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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檀)’과 홍익인간에 대한 재해석
이찬구 (철학박사)
<목차> 1. 문제제기 2. 단군과 단군민족주의 3. 단(檀)과 홍익인간의 관계 4. 결론 |
1. 문제제기
우리 민족에게 깃든 평화의 빛은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다른 민족의 개국신화가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면, 우리의 개천신화는 비폭력적 평화의 정신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를 우리는 홍익인간이라는 개천이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화려한 이념에도 불구하고 우리민족은 현재 남북 분단이라는 비홍익적(非弘益的)이고 비평화적 체제에 살고 있다. 오늘의 남북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하위구조처럼 뗄 수 없는 관계이다.지금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 강대강(强對强)구조를 이루고 있고, 남과 북도 강대강(强對强)으로 적색경보가 켜져 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북한, 중국과 한국도 강대강(强對强)의 구조로 극한 대결을 보이고 있다. 필자는 미국, 중국, 한국, 북한을 동북아평화의 4대 주춧돌[四基礎]이라고 평하고, 이들 4기초의 강온(强穩)의 역학관계에 의해 동북아의 평화가 결정된다고 본다.
그런데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세계 열강에 둘러싸여 있던 조선에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바로 민족적 고유종교(이하 ‘민족종교’로 통칭함)의 등장이었다. 동학과 대종교라는 민족종교는 민족의 암울기에 혜성처럼 나타나 민족해방의 등대가 되었고, 민족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동학운동과 단군운동은 다 같이 민족의 고유성에 바탕을 두고 이를 지키기 위해 민족적 투쟁에 적극적이었다. 그 고유성의 바탕은 홍익인간 정신의 근대적 부활이었다.
그러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홍익인간의 정신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단순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라는 기존의 해석에 얽매여서는 새로운 지혜를 모을 수 없다고 본다. 홍익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해석과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 사상을 찾아 이를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접목시켜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원초적인 해석을 필자는 손성태가 멕시코 원주민(동이족의 일파인 맥이족)의 언어에서 찾은 ‘다다살리’(tlatlazali)에 주목하여 홍익인간의 의미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 ‘다다살리’(tlatlazali)라는 말은 그들의 고수레 풍습에서 나온 것으로 ‘모두 함께 살자’는 뜻인데,우리의 홍익인간의 의미와 매우 흡사함을 느낄 수 있다. 이에 필자는 ‘다다살리’의 ‘다’의 어원을 분석하여 단(檀)의 의미를 파악하고, 다다살리와 홍익인간의 중간에 있는 ‘단’의 철학적 의미에 주안을 두고 ‘弘益人間(홍익인간)’의 현재적 의미를 재해석하려고 한다.
2. 단군과 단군민족주의
1) 20세기 단군운동과 항일무장투쟁
홍암 나철은 1863년 12월 2일 전라남도 낙안군 남산면 금곡리(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부락)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자는 문경(文卿)이고, 호는 경전(耕田또는 經田)이다. 어린 시절에는 이름을 두영(斗永)이라 하였으나 과거와 벼슬길에 오르면서 인영(寅永)이란 이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나인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09년 대종교를 창시하면서 이름을 외자인 철(喆)로 바꾸고, 호(號)또 홍암이라 하였다.
홍암은 1909년 1월 15일 자시, 서울 재동 취운정 아래 육칸 초옥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뒤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함으로써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이 자리에는 나철, 오기호, 강우, 유근, 정훈모, 이기, 김윤식 등 수 십인이 참례하였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단군교를 빙자하여 친일행위를 하므로 홍암은 1910년 7월 30일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로 개칭하였다. 교명을 바꾼 직후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그는 활동지역을 만주로 넓히고 1914년 5월 13일에는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이전하였다. 아울러 서울에 남도본사, 청파호에 동도본사를 설치하는 한편,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도 교구와 외도교구를 선정함으로써 교구제도를 확대·개편하였다.
대종교는 종교활동과 교육을 모두 항일운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1918년 서일, 김동삼, 김좌진, 유동열 등 대종교인 39명이 임오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서일이 조직한 중광단, 윤세복이 조직한 흥업단 등이 무장반일투쟁에 앞장섰다. 1920년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되어 김좌진, 이범석 등을 이끌고, 만주의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독립군 1천8백 명으로 일본군 3개 여단과 맞서 일본군 사상자가 3천3백인데 비해 독립군은 60명이 희생되었을 뿐이다.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대종교가 국조단군을 숭배하고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고 하여, 본래 국수적, 배타적이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대종교의 삼일철학은 민족적 주체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균형 있게 추구하였으며, 다만 침략자인 일제에 대한 무력투쟁은 민족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투쟁이었다.
일찍부터 만주로 망명온 민족지도자들은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만주 땅에서 활발히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자금을 모아 토지를 매입하고 이주민을 받아들여 한민촌을 건설하여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였다. 이어 각지의 청년들을 모아 민족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3.1혁명은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독립전쟁의 때가 다가왔다고 판단하고,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해갔다. 특히 대종교는 만주로 총본사를 옮기고, 1910년 10월 간도 삼도구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간도지방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할 목적이었다. 우선 동창학교, 명동학교 등을 설치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군사교육을 병행하는 한편으로 국내에서 만주로 들어온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결성하였다. 중광단은 1911년 서일을 중심으로 한 대종교인들과 의병들이 규합한 청년조직이다.
