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7월 “더 늦기 전에 20세기의 민중생활을 기록하고 해석하여 민중생활사의 자료집성(아카이브)을 구축함으로써 역사없는 사람들의 역사를 내세우고, 아울러 이 시대에 적실한 새로운 인문학을 정립하기 위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육성사업 지원 아래 결성된 ‘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단’이 또 하나의 성과물을 내놓았다.
‘100년 생활사를 담은 20세기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어제와 오늘: 한국민중 80인의 사진첩>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1백여명의 연구단 참여 전문가들 가운데 20명의 전문연구자들과 3명의 사진작가들이 기록한, 격동의 20세기를 살아낸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이웃 80명의 삶이 그들 자신의 기억과 회고를 토대로 각자의 과거 및 현재 사진들과 함께 정리돼 있다. 이들 80명은 통계학적 표본이 아니며, 경인·호남·영남 이 세 지역군에서 연구자들이 찾아내고 선별한 민초들이다.
하나같이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 급진적 개발시대의 진통을 온몸으로 겪어낸, ‘특별할 게 없는’ 그러나 이 나라 이 시대를 만든 진짜 주역들이다. 여생이 얼마남지 않은 이제 기막힌 세월을 되돌아보는 그들이 고단하고 눈물겹고 때로 허망해보이기도 하고 때론 허허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과 핏줄에 헌신했던 그들 세대의 절박하지만 당당했던 생존투쟁이야말로 한국현대사 그 자체였으며 그들의 기억이 역사 재구성을 위한 근간이 돼야 한다는 것을 책은 보여준다.
책에 소개된 80인 중에서 일부를 <경인><호남><영남>지역으로 나눠, 각 지역 민초들의 인생역정을 사진과 함께 세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경인지역]
▲ “아무리 못 살고 하루에 한 끼니를 먹고살아도 좋아. 왜냐면 신랑이 잘 하더라고. 22년 살다 갔는데 정말 우리 애기엄마는 장미꽃도 젖장미꽃이라고. 너무 이뻤어, 내가. 진짜 이뻤어. 지금은 늙어서 그렇지. 결혼사진 한 번 갖고 와서 보여줄께.” 할머니의 중매로 만난 남편은 나보다 8년 연상이다. 고향이 같은 순창이라도 나는 읍내고 남편은 시골인데다가 어려서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스물아홉 노총각이던 남편이 선을 보러 내려와서는 행여 나를 놓칠까 아예 결혼식까지 치르고 올라갔다. 창신동 산꼭대기 하꼬방 생활이었지만 남편 덕분에 혹독한 시집살이도 행복한 심정으로 견딜 수 있었다.
* 김옥순(金玉順) : 김해, 63세, 1943. 7. 12(음), 전북 순창, 6남, 명주실공장 노동→막노동→풀빵장사→리어카 토스트 장사, 전북 순창→서울→경기 성남→서울→경기 안산,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 (장남, 며느리, 손자 2)
김옥순은 1943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에서 할머니, 어머니, 오빠와 함께 살았다. 남원 운봉 출신인 어머니는 순창장날이면 소전(우시장)에서 막걸리장사를 했다. 순창 동초등학교를 다니던 2학년 때 생활이 곤란해지자 “아들은 가르쳐야 되고 딸은 안 가르쳐도 된다.”는 할머니 말씀에 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가톨릭계 야학을 다니면서 한문도 배웠다. 열한 살 때 할머니가 “딸이라고” 번데기공장(명주실 잣는 공장)을 하는 막내고모네로 보냈다. 거기서 그녀는 밥도 하고 공장일도 하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면서 눈물 겪고” 자랐다. 너무 힘들어서 열일곱 살 때 무작정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혀서 순창 집으로 돌아갔다. 4년 뒤인 스물한 살에 외할머니의 중매로 서울 창신동 산꼭대기 하꼬방 집으로 시집을 왔다.
