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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제복과 군발
오청
아버지의 죽음은 내 스스로를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 계속해서 그대로 머물 수만 있을 수 없게 하였다. 그것은 2학기 등록금 문제가 제일 큰 문제였다. 그래서 쉽게 피할 수 있는 길이 군 입대였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한번 격어야 할 군대문제 그 길이 임시 피할 수 있는 길이었다. 나는 휴학계를 내었다. 그리고 경북병무청에 가서 지원서를 제출했다. 적어도 1년 6개월의 기간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기간은 너무 오랜 기간이 되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남았다. 푸른 제복과 군발은 내 운명을 바꾸었다.
1. 논산 훈련소 입영! (1960.10.25)
1960.10.25일 새벽 4시에 잠을 깨다. 논산 훈련소로 입대하기 위해서였다. 세수를 하기 전에 아침 6시 열차로 김천으로 가기 위해 간단히 식사를 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태진이를 불러러 갔다. 태진이는 이번에 나와 함께 입대를 같이 하기로 굳게 악수한 때문이었다. 태진이와 함께 5시경 대구역으로 향했다. 역 앞에는 경북여고 학생들이 금오산으로 소풍 가려고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얼마 전 내가 알고 있는 친구들에게 찾아가 군에 입대하게 될 것 이라는 인사를 했지만, 오늘 자신이 차린 몸 차림을 보고 비웃을까봐 빨리 차표를 사서 개찰구로 들어갔다. 태진이는 마중 나온 그들의 친구를 기다리느라고 몹시 초조했다. 나는 이별이란 그 자체가 나의 마음을 섭섭하게 대해 줌을 아는지라 전송 나온 사람도 없었지만 태진군의 마지막 건투를 빌어주는 친구들을 보니 더욱 언짢았다.
기차가 대구역을 떠나 김천으로 달릴 때는 나는 내 자신의 자위를 위해 곡조도 맞지 않는 가고파를 몇 번이나 차장으로 내다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고향에 계신 어머님과 형제들 그리고, 친구들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다. 무사히 김천에 도착했다. 그리고 김천 중앙 국민학교에 가서 호명되기만 기다렸다.
1시가 지나서 지원자 중 세 번째로 호명을 당했고, 곧 수건과 빵을 보급 받고 운동장에서 열을 지어 대기하고 앉아 있었다. 4시에 김천 역에서 논산으로 향하는 군용 열차에 몸을 싣고 태진이와 나는 무언지 모르게 창 밖을 보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기차가 출발 음을 내었을 때 20세 갓 지난 여인이, 기차가 출발하는 방향으로 같이 달렸다. 애인인지 약혼자로 되어 보이는 그 여자는 앞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달리고 있었다. 1분 정도는 지났으리라 생각되지만 그 1분이 3년의 이별을 알리는 이별의 고동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 내 눈시울이 시큰둥 했었다.
연무 대에 도착하여 도보로 수용 연대까지 걸어갔다. 이 때 시간은 23시경이었다.
우리는 지정해주는 막사로 들어갔다. 머리를 빡빡 깎은 우리보다 3일전 입소한 전라도 장정들은 큰소리로 고참 역을 할 기세였다. 그때 그 분위기는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오뉴월 하루 빛이 어떻게 이렇게 엄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들 입소 장정은 쥐 죽은 듯이 머리 깎은 고참 장정들의 밥이 되었다. 이들은 내일이면 훈련소로 건너가 입소식을 거쳐, 씩씩하고 늠름하며,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육군 훈련병이 될 것이다.
첫날 하루 밤을 지난 아침 6시, 일찍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 군대인 것이다. 먼저 온 ㅇㅇ도 장정들이 기상을 시키고, 우리를 사역장으로 데리고 갔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난 후에 경북 장정 입대 환영사가 있었다. 우리를 인솔하고 온 경북 병무청 직원들은 우리를 수용 연대로 인계하고 떠났다. 오후에는 수용 연대 9중대 2소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틀째 불침번 근무 중 장정길 이라는 장정이 신음하므로 좀 당황했다. 오전에 여러 가지 측정이 있었다. QT: 131점, AT: 134점, IT: 64점을 받았다. 오후에는 X-RAY 촬영이 있었다.
점호 시에는 박 종영 일병으로부터 지원서 및 서류 일체를 보여달라는 요청이 있어 꺼내어 주었더니 그대로 가지고 가버렸다. 벌써부터 나에게는 심적 고통의 첫 고동이 울었다.
3일째 아침이다. 단체 생활을 하기에는 퍽 힘든 일이다. 각자의 개성을 발휘할 수 없고, 개인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조직적인 체계 밑에서 단체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윤구혁 선임하사는 단체 생활의 연대 책임을 우리들에게 강행했다. 우리는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연대 책임의 추궁으로 강한 특수 훈련을 강요 당했다. 그것은 동료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어젯밤 가져간 서류 때문에 신체검사를 못하고 그냥 되돌아 왔다. 점심을 먹고 서류를 챙겨 신체 검사를 받았다. 이 서류 때문에 군번이 딴 동료보다 200-300번 정도 늦어지게 되었다. 이제 훈련병으로 입소할 자격과 군대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군번을 받았다.
<10769841> 이것은 병적 기록에 오르는 최초의 족보이다.
3일이 지났으니 내 뒤에는 엄청 많은 장정들이 오늘도 수용 연대로 들어와 나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군번을 받기 위하여 줄을 서고 있다. 3일전 만난 전라도 고참 장정에 비하면 이틀 늦은 졸병이지만, 내 뒤에도 거저께, 그리고 어저께, 오늘 들어오는 장정들이 있어, 엄청 고참이라 느껴진다.
