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047 일본의 천적: 현대그룹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가 아시아의 무수한 거대 제조업체 중에서 유독
한국의 현대그룹을 탈냉전 세계를 움직이는 신진파워 중 하나로 선정한
이유는 "현대그룹은 한국경제 성공의 국가적 상징으로서, 자동차,
선박, 반도체 등 30여 개분야에서 세계최대의 제조업대국 일본과
치열한 제품경쟁, 기술경쟁을 벌이며 연간 500억 달러 이상의 놀라운
사업실적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언론도 참여한 이번
선정작업에서 현대가 일본의 유수한 대기업들을 제치고 꼽힌 더
본질적인 이유는 "현대가 일본의 하청공장화된 여타 아시아 기업들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히 일본기업과 경쟁하는 산업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좀더 구조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에 일개 건설업체에 불과하던 현대는 1970년대 들어 당시
제3공화국에 의해 정권안보 및 국가생존 차원에서 단행된 중화학 수출
공업화의 선발주자로 나서면서 연 30p 이상의 놀라운 양적 팽창을
거듭했다. 특히 현대는 1973년 말 오일쇼크로 중화학 공업화가
백지화될 절대위기에, 거대한 오일 머니가 집결된 중동의 메머드
건설현장으로 가장 먼저 뛰어들어 오일 머니의 물줄기를 일부 한국으로
환류시킴으로써 당시 외환 부족으로 자칫 남미가 될지도 모를
절대위기에 봉착한 한국경제를 되살리고, 공염불로 끝날 가능성이 컸던
중화학 공업화를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사업부문이 세계무대에서 일본과의
철저한 경쟁체제를 구축하고 있어, 한국이 오늘날 대만이나 동남아
여타국가들처럼 '일본의 구조적 하청기지'로 전락하지 않도록 막는
견인차 역할을 단단히 해냈다는 점이다.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반도체, 건설 등 일본이 앞장서서 약진하고 있는 사업부문에 과감히
뛰어든 현대는 처음부터 기존의 국내 대기업들과는 달리 내수시장이
아닌 국제수출시장을 겨냥해 사업을 일구었고, 그 결과 국제무대에서
끊임없이 일본과 격돌하면서 한국의 국제 경쟁력을 오늘날과 같은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최근 환율전쟁을 비롯한 미국과 일본간의 각종 치열한 무역전쟁
와중에서 일본의 하청기지화된 여타 동남아국가들이 액면상의 외채
급증등 여러 불이익을 겪고 있는 반면, 한국이 상대적으로 어부지리를
얻고 있는 것도 이런 경쟁적 한일 산업구조가 구축된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
1994년 현재 종업원 숫자만 18만명에 이르고 1993년도 매출액이
580억 달러를 돌파한 현대는 그룹 산하의 30개 기술연구센터를
중심으로 한국형 표준모델 및 첨단기술 개발을 통한 기술 자립화를
서두르고 있다. 자동차와 선박 등에서 입증됐듯 한국형 표준모델과
자체기술 확보만이 살 길임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현대는 그룹의 무게중심을 중국 등 개도국의 맹추격으로 급속히
부가가치가 낮아지고 있는 제조업 일변도에서 탈피해 위성산업,
광통신산업 등 멀티미디어로 상징되는 고부가가치 창출산업으로
이동시키는 방안도 적극 모색중이다. 한 예로 현대는 미국의 로랄과
퀄컴사를 중심으로 한 국제 위성 통신망 구축 콘소시엄인 '글로벌
스타'에도 참여하고 있다. 현대는 1998년까지 18억 달러를 투자해 지상
1,400Km 상공에 48개의 통신위성을 확보하여 1998년 말 서비스에
들어간다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에 데이콤과 함께 한국측 대표로 참여해
이미 중국, 인도, 태국, 헝가리, 칠레 등 5개국에 대한 독점서비스권을
확보한 상태이다.
