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소장의 가을] : 2004년 11월 14일~2004년 11월 14일 방송종료
제작진 : 이종수 연출, 김수현 극본
출연진 : 최불암, 김혜자, 김정현, 최정원, 임채무, 박정수, 양희경
[은사시나무] : 2000년 11월 14일~2000년 11월 14일 방송종료
제작진 : 곽영범 연출, 김수현 극본
출연진 : 이순재, 박정수, 유동근, 한진희, 이덕화, 임채무, 양희경, 조민수, 남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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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파 방송의 드라마 같은 경우는 본방송을 잘 챙겨보진 못하지만 적어도 뭘 하는지는 다 알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은 보는 게 스트레스라 안 보지 10년도 더 넘었지만 드라마는 안 봐도 언제 어느 방송사에서 누가 출연하고 누가 대본을 작업했으며 누가 연출했고 시청률은 대충 얼마나 나왔는지, 그 드라마가 끼친 영향력 같은 것 정도는 외워두는 편이다. 그쪽 종사자는 아니지만 이게 나한텐 중요하다. 오래된 습관이기도 하고 모르면 답답하다.
김수현 드라마도 그녀의 흑백텔레비젼 시절의 작품 까지는 잘 몰라도 80년대 이후의 필모그라피는 보지 않았아도 전부 외워뒀는데 지난 주에 퇴근하고 집에 가니 엄마가 전날 김수현 극본의 드라마가 방영하더라는 것이다. 김혜자도 나오고 임채무도 나오는 김수현 드라마 맞단다. 난 김수현 드라마 좋아한다. 챙겨본다. 그런데 내가 방영사실도 모르는 김수현 드라마가 한다니 의아했다. 김수현 드라마라면 단막,장편,미니시리즈 구분없이 방영 전에 캐스팅부터 낱낱이 실시간 공개되며 화제를 모으기 마련이고 시청률이 조금만 떨어져도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언론인들이 갑론을박하며 보수적이네, 시대에 뒤떨어진다느니 이제 한물 갖다느니 설레발 치기 일수다. 호흡이 긴 김수현 드라마들은 뒷심 받아 역전시키는 경우가 많은데도 여전히 주말드라마만 집필하면 시청률 가지고 쪼개는데 정신없다. 그런데 난 김수현의 신작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엄마가 뿔났다]종영 이후 신작은 당연하게도 kbs아니면 sbs에서 할거라고는 했지만 정확한 시기를 공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김수현의 신작이 케이블도 아니고 정규 방송 시간에 방송한다니 엄마의 말에 잘못 본거겠지 라고 반응할 수 밖에 없었는데, 알고보니 sbs의 야심작 [자명고]의 시청률을 잡기 위해 '김수현 스페셜'이란 명목으로 고육지책을 펼친 것이었다.
sbs다운 황당함이다. 누가 상업방송 아니랄까봐, 이렇게 티를 낸다. 타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때문에 새로 준비하는 드라마의 방영시기를 일부러 늦추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이럴 때 몇가지 대체편성 방법이 있다. 전작이 연장하거나 특선영화를 틀어주거나 차기작의 제작과정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거나 하는 식이다. 그러나 sbs는 이 중 아무것도 안 하고 2주를 버텼고 땜방을 하나 밑질 것 없는 무려 9년 전, 5년 전에 각각 방영했던 김수현 극본의 sbs창사기념 3부작 특집 드라마 2편을 2주에 걸쳐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공중파 방송의 프라임 시간대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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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김희애가 또다시 호흡을 맞추게만 된다면 방송국 드라마 국장이 큰 절이라도 하겠다고 말할 만큼 김수현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sbs가 그걸 믿고 대체 편성한 것 같지는 않다. 혹시나 하는 시청률을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전작 연장해봤자 돈만 들고 [자명고]제작과정 다큐멘터리 만들기엔 시간도 없고 영화를 틀어주자니 2주 합쳐 4일 연속으로 내보내는 건 무리가 있는데다 2시간 짜리 영화를 내보내면 4번이나 11시대 프로그램을 결방시켜야 하는데 그러면 또 언론에선 호들갑 떨고 시청자들은 성토할 게 뻔하니 '스페셜'이란 말이 무색하게 2편의 3부작 드라마를 대책없이 내보낸 것이다.