10월 29일 오전 중에는 인솔 하는 대로 사역을 했다. 오후에는 동산에 누워 훈련소로 가기만 고대했다. 기다리기가 지루했다. 특별한 일 없이 동산에 누워 창공을 바라보는 것도 시간을 때우는 하나의 즐거움이고,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군번 받은 이후에는 기다리는 시간도 병영 일 수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수용 연대에서 군복을 착용하고, 25 연대 11 중대 3 소대로 넘어갔다. 선임하사의 지시에 의해 신상 명세서를 작성한 후 소대 연락병의 직책을 맡았다. 원래 훈련병의 소대 편재에는 연락병이라는 직책이 없다. 다만 훈련 과정 동안 내무 생활을 하는 동안 선임 하사의 뒷바라지를 하는 일이다. 소대 연락병의 직책은 대단하다.
선임하사 밥 타주기, 세탁물 정리하기, 구두 닦아주기 등등으로 야간 불침번 면제, 사역면제, 선임하사 건빵 얻어먹기, 국물 속에 건더기 챙겨먹기 등 특전이 있었다.
11월 1일은 제 2 훈련소 창설 9 주년 기념일이었다. 축구 시합에서 우리 연대가 우승했다.
오늘 처음으로 대학 친구인 종율, 상균, 무남 군에게 편지를 썼다. 다음날 입소식은 강원채 연대장의 훈시와 훈련병의 선서로 끝났다. 선서식을 하는 도중 군인이 되는 것에 보람을 느끼나, 선서식에서 서약 한대로 군인정신을 빨리 습득하게 될지? 못하게 될지? 걱정이 두려웠다.
가. M-I 소총의 개머리판 총대 파손
사격술 예비 훈련의 단계별 교육은 실제 사격에 앞서 중요한 일이다. 처음 입소 후에는 정신 훈화를 비롯하여 일반적인 보급군기와 국방 경비법, 그리고 M-I 소총의 기계에 대한 고장 배제 및 제원 등을 배우면서 사격술 예비 훈련을 단계별로 익히기 시작했다. 사격술 예비 훈련의 1 단계는 조준선 정열이다. 조준선 정열이란 사수가 마음속으로 가늠쇠 구멍을 통하여 십자선을 그린 후, 목표 물을 가벼이 십자선 위에 올려 놓는 것을 말한다. 교관과 조교의 강의 내용에는 우리들 훈련병의 흥미를 끌기 위한 별별 기법이 다 나왔다. 격발 단계에서는 “처녀의 젖가슴을 만지듯이 1 단계, 2 단계로 구분하여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라든지 사격 자세에서 “엎드려 쏴” “일어 서”를 반복 하다가도 “담배 있는 사수, 조수 일어 서”를 하면서 화랑 담배 한 가치를 나누어 피우는 여유를 교관과 조교는 훈련병에게도 주었다. 사격 자세 중 엎드려 쏴 자세를 연속 구령에 의해 계속할 때마다 무릎과 팔꿈치는 딱딱한 지면과 부딪히면서 벌겋게 되거나, 껍질이 벗겨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關係로 한번도 교관이나 조교에게 담배 한 가치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만의 어떤 특혜도 받지 못했다. 사격술 훈련의 마지막 단계를 마치면서 사격을 위한 총기의 안전 검사는 필수 사항이다.
나는 훈련 도중 사총 (4명의 횡렬이 지상에 총을 정열하고 잠시 고정 시키는 방법)을 하다가 우리 조의 4명은 사총을 잘 못하여 총을 땅바닥에 넘어트렸다. 그런데 다른 총은 이상이 없는데 이로 인하여 내 소총의 개머리판 총대가 이상이 생겼다. 개머리판 앞 부분인데 가늠자 뭉치가 있는 바로 뒤부터 시작해서 약 7 센티 정도의 균열이 발생했다. 나는 우선 소대 선임 하사에게 보고를 했더니, 병기계(이 병장)에게 보고를 하라고 했다. 나는 나의 과오를 병기계에게 찾아가서 보고 했더니 병기계는 직무수행을 엄격히 하기 위해서 진술서를 쓰라고 명령 하였다. 그리고 사회에서는 듣지도 못하던 입창 조치를 한다느니, 군법에 회부한다고 하며, 엄청 겁을 주어 정말로 질려 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교장에 학과 출장을 하고 돌아온 후에 병기계를 다시 찾아가서 용서를 빌었다. 나는 오늘 배운 징계령에 대하여 잘 숙지하고 있다는 내용을 말씀 드렸더니 이유 없다는 구실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 때 마침 지나가던 교육계 (왕 일병)는 나를 보고 역시 이유 없는 구타를 시작하더니 우리 소대 막사까지 끌고 가서 구타를 시작했다. 나는 이날 저녁에는 너무나 억울했던 사실에 대해 생각 했을 때 한없이 눈물만이 쏟아졌다. 특히 그날 저녁에 처음으로 친구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이런 일로 내가 군에 오게 된 동기와 집안 일, 그리고 친구들을 생각하니 한없이 슬펐다. 병기계의 지시에 의거 진술서를 강요 당하고 썼다.
M-I 소총의 개머리 판 총대가 부러진 것은 사총의 잘못으로 생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 개머리판의 금이 난 원인이 종전부터 파손 되어 계속 내려오고 있었던 거라고 주장 하고 싶었지만, 햇병아리가 받을 고충을 생각 했을 때 이 과정을 잘 넘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형이 면회 와서 주고 간 용돈을 1환도 남기지 않고, 몽땅 병기 계 입으로 홀랑 던져주었다. 병기 계는 그의 입으로 홀랑 떨어 넣었다. 그 후 병기계는 퇴소식 전날 찾아와 보급품 등 애로사항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지만, 나는 애로 사항이 없다고 말했다.
나.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전반기 6주간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배출대에 도착하였다. 수용 연대와 다름없이 훈련소를 수료하고 각 지로 가야 할 이등병들이 잠시 집결 했다가, 명령지에 따라 전방이나, 후방, 또는 교육기관으로 배출 되는 곳이다. 이곳에 도착해보니, 하루나 이틀 전 훈련소를 수료한 이등병들의 기세는 너무나 당당했다. 이들은 훈련소를 우리보다 하루나, 이틀, 길면 3일 정도의 대기 시간을 보내면서 배출 되기만을 기다리는 대한민국 육군의 제일 쫄 병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보다도 하루 이틀 늦었으니 틀림없는 우리보다는 선배였다.