1918년 중광단을 중심으로 한 무오독립선언, 이듬해 3.1운동의 영향으로 활기를 띈 중광단은 대종교에서 범종교적인 단체로 승화하여 새로운 대한정의단을 결성하였다. 기독교를 제외한 유림들이 참여하였고, 일제에 혈전을 주장하였다. 대한정의단은 이어 김좌진, 이범석 등이 가담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군정부(軍政府)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임정의 명령으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라 개칭함으로써 이름 그대로 정부의 공인 군사기관이 되었다.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그밖에 김규식, 이범석 등이 초대 임원을 맡았다. 조직을 갖춘 대한군정서는 주민들에게 징병제를 실시하여 청장년을 소집하였고, 군자금을 조달하여 체코제, 러시아제 무기를 구입하였다. 대한군정서는 양봉산에 병영(兵營)을 건설하고 연병장을 만들어 본부로 삼았다. 김좌진 등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도음을 요청하여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박녕희, 백종렬, 강화린, 오상세, 최해, 이운강, 김훈 등을 비롯한 다수의 훈련장교들과 각종 교재를 공급받고, 모집한 장정 중에서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초중 등 교육을 받은 신체 건강하고 애국심이 강한 우수 청년 300여명을 선발하여 속성 사관교육을 하여 일당백의 최정예부대를 만들었다. 소총은 물론이고 기관총과 박격포까지 갖춰 중무장을 하였다.
일제의 한국강점 이후 국내에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북간도로 이주하였고 가난한 농민들도 살 길을 찾아 북간도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북간도지역의 한인이주민수는 급속히 증가, 1912년에는 16만 3천명, 1919년에는 27만 9천여 명, 1925년에는 34만 6천여 명, 1931년에는 39만5천여 명에 달했다.결과 1910년대에 이르러서는 북간도지역의 한인 집거구를 중심으로 한인사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는 한국의 민족종교가 국외로 전파되어 상생할 수 있는 지리적, 사회적 조건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2) 한말 단군민족주의로서의 단군운동
한말 민족운동은 크게 동학운동과 단군운동으로 대별된다. 신용하는 이 중에 단군운동에 주목하여,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의 하나의 큰 사상흐름으로서 ‘단군민족주의’(檀君民族主義) 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韓末(한말) 애국계몽운동기의 하나의 思想으로서 「檀君民族主義」 「檀君내셔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思潮가 사상계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전개되다가 그 한 흐름은 歷史로 흘러들어가 申采浩(신채호) 등의 「古代史」의 설명에 投射(투사)되고, 다른 한 흐름은 宗敎로 흘러들어가서 羅寅永(나인영) 등의 「大倧敎(대종교)」의 창건으로 投射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단군민족주의는 두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역사로 흘러들어가 신채호 등의 고대사 연구에 투사되고, 다른 한 흐름은 종교로 흘러들어가 나인영(나철) 등의 대종교 창건으로 투사되었다고 보았다.
그 후 단군민족주의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이는 정영훈이다. 그는 단군민족주의란 “단군을 민족사의 출발점으로 상정하고 ‘단군의 자손’으로의 단일민족의식을 기본으로 하여 민족정체성을 구성하며, 그 같은 인식 밑에 민족적 통합과 발전을 도모하던 일련의 의식-사상 또는 문화적-정치적 운동을 가리킨다”고 규정하였다. 이어 임형진은 6·15 선언 이후 남북 모두에게 단군민족주의는 서로를 위한 최선의 정치사상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근대적 민족주의 사학(民族史學)운동가로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를 들수 있다.신채호는 같은 민족주의 사가(史家)라 하더라도 독특한 위치에 있다. 이를 두고 유교적 사학과는 다른 단재사학(丹齋史學)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신채호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신(神)이나 혼(魂) 또는 얼 대신에 구체적인 고유한 사상체계를 중요시하였다. 즉 그는 화랑도의 사상을 한국의 고유한 것으로 보고, 이 낭가(郎家)사상의 성쇠가 곧 민족사의 성쇠를 좌우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의하면 한국사는 고유사상이 외래사상과 투쟁하는 역사로 파악하였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心的)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世界史)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朝鮮史)라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신채호는 당시의 세계정세를 제국주의 시대로 보고 있다. 그는 서구열강이 추구하고 있는 제국주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저 열강이 문명은 날로 번창하고 인구는 날로 늘어 자기나라의 토지만으로 그 생활을 하기가 어려우며, 자기 나라의 생산물만으로 그 발전을 꾀하기 어려우니, 이에 나라 밖으로 영토를 확대하고 이익을 얻으려고 미발달지역을 개척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니, 자기보다 열등한 나라는 물론 동등한 힘을 가진 나라에 대해서도 경제싸움을 걸어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당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발달과정에 따라 겪게 되는 약육강식의 경제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이 필연적 제국주의 경제전쟁을 목도한 신채호는 역사를 나와 나 아닌,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던 것이다. 신채호의 민족주의는 바로 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유일한 투쟁노선이다. 이 투쟁에서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을사늑약 이후 국권을 상실한 우리 대한을 표현하기를, “삼림(森林)이 유(有)하건마는 아(我)의 유(有)가 아니며, 광산이 유하건마는 아의 유가 아니며, 철도가 유하건마는 아의 유가 아니다”라고 통탄하면서 국가는 있으나 국권이 없는 나라를 시급히 바로잡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을 통한 독립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부국강병론은 서구문물의 모방에는 비판적이다. 그는 서양의 경제, 법률, 상업 및 부국도 결국 그들의 애국심과 국사에 대한 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보고, 우리도 민족주체성과 정신적 대아(大我)를 바탕으로 애국심을 고취하고 산업과 교육을 육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 신채호는“역사가 없으면 국민의 애국심이 어디서 나오겠느냐”면서 민족사의 서술 작업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존 역사서술이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고, 역사중심의 민족주의 사관정립에 몰두한다. 그는 우리 민족사의 사통(史統)을 세움에 있어, 아래와 같이 단군을 시조로 분명히 하고 2천만 민족은 그의 자손이라 하였다.
