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가 기독교 2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부흥을 이룩하였고,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넘기면서 한국교회의 눈부신 성장을 세계에 과시하였다.
이와 같이 장족의 발전을 한 근원적인 원동력은 바로 부흥운동에 있었다고 말을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원동력은 1907년에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로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고 질적으로 향상하여 교세가 늘어나고 교회가 불어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흥운동에 대해서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대부흥에 대해서 많은 상반된 견해를 볼 수 있다. 그 하나로 대부흥운동을 순수한 성령의 사역으로만 보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가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우려해서 선교사들이 의도적으로 교회의 “비정치화, 비민족화”를 민경배, 『한국기독교 교회사』(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3), pp. 255-256.
위해서 대부흥운동을 이끌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견해를 안고 있는 문제점과 대부흥운동이 가지는 바른 의미를 밝힘으로써 오늘날 한국교계의 부흥회의 오류와 흐름을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기독교는 1884년 알렌(H.allen) 의료선교사의 입국 이영헌, 『한국기독교사』(컨콜디아사, 1983). pp. 75-76.
으로 이 땅에 개신교의 뿌리를 내리게 된 이래로 선교 100주년을 지낸 지금까지 파란만장 했던 한국의 역사 가운데서 특히 근대사에 빛나는 획기적인 영적 활력소를 불어 넣어 준 이 1907년 부흥운동이야말로 한국교회를 세계 기독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단기간에 급성장을 이룩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부흥운동이라 할 때 이 말은 단순히 부흥회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부흥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발자취를 돌아보기 원하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현대의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고, 보다 나은 역사를 평가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배경과 경위 그리고 결과와 영향을 다룰 것이다.
Ⅱ. 부흥운동의 역사적인 배경
1. 시대적 배경
대부흥운동은 1895년을 고비로 해서 보다 노골화된 일본의 한국 지배욕에 의한 조선말 비운의 역사가 그 시대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주재용,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대한기독교서회, 1998) p. 285.
당시 우리나라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었으며 나날이 더해 가는 일제의 탄압과 압력은 쇠약해져만 가는 한국으로선 다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곤경에 몰아넣었고 이 난관을 돌파하고 나설만한 힘이 없었다. 이영헌, p. 105.
1894년 동학난 진압을 위해 청군이 개입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군대를 한국에 상륙 시킨 후 한국에서 청국의 세력을 몰아내고자 청․일 전쟁을 일으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김홍집 등 친일내각을 중심으로 1895년 갑오경장을 단행하여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 걸쳐 개혁을 감행하였다. 이 개혁을 지휘 감독한 일본은 한국 근대화에 그 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침략에 있었다. 그러나 그 해에 일본에 의해 배척되었던 민비는 친일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한 나라의 왕후인 민비가 일본 잡배들의 의해 그의 침전에서 무참히 살해당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민비는 일본 난입자들에 의해 머리채를 휘어 잡혔으며 그들에 의해 죽었고, 그의 시체는 석유불에 태워졌다고 맥켄지(F.A.Mckenzie)는 전하고 있다. F.A.Mckenzie, The Tragedy of Korea, London: Hadder & Stoughton, 1908, pp. 63-64.
일본인들은 고종의 어깨를 밀추었고, 태자의 머리를 끄는 등 일국의 국가권위의 입장에서 보아 도무지 있을 수 없는 난폭한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으로 다시 친일내각이 조직되었으나, 국모 피살이 민심을 극도로 자극하였고, 이것이 반일 감정으로 변하였다. 1895년은 한국사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들이 많은 해이다. 을미사변, 청․일전쟁, 전쟁으로 인한 콜레라발생, 백정 박씨사건, 춘생문 사건, 등에 이어 다음 해인 아관파천이 있었다. 이로부터 일본과 러시아는 한국과 만주를 놓고 침략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었으며, 마침내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터지자 한국은 국외 중립을 선언 하였으나, 일본은 병력으로 위협하여 1904년 2월에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간섭을 합리화했고,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점유 할 수 있다.(제4조), 양국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본 조약 취지에 의반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제5조)”등의 조항을 포함한 6개 조항으로 된 한일의정서를 강압적으로 한국으로 하여금 수락케 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진출을 막으려는 미국, 영국과의 비밀협약, 또는 동맹 등으로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의 지배에 있어서 모든 방해 세력을 제거하였으며, 일본이 한국 지배를 합법적으로 구체화 시킨 것은 같은 해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 이영헌, p. 106.
을 맺음으로서 한국은 독립 국가로서의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였다. 그로 인해 백성들의 분개는 극에 달하였고,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써서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동한 대신들을 성토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이틀 전에 고종이 헐버트(H.B.Hulbert)에게 “한국이 자주적 정부를 보존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라는 진정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백낙준, 『한국 개신교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pp. 283-284.
분격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조약무효를 부르짖었고 5족 규탄의 소리가 비등하였다. 유생들과 전직 의정대신 조병세, 민영환 등 관원들이 조약폐기 운동을 벌였다. 고종황제도 누구보다도 이 조약을 통탄하였으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도 실패로 끝나고, 고종은 그 책임을 지고 퇴위하게 되었으며, 일본은 한일신협약을 맺어 일본인 통감에 의한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영헌, p. 108.