그것은 수용 연대에 비해 더 살벌하고 군기가 엄했다.
제일 먼저 우리를 내무반 통로 앞에 선 채로 정열 시킨 뒤 일장 연설이 있었다. 그런 다음 침상 쪽으로 향하게 한 후에 “지금부터 열을 헤아리는 동안 군화를 벗고, 침상으로 올라가” 라는 호령이었다. 이등병 선배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금방이라도 그 호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벼락이라도 떨어질 정도의 험악한 공포 분위기였다.
“하나, 둘, 셋, -----------아홉, 열.” 숫자 헤아림이 끝났다.
다음은 두 번째 호령이 내려졌다. 성냥 가치를 들고 “엎 들여 쏴”, “일어 서” 의 사격술 예비 훈련의 반복 훈련이다. 성냥 가치로 열 번만 계속 반복하면 하늘이 온통 누렇게 보이거나, 별빛이 반짝인다. 그 외에도 원상 폭격, 한강 철교 등 고참의 호령은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왜? 입대했던가? 눈물이 핑 도는 순간이다. 한참 고참 이등병들에게 혼을 빼앗기고 난 다음, 정신을 차려 주위를 살펴보니, 우리가 신고 온 새 군화는 헌 군화와 바뀌어 있었다.
태풍과 파도가 지나간 다음에는 막사안도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3일이 지난 다음, 우리도 오늘 배출 대에 들어온 이등병에게 같은 행동을 계속 했다. 악순환의 연결 고리는 끊임없이 반복 되고 있었다.
다 헌병학교 교육
연무대 역에는 앞에서부터 한 열량 정도의 군용 열차가 우리를 수송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앞 열차에 타는 이등병은 대전을 거쳐서, 용산 경유, 춘천이나, 의정부 쪽에서 근무할 확률이 많았고, 후미를 중심으로 앞으로 세, 네 칸에 탄 이등병은 대전에서 경부선 열차에 연결되어 각 학교에 입교가 되어 교육과정을 마치면 다시 명령에 의거 전 후방 부대로 배치되어 근무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태진이와 나는 공교롭게도 후반기 교육 과정을 영천에 있는 헌병 학교로 같이 가게 되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8주간 교육을 받아야 했다. 60년 12월 말, 영천은 을씨년스럽기만 했고, 단 포 주위의 바람은 세차게 몰아쳤다. 년 말에 도착하다 보니, 60년도 교육과정은 모두 종결되고, 새해부터 교육이 시작되니 우리들 피 교육생들에게도 외박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나에게는 외박이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외박에서 제외된 자는 대게 도서지방에 있거나, 나처럼 멍청한 놈 밖에 없었다. 나는 집이 영천으로부터 80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구라 꼭 가게 될 줄 알았는데, 그만 기회가 상실되었다. 거기에다 당직 근무자의 감투까지 주어 꼼짝 못하게 되었다. 그 당시 구대장들은 너무나 유명했고 헌병병과에서는 이들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
나는 휴무기간 동안 잔류 병 20여명과 함께 당직 근무를 하면서 보냈는데 그때 나와 함께 당직 근무를 하던 구대장 이 하사는 나를 불러 양말을 서, 너 컬레 가져오라고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단포 다리 밑으로 구보로 달려가, 얼음장을 깨고, 찬물로 얼굴을 닦을 때마다 어서 빨리 봄의 소리가 귓전으로 들려오기를 기대했다. 학교 교육은 타 병과의 의표가 되며 솔선수범이 학교가 지향하는 목표였다. 군가의 가사 내용의 후렴은 “ 이 나라를 바로 잡는 헌병 학교다.”라고 되어 있다.
2월 말쯤 학교교육을 마치게 되었는데, 나는 헌병학교에 기간병으로 차출되어 교도 대에서 조교로 근무토록 발령을 받았고, 태진이는 육군사관학교로 가게 되었다. 헌병 학교의 교육 군기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나는 기간 요원이 된 후에도 이 문진 병장 등 여러 선배들로부터 조교가 되기 위해서 실무 교육을 받았는데, 교통 정리, 폭동 진압, 등 전 과목에 대하여 열심히 받았다. 그런데도 툭하면 기압 받기가 일수 였다. 심지어는 침대 머플러로 열 대여섯 대 맞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영천에 근무하면서 간혹 선배들로부터 외출을 갔다 온 후에 이야기를 들었는데, 영천에 외출 가서 해병대와 싸움을 한판 했다느니, 다음 주에는 또 누구하고 한판 한다느니 하는 육군의 강자임을 스스로 자랑하는 어리석은 이야기도 들었다.
라. 단기 복무 신청
나는 3월 달에 SO(학보)를 신청하였다. 그 당시 병역을 단축 근무할 수 있는 제도로써 대학을 다니다가 입영하거나, 또는 학교에 교사로써 재직하다가 군에 입대하게 되면 단축 근무의 혜택을 받게 되어 있었다. 학 보(학생)는 18개월, 교 보(교사)는 12개월을 근무함으로써 병역의 의무를 마치게 되어 있었다. 나는 학 보 케이스에 해당 되었다. 다만 최종 보직은 소총수로 근무 하여야 한다. 나는 얼마 후 춘천 보충대로 발령이 났다. 나는 4월 초에 춘천을 거쳐서, 화천에 있는 0 사단에 들려 00 연대로 전입 명령을 받았다. 연대에서는 1 대대 2중대로 명령을 받았다.