과연 현대가 포드식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중시하던 종전의 제조업
마인드에서 벗어나 다품종 소량생산과 두뇌 중시주의로 요약가능한
창발적 소프트 마인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대목이야말로 현대, 더 나아가 한국경제가 과연 일본경제의 그늘과
중국의 맹추격에서 벗어나 성장을 계속할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POWER 048 소프트 그린 에너지: 차세대 전지
모든 전자제품에 필수불가결한 전지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전 엉뚱하게도 개구리 해부대 위에서 시작됐다.
1789년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자 L.갈바니는 금속판 위에서
개구리 해부를 하던 중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금속 해부용 칼을
대는 순간 마취된 개구리의 다리가 파르륵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가 여러 물질을 이용해 실험해본 결과, 금속
종류에 따라 경련의 정도가 다르고 절연체에서는 경련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 현상을 개구리 신경 속에
있는 전기가 방전하는 것으로 단정, 이를 동물전기라고 이름붙인
논문을 발표했다.
이 가설에 의문을 제기한 한 이탈리아 물리학자가 있었다.
훗날 '전지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알렉산드로 볼타였다. 파비아
대학에
재직중이던 그는 1796년 갈바니의 논문을 보고 실험을 거듭한 결과,
개구리 다리 대신 소금물이나 산에 적신 천을 구리와 아연 2종류로 된
금속판 사이에 번갈아 끼워놓고 몇 층으로 겹쳐 쌓아서 전기를
발생시키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볼타의 파일'이라 불리는 세계 최초의
전지이다. 볼타는 이 장치를 더욱 개량해 묽은 황산에 아연과 은 또는
구리막대를 끼어 넣어 오늘날의 일반전지와 흡사한 원통형의 전지를
만들었고, 이것을 이용해 물의 전기분해에도 성공했다. 그는 1800년
파리에서 나폴레옹 1세가 보는 앞에서 이 실험을 성공시켜 상금과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후 전지는 무수한 개량과정을 거쳐 1880년
프랑스의 르 크랑세가 망간 건전지의 실용화에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그후 전지는 전기제품과 하이테크제품을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사용가능하게 한 그림자 주역으로서 인류의 삶을 매우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한 때 전지는 극심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환경운동이 발달한 결과, 건전지 내부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한
수은이 인체에 극히 위험한 환경오염 물질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전세계 소비자 단체들은 건전지를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
비난하기 시작했고 각국 정부들은 전지 내의 수은 함유량을 환경보존
차원에서 1차 무역규제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제 문제의 수은전지는 더이상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궁지에 몰린 전지 제조업체들이 수은 대체물질 개발에
주력한 결과, 버튼형 공기 아연전지 등 오염도가 적은 대체품이 잇따라
개발됐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들어 전지는 그 중요성을 새삼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지는
더이상 전기제품의 오염물이 아니라, 차세대 하이테크 사회의 근간이
되는 전략부품인 동시에 환경오염을 크게 줄이는 데 필수적인
핵심부품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산업계와 사회 전반에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하이테크 제품의 생명은 소형화, 경량화, 고성능화 3가지에
달려 있다. 업계는 반도체 등의 개발을 통해 꾸준히 이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모든 제품의 에너지 공급원인 전지를 소형, 경량,
고성능화 하지 않고서는 더이상 이같은 목표달성이 불가능한 시점이
됐다. 이에 산업계는 기존 전지의 성능이 장기간 유지되도록 하는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충전만 하면 되풀이해 사용할 수 있는 2차
배터리 및 고성능 배터리, 태양전지 등 차세대 소프트 에너지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환경운동가들은 여러 차세대 배터리 중에서도 앞으로 전기
자동차의 보급을 가능케 할 고성능 베터리 개발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고성능 배터리만 개발되면 대기오염의 주범인 현재의 가솔린
자동차가 사라지고 전기자동차 시대가 활짝 문을 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전세계 자동차 메이커는 나날이 거세지는
그린라운드 압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자동차용 고성능 배터리
개발에 필사적이다. 그 결과 1993년까지만 해도 충전에 8시간이나
걸리고 주행속도도 시속 80Km 정도며 주행거리도 100Km에 불과하던
고성능 배터리는 최근 들어서는 충전시간이 단 10분밖에 안 걸리고,
최고 주행속도가 시속 200Km까지 나오며 한번 충전시 주행 거리도
400Km가 될 정도로 그성능이 크게 개선됐다. 자동차업계에서는 앞으로
1996년 까지는 완전히 실용가능한 고성능 배터리가 개발될 것이며,
20세기가 가기 전에 전기자동차 시대가 활짝 막을 올릴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POWER 049 컴퓨터 해커 파워: 스텔스 바이러스
어떤 백신 프로그램으로도 예방 또는 감염경로를 확인할 수 없는
최악의 컴퓨터 바이러스들을 일컫는 말이 스텔스 바이러스The stealth
Virus이다. 스텔스 바이러스야말로, 핵무기보다도 무서운, 정보
초고속사회의 최대 위협이 되고 있다.