김수현이니까 방영한지 한참 된 드라마를 정규시간대에 재방송을 시키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자존심 구기는 일일 될수도 있다. [자명고]방패막으로 쓰였다는 점은 명백했고 [홍소장의 가을]이나 [은사시나무]의 1회 재방송 시청률을 두고 또한번 '김수현 굴욕'이라는 카피의 저질스러운 기사를 내보낼 만큼 저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상한 재방송은 1,2부 방송하는 날은 2부에서 특히 시청률이 상승했고 다음 날 3부에서 이 시청률이 그대로 이어져 재방송 치곤 흡족할만한 시청률을 올렸다.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에덴의 동쪽]이 2회 더 연장하는 바람에 맞부딪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노력은 도로아미타블이 되어 버렸고 결국 급하게 만든 [자명고]제작과정 다큐멘터리는 한 소리 또 하고 또 한다는 비난에 '김수현 스페셜'보다도 못한 시청률을 올렸으니 고소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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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은 [은사시나무]가 먼저 했지만 재방송은 [홍소장의 가을]을 먼저 내보냈다. 두 드라마 다 sbs개국기념 특집드라마였다. [홍소장의 가을]은 당시 [전원일기]종영 후 오랜만에 최불암과 김혜자가 부부연기를 한다는 것이 화제를 모으며 시청률도 높았고 반응이 워낙 좋아 김수현 드라마로는 유일하게 dvd출시가 된 작품이었다. 완성도 면에선 [은사시나무]보단 [홍소장의 가을]이 조금 더 높은 것 같다. [은사시나무]도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 흡인력이나 전개의 속도감은 [홍소장의 가을]이 앞선다. 이는 김수현 필력을 넘어서는 연기를 보여주는 김혜자와 최불암의 존재감이 한몫했다. 배우가 대본에서만 맴도는 건 한계를 보여주는 꼴이라고 생각한다. 배우가 꼭두각시는 아니지 않나. 배우는 대본을 넘어서야 한다. 김수현 드라마를 김수현 지시대로만 하는 연기자들은 김수현 그늘에 묻혀 공장생산품 같은 틀에 박힌 김수현 연기를 보여주는데 그래서 김혜자가 김수현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모습이 좋다. 김혜자가 쏟아내는 김수현 화법엔 김수현 특유의 '따따따'가 전혀 없다.
작가의 이야기는 경험의 산물이기 마련이고 그 세계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배우가 온통 작가에게 의지하는 건 노력부족이거나 선천적 모자름이다. 배우라면 본인의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제작진의 협력을 밑바탕에 깔고 그 대본을 읽히는 것 이상의 풍성함을 얹어주어야 하는데 김혜자가 김수현 드라마에서 그런 역할을 굉장히 잘 한다. 작가가 미처 표현하지 못했지만 도달하고자 하는 영역을 배우가 확장시켜 주기 때문에 가장 많은 김수현 드라마에 김혜자가 출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흔히들 떠올리는 윤여정이 아니다.) 김수현이 mbc를 떠나지 않았다면 김혜자의 근사한 연기가 돋보이는 김수현 드라마를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이 2000년대 이후 mbc와의 장기계약이 끝나 김혜자의 김수현 드라마 연기를 다시 볼 수 있었는데 그 첫번째가 [홍소장의 가을]이었다. 김혜자가 2000년대 이후엔 작품 활동이 뜸했고 주연이 아니면 안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서 [엄마가 뿔났다]까지 텀이 길었던 것 같다.