전 국민의 호소도, 피의 항거도, 아무런 효력을 보지도 못 했고, 모든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치적으로 망국의 비운을 맛보아야했던 민족은 경제적으로도 착취를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망향의 길에 올랐었고 깊은 좌절과 암흑만이 나라 전체에 감돌았다.
2. 부흥운동의 두 가지의 발단
1) 1903년 원산기도회
대부흥운동의 기원은 원산 선교사들의 기도회였다.
1903년 겨울 한국을 두 여선교사가 방문하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중국주재의 남감리회 여선교사 화이트(M.C.White)였고, 다른 한 사람은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로 둘이 자주 모여 선교사들 사이에 부흥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다가 원산에 있는 선교사들의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갖기를 제의하여 모임을 화이트 선교사가 인도하는 기간 중에 한 선교사가 요한복음 14:12,14, 15:7, 16:23절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 오순절 성령체험을 설교하였다.
다음 주일 예배 후 한 신자가 그의 아내를 돌보지 아니하여 죽게 한 죄를 자복하였다. 이영헌, pp. 107-108.
그 날 저녁 중국에서 선교하던 스칸디나비아 선교연맹의 푸란손(Rev.F.Franson)목사가 내한하여 하디(R.A.Hardie)의 집에 와서 한 주간 기도한 후 원산에 있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회까지 합하여 창전교회에서 한 주간 기도회와 성경공부를 하였다. 이영헌, p. 109.
이때 캐나다에서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온 하디(R.A.Hardie)선교사가 1898년부터 남감리회 선교부에 가담하여 강원도 북부에서 활동하던 중 이 집회에 참석하여, 성령체험을 얻고 나자, 동료선교사 앞에서 자신이 몇 해 동안 애써도 결실을 얻지 못한 원인을 고백하였다.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장로회신학대학교, 1997), p. 244.
그는 그 다음 주일에는 한국인 교인들 앞에 서서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심정으로 내 자신의 교만함과 신앙 없음을, 그리고 이렇게 되어버린 나의 잘못을 고백한다.” 그의 실패의 원인은 한국인과 마음과 마음의 상호교통이 없었다는데 있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과 거리를 두고 관계함으로 인해서, 그들의 선교가 결실을 얻을 수 없었다. 이 때 그 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하디의 적나라한 죄의 고백과 성령의 충만한 은사를 체험하는 것을 목도하고 그들도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어 부흥의 불길이 서서히 불붙기 시작하여 한국인들은 하루 종일 성경 공부와 기도회를 가졌고 서로의 죄를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사람들이 간증하는 내용은 지금까지 기독교가 이렇게 개인적으로나,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것을 느끼지 못 했다”는 것이다. 차종순, 『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와 교회 성장』 (목양사, 1985), p. 260.
이듬해 1904년 정월 원산의 집회는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캐나다 선교사 럽(A.F.Robb)은 “특은(特恩)을 받아 다일간(多日間) 금식통회(禁食痛悔)하며 가로상(街路上)에서도 간구불절(懇求不絶)”하여 성령의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이런 은사의 체험은 원산을 중심한 일정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다. 김인수, p. 245.
캐나다 선교사 럽과 전계은(全啓恩)은 은혜를 받아 가슴을 치며 통회 전도하였고 민경배, p. 251.
,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역시 원산 거리를 누비며 은사를 선포하였다. 양주삼, 조선감리교회, 1926, p. 61
1906년 여름 하디선교사 주도하에 제직 사경회 사경회(査經會)는 네비어스 선교 정책 중 유급 전도자들과 지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반으로 시작된 것이다. 1892년부터는 평신도들에게도 성경을 가르치는 사경회로 그 형태가 바뀌었다. 사경회는 보통 일주일에서 10일간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가 열렸는데, 이 때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으며 어떤 사람은 40일동안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던 중 이상을 보기도하였다. 그리고 럽선교사의 집에서 3-4명이 모여 기도 중에 통곡하는 소리가 마치 성가와 같았고, 또 중국 양자강 연안에서 참석한 고(高)요한선교사는 언어가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上, 1968, p. 179.
원산기도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뜨거운 역사의 소식을 전해들은 한국교회들은 하디와 원산출신 기독교인들을 송도, 서울, 제물포, 평양 그 외 각지에서 전도집회, 부흥집회에 초청을 했다. 이로 인해 선교사들이 먼저 부흥되었다. 차종순, p. 260.
1906년 8월 하디선교사가 요한一서를 공부하면서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겨울에 있을 사경회를 위하여 서로 기도 할 것을 약속하였다.
1906년 9월 서울에서 선교사 연례회로 모였는데, 미국의 존슨(H.A.Johnson)목사가 여기에 참석하여 영국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 소식은 평양의 한인 신자들에게 전하여졌고, 이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그와 같은 은혜 받기를 간구하였다. 김인수, pp. 245-246.