예상 밖으로 스텔스 바이러스의 최대 주산지는 불가리아이다.
불가리아에서는 매주 평균 1--2개의 새로운 컴퓨터 바이러스가
발견되고 있을 정도이다. 불가리아가 컴퓨터 바이러스의 천국이 된
것은 1980년대 컴퓨터 육성정책에 의한 양산된 젊은 프로그래머들이
탈냉전의 혼란스러운 정치격동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세계 컴퓨터 사용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스텔스 바이러스 1호는
1988년 11월 10일, 당시 27살이던 불가리아 청년 프레발스키의 방에서
탄생됐다. 그는 이 바이러스를 넉 달 동안 50차례의 손질을 거쳐
완성했다. 초기에 이름이 없던 이 바이러스는 감염시 컴퓨터에서 양키
두들이라는 록음악이 흘러나옴에 따라 '양키 두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스텔스 바이러스 2호는 1991년 5월에 출현했다. 당시 소피아
대학에서 순수과학을 전공하던 26살의 '어둠속의 복수자'(아직까지도
실명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그해 3월 국제 전자 게시판인
'피도네트'에 "그동안 보내주신 여러분의 성원에 답하기 위해 어떤
백신 프로그램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바이러스를 곧 선보이겠다"고
예고했다. 그리고 정확히 두달 뒤의 '어둠속의 복수자'는 자그마치
40억 가지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공포의 바이러스를 만들어냈다. 이
바이러스에게는 '돌연변이 엔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스텔스 바이러스 3호는 그로부터 몇 달 뒤 역시 정치혼란기에 빠져
있는 옆나라 러시아에서 출현했다. '사생아'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바이러스는 컴퓨터에 감염되는 순간, 5천부터 카운터를 시작해 제로가
될 때까지 하드 디스크의 모든 자료를 야금야금 남김없이
파괴해버린다.
스텔스 바이러스야말로 정보시대의 에이즈로서, 21세기 정보사회의
최대위협이자 부단히 극복해야 할 최악의 장애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해커라는 강력한 적의 출현,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최첨단
소프트웨어 기술의 부단한 발전을 채찍질하는 최고의 자극일지도
모른다.
Power Group IV 부드러운 힘의 시대, 글로벌 문화 파워
"결국은 부드러운 힘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조셉나이
"결국은 부드러운 힘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미국의 조셉 나이 하버드 대학 교수가 21세기 세계 판도를 읽으며 한
말이다. 이는 앞으로 도래할 21세기는 과거 20세기처럼 총칼이나
제품이
아니라,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되리라는 예언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법칙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동양철학의
기본골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20세기 아시아를 비참한 식민지로 만든
서구제국주의의 강력한 물질문명은 이런 가르침을 우스갯소리로
만들었다. 더욱이 2차대전 후 일본을 선두주자로 하고 한국 등 아시아
신흥공업국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동남아, 중국으로 이어진 거대한
'아시아 제조업 생산 기지화' 신드롬은 강한 것,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정한 파워인양 인식하게 만들었다.