김수현은 [사랑이 뭐길래]이후 본격적으로 가족드라마에 매진했고 2000년대 이후엔 이전보다 독기를 줄인 잔잔한 드라마들을 양산해냈는데 [부모님 전상서]같은 드라마는 이게 과연 김수현 드라마 맞나 할 정도로 자극적이지가 않다. [은사시나무]와 [홍소장의 가을]은 이런 변화된 김수현이 그린 가족드라마의 연장선인데 절대 감상주의에 젖지 않는 전개는 젊은 시절의 작품이나 매한가지다.
김수현은 할머니 나이가 되고 나선 문학계의 박완서처럼 그 나잇대의 동시대성을 건드리는 유일한 노장 작가로 군림하고 있는데 이야기 폭은 박완서가 그린 노년의 이야기보다 조금 더 다양하고 다이나믹하다. 박완서가 중산층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김수현은 부잣집 마나님 얘기와 저소득층 가정의 자질구레한 의식주 문화를 모두 건드리고 있다. 장르가 다른 두 작가를 거론하는 이유는 일단 김수현이 박완서 글을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바도 있거니와 한국에서 노년의 이야기를 유일하게 본격적으로 그린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두 작가 모두 차갑고 냉정하게 이야기를 구성짓는 공통점이 있지만 폭언에 가까운 대사가 기차게 쏟아져 나오는 김수현 드라마가 그나마 조금 더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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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드라마가 보수적이란 얘기가 많은데 이건 90년대 이후부터 나온 얘기다. 김수현은 [사랑이 뭐길래]이전까지 보수적이기는 커녕 선정적이라고 경고 먹고 조기종영도 곧잘 먹었던 작가다. [사랑이 뭐길래]이후에도 [작별]같은 경우는 칼들고 설치는 임예진과 시도떼도 없이 웃통 벗고 나돌아다니는 장용 때문에 2번이나 경고 먹기도 했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김수현 가족 드라마는 대가족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그 안에서 살림하는 현대 여자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순응한다는 게 문제로 지적되는데 이 일하는 여자들의 가정주부로의 회귀와 욕망은 표피만 보면 보수적이고 여성차별적이라 부화가 치밀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그 안에 갇힌 여성들의 반란은 페미니즘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과격하다.
[내사랑 누굴까]에서 온갖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이승연은 프로페셔널한 주부 생활에 자부심을 갖는 여자였고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고두심은 몇 십년 동안 이어진 맏며느리 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자식과 남편에게 심심찮게 화풀이를 내다 급기야 막판엔 시아버지에게서 몇 달간의 휴가를 부여받는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 김희애는 순수하게 살림하는 주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배종옥 떡이 더 커보인 게 탐나서고 [불꽃]에서 이영애는 이혼하며 [청춘의 덫]에서 심은하는 원래 살림이 천성인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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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3부작인 [은사시나무]와 [홍소장의 가을]은 김수현이 90년대부터 추구한 가족 혹은 가정드라마의 연장선으로 이후 써낸 장편드라마의 토대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특히 [홍소장의 가을]은 [엄마가 뿔났다]의 프리퀄 같은 느낌이다. 흡연장면 불가 방침이 세워지기 전에 만들어진 [은사시나무]는 엄청난 흡연장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여기 나오는 남자들은 입만 열었다하면 담배를 피운다.