始祖檀君(단군)이 太白山에 下하사, 此國을 開創하고 後世子孫에 貽(이)하시니, 三千里疆土(강토)는 其産業也며, 四千載歷史는 그 譜牒(보첩)也며, 歷代帝王은 其宗統(종통)也며,
이어 신채호는 단군을 고구려 왕조의 직접 조상이라는 관점에서 ‘단군 →부여·고구려로 양분 → 부여 멸망, 고구려 재통합’으로 보았으며, 특히 묘청을 진압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우리의 옛 사서를 없앤 후에, 조선의 강토를 줄이고, 조선의 문화를 유교화 하며, 외국에 구걸이나 하는 외교가 전부인 양하여 철저히 사대주의로 꾸며놓았다고 지적하였다. 신채호는 우리 역사에서 김부식에 의해 자주적인 국풍파(國風派)가 패하고, 사대주의가 승리한 것을 ‘1천년 이래 제1대 사건’이라고 비탄해 하였다.신채호는 초기에는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했으나, 3·1운동 이후 민중의 위대한 힘을 발견하였다. 여기서 신채호 사상은 ‘신국민설(新國民說)’과 뒤에 나오는‘민중혁명론’으로 구체화된다.
먼저 신국민설은 말 그대로 한 나라의 국가경쟁의 원동력은 한두 사람의 영웅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 신국민설은 결국 부국강병의 근대적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국민인 신국민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며, 그들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이다.그런데 신채호는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을 보지 못하고 망국(亡國)을 당하자 국민이라는 말 대신에 ‘민중’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바로 조선혁명선언(1923년 작)은 민중을 혁명의 대본영으로 삼은, 민중에 의한 무력혁명론이며, 민중에 의한 무장독립전쟁론이다. 그렇지만 그는 무력주의를 절대적이 아닌 제한적인 의미에서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결국에는 민족주의와 인류공영을 양립시키고자 하였다.
3) 대종교의 단군민족주의
김동환은 대종교와 단군민족주의에 대해 ‘대종교의 성립과 단군민족주의’와 ‘대종교의 독립운동과 단군민족주의’라는 두 측면에서 대종교의 단군민족주의를 거론하고 있다. 특히 대종교의 성립에 있어서 「단군교포명서」가 지니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대표적인 민족종교이자 한말, 일제기에 전개된 단군민족주의 운동의 주역의 하나였던 대종교의 중광을 견인한 공헌이다.
둘째, 후대에 와서 민족상징들로 정립된 관점들이 많이 나타나는 점이다. 즉 단군 건국에서 비롯된 단기연호라든가, 10월 3일 개천절이 이 포명서에 제시되어 있다.
홍암 나철은 서기 1908년 말에 일본으로부터 귀국하여 한배검께 보국안민(輔國安民)·제인구세(濟人救世)의 대원(大願)을 기원하고, 나아가 신교(神敎)의 중광과 종도(倧道)의 재천(再闡)으로 민족의 운명과 동양평화를 증진시키려는 뜻에서 1909년 1월 15일에 나 철·오기호(吳基鎬)·이 기(李沂) 등 수십 명이 모여 서울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 6간(間) 초옥(草屋) 북벽(北壁)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하여 단군교를 한국의 종교로서 '중광(重光)'하였다.
이 「단군교포명서」에는 종교적 단군민족주의의 토대가 되는 종교적 체제, 즉 교조관, 교리관, 교사관 등을 엿볼 수 있는데, 교사관적 측면에서 「단군교포명서」에는 단군신앙의 흐름이 단군시대로부터 부여와 고구려, 발해와 고려를 거쳐 조선의 이태조에게 까지 금척을 내린 주체가 단군임을 연결시킴으로써 조선조 까지 연면히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면에서 값진 의의를 갖는다.
또한 10월 3일을 단군개극입도지경절(檀君開極立道之慶節)이라 한 데서 개천절이 부활하는 계기가 된다. 개천절은 종교적 기념일을 넘어 범민족적 기념일로 승화되어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다음은 「단군교포명서」의 처음과 마지막 단락이다.