한때 일본이 '이제는 미국을 따라잡았다'며 샴페인을 터뜨렸던 것도,
한국 등 여타 아시아 제조업 국가군이 이와 유사한 자만심을 가졌던
것도 강함이 부드러움을 이긴다는 전도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아시아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나를 처절히 체험하기 시작했다.
현재 아시아에는 세계 굴지의 제조업체들이 기라성같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세계의 문화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글로벌 문화센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세울 만한 게 없다. 기껏 과거 선조들의 문화유산에 의존해
유서깊은 문화대국임을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어거지에
불과하다. 진정한 문화 파워란 단절적이거나 복고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역동하는 '지금, 이곳'의 시대정신을 과거와 함께 녹여
미래의
시대정신을 창출하는 문화 용광로가 있을 때에만 창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현재 지구촌의 문화 중심은 분명 아시아가
아닌, 미국과 유럽이다. 현재 구미는 영화, 음악, 연극, 미술, 출판,
과학, 도서관, 경매, TV, 여론조사, 스포츠, 학술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오랜 문화 전통과 빼어난 상술, 최첨단 정보 과학으로 중무장한 독보적
문화 파워 센터, 문화 용광로를 구축해놓고 있다. 냉정히 말한다면
지구촌 제조업 생산기지 아시아는 지금 구미의 문화식민지로 전락하기
일보 직전의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다.
문화는 창조이다. 모방이나 복제만으로는 결코 창조적 문화, 고부가
가치 문화를 생산해낼 수 없다. 20세기 아시아는 모방을 통한
추월이라는 일본식 제조업 마인드에 깊이 매몰돼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21세기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은 모방-추월
공식에서 창출할 수 없다. 창의적이고, 도발적이며, 민주적이고,
인간적이며, 무엇보다도 체제 도전적인 문제정신이 한 사회 안에
가득할 때에만 비로소 새로운 문화는 꽃 피울 수 있는 법이다. 문화란
곧 창조적 혼란의 결실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제조업 마인드는 그곳이 생산 현장이든 사무실이든
학교이든 간에 일체의 혼란을 배격하고 있다. 집단주의적 사고와
표준적 노동력을 중시한다. 여기서 이탈하는 것은 그들이 낙오생이든
천재이든 간에 집단에서 철처히 배재해버린다. 연탄공장의
컨베이어에서 불량품을 빼내 부순 뒤 이를 다시 표준품으로 만드는
식이다. 아시아 전역에 팽배한
개발독재도 이같은 군대식 마인드를 더없이 선호하고 있다.
아시아에게 제조업 생산기지 자리를 빼앗긴 구미는 지금 문화산업과
정보산업으로 대표되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21세기의 승부를 걸려
하고 있다. 지금의 추세가 변함없이 계속되다가는 아시아는 구미의
싸구려 제조품 하청기지, 문화산업 식민지로 전락할 게 불을 보듯
훤하다.
부드러운 것과 약한 것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며, 곧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이다"라고 말한 성현들의
지혜를 겸허하게 되새김질해야 할 때이다.
POWER 050 엔터테인먼트계의 대부: 마이클 오비츠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 등 할리우드의 화려한 슈퍼스타들, 'ET' '쥐라기 공원'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심지어는 고 리처드 닉슨 전 미국대통령 등
부와
명예를 두 손에 거머쥐고 있어 그 누구도 겁낼 게 없어 보이던 지구촌
스타들이 단 한 사람 앞에서만은 주눅이 들어 옴쭉달싹 못했다면 과연
누가 믿을까.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문제의 그 한 사람이
바로 현재 세계최대 쇼 비지니스 대행사인 CAA (Creative Artist
Agency)를 이끌고 있는 마이클 오비츠Michael Ovitz 회장이다.
오비츠가 오늘날 할리우드의 황제가 될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왕성한
모험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46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다니던 중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학교
근처에 있던 영화사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관광 가이드로 일하게 된것을
계기로 엔터테인먼트계와 첫인연을 맺게 됐다. 그는 대학 졸업 후
22살의 젊은 나이로 비벌리 힐스의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에
취직하면서 본격적으로 쇼 비즈니스 대행업계에 뛰어들어 다각적으로
경험과 인맥을 축적해 나갔다. 그러다가 일에 자신이 붙자 29살이 되던
1975년 회사를 그만두고 동료 3명과 함께 CAA를 전격 창립, 이를
오늘날과 같은 세계최대의 엔터테인먼트 대행사로 키워냈다.