김수현은 현실을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구사하는 작가이다. 그녀 작품은 딱 드라마같다.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김수현 드라마에서처럼 대화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외워둔 대사처럼 응수하는 인물간의 따발총 대화방식은 드라마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게 먹히는 이유는 그 안에서 작가가 중립적인 시선에서 현실감각을 유지하며 일상의 세밀한 부분을 함축시키는 응축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차피 드라마는 '인간극장'이 아니질 않나? 한때 일상의 모습을 포착한답시고 영화고 드라마고 개중없이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어놓고 일상의 섬세함을 그려냈다고 착각하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어차피 드라마는 우리 삶에서 파생된 한 줄기 가공의 세계일 뿐이다. 드라마답게 전개되면서 삶의 이면을 파고들고 거기에 깊이를 뽑아낼 수 있다면 그 드라마는 성공한 거라고 본다.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김수현이 30년 넘게 통속적인 일상의 소재만 파고들면서도 한번도 '사랑과 전쟁'으로 전락하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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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재방송은 [홍소장의 가을]보다 늦게 했지만 본방송은 [홍소장의 가을]보다 4년 먼저 했던 [은사시나무]부터 말해보자. 이 드라마는 간단한 시놉시스만 읽고 예측할 수 있는 전개를 반전시키는 작품이다. 보통의 드라마였다면 아내와 사별하고 시골에서 아내 제삿상 준비를 하며 혼자 사는 할아버지의 생활 자체가 문제가 됐을 것이다. 자실들이 하나 둘 오고 이 문제로 헐뜯고 미워하다 결국엔 화해하고 끝나는 이야기가 됐을 거싱다. 이것만으로도 3부작을 채울 수가 있다. 그러나 [은사시나무]는 이 문제는 이미 시효가 지난 소재라 생각했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식들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렇게 해서 50부작 드라마에서 뽑아내도 먹힐만한 이순재의 다섯 자식들의 탈많은 객지생활이 3부작 내에서 헤치워버린다. 처음엔 평범하게 시작된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얘기가 전개될 수록 어느 누구 하나 평범하지 않다. 후반부에 이르면 아버지를 제외한 등장 인물 모두가 히스테리에 빠져 있다.
아들은 엄마 몰래 엄마가 반대하는 신부감을 데리고 와 엄마를 돌게 만들고 그 바람에 집안은 폭탄 맞은 분위기로 변하고 큰 딸은 노름꾼이었던 전 남편이 와 한바탕 소란을 떨게 한다. 대판 싸운 엄마와 아들은 절교 직전이고 아무도 자기 편이 없다는 생각에 야속한 엄마는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가버리고 남편은 그런 그녀를 경멸하고 둘째 며느리는 여전히 돈타령이고 그 때문에 종종 남편한테 얻어 맞아 이상하게도 제삿날만 되면 눈이 퉁퉁 부어서 온다. 가장 늦게 와서 아무 일도 안 하는 밉상시누이 막내 딸은 유부남과 쫑내고 왔지만 확실한 것도 아니고 세째 아들은 기러기 아빠 신세만 5년째인데 미국 간 아내가 바람이 난데다 술만 먹으면 개차반이 되고......이 집안 알고 보니 콩가루 집안이다.
전형적인 형제 구조이다. 묵묵한 큰형, 철부지 둘째 형, 생각이 깊은 것 같으면서도 막내 티를 못 벗어나는 막내 아들, 괄괄한 큰 누나, 얌체같은 막내 시누이. 아들 셋, 딸 둘과 그와 연계된 식구들이 모이고 유동근이 술먹고 행패부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잔잔한 분위기를 역전시키며 역시나 김수현 드라마답게 지독한 독기를 뿜으며 과격하게 돌진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적대적인 마음은 풀지 못하고 드라마가 끝나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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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 역시 군데군데 보수적인 설정이 눈에 띈다. 가뜩이나 가기 싫은 시댁에 대한 당위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시어머니 제삿상 준비는 온통 며느리들 몫이고 아들들은 방에서 화투나 치고 소주나 불고 담배나 태우다 절만 뚝 하고 다시 소주판을 벌이며 주둥이만 살아있다. 그나마 시아버지가 밤이라도 까고 있지만 그게 이 집안 남자들이 제삿상 음식 준비에 거든 유일한 일이다. 제사 지냈던 큰 상은 어디로 갔는지 여자들과 남자들은 밥도 따로 먹고 가족인지 군대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위계질서도 엄격하다. 큰 시누이는 잔소리는 심해도 그나마 일은 거드는데 반해 막내 시누이는 몸만 살짝 비추고 '큰언니가 맏며느리로서 한게 뭐 있냐'고 당당히 말 할 뿐이다. 장남이면 동생들 학비 대고 어려울 때 도움 주는 걸 당연히 생각하는 시누이의 모습도 어이 없을 뿐이다. 극 중 박정수가 퉁퉁 부어있는 게 당연해보인다.