“가난한 어린 시절의 고생, 결혼이 해방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결혼은 그녀 인생사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시집 와서도 고생은 계속되었고 시어머니의 구박도 만만치 않았으나 “신랑이 너무 잘해줘서” 늘 행복했다. 그녀는 젊었을 때 예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남편이 늘 “당신은 장미꽃도 젖장미꽃이다.”라고 말하던 것을 지금도 되뇌이고 있다. 비록 스물 두해 같이 살다가 떠난 남편이지만, 그녀는 없이 살아도 서로 존중해주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창신동 1차 철거 바람에 성남으로 쫓겨 가기 전 몇 년 간 그녀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은 머리카락 장사였다. 기동차를 타고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머리카락을 사다가 중앙시장 등에 내다 팔았다. 성남으로 집단이주한 후 그녀의 가족과 이웃사람들은 모두 천막 비닐하우스를 짓고 공동생활을 했다. 정부에서 철거민 생계대책으로 <초석건설>이라는 토건회사를 앞세워 공사장 막노동을 주선해준 적도 잠시 있었으나, 그 시절 생계가 막막한 부부는 주로 동대문까지 노동일을 하러 나왔다. 7-8명의 식구가 꼬박 1년 반을 비닐하우스에서 살다가 당국에서 성남 신흥동에 택지를 주어서 옮겼으나, 당장은 얼기설기 하꼬방을 지어 살 수밖에 없었다. 공사판 막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아가던 이들에게는 그곳에 그럴듯한 집을 짓는 데만 10년이 걸렸다.
성남시절 그녀는 남편과 같이 막노동일도 하고 공장에도 다녔으며, 집에서 벙어리장갑 꿰매는 일도 했다. 남편이 동대문 근처로 노동일을 나갈 때는 그녀도 동대문 <보람약국> 옆에서 풀빵, 호떡, 튀김 등을 팔았다. 그러던 중 <임성기약국> 근처에서 막노동을 하던 남편이 나이 마흔에 뜻하지 않은 안전사고로 운명을 다했다. 남편과의 결혼이 그녀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듯이 남편의 사망 역시 그녀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남편 죽음 후 아이들과 서울 이문동으로 옮겨왔고 청계천 청평화시장 뒤쪽 버스정류장 앞에서 지금껏 20년 넘게 토스트를 구워서 팔고 있다. 서울시의 노점상 단속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10년 전부터는 노점상협회에 가입하고 안산으로 이사하여 비교적 편안해졌다.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6시 30분경 그곳으로 오는데,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벼룩시장이 옮겨가는 바람에 요즘은 하루벌이가 5만 원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노상의 가게는 현재 인근 사람들의 사랑방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슬하에 아들만 여섯을 두었는데,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까지는 모두 시켰으며 다섯째만 빼고는 다들 일가를 이루었다. 그녀는 1년에 몇 번 절에 가는 것과 협회 모임에 참석하는 외에는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으며 지낸다.
▲ 35세가 되던 1977년 여름에 부산의 태종대에서 섬을 배경으로 친구가 찍어 준 당시의 유일한 사진이다. 나는 부산시 영도구의 지역구 청년회의 회장이었기 때문에 항상 곁에 친구들이 많았다. 내가 서울에 올라가서 새로운 일을 하겠다는 결심이 서고 나서 그것을 친구들에게 알리니까 8명의 친구들이 부산의 태종대에서 환송회를 해 주었다. 이 환송회는 내가 상경하기 전의 마지막 파티가 되었다. 바다와 섬이 어우러진 태종대의 한 횟집에서 나와 친구들은 그렇게 작별을 했다. 지금 그 친구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몹시 그리워진다.
