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내용의 이미지나 영화 글 등을 보면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반응할까?
현대의 삶이 지닌 주목할 만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참사들을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볼 기회가 셀 수도 없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잔혹한 행위를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작은 화면을 거치면서부터는 점점 진부해진다는 것이 '수전 손택'의 말이다.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뛰어난 소설가이며 예술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
는 찬사를 받으며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했다.
9· 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태도를 날카롭게 비관해
또한 국내에서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이으키기도 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 준 인물이다.
<타인의 고통>은 이미지를 통해서 본 '재현된' 현실과 '실제' 현실의 거리를 분석해 주고 있다.
쉽게 말하면 아무리 잔혹한 이미지들도 반복적으로 노출되다보면 무감각해진다는 것이다.
매체에 따라 강도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특히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당연히 얼마 안 가서 싫증나기 마련이라고 한다.
원래 텔레비전 자체가 시청자들의 집중력을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넌더리날 만큼 이미지로 사람들을 자극해대어서 곧 싫증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수많은 비평가들은 텔레비전 탓에 전쟁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로 되어버렸다고 지적해 왔다.
한번 충격을 줬다가 이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종류의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가게 된다.
연민이 극한에 다다르면 결국 무감각에 빠지기 마련이며
통속적인 처방이 내려지는 법이다. (159쪽)
내게도 세월호 사고를 겪은 후에 사건 사고를 보는 데에도 이런 논리가 작용했다.
많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죽은 일은 엄청난 충격이어서 한달 가까이 헤매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전에는 한 두사람 사망한 사건 사고도 놀라움으로 바라보곤 하였는데
세월호 사고 이후에는 덜 놀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려운 가정의 모습을 밀착 취재하여 시청자들의 도움을 끌어 모으려는
한 프로그램을 집중해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보면서 상단에 씌어 있는 기부 전화 번호를 꼭 눌러서 참여했다.
그런데 여러 번 그 방송을 보다보니 나도 모르게 시들해지는 시기가 오고
아예 그 방송을 보지도 않게 되었다.
'연민'의 감정은 부정적인 것일까?
수전 손택은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진다고 한다.
문제는 이제 막 샘솟는 이런 감정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지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면서 "'우리'(그런데 '우리'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금방 지루해지고 냉소적이 되며 무감각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속을 뒤집어 놓은 것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적응력을 말하는 것인데 실제 생활에서의 공포에 익숙해질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이미지가 건네주는 공포에도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 시기가 되면 책장도 덮여지기 마련이며,
[사진을 보고 받은] 강렬한 감정도 곧 사그라질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진이 고발한 특정 사건들도 곧 뇌리에서 잊혀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갈등과 특정한 범죄의 속성을 둘러 싼 비난은
인간의 잔인함, 인간의 야만성 자체를 둘러싼 비난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렇듯 광대한 과정 안에서라면 사진작가의 의도라는 것은 거의 무의미해진다.(178쪽)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라고 한다.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한다.
우리가 난민이나 폭력 피해자들의 모습을 볼 때
얼굴 한번 찡그리는 것으로 끝나면 세상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역시나 내가 무엇을?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타인의 고통에 방관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해보는 순간
무슨 행동을 취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 본다.
이 책에는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있는데
이 사진은 정말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백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이라는 사진인데
이 사진의 주인공 푸추리는 몽고 왕족의 왕자 아오한우안을
암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 형벌은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능지'이다.
죄인의 살갗이나 살점을 칼로 도려내는 형벌로서
가능한 한 죄인을 살려둔 채 며칠에 걸쳐 시행함으로써
고통을 극대화하는 형벌이다.
집행자는 한 사람에게서 2만 점까지 도려낸다고 한다.
바타이유는 1925년 프랑스 최초의 정신분석가 중의 하나였던
보렐에게서 이 사진을 받았다고 한다.
바타이유가 격렬한 고통을 보여주는 이 이미지를 보면서
즐거워했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그는 이 이미지를 통해서 극심한 고통, 단순한 고통 그 이상의 것,
그러니까 신체가 변형되는 그런 고통을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적 사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유가
바로 이와 같은 고통의 관점,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점이다.
따라서 고통을 뭔가 잘못된 것이라거나
불의의 서건, 혹은 일종의 범죄로 여기는 감수성,
즉 고통을 고쳐야 할 무엇, 거부해야 할 무엇,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엇으로 여기는
현대의 감수성에는 낯설기 그지없는 관점이다.(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