서울 집회를 마친 존슨 목사는 평양을 방문하여 장대현교회에서 주일예배 설교하게 되었다. 설교 중에 그는 조선에서 누가 교회를 부흥시킬 성령의 은사를 받겠느냐고 있으면 손들고 일어서라고 하였다. 이때 당시 신학생이며 장로로 교회를 섬기던 길선주 길선주는 1907년 6월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9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가 손을 들고 일어났다. 이 모습을 본 존슨 목사는 장차 조선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하였다. 이후 교회 분위기와 지도자들의 동태를 보고 성령의 역사가 태동하고 있음을 느낀 길선주는 본 교회에서 동기(冬期)사경회를 열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회장 그래함(Graham Lee) 선교사를 방문하고 동기사경회를 개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길진경, 『영계 길선주』 (종로서적, 1980), pp. 182-183.
. 이 집회를 위한 준비는 만전을 기했고, 신자들도 열정적으로 협력하여 평양시내는 부흥회라는 집회가 처음이었던 만큼 일반 사회에도 관심이 고조되었다.
2)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
이 새벽기도회야말로 세계 어느 교회도 갖지 않은 한국 교회 특유의 기도회로써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새벽기도회가 신앙의 양태로 자리 잡는 것은 원산 부흥운동과 평양 부흥운동의 중간으로 볼 수 있다. 기록상으로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와 박치록이 1905년부터 매일 새벽에 교회에 모여 기도한 것이 그 시초로 알려지고 있다. 길진경, pp. 183-184.
어찌 보면 공식적으론 당회로부터 허가 받은 1906년 가을로 볼 수도 있다.
그는 예수를 믿기 전에 행하던 관성교의 새벽 예불 습관이 남아 있었으므로 국가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며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다. 이에 교인들이 호응하여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길 장로는 공식적인 허가 없이 매일 수백의 교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당회로부터 정식 허가를 얻음으로써 공식적으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는 수많은 동네의 조용한 새벽을 예배당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로 깨우기까지 발전하였다. 김인수, pp. 246-247.
사실 그 당시에는 대중적으로 매일 새벽기도회를 계속한 것은 아니었고, 그 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겼으며, 교회의 사정에 따라 집단적으로 새벽기도회를 가졌다 길진경, pp. 121-122.
. 이것이 1906년 동기사경회 때 정식 집회로 개최되게 되었고, 그 이후 한국교회의 영속적인 집회가 되었다. 길선주 장로가 평양에서 한국 최초로 시작했던 새벽 기도회의 뜨거운 열정이 또한 대부흥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고, 부흥 운동을 계기로 전국에 새벽기도회가 확산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덕주, 『초기 한국 기독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p. 99.
Ⅲ. 1907년 부흥 사경회
1907년 1월 6일 주일
마침내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연합한 대사경회가 열렸다. 이 사경회는 열흘 동안 계속 되었는데, 낮에는 성경공부를 했고 밤에는 특별전도 집회를 가졌으며 선교사들은 정오에 기도회를 가졌다. 길선주 장로가 설교를 하였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힘의 임재에 압도되어 큰 충격에 떨었다. 이만열 외 7,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2), p. 249.
메시지의 내용은 성도생활과 성령의 역사, 죄의 회개와 영혼의 구원으로 몰두되어 가고 있었다. 남자만도 매일 1,500명이나 모였기 때문에 자리가 없어 여자들은 밖에 자리를 만들 정도였다. 이영헌, p. 110.
그래서 여신도들은 각 교회에 분산해서 모이게 하였고, 남여중학교와 초등학교 학생들은 각 학교강당에서 모이게 하였다. 김양선, 『한국 기독교사연구』 (기독 교문사, 1971), p. 86.
개회 첫날 2천여명의 신자들이 모여 은혜스럽게 진행되었으나, 처음부터 성령의 은사는 쏟아지지 않았고, 며칠 평범한 집회가 계속되었다.
1월12일 토요일
블레어(William Blair) 선교사가 고전 12:27절을 본문으로, “공동체 의식의 감화”란 주제로 설교하였다. 참석 교인들에게 각별한 감동을 주었다. 이만열 외 7, p. 249.
1월 13일 주일
저녁집회에 모두가 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참석 하였으나, 그 날 집회는 이상하리 만큼 잠잠했다. 마치 태풍전야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김중기, 한국교회의 성장과 그 요인분석, 한태동교수 회갑 기념 논문집, 신학논단, 제 16집 p.274.
.
1월 14일 월요일
아침에 부흥회를 지도하는 선교사들이 모여 간곡한 기도를 올린 바 있는데, 저녁에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설 때 확실히 체감으로 거기서 신의 임재를 압도당하듯 느끼고 있었다. 그 날 비로서 부흥회가 무르익었다. 민경배, pp. 252-253
리(Graham Lee)선교사가 짧게 설교한 뒤 곧 통성기도를 할 것을 제의하였다. “통성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통회의 울음은 설움의 폭발이라기보다는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어 넘치는 영혼의 찬양의 물결 같았다.”라고 리 선교사는 믿었다. 이 때 리 선교사의 요리사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거짓행동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으며, 교회의 지도자급인 강씨와 김씨가 서로 화해하며 강씨가 김씨에게 당신을 미워했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고백할 때, 온 회중에게 감명을 준 은혜로운 장면이었다. 집회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으나, 날이 몹씨 추워 냉기가 스며들자 일단 폐회하고 교인들을 해산시켰다. Graham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ung Yang Korea, pp. 363-364.