우리 대대는 파포 리 고개를 넘어서 우측 산길로 약 2 – 3 키로 미터쯤 들어가야 했다. 이른 4 월 이지만 이곳 파포리의 봄은 겨울 같은 날씨였다. 산에는 녹아 내리지 않는 흰 눈과 개울에는 얼음이 꽁꽁 얼어 붙은 채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어 우리들 초병에게는 또 한번의 겨울을 남겨야 할 시련을 예고 해 주는 것 같았다. 츄럭에 실려 대대 정문을 통과 할 때 그때의 시간은 오후 3 시쯤 된 것 같은데 조금 지나다 보니 보급 창고에 방한모와 방한복을 착용하고 사역 나온 선배들이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양지 바른쪽 에 서서 멸치 볶음과 콩 조림 반찬을 손 바닥 위에 올려놓고 맛있게 먹고 있었다. 멸치 볶음과 콩 조림 반찬은 부대 교대를 앞두고, 이동 시 장병들에게 비상 급식용으로 사용 할 계획 이였다. 그런데 이들은 이런 사역을 하면서 간식용으로 맛 있게 먹고 있었다. 부대는 대단히 바쁘게 움직였다. 이미 부대 교대를 위한 선발대는 미리와 있었다. 내일 모래면 0 사단과 우리 사단은 부대를 교체하게 된다.
3 일 후 우리는 야음을 이용하여 차량에 탑승하고 새로운 교대 진지로 이동하였다.
부대 마크도 제거되고 차량 넘버도 전부 가리웠다. 새로운 진지에 도착 해보니 먼저 있는 파포리 고개 보다는 훨씬 후방인 양덕원리였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떠 보니 부대는 도로로부터 한 2– 300 미터 떨어진 산 밑에 위치하고 있었고, 개울 물도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양덕원리를 거쳐 홍천과 양구로 가는 버스와 차들도 눈에 띄었고, 반대로 양구나 홍천에서 양덕원리를 거쳐 서울로 가는 차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언제 한번 저 버스를 타고 휴가를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등병의 향수 병은 버스를 보는 순간에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가족들, 친구 들을 느끼게 한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이 제일 그리워 진다. 파포리에서는 사방이 온통 산으로 에워 쌓여있고 가운데로 뚫어진 하늘 만을 약간 쳐다볼 수 있어 지나가는 차량은 볼 수도 없었다가 이곳에 와보니 엄청 분위기가 달랐다.
나는 중대 본부에서 대기 중에 3 소대 3 분대 소총수로서 명령을 받고, 중대 본부에서 편제에도 없는 서무계 조수 역할을 맡았다. 일과 중에는 중대 본부에서 일과 후에는 3 소대에서 내무 생활을 보냈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대 원 중에는 한글을 체득 하지 못하고 편지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선배들이 있어 연대 단위로 고등 공민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간혹 한글을 체득 하지 못 한 선배들이 편지를 읽어 달라거나 대필로 편지를 써서 집으로 부쳐 주기를 바랬다. 이 교육 기간은 2 주간씩 운영 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단기근무 (SO) 혜택을 받게 될 이등 병의 전입은 그들의 눈에는 가시로 보였을 것이다. 입대 일자와 군번은 비교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12 개월 후면 선배인 자기들 보다 빨리 전역 할 것이라고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무반 생활도 조심스럽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잘 못하면 배출대에서나, 헌병 학교에서 당한 얼 차려 교육이 재발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은 오래가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 갔다. 역시 신병은 혼이 나야만 사자가 될 수 있다. 나는 사자가 되기 위해서 참아야 했다.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생활을 하는 가운데도 경북 고령에서 온 고참인 곽 병장은 나를 무척 아껴 주기도 했었다. 짤막한 키에 구리 빛 색깔의 얼굴에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 웃을 때 마다 금 이빨의 모습은 다정 다 감 해 보였다. 어떤 날 2 중대에서 근무를 하고 있을 때 하루는 홍 선임하사와 분대원 전원이 주변에 대한 산악 정찰을 가게 되었는데, 일 개 분대가 소총과 상황판, 쌍안경 등의 군장을 준비하고 점심 식사를 쌀과 보리 쌀(압맥), 그리고, 콩나물, 멸치, 된장 등을 1 종계로부터 수령하고 부대에서 수 키로 떨어진 지정 해 준 산악 코스로 정찰하게 되었는데 간첩 들의 은거지나 행적 등은 발견 할 수 없었다. 모처럼 정찰을 나간 분대원들은 반합에 쌀을 씻고, 싸리나무 가지로 불을 집혀 밥과 콩나물 된장국을 끓이면서 거기에다 흐르는 물에서 돌을 뒤져 잡아낸 가재 몇 마리를 국에 넣어 끓여 먹었는데 이등병에게는 밥과 국 맛이 일품인데다 붉게 익은 가재 몇 마리의 맛은 더 일품이 였다.
나는 5 월 1 일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 진급 되었다. 고작 잔 밥 생활이 6 개 월이 경과 되었고, 부대에도 하나 둘 씩 나보다 늦은 이등병 쫄 병이 전입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4/5는 선배 들이었다. 나는 매 식사 때 마다 배 고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밥 한 그릇(반합 내피)에 국 한 그릇이면 수치 상으로는 두 그릇인데 밥 그릇(반합내피)에 국을 쏟아 부으면 한 그릇도 안되게 내려 갔다. 밥 그릇 사이에 공간을 국물이 파고 들어가 일어나는 쫄 병 만의 착시 현상이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제일 먼저 사귀고 싶은 사람이 취사 반장 이었다. 취사 반장은 대대 통합 식당을 운영하면서 식당 군기를 잡기 위해 질서 유지와 두 번 줄을 서서 이중 배식을 타는 자를 잡아내고, 마음에 두는 사병은 한 술 더 퍼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나는 취사 반장에게 막걸리 한 주전자를 사주고 사귀기를 바랬다. 인사도 갂듯이하고 PX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사다 주었다. 약간의 효과는 있는 듯 했다.