오늘은 오직 우리 대황조 단군성신께서 나라를 여시고 한얼이치의 그 진수를 펼치시어 깨우침의 참다운 도리를 세우신 지 4237년이 되는 경절(慶節)이라, 우형(愚兄) 등 13인이 태백산 대숭전(大崇殿)에서 본교 대종사 백봉신형(白峯神兄)을 찾아가 절하여 뵙고(중략) 오호라! 물을 마시면서 그 원천을 생각하고, 나무를 심으면서 그 뿌리를 북돋아 주어야 하나니, 이는 본교 신봉자들이 당연히 해야할 도리이며 당연히 행하여야 할 일이요, 쉽게 알게 되는 이치이며 쉽게 행할 일이라. 믿는 마음을 독실히 가지고 행하여 오직 한 정성으로 대황조님을 숭봉하소서! 4천여년 오랜 가르침의 숨겨졌던 것이 다시 돌아와 나타나는 밝음이 또한 오늘에 있을 지며 천만억 형제 자매의 화가 물러가고 복이 돌아옴이 역시 오늘에 있으니, 오호라! 모든 우리의 형제자매들이여! 단군개극입도 4237년 대한 광무 8년 갑진 10월 3일
「단군교포명서」는 본래 1904년 음력 10월 3일 두일백 등 13인이 백두산에 있는 대숭전(大崇殿)에서 대종사(大宗師) 백봉과 함께 포명한 것이다. 그 내용은 "금일은 유아(惟我) 대황조단군성신(大皇祖檀君聖神)의 4237회 개극입도지경절야(開極立道之慶節也)라…"라는 글로 시작하여 그 끝도단군개극입도 4237년으로 마친다. 이처럼단군 탄강의 역사, 단군교의 신앙유습, 단군교를 신봉하여야 할 이유 등을 설명하고, 우리 민족은 같은 민족으로서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 겨레가 하늘의 자손임을 강조하고, 단군교를 오로지 정성으로 믿고 받들어서 구교의 중광은 물론, 천만 형제자매가 복록을 누리게 되기를 호소하고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서기 1904년을 단기 4237년이라고 분명히 밝힌 점이다. 이는 『동국통감』에서 말한 단군의 무진년 건국에 따른 것이다.
그 다음은 대종교의 무장독립운동에서 단군민족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양대 독립기구인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에 참여한 독립군들이 모두 단군성조를 받들고 단군민족주의로 철저히 무장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점은 앞에서 열거한 중광단 등의 활약에서 본 바와 같다. 특히 단군민족주의는 문화적 투쟁의 배경으로 작용하여 혁혁한 문화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시경, 이극로, 최현배의 한글운동, 이병기의 시조운동, 김교헌의 신교사관에 의한 역사복원운동, 신채호의 낭가사상, 박은식과 정인보, 신규식의 국혼운동 등등에서 대종교인이 앞장서 펼친 것은 단군민족주의의 투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최근 발굴 자료에 의하면, 대종교는 대사회주의적(大社會主義的)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종교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홍익인간 재세이화이다. 이는 일면 사회주의와도 유사하다. 홍익인간이 철학성을 강조한 말이라면, 사회주의는 정치성을 중시한 점이 차이가 난다. 예컨대, 신채호, 신백우, 조소앙, 안재홍 등의 사상적 배경에는 이런 대종교의 이념이 정치성에서 영향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영우는 김교헌의 『신단실기』를 지적하며, “대종교 신자의 입장에서 단군 또는 삼성(三聖)에 대한 깊은 종교적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여 편찬한 것이면서도, 어디까지나 문헌적 자료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배달족의 역사를 서술하려고 노력”한 것과 “단군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무리하게 날조하지 않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밝혀낸 단편적인 연구 성과를 광범하게 수집 정리하고, 여기에 대종교적인 단군민족주의 세계관을 투영시켜 새로운 상고사의 체계를 수립”했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권덕규의 『조선사』는 조선의 영역을 태백산(백두산)의 북쪽인 송화강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동북부 지역의 대부분과 반도 전체를 조선의 영역으로 포함시켰다. 그리고 조선의 종족은 상고시기 6대 문명을 시작한 환족(桓族)이라고 하고 이 환족을 천족(天族)이라 규정했다.단군시대에서 환족의 범위를 숙신, 옥저, 예맥, 고죽, 한(韓)과 한족(漢族)과 섞여 살고 있는 예, 견, 방, 람 등과 청구, 주두, 도이, 래이, 우이 등 최소 14개 종족을 환족(桓族)으로 포함하여 단군의 종족으로 규정하였다.또 권덕규는 인민이 천제(天帝;皇祖)의 후예임을 믿고 배천(拜天) 숭조(崇祖)의 신앙을 하였다고 보았다.이처럼 조선의 종족을 환족 또는 천족이라 하고, 그 역년을 5~6천년이라 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 있다. 이는 처음으로 신시(神市)시대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단(檀)과 홍익인간의 관계
1) 단(檀)에 대한 새로운 접근
1894년 일본의 백조고길(白鳥庫吉)은 “단군의 사적은 원래 불교에 근거한 가공의 선담(仙譚)”이라고 비하했다. 환인과 단군이라는 왕호가 다 불교에서 차용한 말이라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단군이라는 명호가 불교설화의 차용이 아니라, 우리말 고대어에서 나온 것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안호상은 『계림유사』등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단군(檀君)의 단(檀)은 밝달이고, 단군은 ‘밝달임금’이며, 밝달나라는 배달나라라고 했다.양주동도 단군왕검은 ‘박달 님ᄀᆞᆷ’, ‘ᄇᆞᆰ달 神君(신군)’으로 보았다.북한의 강인숙은 단군을 ‘박달임금’으로 보고, 그 박달을 ‘불산’으로 보았다.최근 손성태는 단군을 ‘나의 새로운 신’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 밝달 이전 최초의 단군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고, 또 단군을 어떻게 불렀을까?
북한의 리지린은 단군의 단(檀)이나 단(壇)은 모두 ‘다’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으로 보고 단군은 국왕으로서의 ‘단임금-다임금’이라는 색다른 해석을 제시하였다.리지린은 그 근거로 ‘다’를 따(地)의 고어로 보았다. 과연 이 주장은 타당한가?