이 날을 직접 경험한 블레어 선교사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그때 일은 형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결코 혼란이 아니었고 영과 성(聲)의 엄청난 조화였다고나 할까, 걷잡을 새 없이 터져 나오는 기도의 맥이 온 영혼들에게 통하여 폭발되는 감격이었다. 나에게는 그 기도가 마치 큰 폭포소리처럼 들렸고, 또 그 기도소리가 바다의 파도처럼 하나님의 보좌에 부딪히고 울려 퍼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여럿이 외쳤던 소리였건만 기필코 하나였다. 그것은 유일하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 한 분 하나님께로 들리움을 받는 체험이었다.” W.N.Blair, The Korean Pentecost and other Experience on the Mission Field, New York, 1908. p. 71.
1월 15일 화요일
선교사들은 정오 기도회에 모여 월요일 밤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남은 일정에 더 큰 은혜를 내려 달라고 간곡하게 기도하였다. 그날 저녁에 성령의 역사는 놀랍게 나타났다. 길선주 장로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하고 외쳤을 때 사람들의 마음 속에 큰 충격과 변화가 일어났다. 이영헌, p. 110.
설교가 있은 뒤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고 했으나, 6-7백명이 남아 철야기도를 하였다. 한국기독교회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Ⅰ』 (기독교문사, 1999), p. 271.
리(G.Lee)선교사는 이날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월요일에 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집회를 인도했다. 가장 은혜가 많은 우리의 한국인 설교가 길장로의 설교가 있은 뒤에, 집으로 가길 원하는 사람은 돌려보내고, 육백여명이 남아서 계속 기도회를 가졌다. 이 집회는 월요일 저녁집회와 흡사했지만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훨씬 더 강력하였다. 몇몇 선교사들은 김씨와 주씨를 위해 특별 기도를 하였는데, 김씨가 갑자기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자신은 다른 형제들을 질시했으며, 특히 블레어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한 죄를 회개 고백하고 그 자리에 거꾸러졌던 것이다.……… 이날 저녁에 가장 뛰어난 일은 한 대학생의 기도였다. 그는 격렬한 음성으로 기도했는데, 그런 기도는 나로서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중략) 그는 음란과 증오, 특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 뿐만 아니라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는 온갖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었고 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 우리는 그 순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 김양선, p. 86.
평양부흥회는 9일째인 화요일 저녁 집회로 일단 끝을 맺었다.
1월 16일 수요일
장대현 교회에는 수요기도회가 열렸는데, 이 곳에서도 성령임재와 통회자복은 계속되고 블레어 선교사가 인도하였다.
Ⅳ. 평양과 기타지역의 부흥운동
이러한 대부흥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 선교사들은 사람들이 감정에 흘러서 참되지 못한 동기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하여 의심스럽게 여겼으나 얼마 안 되어 사람들이 진정으로 죄를 통회 자복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 운동을 심각하게 관찰한 사람들은 이 현실을 한국인의 비정상적인 심리적 기질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와 같이 대부흥의 불길은 뜨겁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평양 전역에 확산하여 번져갔다.
먼저 평양 신학교로 그 부흥의 불길이 번져, 4월 1일 개학한 신학교는 4월 6일의 부흥집회에서 강렬한 성령체험의 현상이 일어났다. 선교사 맥쿤(G.S.McCune)은 “장차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될 사람들이 성신의 불로 그들의 죄가 모두 태워져 버림을 체험하였다.” 이만열 외 7, p. 252.
고 할 정도였다.
숭실대학과 숭실중학의 경우에는 벡커(A.L.Becker)의 기록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우리들은 그저 학생들의 감정을 흥분시키려 하지 않았고, 또 너무 이래라 저래라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저 예수의 십자가에 마음 모으기에만 노력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너무도 분명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학생들까지도 넘어져 통절한 참회를 하였다. 한번은 직접 세어보았다. 30명 이상의 학생들이 몇 시간이고 서서 죄짐을 벗어 버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의 약 10분의 9가 이때에 깊은 감화를 얻어 중생의 은혜를 보았다. 많은 수의 학생들이 십자가를 전하는 열정적인 전도인이 되어서 이 부흥의 불길은 온 성내와 인근 부락에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멀리 제물포와 공주에까지 전파 되었다.” 이영헌, pp. 111-112.
고 증언하고 있다.
이 외에도 김찬성이 인도하는 숭덕학교 기도회에서 3백여명의 학생들이 죄를 뉘우치고 통회 자복하였으며, 채정민의 통회로 감리교 학교 학생들도 이 부흥에 동참하였고, 평양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그 열기가 전하여졌다. 이들에 의한 집단적인 전도 운동도 전개되었다. 한국기독교회연구회, p. 272.