[은사시나무]에서 박정수 캐릭터와 박정수, 한진희의 차가운 부부관계는 후에 방영한 [홍소장의 가을]에서 거의 똑같이 변주된다. 다른 게 있다면 남편 역이 임채무로 바뀌었고 이제 막 중산층으로 자리 잡았다 위기에 몰리는 [은사시나무]와 준재벌급의 부를 누리다 망해가는 [홍소장의 가을]의 배경설정 정도의 차이다. 박정수가 기대 이상의 호연을 보이자 이 캐릭터를 발전시켜 [홍소장의 가을]로 확장시킨 것 같다. 박정수는 이전에 이런 차갑고 도도한 역보단 주로 푼수끼 있는 소시민 주부이거나 희극적인 감초 역을 맡는 배우였는데 비슷한 배역을 맡은 [은사시나무]와 [홍소장의 가을]에서 멋지게 배역을 소화하며 연기영역을 넓혔다. 특히 [홍소장의 가을]에서 못된 마누라 역은 근사했다. 두 드라마에서의 끔찍한 부부관계를 압축시켜 주는 박정수의 대사도 비슷한 편이다. 예를 들어 비교해보자.
[은사시나무]
양희경 : "워낙에도 활달한 사람 아닌데 하루 아침에 날개 부러져 그러고 있는데 술먹고 싶지 왜 안먹고 싶겠어요?
박정수 : "이해의 한계를 넘었어요. 좀 훌쩍 나가서 친구도 만나고 선후배도 만나고 어떻게든 좀 발전적으로 움직이면서 지내면은 좀 좋아요. 이거는 집안에만 쳐박혀서 하루 종일 홀짝홀짝, 깰만하면 또 마시고 깰만하면 마시고. 이틀도리로 냉장고 뒤지고 옷장 뒤지고 음식이 썩는다느니 옷이 좀먹는다느니, 있는 잔소리 없는 잔소리. 나도 어려워요.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다고요." (중략) 얼마나 무능하면 보자는 사람도 딱 끊어지고 자리 있다고 나오라고 하는데가 한 군데도 없이 저러고 나 앉아 있어요? 친구들 보기도 자존심 상하고 친정에도 들 낯이 없어요. 그것도 좋아요. 능력 없어 불러주는데 없는 것까지도 좋다고요. 스트레스는 주지 말아야지요. 고단한 사람 스물네시간 집에 있는 것만도 스트레스인데 술냄새 풍기며 흔들흔들, 알아듣지도 못할 말 중얼중얼. 얼마나 보기 싫은지 안 겪어 본 사람은 몰라요.
이런 박정수 캐릭터를 그녀의 아들 역으로 나오는 남성진이 한 마디로 일갈한다.
남성진 : 엄마같은 아내 필요없죠.
[홍소장의 가을]은 더 심하다.
[홍소장의 가을]
임채무 : "그 사람 얘기 하지 말아요. 목졸라 죽이고 싶을 때 "한 두번이 아니에요.
박정수 : "형님하고 애기씨 지금 나 앉아놓고 청문회하는 거에요? (중략)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부 다 뭐든지 다 내 잘못이라는 비판아니에요. 겪고 있는 건 그 사람 뿐만이 아니에요. 나도요. 그이 하루아침에 목 날라가니까 모두들 무슨 큰 부정이라도 해서 짤린 거 아닌가 캐고 싶어 죽겠는 친구도 있고요.(중략)소리 좀 지르지 마요. 나 귀 안먹었고 아주 불쾌해 죽겠어요. 네! (중략) 내 맘 모르는 친구들은 퇴직금 왕창 받았을텐데 운동은 왜 꽁무니 빼냐는 둥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는지.