할리우드는 1980년대 중반 이래 완전히 그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CAA에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 외에 극작가, 감독, 프로듀서, 사회
저명인사들이 빠짐없이 가입해 오비츠에게 출연 교섭, 영화제작비
조달, 광고출연, 이미지 관리, 홍보 등을 모두 의뢰하고 있다. 아니
의뢰하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강요당하고 있다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만치 할리우드 내에서 오비츠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며,
반항이란 곧 에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무수한
영화잡지들은 해마다 여론조사에서 그를 할리우드에서 가장 힘 있는
인물로 꼽고 있으며, 영화인들은 할리우드를 오비츠 왕국이라 부를
정도이다.
오비츠는 쇼 비즈니스를 대행만 하는게 아니라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들을 팔고 사는 문제도 모두 그의 관할이다. 미국 내의 거센
비난 여론을 물리치고 지난 1989년 일본의 세계적 가전업체 소니가
48억 달러의 거금을 내고 콜롬비아 영화사와 트라이 스타 영화사를
매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이어 1991년 일본의 가전업체 마쓰시다가
MCA사를 매입할 수 있었던 것도 오비츠의 중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오비츠는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 세기적 매매를
중개하면서 배우와 감독들도 끼어넣기로 팔아넘기는 방식으로 저팬
머니를 최대한 긁어냈다.
1994년 10월에는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붐을 계기로 벨사 등 3개 전기
통신회사들을 부추겨 3천만 가구에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하는
컨소시엄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최근 오비츠의 철옹성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비츠의 율법을
깨는 선상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대표적
예가 1994년 10월 전격 단행된 세계 최고의 흥행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독립 프로덕션 설립이다. 제프리 카젠버그, 데이비드 제펜
등 동료흥행감독들과 손잡고 단행한 이 선상반란은 오비츠에게 대단한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더이상 오비츠의 사슬에 묶여 있기를
거부했음에도 제작자들이 앞다퉈 투자하기를 원하는 이들 실력파들을
제재할 마땅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할리우드의 이 비정한 철칙이 이제
오비츠에게도 다가온 셈이다. 그러나 스필버그 사단이 단기간에
오비츠를 능가하는 절대파워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영화인들은
드물다. 오비츠의 아성은 그만큼 거대하다. 과연 누가 제2의 오비츠가
될 것인가, 지금 할리우드는 숨죽여 주목하고 있다.
POWER 051 아파르트헤이트를 부순 양심의 노래: 조니 클레그
신이 가장 많은 축복을 내렸다는 다이아몬드와 황금의 땅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러나 이곳은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까지는 지구 야만의 산 현장이었다. 500만 명의 영국계 및
네덜란드계 백인들은 3천만 흑인 토착민들을 철저히 착취하고
모멸했다. 흑인들은 자신의 땅과 일자리를 모두 백인에게 뺏겼으며,
백인들이 사는 거주지나 술집, 공원 근처에 얼씬할 수 없었다.
나이어린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한꺼번에 수백명씩 소웨토의
백주대로에서 학살됐으며, 끊임없는 고문과 탄압에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백인들은 600여 평 이상의 유럽풍 전원주택에서 비버리힐즈식
삶을 즐겼으나, 흑인들은 수돗물이 안 나오고 하수구도 없으며 전기도
안 들어오는 3평 미만의 함석집에서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 그것도
장장 342년 동안이나.
