '해체주의자'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고, 그는 선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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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브랜드의 특별함 |
에르메스의 생존전략
에르메스의 광고를 국내에서 접하기는 정말 힘들다. 아니,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은 한 번도 에르메스의 광고를 본 적이 없으리라. 어쩌다 한 번 본 이가 있다면 그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에르메스는 좀처럼 광고를 하지 않기 때문. 하긴, 에르메스 뿐 아니라 기타 명품 브랜드들도 대부분 국내의 브랜드 회사들처럼 엄청난 물량공세를 통한 광고는 절대 하지 않는다. 로고도 되도록이면 크게 쓰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작게 표시한다. 에르메스 또한 여기에 속하는 브랜드로, 자신들의 제품에 대한 프라이드를 과시하고자 하는 전략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상류층들을 공략하기 위한 이런 에르메스의 전략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에르메스 매장을 제외하고는 국내에서 에르메스 상품을 만나기 조차 힘들다. 심지어, WEB이 굉장히 보편화 되어 있는 지금까지도 에르메스는 국내에 해당사의 홈페이지는 커녕 자사 브랜드의 홈페이지조차도 구축해 놓고 있지 않다. 기타 샤넬이나 루이비통과 같은 회사들이 자사의 홈페이지를 이미 예전에 구비해 놓은 데에 비해 상당히 퇴보(?)한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또한 에르메스의 전략 중 하나가 아닐까.
한편,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곳엔 에르메스의 3대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있다. 그는 세계 제1차대전이 한창일 때, 아메리카에 건너가 자동차 산업의 탄생을 목격했다. 즉, 그는 마차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 게다가 에밀이 아메리카에서 본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닌 포드시스템이 일으킨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화려한 개막이었다.
그러나 에밀은 오히려 이를 역으로 생각, 그 후의 에르메스의 방향 두가지를 결정했다. 한가지는 주력상품이 변화해도 제조과정은 전통적인 수작업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어느 정도 주문이 들어온다해도 결코 대량생산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소량생산주의가 그것이다. 에르메스의 이러한 소량생산주의는 자동차의 왕좌인 포드가 일으킨 대량생산시스템과의 대결이라고 봐도 좋을 듯. 게다가 에르메스의 선택은 단지 에르메스를 넘어서 브랜드의 본질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브랜드로서의 조건 중의 하나가 희소성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량생산품의 보급은 역설적으로 소량생산의 가치를 높여주었고, 누구든 싼 가격의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되는 대량소비사회의 도래는 구매 곤란한 고가상품으로의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 에르메스 특유의 카리스마는 이러한 희소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고집스럽게 9세기적인 생산시스템을 지켜감으로써 브랜드로써의 왕도를 걸어오게 된 것이라고 본다.
에르메스 브랜드 주요라인
켈리 Kelly 이 이름은 1975년 모나코의 왕비 그레이스 켈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계는 여러 가지 색의 가죽 벨트로 되어 있으며, 팔에 차거나 벨트에 찰 수도 있다. "켈리"는 금과 순은 제품이 대부분이며, 송아지 가죽 및 도마뱀 가죽 밴드로 만들어져 있다. 악어 가죽밴드에 18K 금 케이스와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제품도 있다.
아소Arceau 1978년 생산된 아소는 고전적인 디자인과 기울어진 문자판 숫자들이 어우러져 있으며, 에르메스 고유의 가죽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클리퍼 Clipper 1981년 생산된 클리퍼는 쾌속 범선이라는 의미. 스테인레스 스틸로 된 틀에 못이 박혀 있는 범선 모양의 둥근창 모양을 응용한 것이다.
셀리에 Sellier 1987년 생산된 셀리에. 마구 수리공에서 힌트를 얻어 말안장 머리 부분이 시계 중앙에 새겨져 있다. 사파이어 글라스와 수정의 무브먼트, 30M 이상의 방수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메도 Medor 1993년에 생산된 "메도"는 피라미드 형태의 유리 덮개를 착용한 디자인으로 덮개를 열면 시계의 문자판이 보입니다. 이 시계는 순은과 10마이크론 금도금 메탈의 두 가지 형태로 되어 있으며, 수정의 무브먼트와 30M 방수 기능이 있다.
H-아워 H-Our 1995년에 생산된 H-아워는 시계의 형태를 에르메스의 첫 자인 "H"를 따서 디자인한 시계. 모던하고 심플하게 제작되었다.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금과 파라듐 도금 장식도 있다. 사파이어 크리스탈로 제작, 30M 방수기능과 수정의 무브먼트를 내재하고 있다.