"나 싫어 딴방 살림 차린 거 오빠에요. 애기씨는 부부애가 좋아 모르겠지만 남편이 거들떠도 안 보는 여자 심정, 알기나해요?(중략) 짤렸으면 짤렸지 지금 세상에 반 이상이 짤린 남잔데 그 남자들 다 찬이 아빠같이 굴어요? 멀쩡하게 자고 일어나 나오면서 이마에 내천자 쫙 만들어서는 화장실 청소는 한거냐 안 한거냐, 서랍정리는 언제 한거냐 반찬 가짓수가 왜 이렇게 많냐, 냉장고는 터진다, 음식이 썩는다, 빵점짜리 여편네다, 전기료, 물값, 전화 요금 좀 줄여라, 누구한테 보이려고 미장원이냐, 이런 꼴 당해봤어요? 나도 이제 미칠지경이에요. 알지도 못하면서 나만 잡지들 마세요.
"여자도 남자하기 나름이에요. 이건 얼마나 못돼처먹은 성격인지 친구도 다 끊고 직장 선후배도 다 끊고 콱 틀어박혀서는 나까지 징역살이 시키며 볶아대는데.
뭐니뭐니해도 [홍소장의 가을]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화 부분이라면 아마도 박정수와 김혜자의 오싹한 대화일 것이다. 파탄 직전의 둘째네를 화해시키기 위해 찾아간 김혜자와 박정수의 대화 부분을 발췌해봤다.
박정수 : "집 안 줄이면 금방 어떻게 되는것도 아닌데 애들 아직 결혼도 시켜야 하는데 실직 가장 짜부러드는 거 자존심 상해 싫어요."
김혜자 : "형편대로 사는거지 동서 그게 자존심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박정수 : "난 있어요."
김혜자 : "응 나같으면 벌써 죽었겠네. 평생 남의 식당에서 김치 깍두기나 담그고 반찬이나 주무르면서 산 내 앞에서 그게 할 소리야?"
박정수 : "형님하고 나하고 같아요?"
김혜자 : "뭐가 다른데?"
박정수 : "타고 난 팔자가 다르죠."
김혜자 : "나같은 동서 우리 양반 같은 시숙, 그동안 엄청 자존심 상했겠네. 응?"
박정수 : "거짓말은 못하겠어요."
이때 전화가 울리고 전화 받는 박정수.
박정수 : "네. 그래 했어! 우리 애들 생활비 떨어진다는데 너하고 오빠 이럴 수 있는거야? 죽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30만불 만들어 내. 애들 통장에 원불 넣고 나머지 송금해. 드럽고 치사해 못살겠어 이 자식아! 그럼 아예 떼먹을 작정이었니? 너 나 여기서 죽으면은 너하고 오빠 때문에 홍서방한테 목졸려 죽은 줄 알아!"
공항에서 박정수와 임채무.
박정수 : "사과하는거야? 애들은 모르지만 난 아직 당신 사과 안 받아줄래. 두고 봐야지. 다 안 믿겨. 애들은 모르겠다. 반응이 어떨지. 어깨를 으쓱하고 말던지 아니면 리얼리? 그게 다일 것 같은데. 전해는 줄게. 나 들어가."