이 남아공에서 당연히 백인은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한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남아공 백인 양심세력의 표상으로
불리는 세계적 록 가수이자 작곡가이며 기타 연주자인 조니
클레그Johnny Clegg만은 흑인들로부터도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클레그, 그도 원래는 평범한 한 백인에 불과했다. 1953년
오스트레일리아 록데일에서 태어난 짐바브웨를 거쳐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남아공으로 이주해 온 그는 아프리카의 장대한 자연과 원주민들의
토속문화에 크게 매료돼 인류학자가 되기로 결심, 비터바털스란트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까지 땄고 강의도 맡았다.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라, 과거 남아프리카에 거대한 통일왕국을
건설했던 줄루족에게서 14살 때부터 그들의 신명 넘치는 기타 연주법을
배우고 그들의 말도 익혔다.
그러던 중 그의 삶의 궤도를 180도 바꾸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평소 흑인들의 저항운동을 은밀히 돕던 스승 데이비드 웹스터가
남아공의 백인 비밀경찰에게 무참하게 암살된 것이다. 클레그는 분노에
몸을 떨며 책을 내팽개쳤다. 그 대신 자신의 평소 취미였던 노래와
기타를 무기로 잔혹한 백인 정권과의 길고도 외로운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저항 정치가수로 변신한 그는 '남아공 백인의 만행에 대한
세계여론을 불러일으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방식'이라는 판단 아래, 그때부터 유럽과 미국 등 서방세계를
순회하며 남아공의 참상을 고발하는 노래를 통해 인류에게 흑인들의
아파프트헤이트(흑백인종분리) '철폐투쟁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외로운 투쟁을 하는 클레그 옆에는 언제나 한 친구가 있어 큰 힘이
되었다. 다름아닌 줄루족 출신의 기타 명연주자인 시포 맥추누Sipho
Mcchunu였다. 줄루족이 모여 사는 나탈주 출신의 시포는, 여느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백인들에게 땅을 뺏긴 뒤 강제로 이주돼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만든 기타를 들고서 짬짬이 클럽을 돌며
연주를 하던 거리의 예술가였다. 16살 때 서로 만나 더없는 친구가 된
클레그와 시포는 그후 클레그가 본격적으로 정치투쟁에 나서자 1976년
함께 밴드 '줄루카'를 조직, 전세계를 돌며 줄루풍의 신명나는 음악과
춤을 무기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투쟁을 벌여 나갔다. 시포는 그후
1987년 생활고에 시달려 농장일을 하기 위해 음악을 그만둘 때까지
클레그의 둘도 없는 동지로 활약했다.
이들이 낸 첫 앨범 '지구인Universal Man '은 이들을 일약 세계적
록그룹으로 만들었고, 이어 나온 '아프리카의 기도' '사파리에
흩어져서' '네 땅 위에 우뚝 서라' '제 3세계의 아이' 등은 연속
세계적인 히트를 했다.
특히 백인의 야만적 정치폭력을 신랄하게 고발하면서 30여 년간
옥중생활을 하고 있는 넬슨 만델라를 찬양했기 때문에 남아공에서
금지곡이 된 그의 대표작 '아심노난가 Asimnonanga'는 1980년대 말
파리와 런던, 베를린과 뮌헨 등 유럽 전역에서 공전의 대히트를 했다.
그의 야외공연장에는 수십만 명의 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이
노래는 유럽 대학가의 최대 인기가요가 되었다. 이는 342년간 계속된
남아공의 야만적 백인지배를 종식시키는데 일조한 거대한 세계여론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90년에 데 클레르크 정권 출범 후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민족회의
(ANC)의장이 석방되고 아파르트헤이트 악법이 철폐되자 그는 마지막
앨범 '잔혹과 광란, 그리고 아름다운 세계'를 낸 뒤 조국으로 돌아와
한동안 조용히 고향에 묻혀 아내가 하는 아동복 가게 일만 돕고
지냈다. 자신이 할 시대적 역할은 끝났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직 그가 할 일은 남아 있었다. 흑백정권 교체의 격동기에
처한 남아공이 흑백공존의 평화 메시지를 절실히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1993년 오랜 침묵을 깨고 '열기와 먼지, 그리고
꿈'과 같은 그 특유의 휴머니즘과 화해정신이 가득한 신작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다시 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그를 사랑하는 전세계 팬들을
열광시켰다. 마침내 그의 바람대로 1994년 남아공은 온갖 진통을
이겨내고 평화적 흑백정권 교체의 위업을 실현했다.