1907년 3월 16일에는 평양에서 부인 사경회가 12일간 예정으로 개최되었는데, 여기서도 전국 각지의 550명 여성 지도자들이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날연보(offering day)"를 하여 전도에 매진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평양의 대부흥의 중심 인물들이 각지로 흩어졌다. 리 선교사는 선천으로, 스왈른(W.L.Swallon)은 광주로, 헌트(W.L.Swallon)는 대구로,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성령의 불씨를 확산시켰다. 이영헌, p. 112.
특히 서울에서는 평양으로 사람을 보내어 길선주를 초빙하여서는 경기도 사경회를 열어 성령의 감동으로 대부흥을 일으켜 전무후무한 대 발전을 이루었다. 민경배, p. 253.
이에 관해 게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향인 서울로부터 길(길선주)을 초청하는 대표가 파견되었다. 그는 가야했고, 그들에게 설교를 해야했다. 위대한 맹인 길이여! “……선도에 발을 들여 놓은 지 5년째에 접어들면서부터 그만 시력이 흐려지고 말았다.”
장병일, 『부흥운동의 횃불』 (기독교사상, 제11권 (1966.12)) p. 72.
그는 수도의 거리를 지나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얼마나 굉장한 영향력이 수반되었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깊고 지속적인 결과가 뒤따랐는지, 심지어 레이놀즈(William D.Reynolds) 박사와 같은 보수적인 사람도 온 마음으로 그의 위대함을 시인하였다. 15년간 성서번역과 편집인으로 종사해온 이창식씨는 이 집회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참석하였다.” James S.Gale, Korea in Transition, 신복용 역, 『전환기의 조선』 (평민사, 1896), p. 122.
길선주의 서울집회에 관해서는 클라크(C.A.Clark:곽안련)목사도 보고서를 남기고 있는데, 그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음력명절을 준비하느라고 제각기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길장로가 오기 전 2주일동안 시내 각교회는 매일 저녁 기도회를 열었다. 2월 16일 길장로가 서울에 도착 하였다. 다음 날 오후 모든 교인이 연합으로 모인 집회에서 설교하고 밤에 중앙교회에서 설교했다. 첫날 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은혜스러웠다. 그 다음 날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으며 그로부터 성령의 역사는 날로 발전되었다.(하략)” 길진경, p. 197.
길선주의 서울 집회에서는 서울 중심의 교회들이 영향을 받았다. 즉, 승동교회의 큰 변화를 비롯하여, 연동교회에서는 후에 목사가 된 이명혁이 회개했고, 유성준장로도 큰 은혜를 체험했다. 감리교회인 수구문교회에서도 원산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은 정춘수와 이영화 등이 큰 체험 끝에 목회의 길로 나섰다. 이만열 외 7, p. 253.
이 부흥의 불길은 평양과 서울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나갔다.
1906년에 벌써 남감리교 선교사 저다인(J.L.Gerdin)은 목포(木浦)에서 사경회를 인도한바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성령의 위대한 강림이 교회에 내려짐을, 장로교 선교사 한 사람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저다인 목사가 성경말씀을 읽고 공의와 절제와 심판, 그리고 죄의 무서움, 그 뉘우침의 필요성을 강설하자, 죽음과 같은 정숙함이 여럿 위에 내려 덮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메스처럼 사람의 마음을 속 깊이 갈라 쪼개어서 감추어진 죄와 영의 악들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그때 교인들 모두가 다투어 죄를 통회 자복 하였으며, 힘센 어른이 어린애처럼 우는 참회의 물결이 세차게 흘렀다.……이제 그들의 얼굴은 생명으로 빛났고, 교회는 승리의 찬송을 드높이고 찬양과 영광의 종소리를 드높였다.……이 모임의 결과는 전라도 지방에 널리 그리고 깊숙이 파고드는 영향으로 작용 할 것이다.” 민경배, p. 254.
1908년 만주에서는 현상적인 종교적 부흥을 일으켰고, 1910년에는 중국 본토에까지 그 열기가 확장되었다. 이 부흥의 열기는 중국에 퍼져 나가서 만주 지방에서 일하던 중국교회 목사들이 평양에 와서 부흥회에 참석하고 은혜를 받아 본국에 돌아가서 부흥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 부흥의 열기는 봉천, 요양, 만주, 그리고 북경까지 확대되었다. 한국기독교회연구회, p. 254.
중국을 통해 선교 받던 우리나라가 오히려 역으로 중국에 영향을 준 것은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Ibid., p. 279.
Ⅴ. 백만명 구령운동
초기부흥운동은 회개와 중생으로 표현되는 영적 각성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면 이러한 내면적 체험이 외형적 행위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전도운동이었다.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전도의 주체가 선교사에서 한국인으로 확실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운동은 “백만인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 아래 시도된 대규모 신자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한국 교회의 토착적인 전도 유형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처음부터 백만명을 목표로 한 거창한 전도운동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1907년 부흥운동이 기울어져가는 때에 1909년 개성에 있던 3명의 감리교선교사 김인수, p. 263.