* 김정남(金正男) : 김해, 63세, 1943. 11. 4(음), 1남 4녀, 부산 영도, 선박회사 현장감독→민속골동품점 운영, 부산→서울, 서울시 중구 황학동, (아내)
김정남은 1943년 부산시 영도구에서 태어났다. 4남 4녀인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책임감이 무척 강했다. 부모님이 그에게 거는 기대도 남달랐고, 스스로도 어렸을 때부터 자신보다는 가족들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그는 영성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신문배달을 하면서 가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영성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회동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처음에는 청과조합에서 급사로 일했고, 두 번째로는 통조림회사에서 급사를 하게 되었다. 8남매의 장남이다 보니 항상 동생들을 챙기고 보살펴야 했고,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일반계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고 야간고인 건국상고에 갈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신용금고에서 급사로 일하고 밤에는 건국상고에서 공부를 하는 힘겨운 생활이었지만 그 시절에 배운 것도 많다고 한다. 처음에는 신용금고에서 급사를 하다가 두 번째로는 국립경찰병원에서 급사를 했다. 자신이 학비를 벌어서 다녀야 했으므로 때로는 학비를 버느라고 학교를 잠깐씩 쉰 적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힘으로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이 지금도 못내 아쉽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26세가 되던 1968년에 광주 상무대로 군 입대를 하였다. 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그는 맞선으로 만난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1971년에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 선박회사에 들어간 그는 현장감독에까지 진급할 수 있었는데 사하라태풍이 오던 해는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한다.
8남매의 장남이라는 자신의 위치 때문에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과감히 선박회사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갈 결심을 하였다. 당시에 그는 새로운 결심으로 사진관에 가서 증명사진도 찍고, 부산의 친구들이 그를 위해서 환송회도 해 주었다.
부인이 둘째인 딸을 낳은 후, 35세가 되던 1977년에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숭인동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남대문과 동대문을 찾아다니다가 장사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서서히 장사에 눈을 뜨게 된 그는 자신이 평소에 옛날이야기를 좋아하고, 역사를 좋아한다는 점에 주목해서 여러 골동품가게를 다니면서 공짜로 일을 해 주면서 일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부인과 부모님, 동생들을 모두 서울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그렇게 점점 자리를 잡아가다가 1980년에 황학동에 <민속골동점>을 처음으로 열게 되었다.
그 후 골동품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하고, 여러 경험도 쌓아서 지금은 웬만한 물건은 거의 다 감정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황학동시장의 ‘터줏대감’이라고 불리는 그는 지난 30여 년간 황학동시장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황학동시장을 지켜나갈 것이다. 8남매의 장남으로서 가족들을 모두 책임지고, 혼자의 몸으로 서울로 올라와서 이렇게 황학동시장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지난 세월 동안 그가 흘린 무수한 땀방울들이 필요했다.
▲ 1944년, 이 사진은 1944년에 최인순이 이태원의 김의식과 혼인할 때에 신랑집 마당의 봉당에서 찍은 것이다. 그녀는 서울역 뒤편의 중림동 출신으로, 해방 전에 정신대를 피하기 위해 친척 소개로 서둘러 혼인식을 올렸다. 신랑은 이태원의 3대 토박이로, 당시 인기직인 용산 철도국에 다녔다. 전쟁 때에 남편이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자, 홀로 어린 딸을 데리고 피난을 가서 온갖 고초를 겪었으며, 전후에 어려움 속에서도 6남매를 잘 키워냈다. 그는 예전의 서울 모습과 생활상을 잘 기억하고 있다. 두 사람은 작년에 결혼 60주년의 회혼례를 치렀다.
* 최인순(崔仁順) : 해주, 80세, 1926. 9. 23(음), 서울 중림동, 3남 3녀, 보험회사, 서울 중림동→서울 이태원동,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남편)
최인순은 서울역 뒤편의 중림동 출생의 서울 토박이로, 어릴 적에 말마차가 7필이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따라서 어릴 적의 중림동의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다.