양심의 노래를 부르는 조니 클레그가 있다는 사실, 과거 남아공
백인들을 분노케 하던 존재가 이제는 백인들의 부끄러운 양심에 유일한
위안이 되는 시대가 왔다. 결국 철권보다는 부드러운 노래의 힘이 휠씬
강했음을 클레크는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다. 유신시절 한국에서
김민기와 김지하가 그러했듯이
POWER 052 지구촌 최대 지식창고: 미국 의회도서관
"민주적 입법기관은 그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전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필요로 한다."
미국 제2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이 남긴 제국의 철칙이다.
제퍼슨의 이 철학에 기초해 1800년 설립된 지상에서 가장 방대한
도서관이 바로 미국 의회도서관 The Library Congress이다. 이곳에는
전세계에서 수집한 2천만 권의 장서를 비롯해 논문, 정기간행물, 지도,
사진, 그림등 총 1억 400여만 점의 각종 자료가 보관돼 있다.
워싱턴 의사당과 지하로 연결된 본관과 제퍼슨 빌딩, 매디슨 빌딩 등
모두 3개의 건물로 구성된 의회도서관에는 5천여 명의 전문요원이
사서국, 의회조사국, 법률도서관, 일반조사국, 저작권국 등에서
의원들의 입법활동을 지원하는 외에, 일반 국민에게 정보제공 서비스를
하고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국가대표 도서관으로서 일반 국민
누구나 이곳을 이용할 수 있다. 의회도서관의 모든 자료는
국민세금으로
구입한 것으로 자료 대여에 따른 수수료를 일절 받지 않고 있다.
17개 부서로 구성된 사서국에서는 1,800여 명의 직원이 도서관 비치
자료입수와 목록 정리 작업을 하고 있다. 사서국은 이미 전세계 600개
주요 도서관에 소장된 2천여 만 권의 장서목록을 전산카드화 해 놓은
상태로, 전 세계인들은 누구나 세계최대 학술 통신망인 인터네트에
들어가 의회도서관 온라인 정보서비스 LOCIS 란 이름으로 이를 이용할
수 있다.
사서국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94년 10월부터 앨 고어 자료를
모두 디지털 도서관건설에 돌입한 것이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밝힌
'디지털 도서관을 향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사업계획에 따르면 우선
사용빈도가 높은 자료들부터 매년 100만 점씩 연차적으로 디지털화해,
궁극적으로는 1억여 점의 소장자료를 모두 디지털 자료화할 예정이다.
사서국은 1단계 작업을 2000년까지 완료한 다음 이를 전세계에 공개할
계획이다.
의회도서관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다. CIA가 행정부를 위해 행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정보 수집, 분석 작업을 독자적으로 행하고 있는
의회의 CIA 이기도 하다. 850여명의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는 의회
조사국(CRS)에서는 미국의회의 모든 의원, 위원회, 소위원회가 필요로
하는 입법 참고자료의 작성, 조사, 연구 업무를 돕는다. 행정부 등
국내외 각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거나 그들에게 용역을 주어 매년
45만 건 이상의 조사와 보고서 작성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또 일본
도쿄 등 세계 주요도시에 '회색문서 수집사무소'를 설치해, 정작
공개는 됐어도 입수하기 힘든 회색문서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작업을 거쳐 완성된 보고서는 미국의 대내외 정책결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 예로 CRS는 1994년 7월 27일에는 북한 핵문제
해결방식을 둘러싸고 미국과 갈등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김영삼정부에
대해 극히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중간평가를 해 청화대측을 바짝
긴장시키기도 했다.
법률도서관에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200만 권의 법률도서 및
각국의 헌법조약집, 재판기록, 각종 결의문 등이 소장돼 있다.