2. 간부 후보생 시험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전방은 부산 했다. 5 월 어떤 날 2 중대에서 근무한지가 한 달쯤 되었는데 대대 정보과로 파견 근무를 하라 는 명령이 내렸다. 정보과 상황실에 위치하여 대공 초소의 근무상태와 주변 산악 정찰 코스 운영 등 정보 분야에 대한 근무를 익히기 시작 했다. 대공 초소 근무자로 하여금 주변의 상공을 나르는 비행기의 기종과 방향, 고도 등에 대한 상황보고를 받으면서 일지를 기록 유지 해 나갔다. 간혹 대대 정문을 출입하는 차량에 대한 통제도 있었고, 울타리를 넘나드는 병력에 대해서도 감시적 기능을 수행 했었다. 그 때만 해도 영외거주자에 대한 결식 미(아침 저녁 식사를 하지 않는 영외 거주자에게 주는 쌀, 보리)를 지급 하고 있었고, 화목 등을 영외 거주자 숙소로 운반하던 때였다. 대대 정보과에서 근무 한지 한 달이 지났다. 그 때 대대 인사과 앞에 게시판에 육군 회보가 공고 되어있었다. 이 회보가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육군 간부 후보생 모집 공고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군에 입대 할 때의 생각은 당장에 계속 할 수 없는 학업을 중단하기 위해서 취한 일시적인 선택이었다. 이제 11 개 월 후에 전역을 하게 되면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으면 학교로 복학 하기란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는 일이며 스스로 해결 책을 수립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 하였다. 나는 먼저 닥쳐 온 문제부터 풀어 보자는 속셈에서 간부후보생으로 지원하기로 결심을 하고 3 일 간의 시간을 얻어 서류 구비를 위해 대구로 내려 갔다. 졸업 증명서와 관계되는 기타 서류를 구비하고 귀대 한 후에 지원서를 작성하고, 그 서류를 연대를 거쳐 사단으로 제출 했었다.
나는 6 월 말일 경 춘천에 있는 0 군단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시험을 치르기 전 부대에서는 7 일 간의 시간을 주어 춘성 군 신북면 율문리에 있는 민가의 방을 하나 빌러 1 주 일 간을 쓰기로 했다. 농촌에서는 하지 감자를 캐던 시기라 아침 저녁 햇감자를 삶아서 며칠간 수고하는 나에게 주인 아주머니는 수험생 부모 대리 역할을 정성껏 다해 주었다. 부대에서 출발 할 때는 1 종(쌀, 보리 쌀)과 부식을 현물로 타서 그 집에 맡겼다. 아주머니의 후덕한 마음으로 마지막 7 일 간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게 되었고, 시험일 시험을 치르고 난 다음 그 집을 떠나게 되었다. 시험을 잘 치르지는 못 했다. 그런데 7 월 중 순경 연대 정보 과에서 신원 진술서를 작성하여 제출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진술서를 처음 작성 해 보지만 어려운 문항도 많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로 기록되는 사항이다. 출생 은 어디서, 학교는 언제 어디서, 그 때 친구는 누구이며, 가족 사항 중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들의 성명, 출생지, 학력 등이며, 정당의 활동 여부와 북쪽에 있는 가족 사항도 기록 하여야 하며, 존경하는 인물 등도 기록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이번에 지원서를 제출 할 때도 학력을 어떻게 기재 해야 할 지? 항상 망스리든 사항이었다. 그런데 이 신원 진술서는 간부 후보생 합격에 주요한 효과를 나타 낸다고 볼 때 사실대로 잘 써야 된다고 생각 했다.
8 월은 부대 행사가 많은 달이다. 날씨는 덥고, 움직일 때 마다 땀이 흘러 내린다. 대대는 시동 부락으로 출동하여 4 박 5 일 간의 대대 전투 훈련을 받아야 한다. 출동 전에 갖추어야 할 군장 준비와 제대 별 실시되는 군장 검사는 몇 차례 걸쳐 받아야 한다. 항상 군장 검사 준비 단계가 더 까다로웠다. 8월 두째 주 대대는 중대 별로 잔류 병 몇 사람씩 남기고 훈련 지역으로 옮기기 시작 했다. 이동이 완료된 뒤에는 개인 천막으로 숙영 시설을 준비하고, 위장을 한 후에 숙영 지에서 1 박을 하고 나면 내일 아침부터는 방어 단계와 공격 단계로 구분하여 대대 훈련이 이루어 진다. 동료 병사들의 검게 탄 구리 빛 얼굴은 적과 싸워 이길 늠늠 함을 보여 주는 대한 남아의 표상이었다.
훈련 3 일 차 대대 인사과 선임 하사가 나를 불렀다.
나는 인사과에 들렸다. 선임 하사는 나에게 간부 후보생 입교 명령을 알려 주었다. 나는 우선은 당황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간부 후보생 입교를 하지 않으면 안되냐고 물었다. 그것은 6 개 월간 받아야 하는 군사 훈련의 강도와 내 체력과, 앞으로의 환경 변화를 어떻게 접목 시켜야 할지 걱정 스러웠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선임 하사는 입교하지 않으면 탈영이 된다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그제서야 알아 차렸다. 명령에 의해 살고 죽는 게 군인 인 것을 처음으로 피부를 통해 체험한 순간이다. 대대장에게 전출 신고를 했다. 나는 “전진. (경례 시 부대구호)신고 합니다. 일병 오 청 은 1960년 8월 14일 부로 보병 제 11 연대 제 1대대 2 중대로부터 육군 보병 학교로 전출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 합니다. 전진.”하고 신고 했다. 대대장은 갑종 간부 후보생 출신이었다. 대대장은 보병 학교에서 교육을 끝까지 열심히 받고 꼭 육군 소 위로 임관 되기를 바란다고 말 했다. 대대 보급 수령 차가 훈련장에 도착하여 부식을 추진하고 돌아가는 편에 원대로 들어가서 입교 하라는 당부를 받고, 원대로 복귀 한 후에 피복 등을 반납 하였다. 1 종계는 그 동안 부대 내에서 급식하지 못 했던 건빵과 담배를 보급하지 못 한 것 과. 육군 보병 학교로 가는 일보 변동 일(60.8.19일) 까지를 포함해서 건빵 15 봉지를 지급하고 나를 출발 시켰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1 종계는 담배 대신 건빵을 지급 하였다. 나는 건빵 15 봉지를 두꺼운 마분지에 잘 싸서 철사 줄로 동여 메어 양덕원 리에서 버스를 타고 숭인동에 내린 후, 다시 시내 버스로 바꾸어 타고 용산 역에 도착하여 야간 군용 열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 갔다. 대구의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가족들은 놀라운 표정을 지웠다. 왜냐하면 혹 군대 생활을 잘 이겨내지 못하고 탈영하기 위해 온 것으로 느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곧 의아한 마음은 풀어졌다. 나는 보병 학교에 입교 할 때까지 며칠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거나 친척집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거나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8월 18일 보병 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대구 역에서 야간 군용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가서 호남 선 열차로 바꾸어 타고 다음 날 아침 송정리 역에서 내렸다. 송정 리 역에서 버스로 상무 대에 도착 했다.