9살 때에 정동공립보통학교 3년 과정을 마친 후에, 나중에 봉래공립심상소학교로 옮겨 졸업했다. 소학교 6학년 때에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가서 선죽교를 본 기억도 지니고 있다. 6학년 때(14살)에 부친이 62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도 기울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모친이 하숙을 치며 자식들을 교육시켰다. 당시 하숙생들은 주로 인근 대륙?태평고무공장 노동자, 남대문 시장의 장사꾼, 마루보시(철도 하역 업체) 창고 일에 종사하였다.
그는 어릴 적의 명동과 본정통 백화점, 서울역 부근의 모습, 서울 사람의 세시풍속과 각종 세시음식, 어린이 놀이 등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뚝섬, 퇴계원에 놀러간 기억도 지니고 있다. 한편 예전에 집안 고사와 터주신 모시는 과정, 또한 18살 때에 당시 인기 영화인 ‘검사와 여선생’을 인상 깊게 보았던 기억도 가지고 한다. 서울 생활에서 땔감이 쪼꼬리 사용 아궁이에서, 연탄보일러, 기름보일러로 변화해 가는 과정도 구술하였다.
그녀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19살의 나이에 당시 철도국에 다니던 22살의 김의식을 만나 혼인을 하고 7남매를 낳았다. 전쟁 때에는 남편이 제 2국민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혼자 1.4 후퇴 때에 6살, 4살의 두 딸을 데리고 평택으로 피난을 가서 갖은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6. 25 직후 낳은 아들은 6개월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더구나 둘째 딸이 전쟁 속에서 제대로 먹지 못해, 성장하며 잦은 병치레로 고생을 하며, 이때 건강을 해친 것이 탈이 되어 결국 49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이 일을 항상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50세 전후해서 생계를 위해 보험회사를 5년 정도 다닌 적이 있다. 현재는 건강이 좋으며, 조양경노당의 할머니 노인회장을 맡고 있다.
최인순의 남편 김의식(남, 1923년생, 83세)은 이태원에 3대에 걸쳐 거주한 토박이다. 5살 때에 부친, 7살 때에 모친이 사망하여, 고모 밑에 성장하였다. 한남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4살에 해방을 맞이했다. 1937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용산철도국 공작소에서 주로 정비일을 보았다. 당시 이태원에서 10여명이 철도국에 같이 다녔다고 한다. 해방 직전에는 육군 보급 창고에 2-3년 다닌 적도 있으며, 해방 이후 기술을 살려 철공장에 주로 다녔는데, 생활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그는 이태원의 변천 과정을 잘 알고 있으며, 부군당제에도 화주로 여러 번 참여하였다. 가난하지만 비교적 성실한 삶을 살았다. 몇 년 전에 전립선 수술을 받았으며, 현재 허리 디스크가 있어 건강이 좋지 못하다.
▲ 한남수상소학교 3학년(1935년) 때에 반 학생들과 함께 찍었다. 당시 한국인 담임 선생님께서 “여기서 낙제한 놈이 있을테니깐도로, 너희들 친구들 다 있을 적에 찍는다.”고 해서 찍게 되었다. 나중에 실제로 반에서 8명이 낙제하였다. “선생님이 된장 자장면을 좋아한다고. 그래서 얘들 시켜서 된장국수 해가지고 와라고 했지. 된장국수가 자장면이죠.” 당시 운동장 위쪽 계단에서 촬영했으며, 벚꽃 피는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이 학교는 당시 한남동을 비롯해 인근 보광동, 서빙고동, 이태원동, 옥수동, 금호동 출신의 학생들이 다녔다. 유일하게 분당에 친구가 살아 있으나, 그도 이 사진을 갖고 있지 않다.