먼저 ‘단’(檀)은 언어 발달과정에서 이미 ‘ㄷ’시대의 언어이다. 檀(단) 이후에 ᄇᆞᆰ의 ‘ㅂ’이 등장하지만, ‘단’ 그 자체는 ‘ㄷ’시대의 언어의 소산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단(檀)의 소리는 어디서 왔는가? ‘단’의 반음(半音)인 ‘多(다)’에서 ‘단’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말 骨大(골대)를 ‘고다’로 읽은 것에서 大(대)를 ‘대’라고 하기 이전에 또한 ‘다’로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어로 大同(대동)을 ‘다퉁’이라 소리내고, 일본어의 大山을 ‘다이센’이라 소리내고, 高을 ‘다까’라고 소리내는 것에서 檀(단)은 본래 ‘다’의 소리였고, 많다(多,다), 크다(大, 대), 높다(高, 고)의 뜻을 지닌 말로 분화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예컨대, 고구려의 지명에 개백(皆伯)을 또는 왕봉(王逢)이라고 일컬었다는 것은 ‘다 皆(개)’를 ‘王(왕)’의 뜻으로 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王(왕)으로서의 檀(단)은 다(多, 皆)에서 왔다고 것을 입증할 수 있다. 따라서 단군의 단(檀)의 어원은 ‘다’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시기에 天干(천간)을 ‘더가나/더하나/다가나/더하나’로 읽은 근거에서 天(천)을 ‘더’, ‘다’로 소리 낸 것을 확인할 수 있다.아울러 ‘다’는 ‘닫>달>다>따>땅’으로 변한 것에서 리지린의 주장처럼 땅(地)의 뜻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는 ‘하늘’과 ‘땅’을 뜻하다가 점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여 마침내 ‘왕’의 뜻을 지닌 말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어의의 발달과정상 처음에는 하늘과 땅의 뜻으로 쓰이다가 어느 순간에 ‘왕’의 뜻으로까지 전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다’는 다시 ‘다나’ ‘다누’ 등으로 ‘ㄴ’첨가현상이 일어나 변해가기 시작했다. 신라 말에 檀溪(단계)는 ‘다나구루’로 소리 냈다. ‘다나’는 檀(단)의 소리를 옮긴 것이고, 구루는 ‘내’의 뜻을 옮긴 것이다.강상원은 단군을 산스크리트어로 ‘다누 나자’(Dhanu raja; hero, king)로 해석했다. ‘다’의 다양한 변화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君(군)은 무엇인가? 리지린은 단(檀)자가 고조선어를 음사한 것이라면 군(君)자는 한문식 기록으로 추정하고, 단군(檀君)보다는 본래 ‘다임검(檀王儉)’일 것으로 보았다.하지만 고구려말로 君(군)은 ‘그므’로 그므(今勿)>검(黑)으로부터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양주동은 『지봉유설』(권16)을 인용하여 ‘君(군)은 尼音今(니음금)’이라고 했다.니음금을 줄이면 ‘님금’ ‘님검’이 된다. 신라의 왕칭인 尼師今(니사금)도 이 ‘님’에서 나온 말이다. 님(壬)의 상고음이 ‘니엄’, 고대음이 ‘니무(nimu)’로 되고, 님검은 ‘니무가마’, ‘니무거머’로 된다.북한의 류열은 尼師今(니사금)을 ‘니시기미, 니시거미’로 읽었다.서정범은 님은 ‘닏>닐>닐임>니임>님’의 변화를 거쳐 왔으며, ‘닏’의 근원적 어원은 사람으로 ‘나, 너, 누’와 같은 말이라고 했다. ‘니’는 우리 말 너(汝, 爾)에 해당하나, ‘니’와 ‘나’(我)는 같은 뜻으로 사용된 예가 있다. 그러면 두 말 중에서 어느 말이 원조일까? 상대방을 가리키는 ‘니’가 먼저일 것이다. 그 ‘니’는 어디서 왔을까? 정호완은 왕을 ‘니마>님>임’으로 보고, 니(님)의 근원을 太陽(태양), 日(일)이라고 밝히고 있다.日本(일본)을 ‘니혼, 니뽄’이라고 읽는 오늘의 일본어에서 ‘니’의 원형을 추적할 수 있다. 한자의 昵(닐), 暱(닐) 등에 그런 흔적이 남아 있다. 닐(昵)과 날(日)은 통용이 가능하다. 실제로 신라 초기에 日(일)을 泥(니)로 소리 냈다.이두문에도 닐곱의 ‘닐’을 ‘日(일)로 쓰고 있다.