들은 한 주간 사경회를 열어 교인들과 함께 성경연구와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 이 사경회가 끝나고 세 선교사의 한 분인 스톡스(M.B.Stokes)는 자기 선교 구역에 있는 교인들에게 그 해의 5만명의 신자를 얻기 위한 기도회를 갖자고 권유하여 그해 9월 남감리교 선교회의 연회가 열렸을 때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20만명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구령운동에 나서기로 가결하였고, 이 운동은 서울의 선교연회 폐회 직후 개최된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공의회에서 마침내 “백만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기독교회연구회, pp. 277-278.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계획이었다. 그 때 정식으로 집계된 교인수는 전국 8천명 정도였으며, 기독교와 관련된 사람들까지 합쳐봐야 약 20만명 정도였다. 왜? 백만명구령운동을 하였던 것인가? 여기에는 당시의 역사적 정황과 밀접한 함수관계가 있었다. 즉, 선교사들은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당시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전도운동을 전개하기에 좋은 기회로 파악했던 것이다. 이 부흥운동의 계획안이 총회에서 결의되자, 그 때에 동양지역 전도 순방 중이던 미국인 부흥사 채프만(J.W.Chapman)과 알렉산더(C.M.ALEXANDER)등을 초빙하여 백만명구령운동을 위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백만명구령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일은 독특한 전도방법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가 전도운동에 참여한 사람들로 하여금 이른바 ‘날연보’(day-offering)를 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날연보란 말 그대로 전도운동을 위하여 물질적인 연보와는 별개로 자신의 시간을 연보하는, 즉, ‘헌일(獻日)’하도록 한 방법을 말한다. 이덕주, p. 101.
이 날연보 방법은 대단히 호응이 좋았다. 평양에서는 1천명의 신자가 연 2만 2천일을 날연보하였으며 재령에서는 1만일이 날연보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도운동기간에 전국에서 바쳐진 총 날연보 일은 무려 10만일이 넘었다. 한국기독교회연구회, pp. 279-280.
이 ‘날연보’는 한국과 같은 농경사회의 ‘품앗이’제도와 맥이 닿는 것으로 물질이 아닌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한국교회 고유의 신앙 양태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날연보 제도가 한층 발전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십일조회’다. 이 ‘십일조회’는 미감리회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여성 전도모임인데, 영변지방 여선교사 에스티(E.M.Estey)가 조직을 지도하였다. 날연보 바치듯 시간의 1/10을 바치겠다고 서약한 부인들은 십일조 부인이라 불렀고, 이렇게 해서 자원한 십일조 부인들을 교육하고 훈련하여 부급 전도부인으로 시골에 파송했던 것이다. 1909년 9월 영변에서 시작된 십일조회는 평양 해주를 거쳐 전국으로 확산되어 1910년 1년 동안 북쪽 지방에서만 199개 십일조회가 조직되는 성과를 보였다. 이러한 십일조회는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했던 초기 선교상황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십일조회는 경제 기반이 약했던 한국 여성들의 토착적 선교활동의 예로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열정을 증언한 예로 큰 의미가 있다. 이덕주, pp. 102-103.
시간을 바치는 날연보나 십일조회 외에 한국교회 여성들의 헌납제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 바로, 성미(誠米)제도이다. 성미 역시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신앙 양태이다. 특히 이 것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 사회에서라야 형성될 수 있었던 신앙형태이며 여성들만의 고유한 헌납 행위였다. 이렇게 해서 모여진 성미는 한국 전도인들의 생활과 빈궁한 사람들의 구제를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Ibid., pp. 103-104.
또 하나의 독특한 전도방법은 문서 전도였다. 크게 소리지르며 예수 믿으라고 노방 전도하던 방법에 더하여 대규모의 문서 전도가 행하여졌다는 점이다. 당시 수백만매의 전도지가 전국 각지에 뿌려졌으며, 70만권이 넘는 마가복음서 쪽복음이 배포되었는데, 대구에서는 1만6천부, 선천에서는 3만5천부가 뿌려졌고, 그리고 평양에서는 7만3천매의 전도지가 집집마다 배포되었다. 김광수, 『한국기독교 성장사』 (기독교문사, 1976), p. 69.
1. 백만명 구령운동의 결과
그러나 이와 같은 적극적인 전도방법과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신통치 못하였다. 1911년까지 계속되었던 이 운동은 백만명의 10분의1도 미치지 못할 만큼 저조하였다. 한국기독교회연구회, p. 281.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서 Rhodes선교사는 “백만명구령운동이 전개된지 1년만에 개종자들 가운데 대부분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이 운동은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H.A.Rhodes,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U.S.A.1884-1934.P.287.