* 최상현(崔相鉉) : 흥해, 81세, 1925. 1. 17(음), 경기 시흥, 2남 4녀, <삼협백화점>→육군작업소 창고식품부→각종 노동→미군부대 자동차수리부 정비, 서울 용산,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아내, 손자 2)
최상현은 조부모가 청파동에서 한남동으로 이주했으며, 어머니는 원효로 4가, 부인은 흑석동 출신의 서울 토박이 집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모는 대궐의 궁녀 출신이며, 부친은 한남동 나루 근처의 방앗간에서 기계수로 일했다. 최상현은 어릴 적에 한강나루에서 자랐고 지금도 한남동에 사는 전형적인 지역 토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1925년 을축년은 대홍수가 일어난 해이다. 정월에 태어난 그는 여름철 대홍수로 인해 집이 떠내려가면서, 어머니께서 간난 아기인 자기를 데리고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의 삶은 한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어린 시절에 한강을 넘나들며 보냈다. 한남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담임선생님의 주선으로 용산의 <삼협백화점>에서 약 3년간 점원과 배달 일을 했다. 당시 일제는 21-22살의 청년을 대상으로 징병을 실시했으나, 그는 다행히 몇 달이 모자라 가까스로 징병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육군작업소의 육군창고 식료품부에서 일을 하다가 해방이 되면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 용산철도 공작창에 들어가 칠방에서 칠 일을 하다가 1950년 전쟁이 나면서 그만두었다.
전쟁 중에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서 수복 때까지 마루 밑에 굴을 파고 은신하면서 목숨을 부지했다. 수복 후에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어, 인천에서 배를 타고 3일간 거의 먹지 못하고 부산에 갔으며, 다행히 신체검사에 불합격을 받아, 걸어서 거지꼴이 되어 서울로 생환하였다. 이 때 서울 부근에서 열병을 앓아,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귀가했으나, 다행히 부모가 3일 만에 피난에서 돌아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특히 피난 중에는 사진을 비롯한 중요 귀중품을 독에 넣고 땅속에 묻어 보관하여, 아직도 1930년대 소학교 시절을 비롯한 귀한 사진을 몇 장 보관하고 있다.
전쟁 이후에 각종 노동일을 하다가, 1980년 초기에 5년간 미군부대 자동차 수리부에서 일을 하면서 거칠게 삶을 헤쳐 나왔다. 그는 예전의 한남동과 인근 한강변 모습, 주변의 정미소의 작업 방식, 한강의 늘배, 주민의 생업 방식, 한강 수해 모습 등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한남동의 작은 한강 부군당의 당주를 24년간 맡아 관리하고, 제의를 주관하고 있다. 부친 최동원(崔東沅, 85세 사망)도 이곳 부군당의 당주를 역임해서 2대에 걸쳐 당주 일을 보고 있는 셈이다. 부친이 당주를 그만 둔 지 3일 만에 큰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이런 일로 인해 더욱 믿음을 가지고 부군당을 지키고 있다. 2005년도에는 구청 보조 230만원과 68명으로부터 148만원을 추렴하여 제물을 준비하고 굿을 하였다. 무당에게 대부분의 돈이 나가기 때문에 모자라는 비용은 부군당 내 방의 월세 10만원으로 충당한다. 지금도 제의는 1월 1일에 하며, 그는 굿과 당제사 준비로 인해 한번도 정월 초하루에 차례를 지내지 못하고, 항상 설날 다음날인 정월 2일에 별도로 집안 차례를 모시고 있다. 그동안 부정이 한 번도 없어서, 24년간 한번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당주를 맡아 제를 주관하고 있다.
▲ 1971년 음력 정월 24일 시아버지 환갑 때 찍은 가족사진이다. 예전에는 환갑만 지나도 장수(長壽)를 하였다고 해서 잔치를 크게 했기 때문에 일가친척들을 모두 불러 음식을 장만해서 대접하고 기념 촬영을 하였다. 시댁은 7대째 김포에서 살고 있으며, 사진을 찍은 장소는 현재 살고 있는 집 마당이다. 시아버지 이관응은 부인 민영환과의 사이에 4남 3녀를 낳았다. 남편 이재구는 장남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가진 하성 농장 땅 4천 평을 소작하였고, 해방 후에도 정부 소유의 하천 부지 땅을 개간하여 아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시아버지는 1974년 64세로 돌아가셨다.