이빨을 니(齒)라 한 것은 몸 중에서 가장 흰 곳이 이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檀君(단군)은 오늘날의 ‘단군’이라는 소리가 생기기 이전에 ‘다+그므’, ‘다나+그므’, ‘다누+그므’로 결합하거나, ‘다나+니시거미(니사금)’ 또는 ‘다누+니무가마’로 결합이 시도되었을 것이다. 의미상으로 ‘다(多)+검(黑)’, 또는 ‘다(多)+니(尼)+검(今, 金, 儉)’이 되었을 것이다. 즉 多(다)는 天(천)의 뜻, 尼(니)는 日(일)이므로 ‘다(多, 皆)+그므(今, 君)’, ‘다(多)+니(日)+금(今, 儉)’이 된다. 결국 ‘다(天)+니(日)+금(今, 儉)’이 되면서 檀君(단군)이란 말이 생긴다. 이 단군의 뜻은 오늘날로 보면 천일군(天日君), 또는 천일왕검(天日王儉)으로써 즉 하늘의 태양 같은 임금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있어서는 다(多, 皆)가 처음의 天(천)의 뜻이 약화되고 地(지)와 王(왕)의 뜻으로 강조되면서 단군은 천지대왕(天地大王)으로서 檀王儉(단왕검) 또는 檀君王儉(단군왕검)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본다. ‘단군’과 ‘왕검’은 동어반복이다. 정인보는 ‘검’은 천왕, 천가한(天可汗), 탱리선우처럼 당시의 지존을 가리키는 칭호로 보았다.儉(검)이전에 檀(단)의 多(다)에 天(천)과 王(왕)의 뜻을 동시에 함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남선은 “단군(壇君)이란 텡그리(Tengri) 또는 그 유어(類語)의 사음으로서, 원래 하늘을 의미하는 말에서 변전하여 하늘을 대표한다는 군사(君師)의 호칭이 된 말”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군장(君長)의 이름에 하늘을 씌워 부른 것은 조선 고대문화의 특색의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탕그리와 텡그리와 비슷한 ‘대갈’은 곧 머리이며, 동시에 하늘이라 했다. 일찍이 탕그리(tangri)를 하늘의 뜻으로 소개한 사람은 백조고길이다.김규승은 壇君(단군)의 壇(단)자는 그 반음(半音) ‘다’ 로 읽고, 君(군)자는 마루[宗]의 ‘말’로 읽어 壇君(단군)의 古訓(고훈)은 하늘을 뜻하는 ‘다말’이 된다고 했다.이때의 하늘은 태양의 인격적 표현에 가깝기 때문에 천신(天神)이라 할 수 있다. 『산해경』(「대황동경」)에 의하면, 大荒之中(대황지중)에 大言山(대언산)이 있다고 했다. 이 大言(대언)은 말 그대로 큰 대(다), ‘말’씀 언이므로 ‘다말’이다. 즉 天山(천산)이라는 뜻이다.
「삼한관경본기」에도 王儉(왕검)은 大監(대감)이라고 했다. 이 대감의 ‘대’에는 본래 천(天)의 뜻이 들어 있다. 大(대)란 글자는 머리, 손, 발을 다 갖춘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이 때의 大(대)는 ‘크다’는 훈독(訓讀)일 뿐만 아니라, ‘대’ 이전의 음독 ‘다’라고 재해석할 수 있다. 다 皆(개)의 의미는 머리, 손, 발로써 몸의 전체를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단군의 ‘다’에는 하늘의 뜻을 원초적으로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최남선의 ‘대갈’(다갈)이나 김규승이 ‘다말’이 본래 ‘하늘’ 또는 ‘천신’의 뜻이었다는 말은 ‘대’와 ‘다’가 하늘을 뜻하고, ‘갈’이 ‘대갈박’이라는 우리말에서 곧 머리임을 알 수 있으며, 다말의 ‘말’도 머리, 마리의 줄임말 ‘말’인 것에서 인격적인 천신(天神)을 상징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늘을 뜻하는 ‘다’에서 천신을 뜻하는 다말(대갈)이 되었듯이, 하늘을 대신해 땅을 다스린다는 뜻의 ‘다그므’, ‘다나+니시거미’의 단군(檀君)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한시대의 천군(天君)이라는 호칭이 이를 반영한 말로 보인다. 천군도 ‘다그므’, ‘다나+니시거미’로 소리 냈을 것이다.
2) 단과 천지인의 왕
예를 들어 고구려 지명 ‘多知忽(다지홀)’을 나중에 ‘대곡(大谷)’으로 호칭한 것에서 ‘대’는 ‘다’의 소리에서 나온 것임을 거듭 알 수 있다. 도(道)는 중국어 ‘다오’에 ‘다’의 소리가 남아 있다. 『광주판 천자문』(1575년)에 ‘긔ᄌᆞ’ 王(왕)이라 했고, ‘님굼’ 君(군)이라 했다. ‘긔ᄌᆞ’ 王(왕)이 ‘다 皆(개)’에서 나왔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때의 다 개(皆)는 본래의 뜻이 하늘의 해를 뜻하고, 또 사람을 뜻한다. 날씨가 ‘개’다고 할 때의 ‘개’는 해를 뜻하고, 아무‘개’라고 할 때의 ‘개’는 사람이다. 사람에서 왕으로 그 뜻이 옮긴 것이다. 天(천)과 地(지)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천지와 인(人)과 왕(王)이 그 소리는 ‘다’로 통한다. 단군의 단은 ‘다’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로 볼 때, 바로 천지인과 왕을 다 포괄하고 있다. 『노자』 (25장)에도 “道大, 天大,地大,王亦大”(도도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사람)도 크다)라고 했다. 또 『설문』(大)에도 “天大,地大,人亦大。故大象人形”(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도 크다. 사람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라고 했는데, 왕(王)도 ‘다’의 소리가 나고, 인(人)은 ‘다’도 소리가 나므로 『노자』와 『설문』의 표현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단군을 천군(天君)에 이어 지군(地君), 왕군(王君), 인군(人君)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단군(檀君)은 천군(天君), 또는 천일군(天日君)의 뜻뿐만이 아니라, 천지인(天地人)을 다 아우르는 제왕(帝王)으로서 바야흐로 천하가 모두 돌아가는 ‘최고의 大王’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윤내현은 고조선은 건국부터 붕괴될 때까지 왕이라는 칭호는 없고 최고 통치자를 단군이라고 불렀으며, 단군과 한(韓, 汗)은 함께 사용되었으나 단군이라는 칭호에는 신 또는 종교지도자의 의미가 강하고, ‘한’이라는 칭호에는 정치적 의미만 있었다고 보았다.그런데 리지린이 단군이 산신(山神)이 되었다는 말에 근거하여 천군(天君)보다는 ‘지상의 군주’로서의 단군으로 국한하여 인식하였으나,신용하는 천왕이 곧 단군의 뜻이라고 보고, 『삼국유사』에서 흙토의 단군(壇君)이라 표기한 것은 지상의 천왕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사실상 삼한의 천군은 제사의 주관자였기 때문에 단군보다 하위개념이다. 『설문』도 『춘추번로』를 인용하여 王(왕)자의 뜻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이것을 보면, 단군은 태왕(太王)으로서의 천군이었지, 무군(巫君)이 아님을 알 수 있다.