고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이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이 운동이 한국교회 부흥사에 끼친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백만명구령운동은 중앙과 지방에서 정식으로 조직체를 구성하여 범 전도운동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점과 소위 “날 연보”제도가 생겨서 일반 농촌이나 약한 개척 교회에서는 재정이 넉넉지 못해 유급 전도인을 둘 처지가 못되므로 교인 각자가 일주일중 어느 하루나 몇 시간씩 내어 개인적으로 축호 혹은 노방 전도하는 것이었다. 이 구령운동의 표면적인 결과에 비하여 내적인 결과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신자들이 개인 혹은 집단적으로 전도운동에 시간과 물질을 바쳐 참여하는 가운데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긍심과 공동체 의식을 보다 공고하게 해주었으며, 교파간 연합으로 진행되었으므로 교파를 초월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체감을 고양시켜주었다. 한국기독교회연구회, p. 281.
교인들에게 있어서 대부흥의 뜨거운 은사체험이 막연하던 것이 구체적으로 실행함으로 영적 성장과 질적 향상으로 발전하였다. 평양주재 베어드는 이렇게 말하였다.
“복음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전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구원받은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백만명 이상의 사람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김양선, p. 90.
그러나 이 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이 운동을 민족사적 시각에서 보면 이 운동이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탈역사적인 운동이라는 지탄을 받을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회연구회, p. 282.
어쨌든 이 전도의 불붙은 열심이 한국의 미래 교회를 향해 일종의 전통처럼 이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될만한 가치가 많다고 본다.
Ⅵ. 부흥운동의 결과와 영향
1) 사회 윤리 의식 변화
이 운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게 하였으며 기독교 진리가 한국기독교인들 마음에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참된 회개와 성신의 감동,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결단하는 삶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마을에 있는 사당들을 이 부흥운동이 지난 후 헐어버리는 사례가 빈번히 나타나고, 회개를 통해 지금까지 유교적 관념으로는 전혀 죄라고 생각지 않았던 축첩, 노비소유 등의 죄악을 고백하고 축첩을 정리하고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김인수, p. 254.
그들은 회개의 눈물로서 끝낸 것이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은 그 손해를 배상함으로써 피차 화목을 이루게 되었으며, 각기 집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거나, 훔친 물건이 있을 경우에는 그 것을 갚아주었다. 그 것은 신자들에게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그렇게 했으니 온 성안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한국기독교회연구회, p.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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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세의 변화
대부흥운동 결과로 주목되는 것은 감리교와 장로교의 성격과 교세 특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부흥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던 장로교회가 교세의 안정과 발전을 기하는 반면 감리교는 보다 사회적 관심에 투철하여 감리교인의 감소나 정체가 크게 나타났다. 교세 부분에서는 장로교가 우세하였고, 서북지역으로 한국기독교 기득권을 완전 장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만열 외 7, pp. 257-258.
3) 교회지도부의 변화
평신도 중심의 한국교회의 지도부가 목회자, 즉 성직자 중심의 지도층으로 개편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증상을 몇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대부흥운동을 전후해서 감․장 교파의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본격화하였고 배출이 시작된 점이다. 둘째, 민족운동이나 사회․계몽 운동에 주안점을 두고 교회 활동에 참여했던 민족운동계 평신도 지도자들이 대부흥의 과정에서 교회와 일부 유리, 소원하게 된 점이다. 셋째, 종교적 동기에 입각, 평생을 성직에 몸 담기를 소원하는 목회 지망 청년들이 다수 생긴 점이다. 넷째, 양․감 양 교파 모두 대부흥운동을 전후하여 본격적인 한국교회 자체의 치리 조직을 갖춘 점이다. 다섯째, 교회의 종교성 강화와 성례전적 신학, 신앙 구축에 따라 종교 활동 만이 전업이면서 또한 성례집행의 권능을 공식적으로 부여 받은 성직자가 교회의 구심점으로 부상한 점이다. lbid., pp. 261-262.
4) 한국교회의 성장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이었다. 전국교회에 부흥의 물결로 인해 신자들의 전도에 힘입어 교회의 부흥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기독교 학교의 수도 증가하였으며 덩달아 학생 수도 증가하였다. 기독교 학교의 수적 증가는 많은 학생들이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 학생들로 하여금 3․1운동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김인수, p. 254.
5) 토착화된 기독교
초기 기독교인들의 개종체험에서 한국인들은 전통종교와 관계가 단절과 파괴가 아닌 연결과 완성의 관계로 승화시켜 기독교는 전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격적인 신과의 만남으로 인한 체험이 회개와 중생이라는 기독교의 본질체험으로 연결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덕주, p. 116.
초기 신앙인들의 신앙고백이나 신학 작업들은 각자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그 속에서 복음을 수용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동양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노력하였다. 이러므로, 전통 동양종교와 연속성을 유지하며 복음을 해석하였다. 결국 토착화 신학은 토착화된 신앙 체험이나 신앙양태, 그리고, 고백을 내용으로 하여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Ibid., p. 118.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된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길선주 장로가 주도한 ‘새벽기도회’, 이 새벽기도회는 세계 그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한국교회 특유의 기도회의 모습이다. 또 하나는 기도하는 통성기도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부흥운동의 결과로 통성기도라는 한국 특유의 기도방법을 만들어 내었고 새벽기도와 더불어 현재까지 기도의 한 방법으로 통용되고 있다.