* 김순분(金順分) : 경주, 72세, 1934. 11. 8(음), 경기 김포, 2남 2녀, 경기 김포,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남편)
김순분은 72세로 김포시 하성면 후평리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9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6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친정은 형편이 좋은 편이어서 딸에게 밥하기, 밭매기도 시키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학교에 다닐 마음이 없어져서 그만 두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께서 마음에 두었던 하성면 석탄리에 사는 이재구와 19살에 혼인해서 2남 2녀를 두었다. 처음 시집에 왔을 때 식구는 많고 먹을 게 없어서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몇 년 지나서부터는 둑방길을 막아서 보리와 벼를 심어서 살림이 비교적 나아졌다. 친정에서 일을 하지 않다가 시집에 와서 갑자기 일을 하다보니 처음에는 구박을 받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품앗이를 가서 벼 두가마를 찧는데, 손바닥이 불어터져서 피가 나올 정도였는데 내색을 하지 못하고 일한 기억도 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은 시부모님과의 갈등으로 인해 큰 아들을 낳고 3년 동안 집을 나가서 살던 때이다. 시부모님과 갈등으로 수차례 친정집으로 갔고, 결국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영등포에서 식당을 하던 외삼촌댁에서 살았다. 그 동안 남편은 군 제대를 하고 돌아와서 부모님의 강요로 새 장가를 들었다. 둘째 부인은 고등학교까지 나온 신여성이었다. 그 후 남편의 설득과 둘째 부인의 이해로 다시 시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둘째 부인은 서울에서 살고, 김순분은 계속 현 거주지에서 계속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둘째 부인 슬하에는 1남 2녀가 있다. 남편의 설득으로 둘째 부인과 원만한 관계로 지내며 큰 대소사가 있을 때 마다 서로 참석하였다. 둘째 부인은 10년 전에 당뇨로 사망하였다.
시아버지가 서울에 살고 싶어 하셔서 서울에 집을 짓고 자식들과 시부모님은 서울에 살았다. 남편과 김순분은 김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자식들이 많아서 딸까지 대학을 보내지는 못했다.
농사가 많아지자 30여 년 전에는 머슴을 2-3년 두었다. 당시 머슴에게 품값으로 쌀 7-8가마를 주었다. 틈틈이 새끼를 꽈서 번 돈으로 아이들 용돈과 학비도 주고, 입찰계나 번호계와 같은 여러 계에 들어 돈을 늘리기도 했다. 농한기에는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해서 돈을 벌었고, 가을에 도토리를 따서 도토리묵 가루를 만들어 팔아 부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형편이 나아진 지금도 상자 접기 부업 등을 하면서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요즘에는 마을 노인 회장을 하는 남편을 도와 마을 회관에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점심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을 대접하기도 하고, 관광도 다니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고 60년이나 61년 쯤 놀잇배 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강 건너 노량진에서 산천동쪽으로 찍은 것으로 맨 오른 쪽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본인이다. 놀잇배지만 친구들과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뱃놀이 객에게 대여한 것이었다. 함께 탄 사람들은 뱃놀이를 나온 손님들이다. 당시 사람들은 뱃놀이를 나오면 강에서 바로 물고기를 잡아 요리해서 술과 함께 먹으면서 놀았다. 하지만 손님들이 직접 배를 몰고 물고기를 잡을 수 없어서 배 소유주가 어구와 조리 도구, 양념들을 가지고 함께 타서 배를 운행하고 물고기를 잡고 요리를 했다.