등장인물들이 많은 [은사시나무]와 달리 두 집안 이야기 중심으로 흐르는 [홍소장의 가을]에서가 조금 더 집약적이다. 배역의 입체성도 더 두드러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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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의 배우들을 보자. [은사시나무]는 처음 김수현 드라마에 출연하는 유동근이 유독 튀는데 처음엔 김수현 드라마하곤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유동근이 김수현식 화법을 구사해서 어색하기도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병들고 찌든 인물은 큰 형 한진희보다 셋째 아들로 분한 유동근일지도 모른다. 처음엔 바른말 딱딱하며 가장 정상적인 인물로 나오지만 극이 전개될 수록 이 인물은 서서히 미쳐간다. 못마땅한 게 있는 상태에서 술만 먹으면 지랄도 저질적으로 한다. 유동근이 발악할 때면 쩌렁쩌렁 울리는 게 갑자기 사극이 되어 버린다. 이런 인물이 더 무섭다.
[은사시나무]는 연극적인 드라마다. 도입부를 지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면 제사를 모시는 아버지의 집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고 끝난다. 동선도 방,부엌,거실,집 앞을 벗어나지 않고 특별한 카메라 기법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라서 이 드라마를 연극으로 만들어도 참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며느리 말대로 "요즘 이렇게 제사 지내는 집이 어딨냐는"것에 대응하기 위해 정석으로 상차리는 모습도 보여주니 교훈도 될테고 말이다.
[홍소장의 가을]은 [엄마가 뿔났다]의 전초적 성격이 강하다. 속상할 때면 부부가 마당에 나와 소주잔을 부딪히는 일상적인 모습부터 시작해서 결혼축의금을 자식들에게 안 주려는 엄마의 모습이나 평생 자식들에게 등골 빠지고 수중에 목돈 없는 게 서글프고 분한데다 남편은 퇴직하고 앞날이 막막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엄마의 모습 등이 [엄마가 뿔났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망가진 박정수, 임채무 부부의 비중이 큰 드라마라 [엄마가 뿔났다]와 달리 차갑고 격하며 찡하다. 특히 무슨 역을 맡겨도 다 잘하는 임채무의 피폐하고 낙오자 연기는 그야말로 후벼판다. [은사시나무]와 [홍소장의 가을]에서 상반된 연기를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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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김수현의 드라마 세계에서 역할바꾸기를 하는 배우들의 호연은 이번에도 볼만하다. 두 드라마에서 김수현식 오지랖 캐릭터를 연기하는 양희경은 등장했다하면 소란스럽다. 이 외에 박정수, 임채무도 겹친다. [홍소장의 가을]에서 서로 못 잡아 먹어 으르렁거리는 박정수와 임채무는 [은사시나무]에서 말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않는 사이다. 이덕화가 양희경을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회를 거듭하면 어느덧 익숙해진다.
두 드라마는 김수현 드라마가 다 그렇듯 절대 호락호락하게 매듭짓지 않는다. 현실의 세계를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구사하면서 드라마같은 결말을 내지 않는 것이 김수현 드라마의 특징이자 장점인데 [홍소장의 가을]에서 박정수는 부부관계가 조금 회복되긴 했지만 미국 가면서도 남편을 완벽히 신뢰하진 못하고 남편 화해의 징조는 그가 여행을 가장한 자살을 결심했기 때문에 가능한 말로였다.
[은사시나무]에선 아들 때문에 열받은 박정수가 중간에 집을 나가버리고 아들은 엄마 인정을 못받은 채 결혼을 결심한다. [홍소장의 가을]은 기승전결이라도 있고 이기적인 자식들이 엄마의 심정을 이해하는 순간이라도 있지 [은사시나무]에선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다. 유동근은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바람난 아내 눈치 보는 기러기 아빠고 임채무와 양희경은 카섹스를 벌였다 해서 재결합을 약속한 게 아니다. 조민수가 유부남과 완전히 헤어진 것도 아니고 맏며느리는 남편 팽개치고 이민 갈 가능성이 농후하며 더 문제는 남편이 이를 관망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정한 거리두기 방법을 통해 김수현은 타 가족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깊이와 쓸쓸함을 더했다. 노장의 지혜가 보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