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10월에 부왕이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省門寺의 잘못)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37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름은 이련(伊連), 이속(伊速) 또는 어지지(於只支)이며,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즉위하였다.
소수림왕 때의 여러 제도 정비를 통하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쪽으로는 385년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군과 제3현도군을 점령하는 등, 《자치통감》 권106에 실린 호삼성(胡三省)의 주에 의하면, 385년 이후 “후연은 고구려를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후연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때 확보한 요동·현도의 두 군은 386년 다시 후연에 빼앗겼다.
또, 남쪽으로는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고, 389년과 390년 백제의 침공을 받는 등 백제와 공방전을 되풀이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북으로는 후연, 남으로는 백제와 대립하면서 국력을 신장하였다.
19대 광개토태왕:391년~413년
고국양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는데,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의 전하는 바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시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20대 장수왕:413년~491년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한 대중국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남중국에는 한족에 의한 동진(東晉, 317∼420)·송(宋, 420∼479)·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하여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한 이래, 동진을 이은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435년(장수왕 23)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436년 북위의 군대에 쫓긴 북연(北燕)의 왕 풍홍(馮弘)의 고구려 망명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북위의 풍홍소환요청을 거절한다든지, 466년 북위의 혼인요청을 거절하는 등,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 북위와의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었고, 440년부터 461까지 20년간 사절의 교환이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북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백제가 북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472년 이후부터는 매년 2차례 이상 사절을 파견하는 등, 북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연(柔燕)과도 연결을 가져, 479년에는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일대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의 분할 점령을 꾀하고 거란족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21대 문자왕:419년~519년
장수왕의 손자.
494년 물길족에게 멸망한 부여의 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임
497년에 신라 우산성, 512년에 백제 가불성·원산성을 점령함
광개토왕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강성해져 대국으로 발전함
22대 안장왕:519년~531년
이름은 흥안. 치세는 12년간
23대 안원왕:531년~545년
이름은 보영. 치세는 14년간
24대 양원왕:545년~559년
안원왕의 맏아들.
동위·북제 등에 조공하여 친선을 도모함
547년 백암성·신성 등을 중수함
551년 돌궐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신라·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잃음
25대 평원왕:559년~590년
양원왕의 태자
559년 즉위한 후 중국의 진·수·북제·후주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함
일찍이 장수왕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장안성(평양)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586년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함
26대 영양왕:590년~618년
평원왕의 태자.
수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 말갈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를 선공,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섬
이에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였으나 이를 격퇴함
600년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편수함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 우명산성을 함락함
612년 수나라 양제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을지문덕을 시켜 살수에서 적을 섬멸함
27대 영류왕:618년~642년
영양왕의 이복동생.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나라 침공 때 포로가 된 이들을 찾아옴
631년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시작, 연개소문에게 역사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됨
28대 보장왕:642년~668년
고구려의 마지막 왕.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의 추대로 왕위에 오름
645년 당나라 태종이 침입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독전, 격퇴함
661년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해 연개소문이 다시 격퇴함
668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당나라로 압송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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