王(왕)은 천하가 모두 돌아가는 곳이다. 동중서는 “옛날에 문자를 만든 사람이 세 번 획을 긋고 그 가운데를 이어서 왕이라 하였다. 세 획은 천지인이다. 이 셋을 관통하여 다스리는 자가 왕이다. 공자도 하나로써 세 가지를 관통하는 것이 왕이라고 했다.
天下所歸往也。董仲舒曰:“古之造文者,三畫而連其中謂之王。三者,天、地、人也,而參通之者王也。”孔子曰:“一貫三爲王(『설문』 王)
이런 의미에서 왕 다운 왕은 단군이고, 단군의 檀(다>단)의 ‘다’가 천지인의 관통자로서 왕호(王號)개념을 함의한 최초의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일반의 왕(王)자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 바로 단(檀)이다. 그럼에도 일부 식민사학자들은 우리 역사에 왕호의 출현이 중국보다 늦다는 것을 구실 삼아 고조선의 후진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김정배는 『삼국지』(동이전)에 나오는 것처럼,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칭왕(稱王)하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스스로 칭왕(稱王)하였다는 구절에 근거하여 B.C. 4세기경까지는 고조선이 왕호를 쓰지 못했다고 지적한다.김부식은 최고운을 지적하며 이르기를 “신라왕을 거서간이라 칭한 이가 하나요, 차차웅이라 칭한 이가 하나요, 니사금이라 칭한 이가 열여섯, 마립간이라 칭한 이가 넷이다. 그런데 나말의 명유 최치원은 帝王年代曆(제왕연대력)을 지을 때, 다 무슨 무슨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의 칭호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혹 그 말이 야비하여 족히 칭할 것이 못 된다는 까닭일까?”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러면서 “『좌전(左傳)』과 『한서(漢書)』는 중국의 역사책인데도 오히려 초(楚)나라 말인 ‘곡오도(穀於菟)’, 흉노(匈奴) 말인 ‘탱리고도(撑犁孤塗)’등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신라의 일들을 기록함에 그 방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본다”고 덧붙이고 있다. 흉노조차도 천자(天子)를 ‘탱리고도’라고 고유한 방언을 쓰는데, 왜 우리가 ‘마립간’이라는 고유어를 못 쓰겠느냐고 김부식답지 않게 주체성을 강조한다. 이런 차원에서 고조선 시기에 왕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철저하게 고유어를 쓰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경주』11권 역수(易水)와 12권 거마하(巨馬河)주변에 단산(檀山)과 단수(檀水)가 있다.역시 단군의 이름도 불교의 ‘전단(栴檀)’에서 따온 말이 아니고 우리의 고유어인 하늘을 뜻하는 ‘다나(단)’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단군의 ‘다’는 소리로는 天(천), 地(지), 大(대), 王(왕)의 뜻이 있고, 뜻으로는 ‘많을’ 다이므로 ‘많’의 ‘마’는 크다, 신성하다의 뜻이 들어있다. 예컨대, 麻姑(마고)의 ‘마’는 크다, 신성하다, 나아가 신(神)을 지칭하고, 고(姑)는 골, 고을로 성(城)을 뜻한다. ‘마고대성’의 ‘마고’와 ‘대성’은 동의어이다.
3) 단과 천지인의 홍익인간
여기서 단(檀)과 왕(王)의 관계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송사(宋史)』 (卷490 열전 第249)에 층단국(層檀國)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층단국은 셀주크투르크(Saljūk Turks)인들이 건립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아라비아반도에 있었다고도 하는데, 1071년에 처음으로 중국과 교역이 이루어졌다. 당시 층단(層檀)은 Al-Sultan(蘇丹)의 음역으로, 왕(王)이라는 의미였다고 한다.단(檀)에 천지인 삼재관통의 왕호개념이 이미 들어있었음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김정배의 칭왕설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신채호는 단군을 대단군(大壇君)왕검이라고 칭했던 것이다.실제로 삼국시기에 天干(천간)을 ‘더가나/더하나/다가나/더하나’로 읽은 근거에서 天(천)을 ‘대’이전의 ‘더’, ‘다’로 소리 낸 것을 확인할 수 있다.아울러 ‘다’는 ‘닫>달>다>따>땅’으로 변한 것에서 땅(地)의 뜻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다’는 하늘 땅의 모든 뜻을 다 지니고 있다. 여기서 ‘다’에는 하늘, 땅의 모든 것이라는 의미로 재해석할 수 있다. 북한의 리지린이 단(檀)은 원래 ‘다’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 같다는 지적은 참고할만하다.