전통의 Hermes Watches
에르메스는 70여년 동안 시계 제조 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왔다. 시간이 갈수록 Hermes time은 깔끔하고 정확한 이미지를 고수, 겉치레 없이 우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어 왔다. 이에 에르메스는 고객들과 더욱 더 가까워지기 위해 시계 제조에 따른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역시 최상의 품질과 창조성을 무기로 영속적인 미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인식하고 있는 에르메스 시계는 특정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시계 제조업체로서의 그들의 일에 대해 항상 강조, 자부하고 있다. 에르메스 시계와 스틸과 은, 금 및 가죽의 배합은 에르메스 장인들의 재능을 보여주는 좋은 예. 에르메스가 실크 전문 업체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1920년대 초부터 에르메스 시계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시계 제조업계에서도 이름을 날린 것이다.
에르메스 시계 제조업의 전통은 1920년 처음으로 가죽 밴드의 시계가 만들어졌을 때로 시간을 거스른다. 결국 에르메스 시계는 현재의 유명한 사각 실크, 향수, 그리고 보석 훨씬 이전부터의 명품이었던 것. 에르메스 스타일은 그 창조적인 시계의 대담성과 독창력 때문에 곧 알려지게 되었다. 에르메스 시계는 '작은 기계 장치'의 시계와는 정반대이며, 맵시있는 시계가 갖춰야할 조건 - 오래가고, 실용적이고, 유용하고 또한 아름다운 - 을 갖추었다. 이 모든 것이 에르메스에 있어서는 철학이었다. 에르메스의 가치를 만드는 것 - 신중, 진지, 신뢰성, 그리고 유머의 가미- 이야말로 가장 최상의 그리고 최종의 목표이며 항상 유지해야할 그리고 또 다시 넘어야할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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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의 메세나 |
에르메스 코리아는 한국에 진출한 1997년 나무조각가 크리스티앙 르농시아의 전시회를, 1999년에는 여류 화가인 아니에스 레비의 전시회를 후원하는 등 외국기업으로서는 드물게 국내 미술계의 활성화를 위해 '메세나' 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여기서 '메세나'란 '문화와 학술활동에 대한 지원 및 옹호'라는 의미의 단어.
에르메스는 상업성을 배제한 순수 후원을 오랜 그들의 전통으로 삼아왔고 이에 한국의 에르메스도 그 반열에 진입했다. 특히 에르메스 코리아는 에르메스가 지원하고 있는 순수 예술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건축을 비롯한 미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시각을 통하여 미와 철학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에르메스의 상품들과 가장 근접한 예술의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 또한 한국의 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예술지원 프로그램으로 가장 기본적인 예술분야랄 수 있는 미술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
에르메스의 기본 이념에 발맞춘, 에르메스 코리아의 메세나. 역시 에르메스는 그의 품격에 걸맞는 비상업 예술 지원활동을 지원하면서 그 자존심을 더욱 높이고 있는 듯하다.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展 (2003. 9. 20 ~ 11 .2)
아트선재센터에서는 2003년부터 에르메스 코리아와 함께,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의 진행 및 전시를 공동 주관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수상후보 지명자 3인이 각각 새로운 프로젝트를 소개하게 되며, 이 전시를 통하여 최종 수상자가 결정. 이와 같은 아트선재센터와 에르메스 코리아의 '파트너 쉽'은 미술계와 기업간의 상호 협력에 있어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고 본다.
지난 2000년도에 제정된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의 역대 수상 작가는 장영혜(2000), 김범(2001), 박이소(2002) 등으로 모두 독특한 조형언어를 바탕으로 동시대 한국 미술의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부산국제 영화제의 숨은 도우미
부산 국제영화제의 숨은 도우미는 외국계 기업들. 그 중 '에르메스 코리아'는 영화제 기간동안 '에르메스와 함께 하는 한국 영화인의 밤'을 개최했다. 특히, 원로 회고전은 에르메스코리아가 지난 2001년부터 오는 2005년까지 5년간 후원하고 있는 행사. 매년 꽤 많은 금액을 후원하고 있다. 에르메스 코리아가 증정하는 '디렉터스 체어'는 감독들에게는 또 하나의 영광. 이 의자는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 회장의 부인인 '르나 뒤마' 여사가 직접 디자인한 의자로 일명 '피파 PIPPA의자'로 불리는데, 프랑스 도빌에서 열리는 아시아 도빌 영화제의 감독상 부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더 의미있다고 하겠다. 즉, 상패없는 시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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