새벽기도회와 함께 초기 부흥운동의 특징으로 통성기도(通聲祈禱)이다. 회중이 동시에 각자 자기 기도를 소리 내어 드리는 통성기도 역시 다른 나라 기독교, 특히 서구 기독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신앙 양태이다. 1907년 부흥운동이 한창 진행될 즈음에, 한국에 파송 받아 나온 신참 선교사 매큔(G. S. McCune)은 평양 부흥회 현장을 목격하고 충격 속에 그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무엇보다 통성기도가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헌트 목사의 설교가 끝나고 리 목사가 몇 마디 말을 했다. 그 마지막 말, 기도합시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예배당 안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소리들로 가득 찼다. 예배당 안에 있는 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큰 소리로 기도드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 그 많은 소리들이 있었음에도 전혀 혼란이 없었다. 모두가 일사분란하였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G. S. McCune, "The Holy Spirit in Pyeng Yang", KMF, Jan., 1907, p. 1.
혼란으로 보이는 현상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완전한 조화가 통성기도가 갖는 멋이다. 각자 자기 기도를 소리 내어 드리면서도 전체적인 질서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초기 부흥운동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던 장면이었다. 1903년부터 1907년은 우리 민족이 극심한 시련을 겪던 시기였다. 일제의 정치․군사․경제적 침략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민중 기독교인들의 한(恨)은 종교적 몰입으로 표출되었으니 부흥회가 그러한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따라서 부흥회 가운데 진행된 통성기도는 이러한 민중들의 한 풀이 효과도 갖고 있었다. 또한 통성기도의 내용이 개인적 죄로 인한 고뇌와 고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므로 인해 개인적 회개와 중생의 체험이 통성기도라는 공동체적 체험을 거치게 되면서, 사회와 민족공동체 갱신을 추구하는 결단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반민족적이고 현실도피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덕주, pp. 99-100.
또 하나는 철야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저녁집회가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으므로 멀리서는 교인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철야기도하면서 기도하고 다음 날 새벽기도회에 참석함으로써 철야기도가 생겼다. 김인수, p. 254.
6) 성경공부
부흥운동은 성경공부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평양의 대부흥운동은 장로교 남자들의 성경공부반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한국교회에 신앙생활에서는 함께 하는 요소로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지고 있다. 이영헌, p. 119.
7) 에큐메니칼 정신의 구현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자들 사이에 서로의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이유들이 있었다. 그 이유들은 민족성의 차이, 풍속, 습관의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 그리고 감정의 차이는 상호이해의 길을 막는 벽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정치와 신앙의 문제를 둘러 싼 선교사들의 태도와 한국 신자들의 마음가짐의 차이에서 오는 미움과 증오도 심각한 문제였다. 이영헌, pp. 113-114.
선교를 통해서 선교사들은 가르치는 입장에서 우월의식이, 배우는 한국교회 지도자는 항상 낮은 자의 모습으로 지내면서,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성되었다. 하지만 하디선교사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되어 대부흥운동을 통해서 서로 갈등을 해소되고 형제의식이 굳어지게 되었다. 서로 회복하게 되었다. 또한 에큐메니칼 정신은 교파를 초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인수, p. 255.
Ⅶ. 나가는 말
많은 이들이 대부흥운동을 보고 비정치화와 몰역사화하게 만들었다고들 한다. 진정으로 대부흥운동으로 인해 교회가 몰역사화하였는지 비정치화하였는지 김인수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하여 마무리하고자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선포되고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화되어 가면서 이에 격분한 일반 시민들과 교인들 사이에 반일적인 태도가 구체화되어 가고 무력항쟁의 소지가 높아가고 있을 시점에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는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면서 예수 믿고 천당에 가는 영적인 면에만 치중하게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국교회는 세속적인 것을, 특히 정치적인 면에는 일체 간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부흥운동을 주도했고, 그 결과 부흥운동이 끝나고 나서부터 한국교회의 항일 정신이 희박해졌고 교인들은 내적 신앙에만 치중하게 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이 부흥운동 즉, 성령운동은 선교사 몇 사람이 모여서 일으키고자 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비정치화 문제도 ‘교회와 국가’의 문제, 이 커다란 명제에서 보아도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기 위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얼마나 처절한 투쟁을 벌였는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다. 또한 교회는 정치집단이 될 수 없다. 만약 교회가 정치 집단이 된다면 그것은 정치 집단이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교인이 정치 집단을 만들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가 정치 집단이 될 수 없다. 또한, 비민족화됐다는 평가도 있으나 3․1운동이나 항일운동을 보면 교회가 보이지 않는 구심점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소리가 아닌가 싶다. 대부흥운동을 통해 중생을 체험한 이들이 조국을 위해 기도한 것은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 말이다. 1907년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부흥운동은 현 시대에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아직 잠들어 있는 역사를 깨우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본다. 또한 많은 저서들이 장로교회에서 바라 본 시점에 역사를 기술하였기에 감리교회에서 바라 본 시점의 역사를 기술하기보다는 더 역사적으로 증빙된 자료를 가지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의 대부흥운동은 세계가 놀란 경이적인 운동이다. 이 운동을 살펴보면서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성경보고 좀 더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