그런데 손성태는 멕시코 원주민(동이족의 일파인 맥이족)이 사용한 말들을 분석하여 발표한 바 있다. 다메메, 다마틴이, ‘다다살리’(tlatlazali)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모두 ‘다’로 시작한다. 특히 ‘다다살리’(tlatlazali)라는 말은 그들의 고수레 풍습에서 나온 것으로 ‘모두 함께 살자’는 뜻인데,이 말은 우리의 홍익인간과 흡사함을 느낄 수 있다. ‘다다살리’의 ‘다’를 어원상 분석하면 하늘 ‘다’, 땅 ‘다’의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천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후대의 언어로 재해석한 말이 ‘弘益人間(홍익인간)’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홍익인간의 원초적 개념이 천지에 기초한 인간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천지인합일’사상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원뜻에 가깝다고 본다.
그러면 어째서 ‘다다살리’(tlatlazali)를 홍익인간의 뜻으로 보는가? 먼저 홍(弘)은 『강희자전』에 대야(大也)라 했고, 익(益)은 ‘더’할 익이므로 홍익은 곧 ‘대더’라고 훈독(訓讀)할 수 있다. 대(大)는 다(多)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대더’는 다시 ‘다더’가 되고, 이는 ‘다다’와 멀지 않다고 본다. 따라서 홍익의 본뜻은 천지의 뜻이며, 다다살리는 ‘천지인합일’을 뜻한다. 즉 ‘천지+인간’이 곧 ‘천지와 함께하는 인간세상’이 곧 홍익인간이다. 이때의 인간은 인간 개개인이 아니고 인간세상 즉 인세(人世)라고 본다.
특히 ‘다다살리’(tlatlazali)의 ‘다다’에는 하늘의 ‘다’, 땅의 ‘다’의 뜻을 모두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어 고수레의 풍습 이전의 원초적인 공동체의식으로부터 나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고수레의 의식을 통해 단순히 복을 비는 차원이 아니라, 정치의 목적이 천지합일이나 천지인합일을 기원한 우주의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후대인들이 한자어로 재해석한 말이 ‘弘益人間(홍익인간)’이다.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사상이나 ‘모두 함께 살자’는 ‘다다살리’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단군의 단(檀)이나 홍익(弘益)이 ‘다다살리’의 ‘다다’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하늘 또는 하늘과 땅의 뜻을 모두 지닌 말로 결국 단군의 통치목적도 우주적 ‘다다살리’(모두 함께 살자=홍익인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가 말한 단(檀)은 인간의 삶을 핵심적 가치로 여기고 있는 면에서 볼 때, 신시의 통치이념인 홍익인간의 의미와 일치하며, 오늘날의 민주주의라는 가치와도 일치하는 면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다다살리는 천지인 공동체의 이념으로, 단군의 ‘단(檀)’은 다다살리의 ‘다’에서 나왔고, 그것의 지도자가 단군이며, 그 이념이 훗날에 홍익인간으로 구체화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다다살리는 천지(天地) 의식 또는 우주공동체의식을 반영한 말로 볼 수 있다.
속언에 “하늘보고 땅보고 퉤!”라는 아이들의 말속에도 하늘, 땅에 대한 무한신뢰를 함의하고 있다고 본다.옛 사람들이 천지자연과 함께 살려는 의식의 작은 표현이 고수레였다. 또 고수레는 음식을 매개로 서로의 생명을 동일한 존재로 대한다. 그래서 사람끼리 음식을 나누는 나눔 의식을 한다. 고수레는 인간이 아닌 대상에게도 음식을 나누어주는 행위이다. 당연히 동네에서 가까운 사람이나, 찾아온 손님에게도 음식을 나누어 준다. 고수레는 욕심을 더는 덞 의식이다. 고수레는 단시간에 어디서나 누구나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신앙행위이자, 대자연을 사랑하는 열린 마음이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하찮은 동식물이나 무생물까지도 인격체로 대하는 생명 존중의 마음이다. 이것이 진정한 홍익인간의 모습이다.
일찍이 안재홍은 「신민족주의」를 설명하면서 ‘다사리’ 즉 ‘다사리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은 ‘다사리어’(모두 다 말씀하게 하여)와 ‘다살린다’(모든 사람을 다 살게 한다)의 뜻을 가진 말로 해석된다.
4. 결론
우리 전통의 고수레의 의식은 단순한 기복의 한 형태가 아니라, 천지와 합일하고, 천지인의 합일을 통한 우주의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후대인들이 한자어로 재해석한 말이 ‘弘益人間(홍익인간)’이다.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사상이나 ‘모두 함께 살자’는 멕시코 원주민의 언어인 ‘다다살리’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단군의 단(檀)이나 홍익(弘益)이 ‘다다살리’의 ‘다다’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하늘 또는 하늘과 땅의 뜻을 모두 지닌 말로 결국 단군의 통치목적도 우주적 ‘다다살리’(모두 함께 살자=홍익인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홍익인간은 천지인 공동체의 이념으로, 단군의 ‘단(檀)’은 다다살리의 ‘다’와 같고, 그것의 지도자가 단군이며, 그 이념이 훗날에 홍익인간으로 구체화되었다고 본다. 홍익에는 넓히고 더해가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박제상의 『부도지』(11장)는 홍익인간이라 하지 않고 ‘홍익인세(弘益人世)’라고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홍익인간의 ‘인간’이라는 말은 오늘날의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인세(人世)’의 뜻임을 거듭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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