* 임창봉(林昌鳳) : 나주, 71세, 1935. 1. 21(음), 서울 용산, 2녀, 어업 및 배 임대업→야채운송업, 서울 용산, 서울시 용산구 산동, (아내, 외손자 2)
올해로 71세가 되는 임창봉은 원효로, 산천동 한강변에서 평생을 한강과 함께 살아오신 분이다. 따라서 이분의 생애를 따라가 보면 지난 70년 동안 한강이 어떻게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변화하여 갔는지를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임창봉에게 한강은 단순히 바라보는 경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 중요한 생활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한강에서의 생활은 어린 시절, 아버님이 한강에서 자갈 채취하는 일을 맡아하셨던 데서 시작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원효로 강변에 수송을 위한 철도까지 가설하여 놓고 자갈을 채취하였다. 아버지는 이 현장에서 십장으로 일했다. 이후 일제시대가 끝나고, 곧 닥친 6.25 전쟁 때에는 중요한 격전지였던 한강에서의 싸움을 생생하게 목격하기도 하였다. 청년이 된 후에는 아버지와 함께 배를 띄우고 뱅어, 장어,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웅어까지 계절에 따라 한강에 등장하는 여러 물고기들을 잡아 생계를 이었다. 물이 깨끗하고 맑던 당시 한강에서 뱅어는 뛰어난 맛으로 부유한 서울 사람들의 입맛을 끌었다. 물고기를 잡지 않을 때는 뱃놀이를 나온 시내 사람들에게 배를 빌려주기도 하였다. 배를 띄우고 단오 쯤 올라오는 웅어를 잡아 회를 먹던 그 맛은 진미 중의 진미였다. 그리고 사업 수완이 뛰어나고 세상 변화에 민감했던 아버지와 함께 송파 뱃길을 개척하여 판로가 없어 고생하던 송파의 야채들을 용산으로 실어 판매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송파까지 배를 타고 올라가 야채를 사서 싣고 내려와 당시 서울 시내에 야채를 공급하던 중요한 시장이던 용산 강변 시장에서 그 야채들을 판매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가져온 야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야채까지도 판매하는 유명한 거간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맺은 송파 지역과의 인연으로 그곳에 토지도 구입하게 되었고 결혼도 하였다.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아버님이 점찍어 놓으신 맏며느리 감의 부인과 얼굴 한번 보고 약혼식, 결혼식을 올렸다.
이런 한강에서의 생활로 아버님과 함께 많은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 거의 독점적이었던 뱅어 잡이, 야채 운송 판매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한강이 변화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가족의 생활도 기울기 시작하였다. 먼저 경제개발과 함께 한강의 오염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뱃놀이도 할 수 없었다. 철도가 발달하고 자동차와 도로가 늘어나면서 느리고 작은 배로 야채를 운송하는 일도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과 함께 부모님도 연로해지시면서 차례차례 돌아가시게 되자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임창봉은 송파의 땅을 팔아 쓰리 쿼터 자동차를 구입하고 이제 배가 아닌 트럭으로 야채와 물자들을 운송하는 야채 ‘밭떼기’ 운수업을 하게 되었다. 이 일도 초반에는 아주 벌이가 좋았다. 가방으로 하나 가득 돈을 들고 다녔다고 기억할 만큼. 그러나 역시 이 일도 송파보다 더 먼 곳에서 싼 값으로 야채들이 대량 수송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여전히 한강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이지만 이제 한강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러나 배를 띄우지도 물고기를 잡지도 못하는 한강에서 여전히 때 마다 용궁을 찾아 용왕제를 지내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그에게는 한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 야채에 물이 들어 배추를 사러 천호동에 나갔는데 씨름대회가 결승이라 계획에도 없이 갑자기 참가하게 되었다(31세, 1958. 9. 16). 우승하여 상으로 받은 황소도 보인다. 그런데 보통 씨름대회 우승 황소라고 하면 커다란 어른 황소를 생각하지만, 옛날의 어려웠던 경제 상황에서는 비싼 가격 때문에 대개 이런 작은 황소 송아지를 주곤 했다. 김용민 할아버지가 우승했던 또 다른 큰 씨름 대회인 하남시 동부시장 우승 기념사진에도 역시 작은 황소 송아지가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진에는 우승을 기념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다방에 쌀가게까지 당시 천호동 시장 거리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다.
