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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50) 2023. 12. 6
관용을 베푸는 다윗
사무엘하 19:16-30
<다윗의 귀환>
압살롬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급히 ‘태세전환’을 하여 다윗 왕을 모셔오기로 결의합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만 미적거렸습니다. 이에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연락하여 유다 장로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며, 왜 이스라엘 모든 지파보다 늦장을 부리느냐며 자신을 왕으로 다시 모시는 일에 유다 지파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에 ‘유다 지파’는 다윗에게 전갈을 보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실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로써 다윗 왕은 그동안 마하나임의 임시 왕궁을 떠나 예루살렘 성읍으로 당당히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귀환을 두려워한 두 사람>
오늘 본문에는 다윗의 귀환을 두려워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16~17절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올 때에/ 17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도 그의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과 더불어 그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한 사람은 바로 ‘시므이’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바후림 마을을 지날 때(감람산을 넘어 여리고로 내려가려면 이 ‘바후림’ 마을을 지나야만 했음), 다윗을 향해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16:7)하며 저주를 퍼붓고, 돌을 던진 사람입니다. 이 ‘바후림’이란 마을은 사울의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가 사는 지역으로 사울의 친척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시므이 역시 사울 가문의 일원이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한 가지 편견이 있었는데. 바로 다윗이 사울 가문을 무너뜨리고, 왕권을 탈취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하였고,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죽이지 않았습니다(삼상24:10, 26:9). 그리고 요나단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요나단의 후손은 지켜주기로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실제로 사울과 요나단은 다윗이 죽인 것이 아니라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삼상31장).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금식하며 애도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요나단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내어 사울 왕가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고, 왕의 식탁에서 식사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사울 가문에 대한 반역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백성들의 추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삼상13:14). 그런데 시므이는 지금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 의해 쫓겨나 피신 길이 올랐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마침 자신의 마을을 지나가는 것을 본 것이었습니다. 흥분한 시므이는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이 이렇게 쫓겨나게 된 것은 다윗이 사울 집에 저지른 살인죄 때문에 여호와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소리를 친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말로만 저주한 것이 아니라 따라가며 먼지를 일으키고 돌까지 던졌습니다. 돌을 던지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극도의 분노를 표시한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왜 시므이는 다윗과 같은 의인을 살인자로 매도하며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것일까요?
그것은 시므이가 하나님의 뜻보다는 소위 혈연과 지연에 매여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집안의 몰락 원인을 사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윗에게 그 원인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집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거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마도 시므이는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큰일이 생겼습니다. 예상과 다르게 다윗 왕이 승리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아마도 ‘모골이 송연’(몸이 옹송그려지고 털끝이 쭈뼛해질 정도로 아주 끔찍하다)해 졌을 것입니다. ‘아! 어떻게 하지? 아! 이 주둥이가 문제야’, 그러면서 후회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이젠 나 죽었다’ 싶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두 가지 선택이 남았습니다. 한 가지는 아히도벨처럼 의연한 죽음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비굴하게 자세를 낮추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사울 왕가의 충직한 가신이었다면, 아히도벨처럼 의연한 죽음도 불사했겠지만, 그는 비굴할 정도로 자세를 낮추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베냐민 사람 천 명’(17절)을 모아서, 다윗 왕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나옵니다. 천 명을 모은 것을 보면, 그는 그 지역의 유력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 보이기 위해 요단을 건널 배를 준비해 왔습니다.
18절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다윗 왕이 요단 강을 건너는데, 쓰시라고 나룻배까지 준비한 것입니다. 어떻게든 다윗의 분노를 무마시키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
시므이는 이렇게 다윗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19~20절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하니.”
이에 더하여 시므이는 자신의 죄를 충분히 인정하고 뉘우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먼저 달려와서 이렇게 왕을 맞이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습니다.
<아비새의 분노>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아비새가 분노합니다. 아비새는 다윗의 이복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이자 요압의 동생입니다(2:18). 즉 다윗의 조카입니다(대상2:15~16). 다윗의 충성스럽고 용맹한 장수입니다.
21절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니라.”
앞서 삼하16장에서, 피난 가는 다윗 왕의 일행을 향해 시므이가 저주하는 말을 내뱉을 때, 이미 아비새는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삼하16: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그는 시므이를 ‘죽은 개’라고 표현합니다. ‘죽은 개’는 가장 보기 싫고 하찮은 인간을 뜻하는 히브리적 은어입니다. 아비새는 용맹스럽기는 하나 성격은 매우 급했습니다. 당장 시므이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예전에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사울 왕을 죽이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삼상26:8)
<관용을 베푸는 다윗>
아비새의 말에 다윗은 이렇게 대응합니다.
삼하16:10~11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19:22~23 “다윗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23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
여기서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표현은 당시 관용적으로 사용되던 말로서 “나는 너와 생각이 다르다”는 의미입니다(수22:24). 풀어서 말하면 “너희가 왜 내 일에 간섭하고 나서느냐 너희가 왜 오늘같이 좋은 날 나의 대적이 되려고 하느냐”고 응답한 것입니다.
다윗은 전에는 그가 저주하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이니 놔두라고 하였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다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상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일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시므이를 기꺼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시므이의 말로(末路; 왕상 2:8∼9, 36∼46)
또, 한 사람은 바로 ‘시바’입니다.
17절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도 그의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과 더불어 그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바로 ‘시바’입니다(삼하16장). 그 역시 다윗을 속였기에, 다윗의 귀환이 두려운 사람입니다.