상무대는 을지문덕 기상이 살아 숨쉬며, 6. 25 이후 많은 장교들을 배출한 교육 기간이다.
8월 19일(토) 상무대 정문에 도착 했다. 이 날은 토 요일이라 정문 앞에는 면회 온 가족과 간부 후보생 입교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군복 차림의 현역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사와 병장, 그리고 상병과 일병, 이등병도 있었다. 오늘 우리와 함께 보병 학교로 입교하는 자원은 전국에서 현역 근무도중에 간부 후보생 시험에 응시한 후 합격되어 입교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따불백을 울러 메고 0 사령부 정문에서 명령 지를 확인시킨 후에 보병학교로 찾아갔다. 정문에서 보병 학교로 가는 길은 우측으로 0 사령부의 본청 건물과 그 부속 건물들이 즐비 하게 정열 되어 있었고, 그 건물들은 엄격하게 보였다. 도로 양쪽과 건물 주변에는 키 큰 뽀푸라 나무들이 쭉쭉 잘 자라고 있었으며, 여름의 더위를 식혀 줄 그림자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보병 학교에 가는 길로 따불백을 메고 땀을 흘리면서 걷고 있었지만 나무 그늘 아래 가서 쉬거나 휴식을 가져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앞으로의 임관까지의 견뎌내야 할 긴장과 불안의 첫 시작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임관 시까지 7개월 간 모든 과정은 스스로가 참고 견디면서 인내와 싸워 이겨야 한다. 내 자신이 원한다고 내 마음대로의 행동은 학교가 용납 하지 않을 것이다. 0 사령부로부터 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보병 학교 건물이 있었다. 사령부 건물에 비하면 보 잘 것 없어 보이는 콘셋트 막사가 여러 개 동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그 콘셋트 막사는 양쪽으로 키 큰 뽀푸라에 의해 약간 감추어져 있었다. 막사 주변의 화단 관리는 잘 정리 되어 있었다. 다만 막사도 나무도 꽃도, 잔디도 모두가 직각으로 정리 정돈 되어 있었다. 나는 보병 학교에 도착하여 명령지를 제출하고 접수를 마쳤다. 우리 기는 간부 후보생 158 기 이고, 150 명 정도가 입교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중대는 1개 중대 규모로 A중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 기의 병과는 전원 포병이었다. 보병 학교에는 우리 보다 한 14 주가 빠른 157 기 선배 들이 먼저 입교하여 강한 교육 훈련을 받고 있었다. 우리 보다도 중대 수가 너무 많은 6개 중대였고, 그 숫자도 800 여명이 넘었다. 우리는 월요일 아침에 입교 식(8월21일)이 계획 되었고 입교를 위해 구대 편성과 교번 부여, 피복 지급 등이 빠른 템포로 이루어 졌다. 그리고 우리를 지도 할 중대장과 4 명의 구대장이 소개 되었다. 중대장에는 신동교 대위, 구대장에는 박완수 중위, 민경배 중위, 양해윤 중위, 그리고 이종구 중위로 이들은 각각 1 개 구대를 맡으며, 후보생들을 장교로 육성 할 수 있는 자질과 적성을 점검 하면서 특히 일과 시간 보다는 일과 후의 내무 생활에 대해 중점적으로 지도하게 되었다. 이들 구대장들의 역할은 보이는 곳에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 항상 24 시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젊은 청년 장교로서 다 같이 육군 사관 학교 출신이 였다.
학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나를 따르라”였다. 지금까지의 쫄병 생활이 별로 엄한 통제를 받지 않고 지냈다면 지금부터는 이 구호에 맞춤 식으로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한다. 학교의 규율은 너무 엄했다. 먼저 학교는 한 사람의 초급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해 명예와 양심을 소중한 덕목으로 삼고 있었다, 장교는 국제 신사라고 말하며, 어떤 경우라도 명예를 가장 소중히 여기며,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지도자로서 생활을 강조 했고, 이와 더불어 양심을 속이는 일을 절대로 금하고 있었다. 규율을 잘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상호 적성 평가 제도가 시행되었고, 후보생들의 일 거수 일 투족은 적성 평가 대상에서 늘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작성 되는 수양록은 명예와 양심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 하게 훈련 시켜 주었다. 하루 하루의 생활이 심신 수련의 전부였다.