* 김용민(金龍民) : 김해, 78세, 1928, 9. 9(음), 경기 광주, 7남 1녀, 농사, 경기 광주→서울,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아내)
김용민은 1928년 9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 3번지에서 출생하셨다.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는 당시에는 ‘부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마을이었고, 현재는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아시아 공원이 있는 곳이다. 한강 개발과 함께 강의 물길이 달라지고 제방공사와 매립이 이루어져 현재는 육지로 되어있지만 당시 ‘부렴’은 탄천과 송파강에 끼인 한강변의 모래섬이었다. 신천, 잠실과 함께 잠실 3 동네로 불릴 만큼 생활환경이 비슷했던 농촌 마을로 약 50호의 가구가 야채를 재배하면서 살고 있었다. 모래밭이기는 해도 강변 모래사장 같이 물이 빠지지 않고 고여 있었기에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어린시절이었던 일제시대에는 마을 토지가 모두 일본인의 소유였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소작인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적산 토지가 되면서 농지개혁법으로 소유주가 될 수 있었다. 마을에서 주로 재배하던 야채들은 수박만큼 커다란 청참외, 노란 참외, 수박 등이었고 가을이 되면 무나 배추도 길렀다. 토질 때문인지 과일의 단맛이 덜 했지만 그래도 시내로 잘 팔려나갔다. 그도 군대를 제대한 후에는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신천이나 잠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용산이나 배오개로 야채를 배로 실어 날랐다. 배 채로 거간에게 판매를 맡기고 돈을 받아오는 방식이었다. 수로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는 쓰리 쿼터라 불리던 소형 트럭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잠실 3 동네로 불렸던 신천, 잠실과는 생활환경이 비슷하고 왕래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배구, 축구, 씨름 등 다양한 운동 경기를 열어 친목을 도모하고 마을마다의 힘을 겨루곤 했다. 아직도 3 동네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 가장 큰 추억거리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중요한 행사였다. 특히 ‘부렴’ 사람들은 사람 수는 적어도 이 운동 경기에서 우승을 도맡아 하여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리고 이 시합이 열릴 때 마다 그도 씨름으로 이름을 날렸다. 아직도 주변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부렴은 씨름을 잘 한다.”고 기억할 만큼 뛰어난 솜씨였다. 작은 것이긴 해도 몇 마리나 되는 황소를 타 살림에 보태기도 했다. 솜씨를 살려 학생 시절에는 유도부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농사를 지었지만 씨름만 잘 한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멋쟁이로 이름이 높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잠깐이지만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연구실에서 근무를 하기도 하였고 경성 궤도회사에서 회사원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현재 수도 공업 고등학교인 경성 전기학교를 다녔고, 전쟁으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면서는 방위군 사관학교에 들어가 장교로서 군복무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씨름도 잘하고 재주도 많은 멋쟁이였지만 개발과 함께 생활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면서는 경제적인 문제로 생활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농사를 짓다 맞이한 40대 중반이라는 나이는 새로운 직업을 찾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보상금으로 근근이 생활을 해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변의 신천이나 잠실과는 달리 ‘부렴’은 대토도 받지 못해 숫자도 많지 않은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각지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성동구 성수동, 송파구 잠실동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지만 가까운 이웃을 잃어버린 외로움이 더 컸다.
이 외로움 때문이었는지 결국 ‘부렴’ 사람들은 옛날 운동 경기에서 우승을 했던 단결력을 살려 다시 향우회를 만들었다. 옛날 마을이 남아있을 때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던 뽕나무를 아시아 공원에 다시 심고 개발될 때 살았던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새겨 넣은 기념비도 만들었다. 그리고 매년 음력 10월이면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 옛날 그 뽕나무 아래서 지냈던 동제인 ‘상신제(桑神祭)’를 지낸다. 얼마나 이 모임과 제사가 지속될지 모르지만 ‘부렴’이라는 마을 이름이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인 것이다.