‘시바’는 본래 사울 왕가의 신하로,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는 데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재산을 므비보셋에게 주고 시바와 그의 가족이 므비보셋을 섬길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뜻밖에, 피난길에 오늘 다윗 일행에게, 나귀 두 마리에 피난민에게 꼭 필요한 음식(떡과 여름 과일, 포도주 등)을 가득 싣고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뜻밖이었지만 가뭄에 단비같이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바는 다윗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을 열게 하고, 그를 속여 므비보셋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흑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의 안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삼하16:3b). 므비보셋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 아버지의 나라(사울 왕)를 자신에게 돌릴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위증, 곧 거짓 증언입니다.
이에 화가 난 다윗은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시바에게 줍니다.
더 알아볼 생각을 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성급한 결정이었습니다.
‘시바’의 거짓말은 귀환하는 다윗 왕을 므비보셋이 영접하면서 드러납니다.
삼하19: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므비보셋은 왕권 찬탈을 기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다윗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마치 자기의 일처럼 슬퍼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은 자신이 다윗 일행과 함께 가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삼하19:25-28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26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28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그렇습니다. 시바는 므비보셋을 속이고, 자신만 짐을 꾸려 다윗에게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자기 주인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므비보셋이 가증한 사람이 아니고, 거짓말로 자신의 주인을 모함한 시바가 가증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바’는 자신의 거짓말이 곧 들통날 것이 두려워 다윗에게 엎드린 것입니다.
<다윗의 반응>
므비보셋의 항변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된 다윗의 반응은 어떤 것입니다.
29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다윗 왕은 므비보셋의 재산 중 절반만을 그에게 다시 환수시켜 줍니다. 이것은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다윗은 마땅히 므비보셋에게 모든 재산을 되돌려 주어야만 공평했습니다(9:7-11).
그러나 다윗이 이렇게 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이미 아들로부터 반역을 경험한 터라, 어떻게든 므비보셋의 세력을 키우는 일은 막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훗날이라도 반역의 씨를 내리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결과적으로 므비보셋의 태도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음).
또, 하나는 비록 시바가 자신을 속인 것이 드러났다고 해도, 어쨌든 피난 시절에 시바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16:1-4). 그 시절 시바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 큰 위기를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므비보셋의 반응>
다윗의 조치에 므비보셋은 이렇게 말합니다.
30절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혹자는 이러한 므비보셋의 말이 왕의 처분에 어떠한 불만을 은연중 표시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번 일은 재산 때문에 벌어진 일로서, 이것으로 인해 므비보셋은 다윗 왕에게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오직 다윗 왕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 곧 왕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며, 그러므로 재산은 없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므비보셋은 재물보다 다윗과의 관계 정상화를 더 중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후로 므비보셋과 시바는 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이 이후의 사건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할 교훈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신실한 성도는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므이와 시바를 보면서, 시류와 상황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모습, 상대가 약할 때는 무자비하게 짓밟다가도 상대가 강해지면 태도를 바꾸어 굽실대며 아부하는 비겁한 모습, 이것이 악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동물나라와 새나라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박쥐는 동물나라가 이길 때 자기는 쥐라고 하면서 동물나라에 붙었다가, 새나라가 이길 땐 자기는 새라고 하면서 새 나라에 붙었다가! 결국, 전쟁이 끝나고 여기저기도 함께하지 못하고, 동굴에 숨어 살게 되었다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바로 시므이가 이 이솝우화의 박쥐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서나, 사람에 대하여서나 언제나 한결같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웃이 약하든, 강하든, 또 그들이 부자이든 가난하든 변함없는 모습으로 진실하게(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 공동체 안에서 - 약2:1~5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둘째, 악은 어떤 모양으로든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인은 반드시 의인 앞에 엎드리게 되어있습니다.
아마도 시므이나 시바는 다윗 왕이 왕권을 회복하여 다시 돌아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행위는 곧 자신들을 옭아매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눅12:2~3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약2:12~13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셋째, 관용하는 사람만이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결정에는 정치적인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시므이는 북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세력가입니다(특히 사울 왕가인 베냐민 지파). 만약 그를 죽인다면 많은 북쪽의 사람들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민심이 돌아오는 시점에서 보복성 정치는 오히려 더 부담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시바 역시 사울 가문의 사람입니다. 북이스라엘의 10지파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용서는 훗날 남유다(르호보암)와 북이스라엘(여로보암)로 나라가 양분될 때 베냐민 지파가 다윗 왕조에 속하여 충성을 다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정치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이유에서도 잘한 일입니다. 다윗 자신도 죄에서 용서받은 자입니다. 이와 같은 관용의 자세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믿음의 선진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먼저 요셉은 자신을 애굽에 팔아 큰 고통과 아픔을 주었던 형들을 용서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사역 초기에는 사역지를 떠난 마가를 용납할 수 없어서 동역자 바나바와 다투고 갈라서기도 했지만(행15:37~39), 마지막에는 연약한 사람들의 모든 허물이나 잘못을 용납하고 이해하는 자가 되었습니다(딤후4:11, 16, 빌4:5).
엡4: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골3:13~14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가장 중요한 본은 보이신 것은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세 번이나 부인 베드로와 제자들을 친히 찾아가셔서, 용기를 주시고, 사명을 주셔서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주신 것도 마찬가지.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를 통해서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마18장 - ‘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함을 받은 자는 또한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만약 용서가 없다면 이 땅에서 불완전한 사람이 살아남을 공간이 있을까요? 복수에 복수를 낳았을 것이므로 이 땅은 피로 얼룩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인의 신분에서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일수록 더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죄들을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나에게 죄지은 자들을 향하여 아량을 베풀고, 용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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