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하회마을을 지켜온 삼신당 느티나무
하회마을 입향조 류공해 공이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심은 수령 600년의 삼신당 느티나무
(2017. 4. 21)
삼남의 4대 길지중의 하나인 하회마을의 중심부에 600년 동안 이 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가 있다. 하회라는 마을 이름처럼 낙동강의 물길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마을의 중심부가 높고 강가로 갈수록 낮아져 풍수지리상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하며, 연화부수형은 연꽃의 모습으로 꽃술이 있는 명당자리에 삼신당 느티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고려 말 공조전서를 지낸 풍산류씨 입향시조 류공해 공이 하회마을에 정착하면서 심은 것이라고 하니 600년의 세월 동안 이 자리에서 하회마을을 지켜오고 있다.
한 뿌리에 세 줄기가 장엄한 모습으로 자라 나무높이는 15m, 가슴높이의 둘레가 5.4m에 이르는 거목으로 하회마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 잡귀와 부정한 것을 막기위해 친 금줄에 한지로 소원을 비는
소원지가 함박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게 메달려 있다.
(2017. 4. 19)
매년 정월 보름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동제를 지낸다. 이 마을의 동제는 다른 마을의 동제와는 달리 하루전날 화산 중턱에 있는 서낭당과 동구에 있는 국신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 날인 정월 보름에 삼신당에서 동제를 모신다.
동제를 지내기 전에 신성한 영역임을 알려 잡귀를 막고 부정한 것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서 금줄을 친다. 그런데 이 금줄에도 다른 마을과는 달리 금줄 사이에 소원을 적은 한지를 끼워 소원을 빌고 있다. 언제부터 인지는 몰라도 이 소원지를 금줄에 끼우는 풍습이 성행하여 마치 함박눈이 내린 듯 하얗게 쌓여 삼신당의 분위기를 엄숙하게 만들고 있다.
이 삼신당의 느티나무는 사람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으로 알려져 이 삼신당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소원지에 소박한 소원을 담아 금줄에 끼우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승무예능 보유자인 이애주 교수가 삼신목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9. 10. 17)
삼신당의 느티나무는 마을의 큰 길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동구에서 마을의 중심부인 양진당과 충효당으로 가는 큰 길에서 오른쪽으로 직각으로 꺾어 좁은 길을 43m나 들어가서 다시 왼쪽으로 90도로 꺾어 8m 정도 더 들어가서 반듯한 정사각형의 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입구의 반대편에 넓은 광장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다.
이렇게 통로가 두 번씩이나 직각으로 꺾이게 하여 공간의 깊이를 더해주고 기대감을 고조시켜주는 한편, 들어가는 길과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흙담에 기와를 정갈하게 이어 성스러운 삼신당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삼신당 느티나무는 마을의 큰길에서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반대편 넓은 마당에서 바라보이는 삼신당의 느티나무 자태.
(2017. 4. 19)
※나무정보
⁃나무품격 : 보호수(1982. 10. 26지정)
⁃위 치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면 하회리 709
⁃나무높이 : 15m
⁃가슴높이둘레 : 5.4m
※하회마을에 정성들인 풍산류씨 입향조의 적선
하회마을은 안동군 풍천면에 있는 풍산(豊山) 류씨(柳氏)의 동족부락으로 입향조인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공이 고려 말에 풍산에서 이곳으로 이거 하였다. 이 마을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향언(鄕諺)으로서 “許氏 터전에 安氏 문전에 柳氏 배판(杯盤)”이라는 말이 있다. 이곳 하회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김해 許氏가 터를 딱아 놓으니 그 위에다가 광주 安氏가 들어와 집을 짓고 문중을 이루었으며 풍산 柳氏는 잔치 상을 벌이고 흥청거릴 정도로 가문이 번성했다는 뜻이다.
풍산 柳氏가 하회에 입향하여 정착하는 과정에서 입향 시조가 선주민들의 저항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대단하였다. 전서공의 할아버지인 고려의 도염서령(都染署令)이라는 벼슬자리에 있던 류난옥(柳蘭玉)이 하회에 세거지를 마련하고자 풍수에 밝은 지사를 찾아가서 택지를 구한즉 지사는 3대 동안 적선을 한 뒤라야 훌륭한 길지를 구할 수 있다고 하여, 류서령은 하회마을 밖 큰길가에 관가정(觀稼亭)이라는 집을 짓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적선을 베풀었다. 이 일을 그의 아들과 손자인 전서공까지 3대에 걸쳐 적선의 공덕을 한 뒤에야 하회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전서공이 화천(花川)의 하안(河岸)에 터를 잡고 숲을 베어 재목으로 삼아 집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완성이 채 못 되어 거듭 무너지자, 어느 날 지나가든 도사가 “아직 이 땅을 가질 운세가 아니니, 꼭 이 땅을 갖고 싶다면 앞으로 3년간 덕을 쌓고 적선을 해야 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가난한 살림의 柳氏는 재물로서는 적선을 할 수가 없어 문경 새재 길 몫에 자리를 잡고(장소에 대해서는 동내 앞 큰길이라는 이설이 있음) 3년에 걸쳐 오르내리는 길손에게 짚신을 만들어 적선을 한 후, 돌아와 주춧돌을 놓고는 하회의 주인공이 되는 기틀을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3대에 걸쳐 적선을 하고도 모자라 다시 3년간의 공덕을 쌓는 지극한 정성을 들여서야 입향을 하는 인내심을 보여주고 있다. “좋은 명당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은 그 명당과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덕을 쌓고 남을 위해 끈기 있게 적선(積善))을 해야만 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