일반조사국에서는 데이터 정리기술 등을 개발하고, 저작권국에서는
미국 내에서 발간되는 모든 자료를 전산화해 상하원에 1500여 대의
컴퓨터 터미널로 연결해 놓았다.
의회도서관은 현재 일본, 중국, 러시아, 중남미의 희귀자료를
해당국가 못지않게 소장하고 있다. 일본 국회도서관은 지난 1984년부터
10여 명의 직원을 이곳에 상주시키며 미군정하의 모든 사료를 하나도
빠짐없이 복사해 가기도 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지난 1990년에
한국과를 신설해 한국관련 자료도 본격적으로 수집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전 한국을 방문한 미국 의회도서관장이 "한국보다 우리가 한국
사료를 더많이 갖고 있다."고 자랑했을 정도로, 이미 이곳에 수집된
한국관련 자료는 엄청난 규모에 달하고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야말로
곧 제국의 싱크 탱크이다.
POWER 053 세계출판인의 축제마당: 인터내셔널 북 페어
매년 10월 독일 프랑크 푸르트에는 독일 서적유통협회 주최로
맥밀란, 펭귄, 이와나미 등 세계의 거의 모든 주요 출판사, 편집인들과
작가, 유통업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책의 올림픽으로 명성높은
인터내셔널 북 페어 INTEMATINAL BOOK FAIR를 개최한다. 이곳은 단순한
출판물 거래장소가 아니라, 세계 지성계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출판 및
저술 방향을 결정 짓는 지구촌 쇼 윈도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는 여느 출판 행사와는 달리 매년 각기 다른
테마로 열리는 게 큰 특징이다. 예컨대 1992년도에는 멕시코의
출판문화를 주제로 열렸으며, 1993년에는 플랜더스와 네덜란드를
주제로, 1994년에는 브라질을 주제로 열렸다. 해마다 전시회에는
전세계 100여 개국의 8천여 개 출판사가 자신들이 만든 35만여 종의
책들을 산더미같이 출품하며, 평균25만 명의 이상의 관람인들이 이를
보기 위해 모여든다. 이때마다 인구 150만 명의 프랑크푸르트는 모든
호텔과 민박시설이 동나는 한바탕 북새통을 치르곤 한다. 1994년
대회에는 105개국 8,628개사가 참가해, 열띤 판촉전을 벌였다.
이곳에 모인 각국 출판인들은 세계의 출판추세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서 팔릴 만한 책을 골라 출판권을 사고팔고, 작가와의
저작권과 각종 아이디어를 흥정하며, 자국 문화를 홍보한다.
심사위원회가 선정한 올해의 최우수 출판물에 대해서는
독일서적유통협회가 '평화의 상'을 수여한다.
인터내셔널 북 페어는 1993년 제 45회 대회부터 독일통일의 여세를
몰아 과거 사회주의권 최대의 책 축제장이던 라이프치히 북 페어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한층 내용이 풍성해졌다. '프랑크푸르트는 전자화로
간다.'는 캐치프래이즈를 걸고 전자출판사들이 CD롬과 CD-I등
멀티미디어 상품을 대거 출품했을 뿐만 아니라, 소니 같은 세계적
전자회사들까지 디스크맨등 각종 전자출판물들을 앞다퉈 출품해
출판계의 거대한 변화를 가늠케 하고 있다.
전시회에 출품되는 멀티미디어 출판상품들도 기존의 백과사전류에서
벗어나 관광, 요리, 종교, 스포츠, 섹스, 학술, 어학등 전분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출판인들은 오는 2000년까지 멀티미디어 상품의
출판시장 점유율이 최소한 18p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더욱이
멀티미디어 상품 출품국도 미국, 유럽, 일본 등 서방선진국 중심에서
벗어나 싱가포르, 홍콩, 브라질, 이스라엘 등으로 다양화돼 이같은
추세가 범지구적 현상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한편 인터내셔널 북 페어 외에 해마다 전세계에서 매년 열리는
150개의 국제 전문전시회 중 116개가 독일에서 개최되고 있을 정도로,
독일은 전세계 전시문화 파워센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