우선 간단한 일이지만 3 보 이상은 구보였다, 그리고 직각 식사와 직각 보행이었다. 내무생활의 정리 정돈은 항상 감독 대상이었고, 잘 못하면 규정된 벌점이 부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점호와 취침 시간 후에 일어나는 특성 훈련은 하루도 빠지지 않으면 안심하고 넘어 갈 수 없었다. 만일 하루라도 특성 훈련을 안받고 넘어가는 날에는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차라리 어떤 특성 훈련이든 받고 넘어 가는 것이 더 편했다. 특성 훈련의 방법은 상당히 많았다. 완전 군장에 선착순 집합과 선착순 집합 후에 상무대 연병장 뛰기 등은 기초 체력을 단련하거나 정신을 통일 하는데 기여 할 수 있는 좋은 훈련 방법이라고 생각 하지만 취침 도중에 비상을 걸어서 완전 군장을 잘 꾸려 빠른 시간에 집합 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또 여기에 낙오자가 발생하면 도저히 용서 받지 못 한다. 그래서 낙오자가 없이 전원이 훈련을 잘 마치기 위해서는 우수한 후보생의 조력과 구대원들이 서로 서로 협력 하여야 한다, 어떤 특성 훈련은 빤쓰 바람에 판초 우의를 입고, 알 철모를 쓰고, 소총을 휴대하고 선착순 집합 명령이 내려 지기도 한다. 후보생들은 연병장으로 나가 알 철모의 덜거덩 소리를 내면서 집합하게 되면 구대 장은 “번호”라는 구령을 붙여 10 번 뒤에 집합한 후보생에 대해서는 다시 목표 물을 제시하고 선착순으로 뛰어오기를 강요 한다. 만일 구대 장이 요구하는 선착 순 범위 내에 들지 못 하면 다섯 번, 여섯 번도 뛰어 선착순에 들어가야 한다. 만일 요구하는 선착순 범위에 들어가지 못 하면 별도로 주먹지고 엎드려뻗쳐나, 쪼구려 뛰기 등 최후의 순간까지 특성 훈련을 실시한다. 주먹지고 엎드려뻗쳐를 많이 한 후보생 중에는 주먹 진 손이 땅 바닥에 모래와 잘 어울리지 못 해 작은 돌이 손 가락 마디 마디에 박혀 상처를 입거나 물 집이 생겨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손 가락 마디 마디가 낫기도 전에 아픈 곳을 알아 차리지 못 하고 명령이 다시 내려 훈련이 가중 될 때 마다 연속해서 상처가 재발 되어 그 상처의 고통을 견디어 내기가 여간 힘 더는 것이 아니었다. 민첩한 행동과 조건 반사적으로 이루어 지는 특성 훈련은 사자 새끼의 훈련 방법이다. 사자 새끼의 훈련 방법은 가파른 절벽에서부터 시작된다. 선착순 훈련은 요구하는 목표에 접근 하지 못 하면 항상 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면서 강행 한다. 이렇게 하면서 강한 사자가 하나 둘 탄생하게 된다. 또 하나는 독수리 새끼 훈련 방법이다. 독수리는 자기 새끼를 훈련 시킬 때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태풍이 몰아 칠 때 자기 새끼를 바다로 끌고 나가 바람과 태풍에서 살아 남도록 훈련을 시킨다. 우리들 후보생에게도 항상 악천 후 교육이 적용 되었다. 비가 올 때나, 바람이 불 때나, 눈 보라가 칠 때도 항상 엄격한 교육으로 우리의 자세는 흩어러 지면 용서 받을 수 없었다.
가. 학과 교육
학과 교육은 교수부에서 주관이 되어 시행 되고 있었다. 일반학, 화기학, 참모학, 전술학, 등 분야 별로 전문화 된 교관에 의해서 교실이나 야외 교장에서 강의와 실습을 병행해서 교육을 받기 때문에 내무 생활 보다는 힘이 덜 더 는 샘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습을 통한 군사학을 빠른 시일 내에 익히기에는 초년 병이나 다름없는 우리에게는 어려움은 항상 긴장 시켰다. 실습은 초급 장교로서 소 부대 지휘를 할 수 있게 이루어졌다. 나아가서 학교에서는 지인용(智仁勇)을 겸비한 조국의 간성을 육성하기 위해 온갖 심혈을 경주하였다.
나.선배 기의 실 병 지휘
우리 기 (158기)보다 1 기 선배인 157기는 우리 보다 입교 기간이 14 주나 빨랐다. 그리고 그 규모도 6개 중대에 인원도 800 여명이 되었다.
우리가 입교하는 날부터 157기 선배들은 실병 지휘의 폭이 넓어졌다. 언제 어디서나 목표 물은 우리였다. 그들은 항상 우리를 잘 훈련 되지 않은 초년병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14 주간을 지나면서 실병 지휘의 상대가 없어서인지 우리에게 모든 관심을 옮겨 놓았다. 이들은 식사 시간이나 취침 시에나, 학과 출장 시나, 화장실에서도 항상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고 우리 기를 타깃으로 생각했다. 식사 시간에는 식당에 와서 직각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사 그만이라는 호령을 내려 꼼짝 못하게 한 후 식당 밖으로 불러 특성 훈련을 가 한 후에 다시 식사를 시키기도 했고, 학과 출장 시에는 대오를 중지 시키고 자세가 흩어러 진 후보생을 불러내어 양쪽 가슴을 치면서 실병 지휘를 마음껏 했다. 우리가 입교한 후, 이 주일째 맞는 토요일 학생대대의 배구 시합이 있었다. 우리는 선배 기인 157기가 한 팀이 되고, 우리 중대가 한 팀이 되어 배구 시합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6:1 의 선배기를 눌러 이겼다. 이 순간부터 선배기는 호랑이로 변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선배 기의 외출 계획이 모두 취소 되었고, 그 분 풀이가 우리 기에게 모두 집중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숨 쉬기가 힘든 우리 기인데 사방 팔방에서 우리를 노리고 만 있었다. 화장실 가다가 지적 받은 동기생은 쪼구려 뛰기의 얼 차려 교육을 받고 혼이 났다. 심지어는 취침 시간 후에 불침번 근무자가 근무 수칙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다고 내무반에 들어와 내무반 바닥에 눕게 한 후에 양 발 끝을 하늘로 향하게 한 후에 물이 들어 있는 세면 대야를 발 위에 올려놓아 몇 분간을 지켜 보고 있다가 훈계하고 돌아갔다. 만일 발이 균형을 잘 잡히지 않았으면 대야의 물은 밑으로 쏟아 질 수 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심한 특성 훈련이었을까? 자나 깨나 선배기의 특성 훈련은 그칠 수가 없었다. 그 방법도 다양했다. 역시 구대장의 특성 훈련 보다 선배 들의 특성 훈련이 더 강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공격 해 오는 선배들의 공격을 막아 낼 방법이 무엇이냐고 생각 해 보았지만 뾰족 한 수는 없었다.
우리가 입교 한 후 2 주가 지났을 때 우리와 같이 간부 후보생 시험을 함께 치르고 차기 입교 명령을 받은 159 기인 후배 기가 입교 하게 되었다. 우리는 2 주가 빠른 선배기가 되어 후배기에 대한 실병 지휘 교육을 할 수 있었다. 현역 사병 시절 똑 같은 날 시험을 치르었지만 현실 앞에서는 기별 구분이 엄격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매기 입교 계획에 따라 시험 성적 순에 의거 2 주 간격으로 160 기, 161 기, 162 기, --------167 기가 입교 하게 되었다.
우리 기의 훈육 방법은 구대 장들로부터 배운 것 보다 더 까다로웠다. 우리 기는 다른 기와는 달리 157 기 선배 기로부터도 강한 훈련을 받았다. 그것은 수적 열세와 운동 시합에서 이김으로 해서 외출을 금지 당하자 그 분풀이가 우리에게 미쳤던 선배 기의 훈육 방법까지 몽땅 익혀 왔기 때문이다. 우리 기도 선배 기 못지않게 159 기 이후의 후배 기에 대해 식당에서는 물론 내무반에까지 찾아가 훈육을 한다는 명목으로 군기 잡기에 앞장 썼다. 후배 기는 고양이 앞에 쥐 격이 되었다.
다. 157기의 임관
157 기 선배 기는 11 월 중 순에 임관하게 되었다. 우리는 0 사령부 상무대 연병장에 임관식에 후배 기로써 행사에 참석 했다. 임석 상관은 박정희 대장(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 내각 수반)이었다. 그리고 내외 귀빈과 가족, 친지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그들은 임관 식에서 을지문덕 장군의 후예로 빤짝이는 다이아몬드 계급 장을 달고 자랑스러운 육군 소위로 임관을 하게 되었다. 상무대와 광주, 그리고 송정리는 새로 임관한 장교와 그의 가족 친지 들에 의해 북적 되기 시작했다. 새 파란 소위 한 사람이 연대의 군기를 다 잡을 정도의 위력이 대단하여 산천 초목도 소위를 보면 부들 부들 뜬 다고 했다. 특히 임관 일은 군기의 위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는 최고의 날이라 상무대 주변의 하사관과 병들은 군기 위반에 걸려 들지 않기 위하여 새 파란 소위 앞에서는 깍듯이 거수 경례한다. 어쩌다 새 파란 소위에게 군기 위반으로 적발되어 불려가면 길거리에 있는 전주 앞에서 거수 경례를 여러 번 해야 한다. 우두커니 서 있는 전주 앞에 세워 놓고 결례를 했다고 해서 거수 경례를 시키면 영락 없이 하지 않을 수 없다. 임관 시 인원은 입교 시에 비해 많이 줄어 들었다. 그 이유는 장교로서의 자질이 검증되지 않으면 중간 퇴교 사유가 되며, 최종적으로는 임관 심사 위원회에서 결격으로 판명 되면 도중 하차하게 되어 원대 복귀가 되어 현역의 잔여 기간을 마쳐야만 군 복무가 끝나게 된다. 어쨌든 157 기 선배 기의 임관 인원이 720 여명이 넘었으니 산천초목뿐 만 아니라 전군 어디에서 도 군기 확립과 전력 증강에 많은 기여가 있으리라 생각 되었다. 157 기가 보병 학교를 떠나가니 우리 기는 명실 상부한 최고 선임 기가 되었다. 우리도 선배 기가 되었다는 자부심과 과시 욕 때문에 후배에게도 훈육 지도를 자주 하게 되었다.
4. 포병학교 생활
우리는 입교 할 때 포병 병과로 계획 되었기 때문에 보병 학교에서 기초 교육이 끝나면 잔류 교육은 포병 학교로 가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 해 12월 보병 학교 교육을 마치고 우리는 포병 병과 교육을 위해 포병 학교로 전입 되었다. 우리 기는 포병 간부 후보생 77 기였다. 포병 학교의 목표는 “알아야 한다.”였고, 보병과는 달리 “3보 이상 승차.”였다. 알지 못 하면 부여된 임무를 수행 할 수 없다.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배움은 곧 장교로서 기초 지식과 부하를 지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여야 한다. 무엇 보다도 관측 장교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역점을 두면서, 포술, 전포, 전술, 통신, 정비(화포, 차량)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학과 교육을 받았다.
포병 학교는 내무생활도 세밀하고 치밀 했으며, 까다로웠다. 1 mm의 눈금 오차를 허용 할 수 없을 만큼의 정확성을 강조 해 왔다. 그러니 보병 학교의 내무생활 보다는 엄격했다. 전쟁에서 화력으로 보병을 지원하려면 얼마나 빠른 시간에 그리고 요구하는 장소에 포탄을 정확하게 제공 하느냐에 달려 있다. 관측 사격이나, 무 관측 사격에서의 포탄의 효력이 유효 사정에 들어야 한다.
우리를 지도 할 포대장은 김혁수 대위(육사 11기) 구대장은 이병국 중위, 김주호 중위, 김도수 중위, 임인택 중위 였고, 이들은 모두 육사 15기 생 동기였다. 이들 포, 구대장은 밤 낮 없이 우리를 손색없는 초임 장교로 육성하기 위해서 온갖 열정을 다 쏟아 부었다. 눈 오는 날 밤에는 하의는 빤쓰만 착용하고 알몸에 판초우의를 입고 알철모만(화이바는 착용하지 않고) 뒤 집어 쓴 채 소총을 휴대하고 연병장에서 특성 훈련을 시켰다. 이 특성 훈련을 100%로 참아내는 동기생들은 거의 없었다. 한 두 후보생이 쓸어지기 시작하면 다른 곳에서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훈육관(포, 구대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정신통일이나, 명령복종의 강한 구호를 복창하게 만들었다. 우리 후보생들이 살아남는 길은 인내로써 참아 견디는 일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 동기 생 중 장복규 후보생은 만 29세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느라 어려운 시련을 여러 번 격어면서도 잘 견디내어 성공적으로 임관하게 되었다. 드디어 62년 3월 17일 121명의 동기 생들은 30주간의 교육을 모두 마치고 풍익당(고 김풍익 소령 기념관)에서 임관을 하게 되었고, 155마일 최 전방을 지키는 국가의 간성으로서 책임을 어깨에 매고 야전 포병가를 부르며 임지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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